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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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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4.09.05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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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DUMMY

로빈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얼굴이 기억 속의 그 얼굴이 맞나 심각한 혼란에 빠져있었다.

가장 오랫동안 봐왔던 얼굴이지만, 그만큼 그 얼굴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손을 들어 보이는, 저 꾀죄죄한 얼굴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너 여기서 뭐 해?!”

로빈이 한걸음에 망루에서 뛰어 내려오며 물었다. 당혹스러움에 눈치채지 못했던 벤의 마법사 로브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고, 놀라움과 감탄이 뒤섞인 미묘한 표정이 로빈의 얼굴에 번진다.

“으악, 마법대학에 편입했다더니 진짜였어?”


“그래 나도 반가워.”


벤이 후드를 완전히 벗어 넘기며 대답했다. 그의 얼굴엔 군용트럭의 투박함과 포장되지 않은 도로 때문에 생긴 멀미의 흔적이 아직도 창백하게 남아있었다. 때문에 로빈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드는 순간 구역질이 다시 올라왔지만, 벤은 그 반가운 손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학생이 여긴 어쩐 일이야? 뭐하러 왔어?”


“전선에 지원할 마법사를 찾는다고 해서 자원했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네. 그러는 넌 여기서 뭐 하냐? 아직 훈련소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하아-, 그러게.”


로빈이 허탈하게, 가슴으로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운 시골에서 고물이나 주워 팔며 살았던 자신들이, 지금은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새삼스럽게 위화감이 들었던 것이다.

벤은 그 나름대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피가 눌어붙은 제복을 걸치고 있는 로빈의 모습이 영 어색한 모양이었다. 벤은 혈흔을 쫓는 자신의 시선을 로빈에게 들키자, 눈앞의 친구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도 사람 죽였냐?”


대수롭지 않은 듯이 툭 던진, 한없이 가벼운 벤의 목소리.

로빈은 무의식적으로 한 번 핫-하고 웃으려다, 어째선지 자신의 목소리와 표정 둘 모두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느새 이마를 감싸려고 올라오는 손을 간신히 참으며, 결국 로빈은 혀로만 웃고 만다.


“당연하지. 여긴 전쟁터라고. 걱정하지 마, 크게 별다른 건 없었어.”


그는 애써 벤의 깊은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별다를 게 없었다-?”

벤이 턱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로빈의 대답을 되뇐다.

“그게 네 감상이야?”


로빈은 말을 삼킨 채 자신의 유일한, 오랜 친구를 바라본다. 이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가끔 알 수 없는 말을 해올 때가 있었다. 책을 많이 읽던 놈이었으니까-, 툭툭 던지는 그런 말들이 마냥 싫지는 않았으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무심해 보였어도, 결국 그 모든 말들은 언젠가를 위한,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한, 진심이 담긴 조언이었으니까.


“후, 너에겐 뭔 말을 할 수가 없어.”

라고, 로빈은 애써 웃어 보인다.

“좀 봐주라, 지금 상황에서 감상을 품는 건 내겐 너무 사치야.”


로빈의 우는 소리에 벤은 웃는다. 벤의 칙칙한 웃음은 항상 인위적, 또는 내려다보는 느낌이 있어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로빈은 벤의 조소와 미소를 구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그래도 그 감상에 후회는 없지?”


벤은 확실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말한 ‘감상’이, 그들의 과장된 상상이 만들어냈던 망설임에 대한 반성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래,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생각보다 떨지 않았다구.”


로빈은 비로소 어색하지 않은 미소로 말을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로빈은 그 순간, 눈앞의 벤도 기사였다면, 그리고 자신의 옆에서 함께 검을 들었다면-이라는 상상을 해버린다. 그렇다면 자신이 걸어갈 이 피의 길이 조금은 윤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만약 지나와 오즈카가 이 말을 들었다면 조금은 서운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그는 큭큭하고 작게 웃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난 네가 어설픈 거에 눌려버리지 않을까 했거든.”


“어설픈 거?”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자신을 짓누르는 그 거대함을 결국 스스로 지워버리고, 더 큰 무게 속에 더 큰 무게의 빛이 숨어있으리라 믿는다.’

벤은 전투마법사 관련 고서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희미한 한숨을 뱉었다.

그가 판단하기를, 이 구절은 하나의 강력한 경고였다. 하지만 로빈은 괜찮을 것이다. 벤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그가 걱정했던 것은 로빈의 나약함이 아니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들 옆으로 병사 하나가 다가온다.


“로빈슨 분대장님, 소대장님이 찾으십니다.”


“어, 알았어.”

그가 손짓과 함께 병사를 돌려보낸다.

“잠깐 다녀올게.”


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의 뒤를 따라 사라지는 로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 차분히 성내를 살피기 시작한다.

아직 식지 않은 피비린내와 시체들. 그 노골적인 승리의 현장에서도 그가 보는 모든 얼굴들에서 공통적인 불안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뒤따라온 마법사들과 후속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건 누구일까.”

이례적으로, 벤은 떠오른 생각을 머리에만 담지 않고 직접 중얼거린다. 물론 일개 마법대학생의 존재와, 그가 중얼거리는 말을 신경 쓰는 얼굴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칼날 위로 져버린 꽃잎처럼, 위태로운 운명 위를 걸으며-”

그의 시선이 시체를 옮기는 병사의 걸음을 쫓는다.

“결국엔 절망의 열매를 맺는 과수 아래에 목숨을 던지겠지.”

유명한 시인의 구절을 읊는 벤의 한숨 섞인 속삭임은 혼란스러운 광장에 묻혀 사라져간다. 그는 느릿한 발걸음을 옮겨 성내를 거닐기 시작했다.




***




로빈은 천막으로 들어서자마자 불편한 표정의 지나와 후발대의 선봉을 맡았던 여마법사가 서로 대치 중이라는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노골적으로 짜증이 나있는 지나와는 달리 마법사의 표정은 약간 상기되어있는 수준이었지만.


“부르셨습니까.”


로빈은 분위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에 먼저 반응한 것은 지나의 미소.


“로빈, 여기 하파님이 우리가 하기로 했던 계획이 맘에 들지 않다고 하시네.”


생글생글 웃고는 있지만, 그녀의 말에 돋쳐있는 가시는 외면할 수 있는 수준의 불만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저렇게 떨리는 입꼬리라니 누구라도 알아채겠지. 설명을 바라는 로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하파라는 마법사에게 향한다.


“적의 공격을 한 곳에 집중시킨다는 생각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너무 터무니없더군요.”

하파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나에게 되받아쳤다. 그녀의 표정은, 지나에게 들은 ‘방법’이라는 것이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수준이라는 듯 잔뜩 구겨져 있었다.

“‘성문을 열어놓자’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요? 그럼 빨리 말씀해보시죠. 시간 없으니까.”


마찬가지로 격앙된 지나의 목소리. 로빈이 제지할 틈도 없이 결국 2차전의 불이 붙는다.


“마법사가 충원됐으니 중계소를 설치하고 통신을 수립, 1대대와 3대대와의 연계를 통해 움직여야 합니다. 공격해올 적의 규모를 모르는 상태에서 성문을 열어놓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아군이 어딨는지 알고 중계소를 잡아요? 지금 적은 코앞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제 말은 적의 규모를 모르니까 수비지점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거잖아요! 협공은 기대하지 말고, 우리만으로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구요! 잘 모르시나 본데, 애초에 우리가 받은 명령도 1,3대대의 공격작전을 위해 적의 시선을 유도하고 적의 병력투입을 지연시키라는 거였어요!”


으르렁거리는 둘 사이로 로빈이 할 수 있는 것은 멋쩍은 헛기침뿐.


“그래서, 부르신 이유는······?”


“이 마법사님께 네 전술적 견해를 좀 들려주라고.”


지나의 말에 줄곧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하파의 미간이 급속도로 구겨진다. 지나의 도발적인 어투에서 자신이 마법사이기 때문에 전술적인 능력은 전무하다-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로빈은 둘을 번갈아 바라보고 나서, 하파를 향해 목을 가다듬었다.


“일단 성을 수복하기는 했지만, 적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위해 포로까지 풀어주면서 이미 이곳을 공격하도록 유도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소대장의 말처럼, 후속대가 합류했다고는 해도 이곳으로 향할 적의 규모를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완벽히 대처하기가 애매한 상황입니다. 성문을 열고 그곳으로 적이 공격을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건 적의 규모가 우리를 압도할 때를 대비하는 도박인 셈이지요.”

도박이라는 단어가 불만이었는지 하파가 앞으로 나섰지만, 지나가 특유의 거친 눈빛으로 제지하는 바람에 로빈의 말이 이어질 수 있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2대대의 1차 임무는 파이튼 성의 점령과 확보가 아닙니다. 그것을 위한 초석을 다질 뿐이죠. 즉, 여기서 1,3대대가 수월하게 승리할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게 우선적인 목표입니다.

하파님의 말씀처럼 1,3대대와의 확실한 연계를 위해서는 상황에 따라 유동적인 대처를 해야 할 텐데, 사방으로 포위된 상태에서는 통신 자체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마법사 전력을 중계소 설치한답시고 내보냈다가 잃기라도 하면 낭패니까요.

그래서 성문을 열고 한 방향으로 들이닥치는 적을 맞이하자는 겁니다. 만약 적이 의심이 많은 인물이라면 함부로 덤벼들지도 못할 테고, 그럼 그것만으로도 시간을 더 벌 수 있겠지요.”


로빈의 설명이 끝났음에도 하파는 입술을 깨물며 난색을 표했다. 마땅한 대답이 없는 그녀를 바라보던 지나는 열불이 터질 노릇이었다.


“아오, 답답해! 당장 적이 쳐들어올 수도 있잖아요! 이럴 시간 없다니까? 그냥 고집부리지 말고 우리가 하자는 대로 해요 좀!”



“소, 소대장님!”

지나가 말을 마침과 거의 동시에, 천막으로 병사 하나가 다급히 뛰어들며 외쳤다.

“척후의 보고입니다! 전진하던 적 본대 중 일부가 회군하여 이곳으로 향한다고 합니다! 예상도착시간은 불명!”


드디어-라는 말을 삼키며, 지나의 눈이 태양처럼 빛을 발한다.


“수는?”


“어두워서 전체적인 군세의 확인은 못 했으나, 대대장급 지휘관을 식별했습니다.”


“그럼 일단 최소 대대급이라는 소리네. 적들의 편제가 정상이라면, 적어도 우리의 네 배는 넘겠어.”

표면상으로는 같은 대대라지만 이곳의 부대는 출발부터 정상적인 편제가 아니었다.

확연해진 병력의 차이.

지나는 다급한 얼굴로 하파를 돌아보았고, 마법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을 확인하자마자 지나는 천막을 나서더니, 영력을 담은 목소리를 통해 성내의 병사들에게 고함을 지른다.

“적이 접근 중이다! 전 인원은 남문에 집결해서 대열을 갖춰! 모든 사수와 지원화기분대는 성벽 위로 올라가서 자리 잡고 내가 직접 명령을 내리기 전까진 절대 사격하지 마! 통신병은 망루 위에서 1대대와 3대대의 신호를 잡도록 한다! 그 외 전투마법사들은 성벽 위에서 보호막 준비해! 그리고,”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드는 지나.

“남문을 열어라!”



***




“완전히 허를 찔렸군. 우회해서 파이튼을 직접 칠 줄은 몰랐는데. 어디서 그런 병력이 나온 거지? 귀찮게 됐어.”


깊은 숲의 어둠을 몰아내는 횃불 아래서 남자의 청색 휘장이 빛난다. 그 휘장은 하얀 제복을 바탕으로 둔 덕분인지 어둠 속에서도 충분히 존재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휘장의 사내 뒤로는 오백이 넘는 흰색 물결이 소리 없이 지휘관의 목소리를 뒤따르는 중이었다.


“남쪽의 숲입니다. 요격을 위해 숲 쪽의 경계인원을 뺀 것이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침투해온 적이 중대 규모여서 고지의 척후가 눈치를 못 챈 것 같습니다.


“중대 규모?”


“예, 도망쳐 나온 병사들의 증언을 통해, 성을 점령하고 있는 적군의 숫자가 많아야 중대급이라는 확인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부관의 정확한 보고에도, 지휘관인 남자는 혀를 차며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든다.


“연대장님이 급하셨던 모양이다. 이렇게 간단한 실수를 하시다니. 게다가 목적지의 적들도 어디선가 증원받아 재편성된 모양인데, 이렇게 대대병력을 성급하게 뺀 것도 영 꺼림칙해.”


“빨리 정리하라는 의미셨을 겁니다.”


“전선을 밀어붙이기 위해 전체적으로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다는 말이다. 적 연대에 궤멸 가까운 타격을 입혔다곤 해도 예비연대나 보충대의 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병력을 나누다니. 애초에 아실레마제국 놈들이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지휘관의 불평은 머지않아 숲과 함께 끝을 고했고, 저 멀리 작은 성벽이 시야에 들어선다. 대대장은 망설임 없이, 영력이 담긴 목소리로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자, 공성준비! 사다리를 삼면에 걸쳐 배치하고 사수들은 성문이 열릴 때까지 사격을 멈추-, 응?”

그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잠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들이 철저하게 깨부숴야 할 것으로 생각했던 성문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부관,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지금 저 성문이 열려있는 게 맞지?”


“네, 그렇습니다. 매복인 것 같습니다만.”


지휘관은 부관의 신중함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매복이라기엔 너무 대놓고 살기어린 영력을 당당하게 뿜어대는 놈이 하나 있는데. 요격하는 것 같지는 않고, 뭐 하자는 거지?”


“지원군이 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 성급하게 걸려들지는 말자고. 오히려 우리한텐 잘 된 걸 수도 있어. 놈들이 시간을 끌려고 허세를 부리는 거지.”


지휘관은 모든 병력을 남문 전방에 포진시켰다. 여차하면 한꺼번에 열린 성문을 향해 돌입시키기 위함이었다. 브린타이나군의 포진이 끝날 때까지도 활짝 열린 성문 안으로 그들을 제지할 어떠한 존재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나의 작은 그림자를 제외하고.



“쟨 뭐야?”

대대장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성문에 홀로 서 있는 그림자를 가리켰다.

아담한 체구의 여인이, 불타는 듯한 눈동자로 이쪽과 이쪽의 병사들을 향해 적의를 쏘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사수! 발사.”

지휘관의 목소리에 망설임은 없었다.


“옛.”


그의 명령에 기다란 소총을 든 병사 하나가 총구를 성문의 그림자를 향해 겨누었다. 곧이어 날카로운 총성이 고요했던 숲을 뒤흔들었지만, 총탄은 그녀의 옷깃에도 스치지 못하고 섬광과 함께 튕겨 나가고 만다. 그 광경을 지켜본 남자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기사였구만. 지금 보니 영력을 마구 뿜어내던 게 저년이었어. 햇병아리 주제에-”

남자가 부관을 돌아보았다.

“부관, 네가 가서 저년의 목을 따와라.”


“넷? 뻔히 보이는 수작인데, 그냥 빨리 밀어버리고 끝내시는 게······.”


부관의 말에 지휘관은 크게 웃었다.


“저런 햇병아리가 저렇게 당당히 도발해 오는데 브린타이나 왕국의 기사로서 손봐주지 않을 수가 없잖나? 중대규모에서 기사라면 최소 소대장급 직책일 텐데, 애써 찾아다니는 대신 먼저 나와 줬으니 오히려 고맙지. 만약 저쪽에서 비열하게 나온다면 그때는 총공격하도록 약속하겠다. 아니면, 자네 혹시,”

부하를 자극하기 위한, 얕은 비웃음.

“저런 허세만 가득 찬 병아리한테 쫀 건 아니지?”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부관은 가만히 넘길 수가 없었다. 부관은 자신의 지휘관을 향해 한 번 크게 웃고는, 장검을 뽑아 성문으로 힘찬 발걸음을 향했다.


“브린타이나 왕국의 기사, 아단 사히드라고 한다. 감히 홀로 우리에게 검을 맞대고 있는 네 이름은 뭔가?”

나름 정중함을 갖춘 부관의 목소리가 성문을 넘어 깊게 울려 퍼진다.

약체인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는 고전적인 방법이었지만, 성문 앞에 선 ‘병아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가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부관은 그녀가 시종일관 새빨간 혀끝이 보이는 비웃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건방지긴!”

부관의 도약은 빠르고 간결했다.

그의 검 끝은 정확히 여인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가속을 위한 두 번째 도약이 부드러운 땅을 강타한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검이 꿰뚫을 붉은 살덩이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눈앞의 어설픈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영력의 파동은 평범한 수습기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그는 다음 순간, 검을 쥐었던 손에서 피어오르는 지릿한 가벼움과,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묵직한 영력의 에페검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얇은 에페의 검신이 허공을 가른 자신의 오른팔을 어깻죽지부터 베어버린 그 순간까지도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통보다도 큰 의문만을 남긴 채, 그의 목은 붉은 분수와 함께 허공을 향해 부유한다.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유일하게 그 광경을 이해한 브린타이나의 지휘관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끼던 부관의 몸뚱어리가 주인을 잃고 힘없이 나자빠지는 광경 앞에서, 그는 당혹감과 분노가 섞인 표정으로 어느새 자신을 향해 에페를 겨누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조작된 미숙함의 향기를 뿜으면서도, 동시에 이런 무게의 영력을 감출 수 있는 자라니-


이런 대대장의 의문이 닿기라도 한 것일까.



“내 이름은 아뮤르 지나!”


여인이 추락하던 부관의 머리통을 에페의 검끝으로 꿰뚫어 낚아채고 높게 들어 보이더니, 곧바로 브린타이나 지휘관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거칠게 내팽개치며 소리쳤다.

동시에 작은 몸집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영압이 작은 성과 온 숲을 가로지른다. 몸을 잃은 처참한 머리는 피를 뿜으며 굴러와 정확히 대대장의 군화 앞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카나반 28대 검성, 아뮤르 한센의 피를 이어받은 자!”


지나의 샛노란 눈동자가 태양처럼 격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이 이름을 쓰러트리고 명성을 떨쳐볼 기사가 브린타이나에 있나?!”


작가의말

9월인데 낮엔 갑자기 더워지네요.

큰 일교차에 감기걸리지 않으시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으면 지적 부탁드리겠습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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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9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1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4 86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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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701 87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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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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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3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4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3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8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7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2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8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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