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전(1)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1>
날이 밝았지만, 왕궁의 아침은 특유의 부산스러움도 활기도 없었다. 대신 살얼음 같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걸음조차 조심스럽게 걷고 말은 더욱 조심했다.
전에 없이 이른 시각에 입궁한 타니엘은 그런 왕궁 안의 분위기를 읽고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부터 섭정공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기세로 동부 귀족들을 몰아친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섭정공을 포함해 손으로 꼽을 소수에 불과했다. 그래야만 하는데도, 왕궁 안에는 이미 출전 직전의 병영에서나 느낄 법한 고요한 긴장이 가득했다.
왕궁 안 사람들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아는 듯 했다. 아니, 알고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은 느끼고 있었다. 탄광 속의 카나리아나 비오기 전의 제비처럼,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감각으로 변화를 감지하는 것 같았다.
시작은 왕궁 지하 감옥에서부터였다. 아침 일찍 기사들과 함께 지하 감옥에 들이닥친 타니엘은 토로스의 신병과 심문 기록을 요구했다.
왕궁 감옥의 죄수는 어디까지나 궁내경비를 담당하는 황금창 기사단의 소관이다. 대개는 국왕파였다. 그러나 입구부터 밀고 들어가 밖으로 연락하는 것을 막은 다음, 죄수를 잡은 것은 서향 기사단이라는 것과 섭정공의 명령이라는 말로 압박하는 타니엘 앞에서 당직 기사는 감옥의 열쇠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출입이 통제되어 상관에게 연락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것이 무슨 경우 없는 짓이냐’고 화를 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경우 없는 짓이라는 말은 사실 틀렸다. 섭정공은 현재 아르반의 최고 통치자였다. 왕과 다름없는 그다. 황금창 기사단은 국왕의 근위대일 뿐 직속이 아니었다. 명령체계를 따라가면 그 끝에는 섭정공이 있었다. 그러니 그가 명령하면 따르는 것이 옳았다.
다만 지금까지 섭정공의 통치해온 방식이 그들에게 필요이상의 권리를 줬을 뿐이다.
동부 귀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하게 명령해도 되는 작은 문제 하나하나까지 그는 일일이 묻고 타협한 뒤 결정했다. 섭정공의 그런 방식은 아르반의 귀족들을 안심시켰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섭정공의 양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르반은 긴 역사와 함께 오랜 시간 명문화 된 법과 체계로 질서를 지켜온 나라였다. 관례나 선례가 그것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섭정공은 양보한 만큼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정무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모두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귀족들의 어떤 말에도 느긋이 답하고 묻고 협상했던 것은 결코 섭정공이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평화를 사랑해서가 아님을. 옥좌에 앉은 그가 습관처럼 가지고 있던 미소를 집어넣은 순간 사람들은 알았다.
동부 귀족들은 당황한 것을 넘어 충격에 빠졌다.
바로 어제 이 자리에서 몇 마디만 오간 끝에 수도 경비대를 손안에 넣은 섭정공이었다. 오늘은 동부 귀족들이 그것을 수복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욘 백작을 돕는다는 핑계로 수도 경비대의 머리 꼭대기에 앉을 아실 하룬의 자격 유무를 따질 생각으로 왔으나, 섭정공은 몰아붙이듯 새로운 안건을 계속해서 내놓았다. 거기에 서부 귀족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뒤따르자 거칠 것이 없었다.
간혹 동부 귀족들 가운데 성미 급한 자가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누군가 목소리가 높아진다 싶으면 서부 귀족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고, 섭정공은 큰소리를 낸 귀족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것은 마치 잘 짜인 연극 무대 같았다. 한 순간 고요해진 가운데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7년의 섭정 기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패트로스 바그랏트의 위압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한 귀족은 자신이 화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얼어붙었다.
정무 내내 그런 식이었다. 섭정공이 지팡이로 가리키면 서부 귀족들이 양떼를 몰 듯 동부 귀족들을 몰아갔다. 그렇다고 해서 폭정이라 할 것도 아니었다. 이전까지 어르고 달래가며 조용히 실리를 챙기던 것과 달리 이제는 가져갈 것을 가져간다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이틀을 연달아 섭정공에게 당한 동부 귀족들은 말을 잃고 조용히 궁을 빠져나갔다. 메칼로는 그 전말을 오후 늦게 찾아온 제이나로부터 들었다. 페리와 함께 궁을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며칠간의 대기라는 말은 내전 근위 전에 필요한 정보를 숙지하고 적절한 교육을 받으라는 의미여서 낮 동안 내내 그와 페리는 교육 담당관과 함께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겨우 시간이 나자 밖으로 나가 마엘과 산디아를 만나보려고 했으나 제이나가 더 빨랐다.
섭정공과 타니엘이 무슨 일을 벌였는가 알려주고 나서 그녀는 두 사람을 탐색하는 눈으로 보며 말했다.
“스텔리안에 대한 이야기 들었어요. 그노스 백작님의 명령으로 우리도 조사하고 있으니 섣부른 행동은 하지 말아요.”
“백작이 스텔리안을 찾고 있다고?”
메칼로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서향 기사단이나 동부 귀족들과 엮을 수 있다면 좋은 기회가 되니까요. 스텔리안은 왕의 근위기사예요. 국왕의 기사를 납치한 죄는 가볍지 않아요.”
메칼로는 그 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노스 백작이 단순히 왕의 기사를 납치 감금한 정도로 만족할까?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핑계를 대서 빠져나갈 수 있는 죄다. 더욱이 상대는 서향 기사단. 기사들의 가문만 따져도 굳이 섭정공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고작 그런 성과를 위해 스텔리안을 찾으려고 한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시체가 나온다면?’
그때는 경우가 달랐다. 설혹 먼 나라의 귀족도 아닌 용병으로 잠시 국왕의 근위 기사가 된 소년일지라도, 살인이 되고 보면 적당히 넘어가지 못한다.
타니엘이 인질인 스텔리안을 쉽게 죽일 리 없으니 그노스 백작의 손에 넘어가면 오히려 살 가능성보다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은 동맹인 관계인데도 적보다 믿을 수 없다는 웃기는 경우였다.
어쨌든 그런 상황이 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약속장소인 여관으로 마엘과 산디아를 만나러 간 메칼로는 제이나에게 들은 것을 알려주고 백작의 주변을 감시하도록 명령했다. 그노스 백작이 스텔리안을 찾아냈을 때 그보다 먼저 구하러 갈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명령을 받은 마엘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산디아는 표정이 묘했다. 메칼로가 알아차리고 그녀를 쳐다보자 표정에 이어 행동이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마엘은 뒤에서 한숨을 쉬었고 페리가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돌렸다.
“내가 물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냐?”
메칼로가 한심함과 동정심이 섞인 얼굴로 말하자 산디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엘, 시간 있을 때 저 녀석 데리고 거짓말 하는 연습이라도 좀 시켜 둬.”
“들으셨죠? 산디아님. 저 명령받은 거예요.”
“대, 대장님! 취소해 주십시오!”
“나한테 숨기고 있는 게 뭔지나 말해.”
산디아의 항의를 무시하고 메칼로가 명령했다. 거짓말에 서툰 테리아의 여전사는 붉어진 얼굴을 팍 숙였다.
“그······ 아직 말하면 안 됩니다.”
“말하는 걸 보니 토비아스, 그 자식이군.”
“예? 어떻게 아압······.”
산디아가 놀라서 말하다 말고 제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소식이 없더라니. 언제 온 거지?”
산디아는 갈등하는 얼굴로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닷새 전입니다.”
“우리에게 연락 온 것이 그때니까 실제로는 더 빨리 왔을지도 모르지요. 토비아스님 성격을 아시잖아요?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아요.”
마엘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래서 토비아스가 뭘 준비하고 있는데?”
메칼로가 질문한 쪽은 여전히 산디아였다. 이쯤 되자 포기했는지 산디아는 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것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연락할 때까지 대장님께 알리지 말라고만 했습니다.”
“나한테 들키면 숨기지 못할 테니 아예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거겠지. 그래도 연락하는 법은 알려줬지?”
“예.”
“연락해서 날 새기 전에 튀어오라고 해.”
산디아가 난처한 표정으로 메칼로를 쳐다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녀가 풀죽은 얼굴로 나갔다가 잠시 후 돌아왔다.
그들이 있는 여관방에 손님이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였다.
그 무렵 페리는 기다리다 지쳐서 잠들어 버렸고 마엘도 심심한지 리라를 뜯다가 페리를 침대 한쪽으로 밀어놓고 옆에 누워버렸다. 산디아만 착실하게 문 가까운 곳에서 바깥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늦은 시각인데도 여관 밖에서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들어 취객들의 주정이었다. 몇 명의 사내들이 함께 취해서 노래와 욕설을 번갈아 쏟으며 다가오더니 방을 잡을 생각인지 여관 안으로 쑥 들어갔다.
시끄러운 소리에 마엘이 일어났고 메칼로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다 피식 웃었다.
취한 손님들은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갔다. 여관 주인이 1층으로 내려가자 손님들 중 하나가 방을 나와 메칼로 일행이 있는 곳으로 왔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지만 그의 힘없는 발소리를 듣고 있던 메칼로 일행은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들어온 사람은 젊은 남자였으나 그 얼굴에 젊은이가 가질 법한 생기나 활력 같은 것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주근깨투성이의 수척한 얼굴은 누렇게 들떴고 눈 밑에 어둡게 그늘이 져서 인상까지 우울해 보였다.
그가 불그스름한 머리카락 아래에서 퀭하니 뜬 눈으로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메칼로를 향해 말했다.
“부하를 잃어버린 대장이 표정만 느긋하군요.”
“보자마자 잔소리냐, 토비아스.”
메칼로가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가 일어나서 앉아있던 의자를 발로 밀어 토비아스에게 보냈다. 토비아스는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메칼로가 밀어준 의자에 앉았다. 구부정하니 허리를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린 그의 모습은 졸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엘이 페리를 깨우려고 하자 토비아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말귀도 못 알아듣는 사람을 일부러 깨울 필요 없습니다. 제가 올 때까지 자중하라고 떠나기 전에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 대장에 그 부하군요. 알마스트에 도착하기도 전에 수에즈의 각인자가 떴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페리가 깨어 있었다면 “그건 대장이 하라고 해서!”라고 변명했을 테지만 토비아스는 그런 기회도 주지 않았다.
메칼로가 삐딱하니 서서 그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 정도는 예상한 범위였잖아? 스텔리안을 되찾을 방법도 생각해 두고 있겠지?”
토비아스가 초점 없어 뵈는 흐린 갈색 눈을 흘겨 떴다. 얼핏 어디를 보는지 잘 알 수 없는 눈으로 메칼로를 향하며 그가 책망하듯 말했다.
“잃어버린 부하란 스텔리안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아이라면 한 번도 놓쳐본 적 없습니다.”
- 작가의말
5시간 1분 지가악! ;ㅁ;
Comment '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