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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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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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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4.08.30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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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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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글자
20쪽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DUMMY

상쾌한 잎을 뽐내는 나무들과, 햇빛을 잔뜩 머금은 푸른 꽃. 그들이 마음껏 만개해 향기를 퍼트린 덕분에 교내엔 여름 기운이 완연하다.

첫인상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칙칙한 회색은 외벽에 한정되어있었던 모양이다. 광장과 그 광장으로 이어지는 초입부터 늘어선 온갖 나무와 꽃, 그리고 잡초가 이루어내는 싱그러운 조합은 전혀 인위적이지 않았다. 잠시나마 벤은 자신의 살던 오두막의 분위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래도 흐린 회색빛을 띠는 하늘은 도무지 익숙해 지지가 않았지만.

물론 그렇다고 고향이 그리워진다거나 하는 감상적인 회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도시가 자신의 취향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우중충한 하늘선도 기분이 나쁠 정도는 아니다. 매캐한 거리의 공기도 그다지 역겹지 않다. 흥미를 반감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검사를 받고 무슨 일을 하게 되든지 간에, 그는 자신이 도시생활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자네들 뭐하나?”


벤은 감상에 젖어있던 시선을 내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돌아보았다. 은색 로브를 걸친 노인이 가던 걸음을 멈춘 모양새 그대로 자신과 이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끔하게 빗어 넘긴 흰머리와 관록 깊은 주름이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아, 누굴 좀 기다리고 있습-”


“누구? 이름은 알고 있나?”


거참 성격 급한 노인네네-, 벤이 속으로 비웃는다.


“네. 여기 학생인데, 고도라고 합-”


“고도? 제르나비 고도? 오호, 그럼 자네가······? 흐으음······.”


노인은 천천히, 그리고 충분히 불쾌하게 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정도까지는 아무 거부감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선이 자신의 어깨에 기대 졸고 있는 이리스에게 향하자, 그 순간만큼은 벤도 긴장을 피할 수 없었다.


“어, 음, 뭔가요?”


결국 벤이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노인은 계속 낮은 신음만 흘리며 후드 아래 감춰진 이리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노인의 노골적인 시선은 벤이 의도가 담긴 헛기침을 날릴 때까지 이어졌다.


“음? 아, 미안하네. 자넨 이름이······?”


“벤입니다. 성은 따로 없어요. 그냥 벤.”


“아, 그래. ‘그냥 벤’, 마침 원소관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안내해 주겠네. 따라오게나.”


이건 곤란하다. 벤이 머리를 긁었다.


“예? 아, 아뇨. 여기서 고도와 만나기로 했-”


“그러니까 내가 제르나비에게 데려가 주겠다는 말일세.


“아니, 그냥-······.”


되도록 반응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상하게 집요한 노인 덕분에 벤의 시선이 자연스레 이리스를 의식하게 된다. 고도를 알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 노인은 교수쯤 되는 사람일 터. 고도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니겠지만 문제는 이리스다. 그녀를 대학의 정문까지 데려온 것만으로도 상당한 도박, 이 이상 노출 시킬 수는 없었다.


“아, 옆에 아이가 인형인 게 신경 쓰여서 그런 거라면 걱정 말게. 난 별로 상관없으니.”


필사적으로 변명을 고민하던 벤에게, 노인은 아주 가벼운 어투로, 무거운 선제공격을 선사한다.

당황이라는 표현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절제할 자신이 있던 벤이었지만, 이런 기습공격엔 그의 표정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어깨가 살짝 들썩이는 바람에 졸고 있던 이리스마저 부스스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 그건······.”


입을 떼기는 했지만, 벤은 이미 자신이 늘어놓으려고 했던 말들의 목적을 놓친 상태였다.

어떻게 눈치를 챘느냐가 먼저인가, 당신은 누구인가가 먼저인가. 아니면 그녀를, 이리스를 데려가고 싶은 것이냐고 묻는 것이 먼저인가.

방황하는 그의 이성을 붙잡아 준 것은 다름 아닌 노인의 얇고 긴 웃음.


“허허- 난 상관없다고 했잖나. 그 아이는 자네의 소유일세. 아, 소유라는 말이 껄끄럽다면 사과하지. 그 아이는 자네의 책임일세. 인형의 각인은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란 말이네. 원한다면, 이 학교에서 그 아이의 정체를 눈치채는 다른 사람이 나온다 해도 내가 어느 정도 안전은 보장해주겠네.”

노인이 비루한 수염을 어루만지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쨌든 내가 관심 있는 건 자네 쪽이거든.”


노인의 웃음을 정면으로 받아내면서, 벤은 등줄기에서부터 찌르르 울리는 무언가가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그 울림이 어색했던 이유는, 그가 ‘소름이 돋는다’는 느낌에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동시에 벤의 머리가 빠르게 움직인다.

이 노인은 누구인가.

괴상한 분위기, 이상한 관심. 단순한 교수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리스의 정체를 단박에 간파해냈다는 건, 전에 충분히 경험을 해봤다는 증거일까?

벤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노인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전 고도와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급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괜히 엇갈리거나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게다가 괜히 어디 싸돌아다닌다고 욕먹고 싶진 않거든요.”


노인은 이 말을 듣고, 하- 하며 짧게 웃은 뒤에 벤과 이리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런- 내가 마음이 급해서 실례했군. 제르나비 양은 지금 인가를 받으러 간 거지?”

벤이 고개를 끄덕였고, 노인이 말을 이어 나간다.

“그 인가를 해주는 사람이 바로 날세. 그러니까 나를 따라오면 번거로운 서류작업 없이 바로 처리해주겠다는 의미였네. 소개가 늦었군, 카나반 왕립마법대학 ‘아스트로바톰’의 총장이자 국제이론마법학회장인 디쿠젠 니바르토 라고 하네.”


디쿠젠이라 자신을 밝힌 노인이 주글주글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온다. 벤은 무의식적으로 그 손을 맞잡았지만, 그의 사고는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학회장······?”


날파리 아이데아와 고도를 서로 소개해줬던 날, 벤은 마구간에서 고도가 늘어놓았던 그녀의 푸념을 기억해낸다. 눈앞의 이 노인이야말로 그녀를 벼랑으로 내몰았던 변태영감(그녀의 주관적 평에 따르면)이지 않은가. 편견을 갖는 것이 좋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그의 관심이 달갑지만은 않아진 벤이었다.


“강요는 안 하겠네만, 마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보단 자네에게나 그 아이에게나 좋지 않을까 싶은데. 제르나비 양도 어차피 원소관으로 올 테고. 어쩔 텐가?”


마치 최후통첩을 하는 모양새였지만, 디쿠젠의 얼굴엔 벤의 생각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이 여유가 넘쳤다. 그의 바람을 충족시켜줄 생각은 없었으나, 결국 벤은 합리를 따르기로 한다. 이리스에게 손을 내미는 벤의 의도를 알아챈 디쿠젠은 환하게 웃으며 앞장서는 것으로 안내를 자처했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정문의 세 갈래 중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가로수 길이었다. 정문보다 빽빽하게 늘어선 나무들과 꽃들이 그들을 맞이했지만, 그 화려함과 아늑함이 인위적으로 조성됐다는 느낌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방학이라서 그런지 길을 지나다니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벤은 그들이 학생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걸치고 있는 로브의 익숙함으로 금방 알 수 있었다) 마주치는 학생마다 반가움과 존경을 담아 디쿠젠에게 인사를 건네온다. 그때마다 디쿠젠도 인자한 미소와 덕담을 잊지 않았다. 고도의 말을 통해 형성된 학회장이라는 인물과 슬슬 괴리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캉페온 광장에서 가장 어둡고 구석진 곳.

긴 의자에 반쯤 누워있다시피 몸을 기대고 있는 고도의 얼굴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울 어떠한 동기도 찾지 못한 채 시체의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고 길었던 수색임무가, 결국엔 그녀에게 어떤 보상도 주지 못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당장 기숙사로 달려가 목욕을 하고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녀는 신음소리와 함께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두 명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음? 제르나비 아닌가?”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도의 표정은 돌아보기도 전에 먼저 일그러진다.


“하아, 안녕하세요, 학회장님······, 엥?”


은빛 머리칼을 말끔하게 빗어 넘긴 노신사가 의자 뒤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뒤로, 익숙하지만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얼굴도 보였다. 어정쩡한 표정으로 학회장의 뒤를 따르고 있는 벤, 그리고 이리스였다.


“아, 그래. ‘그냥 벤’에게 얘긴 들었네. 임무 중에 별일은 없었나?”


고도의 입보다 먼저 디쿠젠이 벤의 이름을 꺼낸다. 어느새 이름까지 자연스럽게 꺼내는 사이가 되었나, 고도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아, 네에······, 뭐어······.”


아무리 연습해도 억지웃음만큼은 자연스러워지지 않는 고도였다. 당혹감으로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 벤은 그렇다 쳐도, 이리스의 존재는 신경이 쓰인다. 하필 가장 피하게 하고 싶었던 인물과 같이 오다니.


“그래, 요번에 성과가 좋았다고?”


학회장이 하얀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성과가 좋으면 뭐 하나요. 보람도 없는데 말이죠.”


고도는 으르렁거렸다. 부학회장이 만약 옆에 있었다면 그녀의 태도에 경악했을 터. 그러나 학회장은 미소를 잃지 않고 부드러움을 이어 나간다.


“국가를 위한 봉사였다고 생각하게나. 물론, 네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범주겠지만 말이야.”

고도가 세차게 머리를 끄덕이자 학회장은 더욱 크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4학년이지? 자넨 그동안 변한 게 없군. 부전공은 정했나?”


“공부 잘한다고 근신을 당하는 마당에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녀의 말엔 여전히 가시가 돋쳐있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반항적인 태도로도 학회장의 얼굴에서 미소를 앗아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뭐, 자네도 언젠간 알게 되겠지. 부전공에 대해 상담할 게 있다면 언제든 찾아오게.”


“부전공 말고 다른 일로 찾아뵈면 안 될까요? 예를 들면 부당한 처사 같은 것 말이죠.”


학회장은 껄껄 웃더니 고도의 뒤를 지나친다. 그녀는 순순히 그의 뒤를 따라가는 벤에게 눈빛으로 따지고 들었지만, 벤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리스의 손을 넘겨줄 뿐이었다. 고도는 그대로 소녀의 손을 끌어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길 수 있었다.

결코 꼬마라고 부를 수만은 없는 이리스였지만, 소녀의 몸집은 고도가 부드럽게 끌어안고서 후드로 감춰진 부슬부슬한 정수리 위로 턱을 올려놓아 괴롭히기에 충분할 정도로 작았다. 소녀가 인형이라는 사실은 잘 알지만, 철저한 이성만을 추구하는 고도의 머리조차 이 작은 소녀를 괴롭히고 귀여워해주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순 없는 모양이었다. 벤의 말대로 애완동물까지는 아니어도, 조용하고 말을 잘 들으니 참으로 이상적인 여동생이 아닌가. 고도는 이리스의 귀여움으로부터 참혹했던 무보수의 고통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저기가 자연계 연구실이네. 들어가 보게나.”


디쿠젠을 따라 본관의 4층으로 들어서자, 바로 앞에 있는 연구실이 벤을 맞이한다. 양옆으로 길고 넓은 하얀 복도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벤은 칼 같은 일관성의 복도를 보면서 어째선지 울렁증이 일 지경이었다. 디쿠젠에게서 종이를 받아들었지만, 노인은 묘한 웃음을 짓고 있을 뿐 떠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 바쁘시지 않나요? 데려다주시고 서류작업까지 해주신 건 감사합니다. 이제 가보셔도 될 것 같네요.”


그러나 벤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디쿠젠은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복도에 서 있었다. 슬슬 소름이 끼치기 시작한 벤이었기에 그는 재빠르게 문을 닫고 연구실로 도망치듯 들어서야 했다.

연구실은 한산했다. ㄷ자 형으로 탁자가 놓여있었고, 벤으로선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와 실험도구들이 즐비했다. 한적함 속에서 얼핏 느껴지는 난잡함을 통해 이곳이 학기중이었다면 필시 연구원들로 붐볐을 것이라고, 벤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어쩐 일로 오셨죠?”

책상 끝에 앉아 두꺼운 책을 펼쳐두고 있던 여인의 물음이었다. 로브 위에 걸친 남색 가운에는 ‘조교’라는 명찰이 달려있었다. 벤은 말없이 종이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아 입학심사 때문에 오셨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영력과 혈액검사가 있으니 여기 서명해 주시고요.”


‘입학심사?’


금시초문이다.

단순한 검사가 아니었나? 아니면 원래 대충 비슷한 건가? 벤은 잠시 기억을 되짚고 조교에게 질문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이미 실험실 뒤편 창고로 사라진 뒤였다. 벤은 짧은 고민 뒤에, 상관없겠지-라고 중얼거리며 그녀가 건넨 종이에 서명을 휘갈겼다.

여자는 잠시 뒤, 플라스크와 주사기를 들고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기 앉으세요. 오른팔 주시고요.”

무의식적으로 내민 팔에, 여자는 주저 없이 바늘을 꽂는다. 그 갑작스런 따가움보다는 아무런 공지도 없이 능숙하게 피를 뽑아내는 그녀 때문에 벤은 다소 놀라고 있었다.

조교가 플라스크에 담긴 벤의 피에 창고에서 가져온 정체불명의 검은 가루를 뿌린 뒤, 작게 주문을 외운다. 그러자 그의 피가 푸르스름하게 약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고, 처음 보는 광경에 벤은 낮은 감탄을 뱉었다.

“네, 자연계 항체가 표준이시네요. 입학대상자십니다. 특수인력 입학전형으로 1학년은 국가에서 장학금이 지급되고요, 기숙사도 제공합니다.”

그녀가 무언가를 잔뜩 적힌 종이를 찢어 벤에게 건네며 말을 잇는다.

“이거 가지고 본관 2층 입학사정관실 옆에 창고로 가시면 교복이랑 교재를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더 궁금하신 거 있으신가요?”


“응? 입학이요?”


지금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벤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피로 장난을 친 것까지는 검사라는 흐름으로 이해하겠지만, 갑자기 입학이라니? 이건 비스트마스터인가 뭐시긴가를 검사하는 것 아니었나?

벤은 디쿠젠에게 받은 종이를 자세히 들여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단어,

입학심사대상자.

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떠올리고 있는 조교를 향해 따지려고 고개를 들었으나,

그때 거칠게 열리는 문이 그의 말을 막아버린다. 여자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는데, 문이 갑자기 열린 것보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인물이 원인이었다.


“어머! 총장님!?”


“아, 조교! 이 청년 결과가 어찌 나왔나?”


디쿠젠이 성큼성큼 다가오며 물었다.


“네? 아, 네! 그, 자연계 항체에 반응이 있습니다. 수치는 준수합니다. 내년 신입생대상자로 분류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음, 그래?”


학회장은 벤을 힐끗 쳐다보더니 그에게서 종이를 빼앗는다. 벤은 불쾌함보다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의구심으로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저기요, 무언가 설명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벤의 비아냥거림을 못 들은 척, 노인은 씨익 웃으며 조교를 향해 주름진 입술을 열었다.


“이 학생, 저번 학기까지의 성적은 평균으로 처리하고, 당장 3학년 2학기부터 편입시킨다고 입학담당관한테 연락해 놓게. 내 이름으로 말이야.”


조교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네에? 하지만-”


“말만 해놔. 내가 처리할 테니. 자, 그럼 수고하게. 벤, 자네는 나 좀 따라오지?”


디쿠젠은 곧바로 연구실을 나가버린다. 빠른 걸음으로 그를 뒤따라 나온 벤은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고도와 이리스가 그의 뒤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고도 또한 벤에게 못지않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손을 드는 벤에게 얼떨결에 손을 들어 화답한 고도는 벤 앞에서 가슴을 펴고 서 있는 학회장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왜 벤이 저기서-”


“벤은 내일부터 바로 학교에 다니게 됐다. 내 특별전형으로 말이지.”


“······네에~?”

고도는 진심으로 놀랐다. 아니, 경악했다.

솔직히 말해서, 벤에 대한 기대감은 전혀 없었다고 해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나마 비스트마스터라고 의심하긴 했어도, 자기 자신부터가 벤에게서 그 어떠한 영력이나 마력을 느끼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한 능력이라도 갖고 있었단 말인가? 학회장이 그에게서 무언가를 간파해내었나? 이렇게 사고의 흐름이 이어지자, 고도의 뇌는 순식간에 계산을 마쳤다.

이런 결론이라면, 자신의 수색임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더더욱 높아지는 게 아닌가- 라고.

“아, 아니, 와- 정말요? 와- 벤의 마력이 엄청 높았나 봐요?”


“아니, 별로.”


학회장이 웃었다.


“그럼, 원소항체가 빠방했나요?”


“그다지.”


학회장이 다시 웃었다.

고도의 미소 아래로 슬슬 불안이 번지기 시작한다. 내색할 수밖에 없는 입술의 떨림이 다시 그녀를 짓누른다.


“그럼 도대체 뭐 때문에······?”


“자네 때문이네 제르나비.”


학회장이 끈적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고도는 그에게서 친절을 느끼긴커녕, 짜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저 때문이라뇨······? 학회장님 또 저를 매우 불안하게 만드시네요. 설마 저한테 얘 멘토라도 하라는 말씀이세요?”


큰 생각은 없이, 단순히 비꼬기 위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동시에 고도는 거대한 진실이 자신의 눈앞에서 닥쳐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차- 싶었지만, 학회장 디쿠젠의 얼굴엔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바로 그거야! 역시 학년수석! 이해가 남다르군!”


껄껄 웃는 학회장에게, 결국 고도는 이마를 감싸며 소리를 질렀다.


“저학년 멘토는 5학년 졸업반만 하는 거잖아요! 아, 진짜 저한테 왜 자꾸 이러세요, 정말!”


“대신 앞으로 있을 모든 근신이랑 수색임무 면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총장님.”

벤은 허리를 과도하게 굽히며 거듭 인사를 올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도라는 인간을 굴복시키기는 생각보다 매우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도는 고도 나름대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이론마법학과의 1학년 수업이야 대부분 암기가 위주였기 때문에 벤에게 자신이 썼던 노트나 몇 권 던져주면 자신의 역할은 끝날 것이라 기대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수지가 맞는 장사다. 지금 그녀의 미소는 절대 인위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럼 더 하실 말씀 없으시죠? 전 벤에게 학교 구경이나 시켜주고 기숙사로 돌아가 볼게요.”

그녀는 살랑살랑 웃으며 벤의 팔을 이끌고 계단 아래로 빠져나가려 했다. 여태껏 이렇게 기분 좋게 학회장을 뒤로하고 빠져나간 적이 없던 그녀다. 드디어 근신과 임무가 없는 분홍빛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나가는 그녀의 뒤로, 학회장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참, 제르나비.”


“네에~?”


고도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행복이 닿은 곳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악하게 웃고 있는 노인네의 굵은 주름이 있었다.


“여기 서류를 보니, 벤의 요청으로 그는 3학년으로 편입됐다네. 자네의 동기생이 된 셈이지. 고생하시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디쿠젠은 고도를 지나쳐 그대로 계단 아래를 향해 사라졌고,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고도는 부들부들 떨며 무겁게, 천천히 벤을 바라보았다.

그가 들고 있는 서류, 편입이라는 단어로 끝나는 그 서류의 공백란에, 그의 서명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깊은 빡침 때문에 거의 울먹이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는 벤의 얼굴에, 그녀는 결국 주먹을 날리고 만다.


작가의말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리며-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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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1

  • 작성자
    Lv.24 주정
    작성일
    14.09.26 10:21
    No. 1

    고도의 깊은 빡침이 여기까지 느껴지네요. 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26 13:17
    No. 2

    주정님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8 나카브
    작성일
    14.10.31 15:41
    No. 3

    조삼모사 짤방이 생각나네요 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0.31 18:29
    No. 4

    으잌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3 패스트
    작성일
    14.11.19 14:18
    No. 5

    자꾸 눈에 거슬리는데, 학회장=총장 맞나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1.19 14:24
    No. 6

    앗 레이지님 맞습니다 ㅎㅎ 따로 설명이 없다보니 혼동을 드렸네요 ㅠ
    대학총장이자 이론마법학회장 겸임이란 설정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2 K.S
    작성일
    16.02.28 01:12
    No. 7

    아..자야하는데..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2.29 07:56
    No. 8

    K.S님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무셔야죠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몽중정원
    작성일
    16.04.11 23:14
    No. 9

    총장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데 부정입학/편입을 저렇게 대놓고 해고 괜찮은 건지...
    흔히 나오는 마탑의 마탑주는 본인이 주인이니 탑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한다지만 여긴 대학교고 국립이라면 총장이라도 정해진 규칙을 뛰어넘을 순 없겠고 사립이라면 심지어 이사장이라도 언론에서 파악하면 권력의 오남용으로 인한 비난을 받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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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4.13 18:26
    No. 10

    몽중정원님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부정입학ㅋㅋㅋㅋ
    무소불위의 권력까지는 아니지만 총장의 존재와 권한은 학계에서만큼은 매우 독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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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9 용석손권
    작성일
    23.02.12 21:11
    No. 11

    총장은 사교성이라곤 없는 제르나비와 말을 튼 것만으로도 벤이 입학자격이 충분하다고 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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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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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3) +16 14.09.26 2,862 69 16쪽
42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2) +18 14.09.25 3,030 73 14쪽
41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1) +20 14.09.24 2,439 63 21쪽
40 (막간) 구원 +18 14.09.23 2,467 59 10쪽
39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7) +10 14.09.23 2,256 63 21쪽
38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6) +11 14.09.22 2,654 93 20쪽
37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5) +17 14.09.21 2,538 81 19쪽
36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4) +14 14.09.20 2,617 73 21쪽
35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3) +11 14.09.19 2,642 84 25쪽
34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2) +23 14.09.18 2,691 96 19쪽
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2 84 19쪽
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3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6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28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5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0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7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0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2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2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3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4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698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2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4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3 86 12쪽
»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3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3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2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7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6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1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7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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