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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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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4.09.0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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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글자
25쪽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DUMMY

“섭정 각하, 오셨습니다.”


“들라 해라.”


잠시 후, 비서의 안내에 섭정실로 들어선 인물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거침없이 와인병 하나를 집더니, 성큼성큼 마누앙 맞은편의 소파에 자리를 잡는다.

어느새 다시 수염이 비죽 올라온 드렌턴이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들어섰을 때보다 피부는 더욱 짙어졌지만, 몸은 그만큼 더욱 다부져진 듯 보였다.

우직한 손으로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뽑아낸 드렌턴이 조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바쁘신 섭정 각하께서 교관 따위를 직접 불러주시다니, 과한 영광이로군.”


“본론부터 말하지, 루디.”


이어질 조롱이 몇 개는 더 남아있는 듯 보였지만, 마누앙이 단호하게 끊는 바람에 드렌턴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와인을 삼키는 것은 잠시 미루어야 했다.


“왕세자는 어디에 있나?”


“왕세자‘님’이라고 해라, 마낭.”

드렌턴이 낮은 목소리로 위협한다.

“다시 말하지 않겠다.”


잠시 서류 더미에서 눈을 떼고, 말없이 드렌턴을 바라보는 마누앙.

옛 친구의 표정을 깊게 살펴본 그는 한발 물러서기로 정한 듯했다.


“그래, 왕세자‘님’은 어디에 계시나?”


“하,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이제 와서 무슨 소릴, 시치미 떼지 마라. 붉은 나무의 씨앗을 가져왔다고 말한 건 바로 너다. 루디.”


“내가 그랬었나?”

드렌턴이 익살스럽게 웃었다.

“이거 나이가 들다 보니 내가 뭔 소릴 했는지도 영 기억이 안 나서.”


드렌턴이 와인을 주욱 들이키는 광경을 인내심 있게 기다린 뒤, 마누앙은 안경을 벗어 서류 위에 올려놓는다. 그의 먹색 눈은 별다른 조명 없이도 충분히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네가 데려온 두 청년······. 처음에 그들 중 하나가 ‘씨앗’일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더군. 둘 모두 20세 초반의 꼬마였지. 실종된 둘째 왕자는, 만약 살아있다면 올해 서른다섯이지, 아마?”

마누앙의 날 선 추궁에 드렌턴은 대답 대신 와인을 들이킨다. 그에 마누앙은 벗어놓은 안경을 매만지며, 짙은 밤하늘과도 같은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갓난아기였던 막내 왕자는 불행하게도 ‘그날’ ‘사고’에 휘말려버려서 운명을 달리했지. 너도 그때 모습을 감추었고. 근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섭정의 시선이 와인병 너머로 드렌턴의 눈을 찾는다.

“너와 리반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지 않았나? 그 애가 살아있다면 올해 스무 살쯤 되겠-”


마누앙은 말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드렌턴의 손에 들려있던 와인병이 폭발하듯 박살 났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드렌턴과 마누앙 뿐이던 집무실에 새로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어딘가의 어둠에서 튀어나온 시퍼런 칼날이 드렌턴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었다.


“아 이런, 미안해. 갑자기 안 좋은 이름이 나와서 말이야.”

드렌턴이 굳은 얼굴로,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가루가 되고 남은 와인병의 주둥이를 옆으로 내던진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내 마누라랑 아이는 그날 이후로 못 봤어.”


“브린, 됐어.”

마누앙의 손짓에 그림자는 천천히 어둠을 향해 사라진다. 그러나 명령자의 얼굴에 남아있는 의혹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상하군. 그렇게 금슬이 좋더니.”


“내 말이.”


드렌턴이 호탕하게 웃었다. 쩌렁쩌렁한 그 목소리는 두꺼운 문을 넘어 집무실 밖으로 울려 퍼질 듯했다. 하지만 과도하게 찢어지는 그의 웃음 뒤에 깔린 그늘을 마누앙의 날 선 눈이 놓칠 리 없었다.


“그래, 리반나의 흔적은 그 후로 어디서도 못 찾았으니, 그 말은 믿어주지. 그런데, 루디,”

마누앙이 천천히 일어섰다.

“네 아이 이야기는 그다지 믿지 못하겠는걸.”


“······.”


드렌턴은 대답 없이 가만히, 창가로 다가서는 마누앙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본인의 덩치보다도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어째선지 마누앙의 그림자에 모두 삼켜지는 듯 느껴지는 것은 저 옛친구의 존재 자체가 그에겐 암흑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리라.


“내 생각엔 말이야, 그 두 청년 중 하나는 분명 네 이름을 이어받아야 했을 아이가 아닌가 싶은데.”


“······.”


여전히 드렌턴의 굳은 입술은 열리지 않고 있다. 뒤돌아선 마누앙의 얇은 미소를 눈치채지 못한 채로, 그는 침묵한다.


“이렇게 하도록 하지. 네가 왕세자님의 소재를 알려줄 때까지, 너와 ‘관련 없는’ 그 두 청년을 내 곁에 두기로 하겠어.”


“뭐?”


드렌턴이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바늘처럼 뻗어나가는 영력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은 그 불같은 모습은 마치 당장이라도 마누앙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하지만, 곧 그는 마누앙의 의중을 알아채고 자신의 경솔함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나, 너하곤 아무런 상관없는 청년들 아니었나?”

마누앙이 흐리게 웃었다.

“이상하군? 애초에 18년 만에 갑자기 나타나선 굳이 나에게 왕의 씨앗을 가져왔다고 찾아온 건 너 아니었나? 그저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한 거였나? 그렇다면 이게 답이 되겠군.”

드렌턴은 분노가 가득 차 벌게진 얼굴로 한참을 마누앙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를 여유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마누앙은 짧은 한숨과 함께 다시 책상에 앉는다. 다시 안경을 쓰고, 서류에 시선을 돌린 그에게서 더 이상의 그림자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뭔가 말할 것이 생각나면 다시 나를 찾아주게. 그 둘은 앞으로 내가 잘 살펴보도록 하지.”


집무실의 황금문이 열리고, 비서가 드렌턴의 곁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드렌턴은 자리를 뜨지 않고 한참을 계속 마누앙을 노려보다가, 이윽고 문고리가 뽑힐 정도로 강하게 문을 박차며 집무실을 나선다. 마누앙은 비서에게 새로운 와인을 하나 가져오라고 명하면서, 드렌턴이 사라진 문을 힐끗 한번 바라보고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또한, 집무실을 나서는 드렌턴의 묘한 미소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




기사훈련소의 본관은 겉보기와는 달리 내부가 상당히 고풍스러운 편이었다.

훈련생들의 피와 땀이 스며있는 훈련장이나 대강당과는 그 분위기부터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높은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샹들리에는 내성에서도 보기 힘든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으며, 그 은은한 조명을 받는 대리석 바닥은 하루에 몇 번이나 닦는지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밋밋한 벽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모든 벽면이 온갖 미술품과 박제품으로 가득했다. 이것이 모두 단장인 검성의 취향으로, 기사단본부는 이보다 몇 배는 더 화려하다는 것이 훈련생들 사이에서 오가는 소문이었다.


본관 대합실의 분위기는 마치 시장이나 작은 광장과도 같이 떠들썩했다.

때문에 로빈은 이곳을 지나는 모든 이들이 남색 제복을 입은 사람들뿐이라는 사실에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격한 훈련소의 본관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찻집이나 기념품관이 즐비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간만에 여유로이 찻집의 야외탁자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지나가 한심하다는 듯이 로빈을 바라본다.

그녀 또한 치렁치렁했던 샛노란 머리를 깔끔하게 말아 올린 상태였다. 생도복이 아닌 남색정복을 갖춘 채로, 가슴엔 훈련생을 의미하는 나뭇잎 휘장 대신 참전용사임을 증명하는 나뭇가지휘장과 부상당한 기사들에게 수여되는 십자훈장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소매에 박힌 다섯 개의 자주색 띠는, 두 달 전 그녀가 초임기사의 신분으로 파이튼 성에서 베어낸 다섯 기사를 기념하는 ‘나이트 슬레이어’의 표식이었다.

그간의 강도 높은 훈련 덕분에 창백하기만 했던 지나의 피부도 다소 그을리게 됐지만, 남색제복과 대비되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맑고 화사해 보였다.

하지만 역시 말아 올린 머리가 불편하고 어색했는지, 머리의 당겨지는 부분을 계속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은 특유의 사방으로 뻗치고 잔머리 가득, 부슬부슬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 다들 우릴 쳐다보는 거 같아서, 우리 같은 짬찌끄러기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나?”


로빈의 말대로, 찻집 앞을 지나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한 번씩 눈길을 흘리고 있었다. 다만 그 시선은 로빈의 걱정과는 달리, 이제 갓 훈련소를 벗어난 초임기사들이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고 있어서가 아니라 로빈과 지나 옆에서 과묵하게 차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는 오즈카를 향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아직 기사단 내에서는 초전부터 적 대대장을 베어 넘긴 검성의 고손녀보다는 배신자의 아들이 더 시선을 끄는 모양이었다.


“우릴 보는 게 아니라 날 보는 거야. 아유-, 이놈의 인기란.”


이쪽을 바라보던 훤칠한 남자에게 눈을 찡끗하는 지나. 하지만 그는 황급하게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긴다.


“넌 여기보다는 브린타이나에서 인기가 더 많지 않을까?”


“지랄, 닥쳐.”


둘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로 오즈카가 천천히 신문을 내려놓는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의 딱딱한 모습이었지만, 지나와 로빈은 오즈카의 눈빛이나 어투가 석 달 전의 첫 만남 때보다는 분명하게 부드러워졌음을 알고 있었다.


“여기 지나의 기사가 또 올라왔군요.”


“뭐, 또 아뮤르의 이름이니 뭐니, 할아버지 찬양과 앞으로 기대한다는 등등 뻔한 지랄들만 떨어놨겠지.”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차를 홀짝였다. 그런 류의 기사나 언론의 관심은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받아왔던 터라 이제는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그래도 제 이름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여기 사설란엔 저를 기사단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내용이 있던데요.”


“꼬우면 지가 나가서 싸우라고 해. 괜히 시비 털지 말고.”

지나가 과도하게 커다란 목소리 소리치는 바람에 대합실에서 움직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을 쳐다봤지만, 여유롭게 찻잔을 집는 지나에겐 그 모든 시선이 대수롭지 않은 듯 보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너나 나나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보여. 이름 따윈 개나 주라지. 그게 전쟁터에서 뭔 소용이 있다고.”


오즈카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빈은 그가 반박하리라 예상했지만, 반박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색은 달라도, 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언제나 서릿바람, 얼음 폭풍과도 같은 눈총이었을 것이다.

오즈카와 지나의 인생 전반에 걸쳐 피부로 스며든 비웃음과 경멸, 찬양과 시기는 로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기에, 그는 화제를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동기들 대부분 배치가 끝난 것 같은데 왜 우리만 오늘까지 대기하라고 한 걸까.”


“배치는 무슨, 말이 좋아야 배치지 그냥 최전방 파견이잖아. 우리도 다를 거 없을걸.”


이미 지나에겐 실전배치라는 단어 자체가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물론 그것이 자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님을 로빈은 잘 알고 있었다.


“하긴, 타피하고 올랜드 빼고는 죄다 전방사단으로 끌려갈 모양이더라.”


“그게 누군데?”


지나가 정복의 넥타이를 거칠게 풀며 되물었다. 아마 저대로 아무런 제지 없이 둔다면 곧 겉옷은 물론 블라우스의 단추와 벨트까지 풀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로빈이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나가 앉아 있는 의자 뒤로 다가가면서 푸념했다.


“야, 석 달 동안 같이 구른 동기들 이름 정도는 외워라, 좀······.”


“알 게 뭐야, 약해 빠져갖고. 인생에 도움도 안 될 년놈들인데.”


그녀의 말엔 악의가 없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두 달 전이었다면 로빈은 서슴없이 그들을 변호하며 지나를 비난했겠지만, 이미 지나라는 인간에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로빈이 지나의 넥타이를 고쳐주며 혀를 차는 것이 들렸는지, 지나가 홱 돌아보며 태양처럼 무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럼 62위의 나는 왜 같이 놀아 주냐?”


그런 지나의 이마에 딱밤을 꽂아버리는 로빈. 그러나 그 정도의 고통은 지나에겐 너무 미약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영광인 줄 알고 잽싸게 홍차나 한잔 더 가져다주지 않을래?”


지나가 발로 차며 로빈을 밀어낸 덕분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찻집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거기 자네, 자네가 로빈슨인가?”


절도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로빈이 돌아보자, 한눈에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여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반적인 남색제복 위의 붉은색 재킷과 슈테인울프의 가죽으로 만든 벨트는, 굳이 휘황찬란한 휘장들을 해석하지 않아도 그녀가 왕실근위대임을 알려주는 증거들이었다.


“네, 제가 로빈슨 듀켓입니다.”


노을과도 같은 선명한 그녀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에 움찔하며 로빈이 경례와 함께 대답했다. 그녀는 빠르게 로빈을 한번 훑더니, 건조한 목소리만 남기고서 뒤를 향한다.


“따라오게.”


“넷? 어디로-”


되물으려는 로빈을 가볍게 눈빛으로 제압하고 나서,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대합실을 나선다. 허둥지둥 그녀를 따라가는 로빈을 향해 지나가 웃으며 휘파람을 불었지만, 표정으로 대답하는 로빈의 원망은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




***




“들어오게.”


비서가 대신 열어준 황금빛 문 너머로 나타난 섭정의 집무실은 로빈의 상상보다 다소 검소했다.

흔히 그가 들어왔던 ‘지도자의 권위’에 대한 어떠한 상징물도 찾을 수 없는, 말 그대로 단순한 사무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방을 살짝 채우고 있는 장미와인의 향은 그에겐 익숙한 것이기도 했거니와, 훈련소 본관에서 봤던 찬란한 샹들리에나 벽장식 따위는 이미 복도서부터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각하, 국립기사 소위 로빈슨 듀켓입니다.”


멍하니 있던 자신을 대신해 소개하는 비서의 말을 듣고서야 로빈은 자신의 무례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여태까지 해왔던 어떠한 경례보다 절도 있게 손을 올렸지만, 서류철에 파묻힌 마누앙은 안경 너머로 흘끗 한번 로빈을 쳐다보고는 곧바로 시선을 내린다.

섭정의 나가라는 손짓에, 비서는 각진 인사와 함께 로빈을 내버려 둔 채 문을 닫는다.

로빈은 그곳에 그대로 서서, 섭정의 말끔하게 빗어 넘긴 희끗한 머리 아래로는 감히 시선을 두지 못한 채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마누앙이 입을 연 것은, 서명을 마친 종이를 같은 것이 쌓여있는 더미에 던지듯 내팽개치고 난 후였다.


“그래, 자네가 로빈슨인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만 같은, 건조한 음색.


“국립기사 소위 로빈슨 듀켓! 예, 그렇습니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그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쩌렁쩌렁 울린다. 그 예상 밖의 울림이 당황스러워 로빈은 순간 자신이 목소리에 영력을 실었었는지 착각할 정도였다.


“힘 좀 빼게, 일단 좀 앉지?”


“넷.”


마누앙의 권유대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지만 로빈은 감히 등을 대지 못하고 여전히 경직된 상태.

섭정은 그에게 더 이상 태도에 대해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로 긴장을 풀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안경을 내려놓고 업무의 무게가 잔뜩 실린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마누앙은 특유의 깊고 어두운 눈으로 로빈을 바라보았다.


“파이튼 성에서의 활약상은 들었네. 훈련생도의 신분으로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만하지.”


“아닙니다. 과찬이십니다. 연대장과 대대장의 훌륭한 지휘 덕분이었습니다.”


입에서는 기계처럼 정해진 대답이 튀어나왔지만, 로빈은 그의 칭찬에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파견이 끝난 이후로 그는 지나와 오즈카에 대한 찬사 및 뒷얘기는 많이 들어왔지만, 자신에 대해 언급한 자는 이 노인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국가원수에게 칭찬받았다는 영광스러운 사실보다는,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 의구심이 먼저 그의 머리를 옭아맸다.


“자네 기수가 오늘 배치가 완료된다고 들었는데.”


“예, 맞습니다.”


“자넨 어디로 배치됐나?”


“아직 배정받지 못했습니다.”


마누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몸을 의자에 기대 뒤로 한껏 젖혔다. 갑자기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어째선지 압도되는 기분이 들어, 로빈은 그렇지 않아도 경직된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껴야 했다.


“흠, 따로 가고 싶은 곳이 있나?”


“아직 딱히 없습니다만, 되도록 전우들과 함께 최전방-”


“그렇다면,”

또다시 재생되는 로빈의 기계 같은 응답을 끊으며 마누앙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내가 한 가지 제안해도 되겠나?”


“제안······, 말씀이십니까······?”


마누앙이 고개를 끄덕인다. 곧바로 그가 큰소리로 누군가를 부르자, 근위기사의 제복을 입은 여자가 힘찬 경례와 함께 섭정실로 들어선다. 로빈을 데려왔던 그 여기사였다.


“다름이 아니라, 자네를 왕실근위대로 임명하고 싶군. 어떤가?”


“옛?!”


마누앙의 제안은 로빈으로선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바,

경직됐던 몸이 펄쩍 뛸 정도로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왕실근위대는 초임기사의 최종평가대상 중에서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야 노려볼 수 있는 직책이었으니까.

최근 들어 전방사단의 기사 수요가 크게 증가하면서 그 규모나 명성이 많이 흐려지기는 했지만, 왕실근위대는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몇몇 초임기사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명예였다.

물론, 로빈이 평소 생각하던 왕실근위대는 지나와 오즈카에게나 어울리는 이름이었지, 자신이 해당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왜 그런가? 너무 갑작스러웠나?”


마누앙의 인위적인 웃음이 섞인 물음에도 로빈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뒤죽박죽되어가는 그의 머리를 정리해 준 것은 뒤에 서 있던 근위기사의 살기어린 영력이었다. 마치 대답하라고 칼로 쑤시는 듯한 무언의 협박에, 로빈은 떠밀리듯 겨우 입을 열었다.


“괴, 굉장히 황공합니다, 섭정각하.”


“그런가?”

마누앙이 얇게 웃었다.

“알겠다는 뜻으로 받겠네.”


마누앙은 근위대를 불러 무언가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아마도 명령서 또는 추천서일 것이라고 로빈은 예측할 수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빈은, 갑자기 무언가에 머리를 맞은 듯이 번쩍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에 용기를 얻어, 과감하게 마누앙을 바라본다.


“섭정각하?”


“뭔가?”


무심하게 던지는 것 같아 보이는 마누앙의 검은 시선에 로빈은 움찔하고 만다. 딱히 분노나 짜증을 담은 눈빛은 아니었지만, 그는 지금부터 자신이 하려는 말이 큰 실수가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말씀하신 제안은 기사로서 굉장히 영광스럽고 황공합니다. 하지만,”

로빈은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시선 처리에 애를 쓰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정말 실례되는 말씀인 줄은 알지만······, 그 제안을 거절하고자 합니다.”


“자네 미쳤나?!”


여기사가 낮은 고함을 질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녀의 시선을 제지하며, 마누앙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술을 연다.


“이유는?”


“왕실근위대는 초임기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직책임은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좀 더 전방에서 경험을 쌓고자 합니다.”


“기사 수련이라면 근위대장이 직접 해준다네. 경험이라면 이쪽이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 아닌가?”


“맞는 말씀이십니다만, 제가 말씀드리는 건 전장에서 현장지휘관으로서의 경험입니다. 저번 전투 때도 그랬고, 훈련 중에도 계속 전투가 아닌 지휘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제가 가지고 있는 기사로서의 능력이 근위대에 어울리는지도 의문이 듭-”


“내 안목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마누앙이 웃었다. 하지만 로빈은 그 웃음이 품고 있는 치명적인 독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닙니다, 섭정각하에 대한 의심이 아닙니다. 제 자신에 대한 의심일 뿐입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흐음.”

마누앙이 의자의 팔걸이에 오른손과 턱을 걸치고 낮은 신음을 흘린다.

그의 시커먼 눈은 마주하는 로빈의 눈을 간파하려 계속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로빈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누앙 곁에 서 있던 근위대가 계속해서 로빈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니, 로빈은 더욱 말끔하게 왕실근위대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만에 하나 자신이 그녀의 부사수로 배치되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앞날에 펼쳐질 악몽의 구렁텅이는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고달픈 일이 될 것이라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짧은 사색 후에, 여전히 로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마누앙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섭정이 무언가를 적던 종이를 찢어버리며 말을 이어 나간다.

“자네를 전방으로 배치하도록 하지. 되도록 소대장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현장 지휘를 익혀가도록 말이야.”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대신.”

불길하고 단호한 마누앙의 목소리. 로빈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다.

“자네의 신분은 파견된 왕실근위대로 하지.”


“각하!”

마누앙의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근위대 여기사였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몸짓으로 마누앙과 로빈의 사이를 가로막는다.

“초임기사에겐 과분한 혜택이십니다! 전례가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최근 들어서 근위대도 전방에 자주 파견 보내고 있지 않나? 관련 법규나 기사단 내규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


마누앙의 눈이 얼음처럼 차가워진다.


“단순히 전례가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내 선택을 가로막지는 말아줬으면 하네, 밀라.”


“요, 용서해주십시오.”


밀라는 결국 굽히고 말았다. 남은 것은 멍하니 앉아 있던 로빈 뿐이었다.


“자, 어떻게 생각하나?”


고민할 시간은 그다지 필요 없어 보였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아, 그, 받, 받들겠습니다.”


“좋아.”

마누앙은 가벼운 손놀림으로 새로운 종이에 무언가를 써내려간다. 그리고는 곧바로 도장을 찍은 뒤에, 밀라에게 그것을 넘겨주었다.

“이것을 근위대장과 기사단장에게 전해주게. 최대한 빨리 처리됐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밀라의 눈에는 아직도 불만과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마누앙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다시 서류철을 집어 들며 로빈과 밀라에게 관심을 끊는다.


“용무는 끝났네. 가도 되네.”


“넷!”

로빈과 밀라는 동시에 경례를 하고 집무실을 빠져나온다.

로빈은 문을 뒤로하자마자 이마를 감싸 쥔 채 신음을 흘리는 밀라의 눈치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하급자는 아무런 잘못을 한 것이 없더라도, 이유 없는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법.

때문에 입을 여는 로빈의 목소리엔 잔뜩 주저함이 묻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


“선배님이다. 호칭은 선배님으로 통일하도록.”


밀라의 목소리는 군인에 어울리는 저음이었지만 로빈은 그 속에서 피어난 짜증을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었다.


“옛, 밀라 선배님, 저는 이제 어떻게 하면-”


밀라가 고개를 들어 로빈을 노려보았다. 언짢음으로 선명하게 뒤틀린 그녀의 눈동자는 지금 보니 마누앙의 깊은 암흑보다 더욱 무서워 보였다.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줘야 하나? 자네 어린애야? 내가 돌봐줘야 해?”


“아, 아닙니다.”

‘아씨 그럼 어쩌라고······.’


로빈은 욕과 침을 삼키며 최대한 죄송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밀라의 화염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그를 노려보던 밀라는 다시금 지끈지끈한 이마를 감싸 쥐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6시까지 근위대 사무실로 와라. 훈련소에서 보급받은 모든 군용품은 반납해. 정복과 전투화만 가지고 와. 자넨 훈련소 퇴소식이 끝나는 대로 곧바로 근위대 소속이 되는 거야, 알았나?”


“네. 선배님.”


로빈의 대답은 한쪽 귀로 흘리며, 밀라는 잔뜩 화난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간다.

로빈은 억울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잠시 후 해답을 찾지 못한 그가 찾아간 것은 아직도 찻집에서 노닥거리고 있던 오즈카와 지나였다.


“어 왔어? 뭐래? 전방으로 뺑이 좀 치래?”


의자의 뒷발로만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지나가 로빈을 발견하고 반가운 목소리로 손을 흔든다. 하지만 로빈의 대답은, 지나는 물론 좀처럼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오즈카마저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 왕실근위대로 배치됐어.”


작가의말

추석 평안하게 보내고 계신지요

이제야 20만자를 넘겼네요.

언제나 감사드리며,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 지적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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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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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3) +16 14.09.26 2,864 69 16쪽
42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2) +18 14.09.25 3,032 73 14쪽
41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1) +20 14.09.24 2,442 63 21쪽
40 (막간) 구원 +18 14.09.23 2,469 59 10쪽
39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7) +10 14.09.23 2,258 63 21쪽
38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6) +11 14.09.22 2,655 93 20쪽
37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5) +17 14.09.21 2,540 81 19쪽
36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4) +14 14.09.20 2,619 73 21쪽
35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3) +11 14.09.19 2,643 84 25쪽
34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2) +23 14.09.18 2,692 96 19쪽
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4 84 19쪽
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4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8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30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8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2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9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2 87 22쪽
»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5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4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5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6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701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2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5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4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4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4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3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8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7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2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8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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