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205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4.08.23 12:26
조회
3,529
추천
102
글자
18쪽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DUMMY

“자아, 저게 바로 카나반 공화국의 수도, 회색도시 아르다르.”


바람도 머물 수밖에 없는 흐름의 안식처. 드넓은 ‘붉은 모래’의 시작이자 끝.

익숙지 않은 준마의 질주 위에서 혀를 몇 번이나 깨물었던가, 얼얼한 허벅지와 엉덩이, 쑤시는 허리. 그 모든 고통을 녹여버리는 광경이 시골 청년의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로빈의 검붉은 눈동자엔 경이감이 흘러넘친다.


“이야, 저렇게 큰 건물은 난생처음 봐······. 성벽보다 높이 솟아있네!”

광활함으로 이름 높은 가도의 그 넓은 폭으로도 도시의 장벽을 모두 담기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지평선의 끝에서 끝까지 이어져 있는 회색장벽은, 성벽이라는 느낌보다는 세상과 세상을 가르는 하나의 거대한 벽과도 같은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성벽 위로 보이는 회색 종탑과 빛바랜 지붕을 가진 건물들 또한 여태까지 로빈이 봐왔던 어떠한 인공물보다도 웅장한 모습이었다.

그들이 모여 이루어낸 한결같고 압도적인 정경은, 말발굽 소리보다도 강력하게 로빈의 심장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는다.

“어? 근데 성벽이 너무 낮은 거 아닌가?”


로빈이 드렌턴을 향해 말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처음 말 위에 엉덩이를 얹었을 땐 돌아보기는커녕 목숨줄처럼 고삐를 쥐고 말의 정수리만 바라보던 걸 생각해보면 눈에 띄는 발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런 로빈의 물음에, 드렌턴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건 외벽이야. 도시가 계속 성장하기 때문에 바로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유동성 구조물들을 연결해 놓은 거지. 이렇게 멀리서 보면 단단하게 연결된 성벽 같아도, 조립식이라 쉽게 분리, 조립할 수 있어. 뭐, 그렇다고 성벽의 기능이 부족한 건 절대 아니지만.”

마치 어린아이가 고향을 소개하는 듯한 자랑스러운 말투를 통해, 로빈은 도시가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뿌듯해하는 드렌턴의 기분을 읽을 수 있었다. 어지간히 유치한 아저씨다. 로빈이 작게 웃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드렌턴의 자랑은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진다.

“외성은 주로 군 관련 시설이나 공업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지. 궁궐과 행정기관들, 마법대학, 상업구역과 주거지는 모두 내성에 있어. 또 그 내성의 성벽과 궁궐로 말할 거 같으면, 카나반뿐만 아니라 에일로피아 반도 전체에서도 아름다움으론 손꼽히는 절경이야!”


그의 평소 성격을 생각해본다면 이 ‘칭찬’에 과장이 더해졌을 것이란 사실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로빈은 말을 재촉하여 도시를 향해 달려 나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드렌턴은 껄껄 웃으며 말을 몰아 그의 뒤를 따랐다.


처음 외벽의 풍경을 눈에 담은 지 한참이 지나서야 그들은 성문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바람이 흐르는 언덕에서 내려다보았던 조그마한 성문은 직접 그 앞에 서보니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웅장했다. 성벽이 너무 낮은 게 아니냐고 했던 질문이 무색하게도, 쉽게 분리, 조립할 수 있다던 성벽은 그야말로 잿빛의 산이었다.

저것들을 어떻게 분해해서 옮긴다는 것인지 로빈으로선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두께가 자신의 키보다도 두텁고, 높이는 목이 아플 정도로 올려다보아야 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의 성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거대한 존재감보다도 로빈을 흥분시킨 것은, 성문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차, 차량들이었다.

검문소를 따라 뱀처럼 줄지어 서있는 인파는 로빈이 생전 봐왔던 모든 사람을 합친 수보다도 많았다. 또한 마차와 이륜차, 사륜차를 비롯한 수많은 차량도 로빈에겐 태어나서 처음 보는 문명의 산물들이었다.

게다가 모여 있는 사람들의 옷차림- 단순한 가죽이나 면이 아닌, 저마다 화려한 염색과 문양이 수놓인 도시 사람들의 차림새는 생소하면서도 세련돼 보였다.

로빈은 말을 몰아 사람들이 줄지어 있는 곳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드렌턴이 그를 붙들었다. 말은 차량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결국 로빈은 드렌턴을 따라 차량 대기열로 줄을 옮겨야 했다. 그곳도 밀려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인파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줄의 길이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은 검문소 앞에 설 수 있었다.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점잖은 경비병의 점잖은 질문. 주위에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후줄근한 행색을 하고 있는 드렌턴과 로빈을 보고도 어떠한 표정도, 어떠한 태도도 취하지 않는다. 일개 병사이긴 하지만 과연 수도 방비의 최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자의 자격이란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태도였다.


“수색임무대상자 둘이다. 기사는 먼저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다.”


라며 계약서와 확인서를 내던지는 드렌턴을 로빈은 깜짝 놀라 바라보았다.

갑자기 웬 무례한 태도냐- 라고 추궁하려 했으나, 드렌턴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도 그 끝을 좇아보았다. 좀처럼 보기 힘든 아저씨의 굳은 표정이 향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검문소를 총괄하고 있는 위병초소.

반투명의 유리로 되어있는 그곳 안에서 한가롭게 두 발을 밖으로 내민 채 신문을 읽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카나반 공화국의 정규기사를 상징하는 남색 정복이었지만, 윗단추 두 개는 풀어헤치고서 하얀 가죽 허리띠까지 밑으로 늘어놓은 채, 아주 편하게 근무를 즐기는 중인 장교였다.

드렌턴과 로빈의 서류를 한참이나 살펴보던 병사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통과해도 좋다는 말과 함께 옆으로 비켜서 경례를 한다. 그 경례에 대해 근엄한 표정의 목례로 답한 후, 드렌턴은 천천히 말을 몰아 바리케이드를 향했다. 갑자기 변한 그의 분위기에 의아함을 지니고서 로빈도 따라나서려는데, 검문초소 앞에서 드렌턴이 말을 멈추는 바람에 그 또한 다시금 고삐를 당길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기사라는 것을 밝혔는데도 수도의 최전선을 담당하는 초소장으로서 아무런 경계도 취하지 않는 거냐!?”

그야말로 일갈.

영력이 담긴 목소리는 적의가 되어 로빈을 비롯한 검문소 주변 모든 인간들의 심장을 거세게 울린다.

왁자했던 주변이 일순간에 드렌턴의 메아리만을 남기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로빈은 놀란 말을 진정시키며 낙마를 겨우 면했지만, 정작 드렌턴이 타고 있던 말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 위압 때문에 몸이 굳어버린 듯했다.

물론 가장 놀란 건, 적의를 온몸으로 받은 검문초소의 기사. 그는 누워있다시피 했던 의자에서 ‘낙마’하고 말았고, 미처 사태 파악을 못 한 그의 혼란스러운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드렌턴은 두 번째 일갈을 터트린다.

“이런 기본적인 방비에도 소홀하다니, 네놈이 그러고도 카나반의 기사란 말이냐?! 너 같은 놈이 수도의 최전선을 담당하고 있다니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관등성명을 대라! 내가 직접 섭정에게 고할 것이다!”


“아, 아니, 저······.”


“관등성명을 대라고 하지 않았나!”


드렌턴의 마지막 호통은 첫 번째 일갈 때 놀라 울음을 터트린 아이들마저 눈물을 삼키고 경직시킬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의식할 틈도 없이, 초소장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나 간신히 경례를 올린다. 정복의 붉은색 옷깃은 이미 식은땀으로 젖은 상태였다.


“구, 국립기사 소위 하이만 자이에프입니다······!”


드렌턴은 그 어떤 목소리도 없이, 말 위에서 한참이나 장교를 노려보았다. 경례를 하고 있긴 하지만, 초소장은 그 거대한 위압감의 앞에서 감히 드렌턴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연신 시선을 둘 곳을 찾아 헤매는 것이 더욱 그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먹음직스러우면서도 혐오스러운 먹잇감을 노려보는 야수와 같은 표정으로, 드렌턴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서서히 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간이 멈추고 호흡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뒷모습이었기에 로빈은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것에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피비린내는 매일 가까워지는데 군기는 흐릿해져만 가는군!”

두터운 성문을 지나며 드렌턴이 거칠게 탁-, 침을 뱉는다. 이런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로빈은 평소의 호기심이나 그에 이어지는 질문 공세 따위는 감히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랬기에, 잠시 후 자신을 돌아보는 드렌턴의 표정이 평소의 인자하고 익살맞은 웃음으로 다시 채워진 것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었다.

“아, 미안, 놀랐냐? 내 성격상 저런 걸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 말이지. 하여간 초임기사들이 빠져가지고······.”


“아니, 도대체 아저씨 현역 때 뭐 했어? 아주 그냥 군기 잡는 게 익숙해 보이네?”


“크핫, 별 건 아니야. 그냥 수도에 조금 오래 있었을 뿐이다.”


드렌턴이 호쾌하게 웃었다. 로빈은 그런 그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았지만, 어물쩍 넘어가려는 듯이 보이진 않았다. 아마 수비대 쪽에서 일했었나보다- 하고 생각할 때쯤, 로빈은 그제야 자신이 도시에 들어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닫혔던 하늘이 열린 기분이었다.

거무스름한 돌로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와 인도를 따라 솟아있는 높은 건물들, 그리고 도시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공장들. 거기에 길가의 건물 층마다 즐비한 가게는 평생 노점상만 보아온 로빈에겐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거리는 인파와 차량으로 혼잡했다. 신호등과 표지판, 도로 가운데의 선로를 질주하는 전차. 이 모든 것이 생소한 로빈에게 도시의 첫인상은 혼란이자 질서였으며, 동시에 시야에 들어오는 하나하나가 그에겐 새로움이었다. 묘한 흥분으로 웃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로, 로빈은 성문 옆 마구간으로 향한 드렌턴을 신난 목소리로 불러 세운다.


“와, 아저씨! 거리가 모두 돌로 되어있어! 저렇게 큰 차는 처음 봐! 역시 도시는 다르네!”


“볼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은 곳이지.”

얇게 웃는 드렌턴은 이미 말에서 내려 마구간 담당의 병사에게 고삐를 넘겨주고 있었다.

병사는 검문소에서의 소란을 모두 봤는지 경직된 움직임으로 드렌턴을 대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그와 말을 주고받으면서 다가온 로빈에게도 과장된 목소리와 행동으로 경례를 올려버린다. 병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말에서 내리는 로빈의 몸을 어떻게 보조해야 자신의 성실함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물론, 뛰어내리다시피 한 로빈에게 도움은 전혀 필요 없었다.

“저건 전차라고 하는 순환전동차다. 도시 곳곳에 정류장이 있고, 돈을 주고 정기권을 끊어 타고 다니는 거야. 당장 면허나 말이 없는 너로선 자주 이용하게 될 테니까 노선은 미리 외워둬.”

드렌턴이 도로 중앙을 가로지르는 전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도시의 외벽과 마찬가지로 은색에 가까운 회색으로 겉면을 도색한 전차였다. 여러 전동차의 몸체를 이어 붙인 모양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흐느적댄다고 생각하며 로빈은 흥미롭게 전차를 관찰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저 전차에 올라타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로빈은 다시 설명을 이어가는 드렌턴에게 고개를 돌린다.

“성문으로 이어진 큰길을 따라 도심으로 들어가면 내성으로 갈 수 있어. 그리고 여기서 왼쪽 길로 쭉 가다 보면 골목 전에 ‘은벽의 낭만’이라는 여관이 있을 거다.”

그가 주머니를 털어 은화 몇 개를 로빈에게 건넨다.

“거기서 요기라도 좀 하고 있어라. 너무 돌아다니지는 말고. 난 계약서 확인하고 인가도 받을 겸, 누구 좀 만나고 오마.”


받은 동전을 손안에서 이리저리 살피던 로빈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드렌턴을 올려다본다.


“누구 만나러 가는데? 숨겨둔 애인?”


“옛 친구.”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오랜 친구지.”




***




“섭정각하. 어떤 분이 각하를 찾아뵙고자 오셨습니다.”


“누구라더냐?”


짜증 섞인 대답이었다. 아무리 일곱 번의 원정에서 살아 돌아온 역전의 병사라고는 해도, 이렇게 상대를 샅샅이 파헤치는 날카로운 눈빛과 나긋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를 대할 때면 언제나 위축될 수밖에 없다. 숨을 한 번 삼키고, 근위병은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옛날 친구분이시라고······.”


“됐다고 일러라.”


병사의 말을 끊으며, 노인은 습관적으로 희끗희끗한 수염을 어루만진다. 의도적으로 구긴 인상과 입가의 깊은 주름이 아니더라도 그는 충분히 차가운 인상이었기에, 노인의 의도를 읽은 근위병은 별다른 대꾸 없이 절도 있는 경례와 함께 회의실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회의실 중앙, 커다란 지도가 놓인 탁자를 중심으로 저마다 다른 문양의 옷을 입고, 다른 색의 휘장을 가슴에 달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카나반 공화국의 상징, 붉은 탕나무가 수 놓인 회색망토를 두른 노인의 풍채와 위용은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미안합니다. 계속하시죠.”


그가 낮은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허락과 함께 맞은편에 서 있던, 남색군복을 입은 대머리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가슴에 달린 수많은 휘장이 빛을 반사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옛. 그리고 어제 파이튼성 근처에서 전투가 있었습니다. 적 순찰대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여 토벌대를 편성했는데, 오히려 매복에 걸려든 모양입니다. 아군 전사자는 72명, 부상자는 240명이고 중대장과 예하 소대장 모두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잠시 노인의 눈치를 보았지만, 노인의 눈과 입에서 어떠한 미동도 읽지 못했기에 계속 말을 이었다.

“이로써 소나무연대 1대대 기사 전원이 전투불능이 됐습니다. 이르지만 다시 2대대와 임무 교대를 건의드립니다.”


“어중간하게 회복, 증원하고 투입해봤자 사상자만 늘어날 겁니다. 다른 연대는 적어도 넉 달은 버티는데, 소나무연대는 한 달도 못 가는군요. 원인이 뭡니까?”


노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질책이라기 보단 순수한 의문으로 들릴 수도 있는 어투. 그러나 그의 혀끝에 담긴 바늘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우둔한 이는 이 안에 없었다.


“이미 상당히 전투력을 소모한 소나무연대의 경계구역으로 적의 도발이 집중되고 있는 데다가, 이번엔 아군의 첩보까지 잘못되는 바람에 피해가 컸습니다. 그 지역은 슬슬 예비연대의 투입도 고려-”


“지금 책임을 정보작전부로 돌리시려는 겁니까?”

가장자리에 있던 여인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강하게 내리치며 소리를 지른다. 그녀의 얼굴엔 굴욕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충원되는 기사들의 자질이 떨어지니까 전투에서 밀리는 것 아닙니까? 저희 정보원들은 이상 없습니다.”


“애초에 2년 교육과정을 6개월로 줄여놓고 초임기사들의 실력을 운운하는 것은 양심이 없는 겁니다! 기사단에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니라 병력충원방식에 대해 책임을 물으셔야지요!”


이번엔 여인의 반대편에 있던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뒤이어 그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고, 그 비난에 대한 비난 이어지며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다.

소란스러운 와중, 말없이 탁자를 노려보고 있는 노인에게 처음 보고를 했던 대머리 남자가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방어선이 점점 얇아지고 있습니다. 이러다간 1년 안에 놈들이 작정하고 밀고 내려올 겁니다. 투입되면 바로 죽는다는 소문 때문에 기사의 충원은 점점 느려지고 있고, 국경 마을은 이미 피난 준비 중입니다. 섭정각하······.”

그가 목에 힘을 주었다.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노인은 침묵했다.

미간을 구기고 지도를 응시하고 있는 그에게 대머리 남자는 더 이상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노인이 누구보다도 지쳤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각기 다른 분야의 지휘관들이 더더욱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노인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임무 교대를 승인하는 명령서에 서명을 하고, 그대로 대머리 남자에게 건넨다. 굳은 표정으로 허리를 숙인 뒤, 지휘관은 문서를 품에 넣으며 서둘러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가 회의실 문을 열자, 아까의 그 근위병이 다시 들어오려던 참이었는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서, 섭정각하.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까 그 친구분이 꼭 좀 뵙고 싶-”


“됐다고 이르라 하지 않았나.”


노인이 소리를 지르거나 면박을 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전신에서 내뿜고 있는 조용한 분노와 짜증만으로도 근위병은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게, 그분이 자기가 붉은 나무의 씨앗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전해드리면 아실 것이라고······.”


순간, 섭정의 눈썹이 뒤틀린다. 그는 빨려들어 갈 듯 깊은 먹색의 눈으로 안경 너머 근위병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근위병은 섭정의 검푸른 입술에서 당장 이놈의 목을 치라는 명령이 터져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으리라 생각하며 숨을 삼켰다.

근위병은 몰랐던 것이다. 그것이 섭정의 ‘놀란’ 표정이라는 사실을.

애초에 ‘놀람’이라는 감정을 노인에게선 좀처럼 볼 수 없었으니까.

섭정은 근위병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소란스러운 허공을 향해 정중한 목소리를 내뱉는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근위병에게 다가와, 살얼음이 스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가 지금 어디에 있나?”


작가의말

나름(?) 본격적인 2막의 시작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4

  • 작성자
    Lv.22 렉쩜
    작성일
    14.09.15 16:11
    No. 1

    뭔가 있는 아저씨다 싶었는데 역시나 한가닥 하던 인물이었네요. 수도와 지방의 높은 기술차이, 전쟁중이지만 남탓하기 바쁜 사령부, 초반에 나왔던 논문이 맞는말일수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15 17:52
    No. 2

    그걸 폄하했던 고도도 어쩔 수 없는 일개 대학생일 뿐이었으니깐요 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4 주정
    작성일
    14.09.24 17:17
    No. 3

    의자에서 떨어진 걸 낙마라고 하진 않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24 17:20
    No. 4

    주정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물론 의자에서 떨어지는걸 낙마라고 하진 않지만,
    로빈이 낙마할 뻔했지만 그는 떨어졌다- 라는 사실에 대한 말장난이었...습니다..ㅜ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4 주정
    작성일
    14.09.26 17:05
    No. 5

    독자 입장에서는 말장난이라고 느껴지지가 않아서요. -_-;;
    작가님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가 힘들군요. 하핫~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26 17:40
    No. 6

    크흑 제 미숙함이죠.... 정진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3 패스트
    작성일
    14.11.19 10:00
    No. 7

    음, 좀 구미가 당기네요. 오늘도 주행 시작!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1.19 11:43
    No. 8

    오늘도 잘부탁드립니다! 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4 jjgoitrw..
    작성일
    15.07.30 20:34
    No. 9

    추천 받아 들어 찾아 보고 있는데,너무 지루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7.31 01:01
    No. 10

    jjgoitrwe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루하셨다니 죄송합니다 ㅠ
    보다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4 속공
    작성일
    15.08.11 01:22
    No. 11

    음...주인공이 있던 마을밖에 나오지 않아서 그런가 수도와의, 시대상의 괴리감이 커보이네요. 저정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기사가 필요한걸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8.12 21:03
    No. 12

    속공님 관심있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몽중정원
    작성일
    16.04.07 04:27
    No. 13

    제 개인적으론 기술력 수준이 너무 짬뽕된 것 같아서 이상하네요. 머리론 판타지니 뭐 어떻냐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계관 설명이 그 파격성이 따라가질 못해서... 전차 정도 만들 기술력이 있으면 머지 않아 항공기 폭격 같은 것도 가능하게 되서 전선 유지나 안전한 후방 같은 건 말로만 존재하는 단어가 되진 않을런지? 애초에 기사가 어느 정도의 전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차가 있을 정도면 화약무기는 아니더라도 총 수준의 다루기 쉽고 살상력이 뛰어난 무기는 있을 것 같아서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4.08 19:06
    No. 14

    몽중정원님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따로 세계관을 확립해드리지 못해 공감형성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ㅠ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변수의 굴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3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3) +16 14.09.26 2,864 69 16쪽
42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2) +18 14.09.25 3,033 73 14쪽
41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1) +20 14.09.24 2,442 63 21쪽
40 (막간) 구원 +18 14.09.23 2,469 59 10쪽
39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7) +10 14.09.23 2,258 63 21쪽
38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6) +11 14.09.22 2,655 93 20쪽
37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5) +17 14.09.21 2,540 81 19쪽
36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4) +14 14.09.20 2,619 73 21쪽
35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3) +11 14.09.19 2,643 84 25쪽
34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2) +23 14.09.18 2,693 96 19쪽
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4 84 19쪽
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4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9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30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8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2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9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2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5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4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5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6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701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3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5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4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4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4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30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3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8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7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2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8 248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