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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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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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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4.09.24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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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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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글자
21쪽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1)

DUMMY

웅장한 세 개의 첨탑 사이로 매시간 울리는 청명한 종소리. 그 맑은 울림이 아름다운 왕립교회 앞은 아직 축축한 공기가 내려앉은 아침이었음에도 취재진과 시민들로 혼잡스러웠다.

왕자가 복귀하자마자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일’의 전개 속도에 일부 언론은 ‘왕당파를 등에 업은 새로운 왕족의 독재가 태동 중’이라며 자극적인 머리기사로 아침신문을 장식했지만, 교회 앞에서 줄곧 왕당파 대표인 오로메와 붙어 다니며 적극적으로 대관식을 준비하고 있는 마누앙의 모습은 그런 의혹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즉위식보다 대관식을 먼저 하는 건 역시 왕자의 핏줄에 대한 의심이지요? 만약 왕자가 정말로 왕가의 핏줄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근위대의 저지선을 귀신같이 빠져나온 어느 기자가 마누앙을 붙잡고 던진 질문이었다. 곧바로 끌려 나가는 그에게 마누앙은 표정조차 지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답한다.


“그럴 리는 없습니다.”


대중들은 아직 진상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드렌턴이라는 이름과, 그 이름이 무엇을 희생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이렇게 확답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정도의 남자가 그 정도의 각오를 하고 구해낸 존재가 가짜일 리는 없으니까.

다만 마누앙이 걱정하는 부분은 다른 방향이었다. 로빈의 피와 기도로 ‘세뮈엘’이 강림하리라는 사실에 의심은 없다. 문제는 그녀가 강림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데르하는 어디에 있느냐?]


아버지가 없는, 왕자의 독자적인 대관식. 그 유례없음에 그녀가 이렇게 의문을 가질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귀족파의 대표로서, 자신은 뭐라고 그녀에게 변명해야 하는가.


“아-, 선왕은 불륜을 저지르는 바람에 제 동생한테 목이 잘려버렸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왕이 빛을 잃은 것은 어디까지나 사실. 하지만 그 사실을, 자신을 비롯한 ‘인간’들이 독자적으로 판단한 것 또한 사실이다. 마누앙으로서는 그 불경함과 오만함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야 했다. 노인의 머리가 지끈 아파오는 건 당연했다.


“걱정되십니까?”


교회의 정문을 대신 열어주는 마누앙의 표정을 보고, 오로메가 넌지시 물었다.


“물론이지요.”

그녀에게 숨길 수도, 숨겨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아는 마누앙은 굳이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저와 윌리안의 목으로만 끝나면 다행이지만, 세뮈엘님이 본인에 대한 공화국의 믿음을 의심하게 되신다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그렇게 되면 교회의 장식부터 다시 다 바꿔야겠네요. 걱정 마세요. 만약 일이 그리되면 우리가 모실 다른 사도를 알아보죠, 뭐.”

마누앙은 편안하게 웃고 있는 오로메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 무신경하고 도를 넘은 농담에 웃어 줘야 할지, 아니면 그 도를 넘은 무신경에 화를 내야 할지, 입이 막혀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 그의 표정이 우스웠는지, 오로메는 다시금 깊은 주름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를 이어 나간다.

“농담입니다. 섭정님은 조금 더 세뮈엘님의 자비로움에 믿음을 가지실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는 마누앙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의 목 하나 치는 것으로만 만족하실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어머, 농담이었는데, 호호호.”


“······.”


진담과 농담의 경계가 참으로 흐린 여자라고, 마누앙은 생각했다.




***




“뭐? 왕자의 소환은 거부권이 없어? 이 새끼가 벌써부터 권력에 맛 들여서 큰일이야.”


본궁의 정문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며, 벤은 도시의 먼지에 자극받은 코를 계속 훌쩍거리며 자신을 부른 친구에게 욕을 내뱉고 투덜거린다. 만약 근위대가 이 벤의 불경함을 들었다면, 당장 목이 날아가는 것도 모자라 그 날아가는 입에서조차 죄송하다고 읊조려야 할 판이었기 때문에 고도는 그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강하게 후려갈겨야 했다.


“야야, 입 조심해. 더 이상 네 친구가 아니라 왕이 될 분이시라고. 그리고 어차피 오후수업은 마법역사학이었잖아. 너 몰랐지?”


“······마법역사학? 이야, 아무래도 난 참 좋은 친구를 둔 것 같아.”


“지랄.”


대합실은 여전히 전날 연회의 뒷정리가 채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분주하게 장식을 치우고 바닥을 닦는 하인들 사이로, 멍하니 중앙 분수대 끄트머리에 앉아있는 로빈의 모습이 벤의 시선에 들어선다.


“야, 뭐 그리 풀이 죽어서 처량하게 앉아 있······습니까, 전하?”


고도가 옆구리를 꼬집는 바람에 벤은 경어로 인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제야 다가온 그들을 눈치채고, 로빈은 그림자가 드리운 초췌해진 얼굴로 자신의 오랜 친구를 올려다보았다.


“아, 왔어?”


그 얼굴을 보고, 벤은 한번 말을 삼킨다.

그리고는 조용히, 친구이자 곧 왕좌에 오를 남자의 검붉은 눈을 바라본다.

간신히 어색해지지 않을 만큼의 침묵을 가진 뒤에, 그는 조심스럽게 코를 쿨쩍 들이마시고는 로빈의 옆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뭔 일 있었냐?”


“아아니, 별로······.”


“그런 얼굴로 그렇게 답해봤자 내가 만족할 것 같냐?”


“그냥 좀-,”

로빈이 얇게 웃으며 대답한다.

“가슴이 불편해서······.”


로빈은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는다. 그것으로 벤에겐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벤은 그 이상의 추궁 없이,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는 친구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하지만 자신이 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선 확답이 서질 않았다. ‘이것’만큼은 자신이 해결해주거나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벤은 고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고, 그것을 눈치챈 고도가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전하, 저희를 부르신 이유는······?”


“아, 그거 말인데. 대관식엔 되도록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참석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뭐, 세뮈엘님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을 둘러보시고 축복을 내리신다고 한다나? 너랑 고도도 시간만 괜찮으면 부탁하고 싶은데. 어제도 그랬지만 그런 곳에 나 혼자 가는 건 좀 답답하기도 하고.”


“영광입니다, 전하.”


“뭐, 나야 좋지. 앞으로도 화요일 오후 1시부터 4시 사이에는 얼마든지 불러줘.”


“······뭔가 구체적이네. 근데 넌 뭐 감기라도 걸렸어?”


연신 코를 훌쩍이는 벤에게 로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지만, 벤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코를 훔쳤다.


“아니, 그냥 도시 공기가 나랑 좀 안 맞는 것 같아.”


“그럼 다행이고. 아니, 다행이 아닌가······?”


씁쓸하게 웃으며 먼 곳을 바라보는 로빈. 딱히 시선을 둘 생각이 없었던 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익숙하다고는 해도, 절대로 친해질 수는 없는 얼굴.


“전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근위대장 쥬넨이 벤과 고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로빈에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그 정갈함과 곧은 태도. 그리고 그 속에 낮게 깔려있는 다른 표정. 그것을 느낀 벤은 막힌 코를 후벼 파며 미간을 찌푸렸다.




***




본궁의 정문을 나서는 그들 앞에 수많은 인파가 내려다보인다. 로빈의 등장과 함께 연신 터지고 있는 사진기의 섬광과 웅성거림이 그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 속에 환호는 없었다.

오로메의 조언에 따라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던 로빈이지만, 자신을 향한 그 미묘한 시선들은 영 꺼림칙한 것이었다.


“뭐, 의심스러운 거겠지.”

후드를 눌러 쓴 채로 로빈의 뒤를 따르고 있던 벤의 말이었다.

“아무래도 너희 아버지의 말년에 대한 평은 안팎으로 모두 안 좋았던 모양이니까.”


로빈은 그의 말을 듣긴 했어도 자신은 직접 사진기 앞에 얼굴을 비치고 있는 터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고, 이런 반응 또한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결코 축복으로 시작할 수 없는 자리임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왕립교회 앞에서, 오로메와 마누앙을 필두로 한 귀족들의 행렬이 길게 양쪽으로 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로빈의 입장에 맞추어 차례대로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고, 그가 자신의 앞을 지나치면 곧바로 그 뒤를 따라 줄을 이루어 교회 정문으로 들어서는 그의 뒤를 따른다. 별다른 악단의 연주도 없고, 환호하는 군중이나 그들이 뿌리는 꽃잎도 없었지만, 그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무게감 있는 행렬이었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군중의 웅성거림은 잦아들었지만, 대신 사제들의 합창이 그들을 맞이한다.

교회의 내부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높고 웅장했다. 바깥과 연결된 창이라곤 정면의 하나밖에 없었지만, 고개를 들어야 전부 눈에 담을 수 있을 만큼 높고 거대한 창이었기에 붉은 숲의 그림으로 장식된 교회 내부 전체를 태양빛으로 밝히기엔 무리가 없었다.

바로 그 창의 아래에서 사제들의 축복 가득한 성가와 함께 로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거대한 황금빛 대야와 붉은 나무가 수놓인 사제복을 두른 채 로빈에게 예를 표하고 있는 대사제.

대야와 대사제가 있는 제단 아래와, 그곳으로 이어지는 통로 양쪽에 배치된 의자에서 입회가 허락된 기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로빈에게 예를 표한다.


“······.”


로빈은 경직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의 신경은 온통 걸음 속도에 쏠려있었기 때문에 주위를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때문에 대사제의 안내로 제단 위에 올라서서 모두를 마주하고 나서야 그 얼굴들을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다.

어젯밤에 술잔을 주고받았던 귀족들은 물론이고, 크라트와 올리의 모습도 보인다. 계속 코를 쿨쩍거리는 벤과, 그런 그를 다그치는 고도, 굳은 표정의 쥬넨과 마누앙, 깔끔하게 남색 정복을 차려입은 오즈카, 그리고-


지나.


그녀는 로빈과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작게 웃어 주었다. 로빈은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것은 그녀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는 묵묵히 속으로 그녀를 향한 외침을 삼키며 대사제의 축복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이 성스러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이들이, 축복 가득한 증인이 되었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대사제의 정중한 목소리가 교회에 울려 퍼진다. 동시에 그는 조심스럽게 로빈의 손을 이끌고 성수가 담긴 황금대야로 다가선다.

가까이서 보니, 대야라기 보단 거대한 거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 로빈이었다. 대사제의 손길에 따라 그 안으로 팔을 내밀었지만, 워낙 크기가 컸던 탓에 그의 손끝은 중심에도 닿지 못했다.

“카나반의 수호사도, 숲을 관장하시는 세뮈엘님께 아룁니다. 여기 당신이 남기신 나무의 씨앗이 있습니다. 이 붉은 수액을 증거로 바치오니, 부디 붉은 나무의 왕가와 그 앞날에 축복을 내려주시길. 사도를 받드는 자로서 기도드립니다. 미트라블루스.”


“사도를 받드는 자로서 기도드립니다, 미트라블루스.”


대사제의 마지막 말을 반복하면서, 로빈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칼을 넘겨받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것으로 성수 위로 펼친 손바닥에 가느다란 붉은 줄을 새긴다.

극도의 긴장감 탓에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성수의 수면으로 떨어지는 피가 그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모습은 어딘가 일상성과의 괴리감을 주는 야만적인 광경이었다. 그리고 곧 그 괴리감의 정체는, 놀라움에 단단히 대비하고 있던 로빈마저도 소스라치게 만들어버린다.


“오오-! 진정한 왕가의 씨앗이셨어!”


“세뮈엘님······!”


그 이상 신비로울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성수 속으로 퍼져나가던 로빈의 피가 갑자기 그 안에서 응축되기 시작하더니, 마치 붉은 씨앗이 된 듯 수면 위로 싹을 피워낸 것이다.

그리고 그 틔움이 곧 시작이었다.

붉은 씨앗에서 나온 붉은 싹은 마치 천 년의 시간을 몇 초로 압축시켜놓은 듯이, 굵은 뿌리와 줄기가 되어 높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붉은 뿌리는 곧 드넓은 대야를 가득 채웠고, 높게 솟아오르는 줄기의 끝에서 여인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침 해가 투과한 이슬처럼 맑은 빛을 내뿜는 피부를 마치 나무의 열매처럼 드러낸 ‘그녀’는, 높게 솟은 붉은 나무의 줄기의 절반가량을 덮고 있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자신을 불러낸 인간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빛가루를 내뿜는 검붉은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찾은 얼굴은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로빈이었다.


[데르하. 이렇게 빠르게 다시 나를 찾은 이유가 무엇이냐? 응? 너는 데르하가 아닌가?]


숲의 바람소리와도 같은 목소리였다. 실내에서 이토록 귀에 와 닿으면서도 전혀 울림이 느껴지지 않은, 몽환적인 흐름.

여전히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는 로빈을 대신하여 대사제가 예를 표한다.


“세뮈엘이시여, 마지막으로 강림하신 지 30년이 넘으셨습니다. 이 새로운 씨앗은 데르하 왕의 아들, 로빈슨입니다.”


[아, 그렇군. 인간들의 시간개념은 아직 잘 모르겠어. 게다가 데르하와 향이 너무 똑같아서 헷갈렸다. 사과하지.]


“화, 황송합니다.”


대사제의 눈길을 받고서야 겨우 입을 떼는 로빈.


[그건 그렇고,]

세뮈엘의 빛나는 시선이 교회를 가로지른다.

[데르하는 어디에 있나?]


올 것이 왔다.

그 무례함을 알면서도 모든 인간이 순간 침묵한다. 이러한 인간들의 분위기를 읽지 못한 숲의 사도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 그 무게감 사이로, 감히 한발을 앞으로 내딛는 이가 있었다.


“데르하는 인간에 의해, 친구이자 신하된 자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먹색 눈을 빛내며 고개를 치켜든 마누앙의 낮은 목소리가 세뮈엘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인간에 의해?]


“데르하는 빛을 잃었습니다. 그는 세뮈엘님으로부터 하사받은 영광을 버렸으며, 자신의 욕심으로 세뮈엘님이 축복하신 나무의 세상을 어지럽혔습니다.”

그 순간 로빈은 지나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어떠한 표정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에 제 동생이 공화국을 지탱하기 위해, 그 영광을 되찾기 위해 감히 당신이 내린 축복에 반하여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모든 것을 알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저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당신의 씨앗을 없애려고 했던 다른 인간에게 있습니다. 부디 이 둘의 목으로 그 노여움을 푸시길 간청합니다.”


[······흐음.]

교회 안의 모두가 숨을 죽인다. 그녀의 분노를 막지 못하면 이 안의 모두가 그녀의 저주를 받을 수도 있었기에. 그리고 그 저주에 공화국의 기틀이 흔들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세뮈엘의 이어진 반응은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너희는 내가 화를 내리라 생각한 모양이구나?]


“······옛?”


세뮈일이 허리를 굽혀 그 빛나는 얼굴을 마누앙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굵은 줄기로 이루어진 그녀의 허리였기에 나무가 뒤틀리는 소리가 교회를 채웠음은 물론이었다. 그녀는 마누앙의 얼빠진 표정 위로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그 신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처음 그를 본 순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아이가 빛을 잃으리란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을 내려주었지. 내가 왜 그랬는지 알겠느냐?]

마누앙은 감히 대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물어 보마. 내가 지금 저 아이도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반복할 것이라 말한다면, 너희는 저 아이의 목을 지금 당장 베어버릴 수 있겠느냐?]


동시에 모든 이의 시선이 로빈에게 꽂힌다. 그가 만약 세뮈엘의 말대로 빛을 잃는다면, 똑같은 운명으로 들어선다면, 정말로 만약에 세뮈엘이 지금 경고를 하는 것이라면-,


“아니,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단호한 마누앙의 목소리. 이번엔 모두가 그에게 시선을 향한다.

“반복되는 운명이 있다고 해도, 정해진 운명은 없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같이 그 길을 걸어가고, 이끌어주고, 방향을 잡아주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 섞여 있습니다. 그 뒤틀림을 한 번 경험한, 저를 비롯한 모두가, 이번엔 같은 실패를 방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서, 세뮈엘은 굽혔던 몸을 일으킨다. 그녀의 얼굴엔 만족의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항상 축복을 내려주는 것이다. 처음부터 빛을 잃고 태어나는 자는 없다.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빛을 안고 태어나는 자도 없는 법이지.]

사도의 부드러운 시선이 로빈과 그를 시선에 담고 있는 모든 이들을 크게 훑는다.

[게다가, 북동쪽의 나무들이 감사의 인사를 전해달라더군. 요전번에 그들을 이용하는 대신 지켜주었다지? 나무를 사랑하는 자에게 내가 축복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잖느냐.]

그녀가 반투명한 손으로 로빈을 향해 손짓하자, 반짝이는 가루들이 그를 휘감으며 빛을 뿜었다.

[그대와 그대의 내일, 그리고 그대의 뿌리에 축복을 내린다. 붉은 씨앗을 품은 자여, 그대를 새로운 나무의 주인으로 인정한다.]


로빈이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하자, 교회의 모든 이의 환호가 섞인 박수가 울려 퍼진다. 시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알리기 위한 맑은 종소리가 울리고, 기자들의 사진기가 빛을 뿜기 시작한다. 그 어수선함 속에서 로빈의 표정을 알아챈 세뮈엘의 얼굴에 다시금 묘한 미소가 깃든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로빈슨, 새로운 붉은 나무여?]


“아 그것이······-”


머뭇거리는 그의 얼굴 위로 다시금 빛을 뿌리며 세뮈엘이 낮게 웃었다.


[나무를 지키면서 싸우자던 방안이, 네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서 그러느냐?]


“아······, 예, 그렇습니다. 그것은 제 친구의 생각이었습니다. 괜히 제가 그 덕을 가로챈 것 같아서······.”


[상관없다. 네 친구의 덕은 곧 너의 덕. 좋은 친구를 두었음이 바로 네 덕인 것이다. 그나저나 그 친구를 한번 보고 싶구나.]

그녀의 말에, 그 주인공을 아는 모든 시선이 벤을 향한다.

갑작스런 주목에 고도는 깜짝 놀라 벤을 밀쳐내며 곁에서 비켜섰고, 졸지에 갑자기 홀로 앞으로 떠밀린 벤은 모든 시선을 어색하게 받아내야 했다.

[흠, 너인가? 가까이 오라.]

쭈뼛쭈뼛 황금대야에 다가서는 벤. 세뮈엘은 그런 그에게도 빛의 가루를 뿌려주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작은 가루 중의 하나가 하필 자극에 민감해진 벤의 콧속으로 들어간 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를 천천히 내려다보던 세뮈엘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져 간다.

[응? 너는-]


“푸엣취!”


종일 재채기와 콧물에 자극받은 벤의 콧속 점막은 그렇지 않아도 얇아져 있었던 데다가, 연신 쑤셔대는 그의 손가락에 상처까지 입은 상태였다. 그렇게 생긴 피딱지와 함께 콧물, 코딱지가 뒤엉켜있었고, 무방비였던 코는 가루에 자극받아 거리낌이 없는 재채기를 내뱉었다.

손으로 틀어막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결국 그 피딱지는 빠른 총알처럼 그의 코에서 방출되고 만다.

그리고 아름다운 직선을 그리며 ‘그것’이 당도한 곳은,

황금대야 안의 성수.


“아앗-!”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마치 연막탄이 터진 듯 대야 안에서 수증기가 흘러나온 것은, 벤의 코딱지가 대야 안으로 떨어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물이 끓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고, 세뮈엘은 나타났던 과정의 정반대로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빛의 파동과 함께 그녀의 모든 줄기와 뿌리가 대야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수증기는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채 멀뚱히 서 있는 벤의 손끝으로 그 수증기가 닿는 순간-


“으앗!”


“뭐, 뭐냐!”


대야 안의 성수가 마치 안에서 마력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솟구쳐 오르더니 이내 모두 증발하고 만다. 동시에 수증기는 안개처럼 퍼져나가 가라앉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마침내 대야가 잔잔해지고,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오직 한 사람,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경악스러운 얼굴로 대야 안을 바라보고 있는 대사제였다. 처음 그 표정을 알아챈 것은 가까이에 있던 로빈과 벤이었다. 그들은 곧 대사제의 시선을 따라 대야 안을 바라보았고, 곧바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와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게 된 다른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뭐여, 여기가 어디야?”

앳된 남자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대야 안에서 끙끙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칠흑의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남자아이.

그는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고개를 들어 모두를 돌아본다.

“응? 뭐야, 너넨 누구냐?”


하얗다 못해 속이 들여다보일 듯 투명한 피부. 어둠보다 더 깊은 암흑의 눈동자. 지나치게 마르고 기다란 팔다리. 검은 천 쪼가리를 옷이랍시고 걸치고 나타난 그 아이를 향해, 대사제는 경악과 함께 그 정체를 중얼거린다.




“아······, 악마······!”


작가의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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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2) +18 14.09.25 3,030 7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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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3) +11 14.09.19 2,642 84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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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2 84 19쪽
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3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6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28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5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0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7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0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2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2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3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5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698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2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4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3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3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3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2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7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6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1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7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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