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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일지도.

메칼로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마니
작품등록일 :
2016.01.05 01:02
최근연재일 :
2019.03.13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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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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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25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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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중야中夜(1)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DUMMY

페리는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깼다면 침대 위에 누워있어야 하는데 그가 누운 곳은 잔디가 잘 깎인 왕궁 뜰의 한구석이었다. 눈에 안 띄는 구석인데도 잔디가 밟혀 닳은 모습을 보건대, 수련하기 싫은 기사들이 숨어서 낮잠 자는 용도로 자주 쓰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페리는 아니다. 아르반의 기사들이 하는 수련이라는 것은 테리아에서 하던 것에 비하면 몸풀기에 지나지 않아서 힘들 것도 없고, 하루 종일 성문 앞에 서서 석상 흉내 내는 것보다 백배는 나은 시간이었다.

오히려 늘려달라고 사정하고 싶은 때에 낮잠이라니 가당치 않다. 그런데 어째서 나태해빠진 아르반 기사처럼 잔디밭에 누워 자고 있었던 걸까. 기억을 돌이켜보려고 하자 다시 머리 한구석이 칼로 째는 것처럼 아파왔다.

심지어 아픈 곳을 만지니 정말로 째진 것처럼 손바닥에 뭔가 느껴졌다. 손톱을 세워 살짝 긁어내보자 까맣게 말라붙은 피딱지가 손톱 밑에 끼었다.

‘뭐지?’

그는 아픈 머리를 쥐어짜며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것은······ 교대하러 온 기사들과 농담을 나눴고, 같이 성문을 지키던 기사가 내일은 비번이니 오늘 밤에는 술집에서 진탕 마셔보자고 했고, 씻으러 갈 생각을 했고, 술 마시고 나면 유곽으로 갈 테니 어차피 씻을 거 뭐 하러 지금 씻느냐는 생각을 했고······ 그 다음에는······ 옷을 갈아입으려고······.

거기까지 생각하자 숙소로 돌아가던 것과 어디선가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던 것, 머릿속에서 징이 울리며 몸이 기울어지던 것까지 단숨에 떠올랐다.

습격당했다.

페리는 재빨리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머리가 아픈 것 빼고 몸에 이상은 없어보였다. 그러나 옷 입은 꼴이 이상했다. 옷의 여민 부분이나 허리띠의 조인 정도, 신발 신은 모양 따위가 모두 평소와 달랐다.

스스로 입은 것이 아니라 남이 입혀준 것 같았다. 없어진 물건은 없으나 모든 물건들이 한 번은 몸에서 벗겨졌다가 도로 입혀진 느낌이었다.

그는 입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메칼로를 찾아서 뛰었다. 뛸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런 것을 걱정할 때는 아니었다.

메칼로의 숙소로 찾아갔더니 거기에는 손님이 와 있었다. 가끔 지나가다 얼굴만 본 적 있는 기사였다. 이야기는 이미 끝났는지, 페리가 들어서자 손님은 난감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갔다.

“스텔리안이 없어졌다.”

페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메칼로가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덧붙인 말에 페리는 아예 하려던 말을 잊어버렸다.

“납치된 것 같다.”

“뭐? 왜? 아니 어떻게?”

페리가 굵은 목소리로 외쳤다.

“사디 경 말로는 아침 훈련 시간에 잠깐 훈련장에 나왔다가 그 후로 지금까지 모습이 안 보인다는데 스텔리안이 그렇게 멋대로 행동할 리는 없고, 혹시 몰라 숙소와 훈련장 주변을 확인해 봤는데 암호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게다가 활과 화살은 숙소에 남겨져 있고.”

스텔리안이 활을 두고 멀리 갈 리가 없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어딘가로 갈 생각이었다면 반드시 활을 챙겼을 것이다. 가져가지 않았다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셈인데 그랬다면 숙소든 어디에든 동료들에게 알릴 표식 정도는 남겨야 했다.

“여기는 왕궁이잖아. 왕궁에서 국왕의 근위기사를 납치해서 어디로 데려간다는 건데? 아니 그보다 누가 그런 짓을 하는데?”

페리가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메칼로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가 그 말에 이마를 찡그렸다.

“무엇 때문인가, 어디로 데려갔는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데려갔는지는 알만 해. 그러니 중요한 건 무엇 때문인가······ 라는 건데.”

대답은 결국 중얼거림에 가깝게 변했다. 듣고 있던 페리가 인상을 썼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야?”

“페리, 스텔리안은 적의를 가진 상대를 구분해. 그런 녀석을 납치하려고 누군가 다가오는데 활도 들지 않고 멍청히 서 있다가 당했을 것 같아? 그러니 스텔리안은 적의가 없는 사람에게 유인되어 활을 들지 않은 채로 함정이 준비된 곳까지 간 거야. 이런 짓을 누가 할 수 있겠어?”

질문으로 들려서, 페리는 안 돌아가는 머리로 열심히 생각해 보았다. 젠장! 하고, 그는 생각을 시작하자마자 화를 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스텔리안이 적을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다. 모른다면 일부러 그런 복잡한 방법을 쓸 리가 없잖아. 그냥 활을 안 들고 있을 때 납치하려고 들었을 테고, 그 결과 실패했을 테고.”

“우리 말고 그걸 아는 사람이라면······. 스텔리안 녀석, 요새 베르칸트 조 기사들하고 꽤 어울려 다녔잖아. 황금창 기사단이야?”

“스텔리안이 애송이지만 아무한테나 가진 능력을 다 보여줄 바보도 아니고, 소문도 기껏해야 감이 좋고 실력이 최고인 소년 궁사라는 정도로 났을 뿐이다. 토로스와 만났을 때는 제대로 싸웠지만 그것만으로 스텔리안의 능력을 파악했을 것 같지 않고, 설사 알아차렸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 토로스의 배후가 스텔리안을 납치한다는 건 타산이 안 맞아.”

“그럼 도대체 누구야?”

“한 명 있잖아. 제대로 실력발휘 했을 때 바로 옆에서 지켜봤고, 그 후에도 쭉 녀석을 감시하면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사람.”

“어어······?”

그런 사람이 있었나? 페리가 그 사람이 누군지 생각하는데 메칼로가 문득 물었다.

“그보다 너,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그제야 페리는 스텔리안의 납치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자신에게 발생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나 습격 받았어. 정오에 교대하고 얼마 안 지나서인 것 같은데.”

메칼로는 대꾸하는 대신 찡그린 얼굴로 이야기를 재촉했다.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누가 후려쳤나 봐. 정신이 들어보니까 훈련장에서 좀 떨어진 정원 구석에 처박혀 있더라고. 그리고 그 놈들이, 내 옷을 죄다 벗겼다가 다시 입힌 것 같아.”

몸에 걸친 것을 모두 떼어냈다. 수에즈의 각인자에게 그와 같은 일이 생겼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가호를 잃게 만들려는 짓이었다.

수에즈의 금기는 벼락 맞은 물건을 몸에서 떼어놓지 말 것. 그러니 수에즈의 신자는 반드시 벼락을 맞은 적 있는 물건을 몸에 지녀야 했다. 그러나 눈으로만 봐서는 그것이 벼락에 맞은 물건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몸에 걸친 것은 모조리 벗긴다는 방법을 쓴 것이다.

“아베디스 루신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으니, 어디선가 네 정보가 샜나 보네.”

메칼로가 중얼거렸다.

“망할 백작놈. 정보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천치 같으니라고.”

페리가 씹어뱉듯 말했다.

“가호는?”

“그야 뭐 아직 그대로지.”

메칼로가 물음에 페리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거기까지는 몰랐다는 거군.”

“농담이 아냐. 여기 오는데 움직일 때마다 항문이 시큰거리더라고. 거기까지 뒤지다니 기분 더럽네, 이거.”

메칼로는 상대방이 더 기분 나빴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피식 웃고 말았다. 웃음은 잠시였다.

“스텔리안이 납치되고, 너는 가호를 잃을 뻔하고. 선전포고 치고는 무시무시하군.”

선전포고라니 누구냐고 물으려는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메칼로의 눈짓에 페리가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너머에는 서향 기사단의 망토를 두른 타니엘이 부하들과 함께 서 있었다.

평소의 세련된 복장은 망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메칼로 경. 잠시 괜찮겠나?”

메칼로가 손짓으로 허락하자 타니엘은 부하들을 밖에 남겨두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페리, 숙소로 돌아가 있어.”

타니엘의 명령으로 남겨진 기사들이나 메칼로의 말에 나가야 하는 페리나 떫은 표정을 지었다. 페리가 할 수 없다는 듯이 밖으로 나가자 방문이 닫혔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수에즈의 각인자도 대비가 꽤 잘 되어있었나 보군.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다 했건만.”

문이 닫히자 망토를 떼어 팔에 걸치며 타니엘이 태연히 말했다. 그를 습격하고 수에즈의 가호를 잃게 하려 시도한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밝힌 셈이다. 페리가 아직 가호를 잃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르반 귀족들은 더 고상한 방식으로 싸움을 시작하는 줄 알았다만?”

메칼로가 비꼬듯 말했다. 타니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테리아 인들은 그런 걸로 불평 안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어쨌든 오늘까지는 충고다, 메칼로. 섭정공이 칼을 뺐고 그것을 휘두를 사람은 나야. 네가 누구의 뜻으로 여기에 왔는지 아직 모르지만, 나와 싸운다면 무시 못 할 피해를 입힐지 몰라도 결국 너희 모두 죽는다. 그럴 가치가 있는지 생각해 봐.”

“생각해 보라면서 뒤통수치는 건 새롭네.”

타니엘은 메칼로의 비아냥거리는 말을 못들은 척했다.

“너희들과 싸우면 손해 보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최대한 타협점을 찾기 위한 거다. 농담 안하는 아가씨로 할까 생각해봤는데 테리아 인들이 숙녀를 대접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녀가 없다고 전력차가 생길 것 같지도 않아서.”

타니엘은 이 말로 스텔리안을 납치한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린 다음 쓴웃음을 지었다.

“어린아이에게까지 손을 쓰는 건 나도 싫다. 하지만 암투라는 건 어디나 시궁창이잖나. 남의 나라 시궁창에서 뒹굴 필요 없다. 포고스로 물러나 준다면 네르세스 가문의 안전도 함께 보장하지.”

메칼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타니엘도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더 나눌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팔에 걸쳤던 망토를 다시 어깨에 둘렀다. 서향 기사단의 흰 망토에 덮인 그는 모르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었다는 듯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메칼로가 그의 뒤에서 물었다.

“너야말로, 섭정공을 위해 국왕을 적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럴 가치가 있나?”

타니엘이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보지 않은 채로 그가 말했다.

“카드 게임을 할 때는 항상 최악의 패부터 상정하는 법이지. 그 반대라면 게임이 아니라 도박이다, 메칼로 경.”

말하고 나서, 그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작가의말

58분 지각!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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