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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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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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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4.09.04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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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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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글자
20쪽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DUMMY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맑고 차가운 숲내음과, 자신이 디딘 곳의 나뭇잎이 부서지는 소리 외에 로빈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자신의 숨소리뿐.

귓가를 때리는 바람 소리마저 위화감이 든다. 그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어색한 소리였다.

무거운 어둠 속을 가르는 자신의 속도가 여태까지 경험해왔던 어떤 때보다도 빠르고 날카로웠기 때문이었지만 그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 살짝 비추는 달빛과 함께 그의 머릿속에 들어온 생각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지금처럼 있는 힘껏 내달려보지 않았던 평화에 대한 의문이자 후회였다.


“!”


감상은 짧았고 현실의 불빛은 가까워진다.

검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그림자를 받아들였고, 이제 로빈은 자신의 발과 그 발이 닿고 있는, 그리고 닿아야 할 곳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화살이 날아온 어둠 속을 경계하고 있던 브린타이나 병사들의 당황한 표정을 눈에 담는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영력을 검과 검을 쥔 손에 집중하는 로빈.

브린타이나군 특유의 백색군복을 바라보며, 그는 깊게 숨을 들이 삼키고 자신의 검이 그릴 곡선의 궤도를 예상해보았다.

그리고 지면을 깊게 박차고 올랐던 그의 오른발이 다시 지면을 때렸을 때, 그 시나리오는 완성되었다.


로빈은 맞은편에서 어둠을 찢고 나타난 익숙한 안광을 눈치챈다. 지금 자신의 얼굴도 저 태양 같은 눈빛을 지닌 동기생과 같을까.

실로 무심하게, 숨조차 쉬지 않고, 먹잇감을 노려보고 있는-,

저 짐승보다도 야성적인 냉철함.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로빈은 그런 의문을 담아 첫 번째 희생양의 목덜미를 향해 그의 낡은 검을 내리꽂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병사. 그 입에서 목소리 대신 걸쭉한 분수가 뿜어져 나왔고, 로빈의 검은 그가 계획한 시나리오대로 훌륭하게 춤을 추었다.

그는 드렌턴의 충고를 잊지 않았다. 로빈의 검붉은 시선은 이미 다음 표정의 탐색을 마친 뒤였다.

그 살벌한 춤사위를 알아챈 병사가 겁에 질린 얼굴로 로빈의 공격을 막기 위해 칼을 들었지만, 로빈이 급하게 편곡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검이 병사의 의지와 어둠을 동시에 찢으며 목표의 심장으로 날아든다. 병사는 그 첫 번째 선율을 훌륭하게 막았지만, 로빈의 검은 병사의 경험과 그의 육신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묵직하고 치명적이었다. 병사에겐 자신의 칼과 그것을 쥔 자신의 양손이 찰나의 섬광과 함께 밖으로 튕겨 나가는 것을 막아낼 어떠한 방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뒤이어 빠르게 다시 날아든 카나반 초임 기사의 검이 병사의 복부와 목을 연달아 베어냈고, 병사는 평생을 머금어 놓았던 피를 한꺼번에 내뿜어야 했다.


“우와앗-!”


로빈의 눈이 비명을 찾아 번뜩인다. 하지만 비명의 주인공이었던 반대편 병사의 입에선 이제 혀 대신, 뾰족한 에페검이 그를 대신하여 돌출되어 있었다. 천천히 앞으로 꼬꾸라지는 병사의 뒤로, 검신에 흐르는 피를 털어내는 지나의 모습이 나타난다.


“느리구나, 로빈.”


그녀의 동선을 따라 네 구의 시체가 서로 경쟁하듯 주변을 피로 적시고 있는 것을 로빈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검을 집어넣으며 웃었다.


“네 쪽에 많았을 뿐이야.”


“허세 부리기는, 네 다리나 좀 어떻게 해봐. 애들 오기 전에.”


“뭐?”

로빈은 그제야 자신의 양다리가 비 맞은 아기고양이마냥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무릎을 부여잡고는 난처한 표정으로 지나를 올려다본다. 부끄럽다기보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다음’ 얼굴을 베는 것에 주저함은 없었다. 지금 다리를 흔들고 있는 것은 어설픈 감정 따위가 아니었다.

“뭐야, 이거? 왜 이러지?”


“아직 네 몸의 근육이 영력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단련되지 못해서 그래. 좀 있으면 손목도 무지 쑤셔올 거야.”


지나가 검을 들어 병사들에게 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낸다.


“넌 괜찮아 보이네?”


“난 그런 경련은 여덟 살 때 졸업했단다, 꼬마야.”


“알만하다.”


바늘 같은 신음을 흘리는 로빈. 잠시 그런 로빈을 내려다보던 지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의 곁에 앉는다. 순간 자신의 곁으로 풍겨오는 비릿한 냄새와 함께, 로빈은 그녀의 정복에서 짙은 남색에 가려져 있던 혈흔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쓰지 않는다고 해서 모았던 영력을 바로 놓아버리면 안 돼. 그러면 지금처럼 몸에 피로가 한꺼번에 누적되거든. 아까 달릴 때처럼 영력을 다리에 유지해. 그리고선 천천히, 긴 시간을 들이면서, 집중해서 사알살 푸는 거야. 알겠냐?”


“말은 쉽네. 난 아직 그 정도로 영력을 운용하지는 못하겠는데.”


로빈이 허탈하게 웃었다.


“배움은 고통의 연속이란다.”


지나는 빨갛게 웃으며 주변을 비추던 횃불을 땅에 박는다. 다시금 어둠이 그들을 삼켰고, 그 덕분에 로빈은 병사들이 다가올 때까지도 아직 미세한 떨림이 이어지던 자신의 다리를 겨우 감출 수 있었다.


“주목. 대답하지 말고 듣기만 해. 적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건 목표인 파이튼 성이 가까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때문에 지금부터는 약간 속도를 붙여서 이동할 거야. 남쪽 성문이 보이면 별다른 명령은 하지 않을 테니 분대별로 쪼개져서 대열을 정비한다. 성문이 닫혀있을 경우엔 불을 놔서 시선을 끈 다음 동문으로 우회할 거다. 전투에 돌입하면 개인화기를 써도 좋아. 가자.”


말을 마치고 돌아선 지나를 선두로, 행군은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빠른 속도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그녀의 명령대로 대열은 이동과 함께 서서히 넓게 퍼져서, 얼마 지나지 않아 환한 빛과 함께 작은 성문이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땐 이미 돌입대형이 갖춰져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정보와는 다르게 성벽과 성문의 상태는 양호해 보였다. 이것이 그들에게 이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지나의 선택에 달려있었다.

그녀는 활짝 열린 성문을 확인하고서는 고민 없이, 곧바로 손짓을 통해 돌격명령을 내렸다.

성문 밖에서 순찰 중이던 브린타이나 병사는 어둠뿐이었던 숲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한 무리의 군세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망루에 있는 동료에게 경고하는 것도 잊은 채 황급히 달아났지만 이내 지나의 에페에 목이 꿰뚫리고 만다.

망루에 기대 졸다가, 갑자기 들려온 고함에 놀라며 일어난 병사가 상황을 깨닫고 경보를 울린 것은, 이미 남색 군복의 병사 몇몇이 성내로 들이닥친 후였다.

전선으로의 보급대가 이제 막 떠나려던 참이었는지 보급트럭 몇대가 성문 바로 안에서 대기 중이었다. 성문이 열려있던 게 이들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로빈은 얇게 웃는 것으로 뜻밖의 행운에 감사하며, 분대원들과 함께 성벽 위를 내달린다. 그나마 방비를 갖추고 있던 망루 쪽의 적병들을 먼저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성내에 주둔하고 있던 대부분의 병사가 부상으로 후송되어 온 부상병이거나 보급부대였고, 그나마 온전한 수비군은 장비도 채 갖추지 못하고 천막에서 튀어나오다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다행히 적 기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포로들을 성 밖으로 내쫓아! 이곳이 공격당했다는 사실을 알리게 해야 한다!”


지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부터 퍼져나간다. 그녀의 명령대로, 공화국의 병사들은 사로잡은 브린타이나 병사들을 성 밖으로 풀어주었고, 그와 동시에 성벽을 장악한 로빈의 분대원들이 빠르게 성문을 걸어 잠근다.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기와 몸 곳곳에 피를 묻힌 카나반의 병사들이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성내 광장으로 모여든다. 지나 또한, 차마 털거나 지울 수 없는 혈흔이 남은 제복을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잘했어. 예상보다 수비군이 적어서 쉽게 끝났다. 하지만 이 파이튼 성 자체가 보급로의 한가운데다 보니까 적들은 곧바로 반격에 나설 거야. 풀어줬던 놈들이 우리의 규모를 자세하게 알려주면 더더욱 빨리 오겠지.”

지나가 그녀의 검을 광장 한가운데 꽂으며 말을 잇는다.

“우리 대대의 목표는 승리가 아닌 버티기다. 하지만 본래 천 명이 주둔할 수 있는 이 성을 150명도 안 되는 이 인원으로 수비해야 해. 쳐들어올 적들의 규모도, 양동을 펼치기로 되어있는 아군의 성공 가능성도, 지금은 아무것도 몰라. 자, 계급, 지위와 상관없이 괜찮은 생각이 있다면 자유롭게 말해봐.”

실질적인 지휘관이자 이곳에서 유일한 귀족 출신인 그녀가 일반병사들에게 의견을 구한다-.

이는 수동적 복종에 익숙해져 있던 병사들에겐 꽤나 파격적인 일이었다. 성벽의 수색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귀환하던 로빈은 이 말을 듣고 참으로 그녀답다고 생각하면서도, 힐끗 병사들의 눈치를 살펴본다. 혹시나 이런 지나의 태도를 그녀의 무능으로 오인하여 이해하는 자들이 있을까 우려됐던 것이다.

짧은 전투였지만,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병사들의 숨소리는 광장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할 정도로 거칠었다. 그중에 손을 들어 의견을 피력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같은 심정으로 지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던 지나가, 붉은 얼룩으로 곳곳이 물든 금발을 거칠게 어루만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파이튼의 진입로는 우리가 들어온 남문, 북동문, 서문, 이렇게 세 곳이야. 우리가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서는 적들을 격퇴한다는 생각보다는 최대한 지루하게 전투를 끌어갈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세 곳을 모두 감당하기엔 병력이 충분하지 않지. 때문에 우린 역으로 적들의 공격을 한곳으로 집중시킬 무언가가 필요해. 아직도 좋은 생각 없나?”


또다시 침묵.

지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바닥에 꽂았던 검을 뽑았다.

별다른 방도가 없으니 그저 죽을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라고, 병사들은 그 한숨의 의중을 읽고 있었다.

그건 모두가 처음 주둔지를 나올 때부터 했던 생각이기도 했으니까.

그때,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지나는 그들의 시선이 점차 한곳으로 모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 시선의 끝엔 조심스럽게 손을 든 채 지휘관을 바라보고 있는 로빈의 검붉은 눈동자가 있었다.


“그게 끝입니까?”


“이게 끝이야.”


“······그렇다면 소위 로빈슨 듀켓, 제안을 하나 하겠으니 잠시 독대를.”

지나의 허락에 두 기사는 아무도 없는 망루 위에서 짧은 대화를 갖는다. 그리고 그 대화의 끝에서, 지나는 미묘한 표정으로 이마를 감싼다. 로빈의 제안은 역시나 로빈다운, 꽤나 많은 의미로 그녀의 기대에 빗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왜, 적의 공격을 집중시켜야 한다며, 이거보다 더 좋은 생각 있어?”


로빈의 어투는 대담했지만, 평소보단 다소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로서는 지나의 이런 무거운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빈의 되물음에 지나는 특별한 반응 없이 자신의 혀만 잘근잘근 씹는다. 밤중에도 어김없이 빛나는 그 특유의 샛노란 눈을, 눈앞의 동기생에게 고정한 채로.


로빈은 그 시선에서, 짧은 감정을 읽고 말았다.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 로빈은 자신도 놀랄 만큼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거부감이 들지 않을 만큼의 동작으로 자신의 손을 지나의 앞으로 가져간다. 그가 잡아서 끈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멱살이었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로빈이 굳은 얼굴로 내뱉은 말이었다.


“응? 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여전히 빛나고 있는 지나의 눈동자.


“이제 훈련받은 지 두 달도 안 된,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들한테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던져주고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걸 왜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 있어야 하는 건데? 그리고 넌 왜 이걸 당연하다는 듯이 납득하고 있는 건데?”


로빈의 낮은 목소리에, 지나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초짜라니, 나는-”


“넌 초짜 맞아. 물론 나도 초짜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너 같은 초짜들은 이런 식으로 내던져져서는 안 되는 거야.”

그는 손을 놓고, 성 밖을 향해 몸을 기대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거’하고는 거리가 먼 시골뜨기 고물상일 뿐이었어. 근데 지금은 죽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에 자원한 공화국의 기사가 되었지.

난 오늘 처음으로 사람을 베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왜냐면 내가 자원한 거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거였으니까. 여기서 한낱 공화국의 소모품으로 죽는다 해도 문제 될 일은 없겠지. 하지만 넌?”로빈은 지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넌 일생을 검에 걸었잖아. 나같이 같잖은 호기심 때문에 이런 곳에 온 것이 아니잖아. 넌 언젠가 이것보다는 큰 전장에, 이것보다는 큰 깃발을 가지고 서 있어야 한다고. 내 말 틀려?”

지나는 로빈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기보다는, 이토록 무언가에 열을 내는 그를 본 적이 없었기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빈은 그녀가 쓸데없는 사고를 하도록 방치하지 않는다.

“상황이 급박하다니 생도의 차출을 이해는 하겠어. 하지만, 적어도 너 정도는, 너 정도의 미래가 있는 기사들은 어떻게 해서든 보호해줘야 하는 거 아냐? 그냥 무작정 여기서 버티라고? 지휘관이 일반병사에게 의견을 물어야 할 정도로 특별한 방도도 없이? 난 그게 답답하고, 그걸 묵묵하니 받아들인 너한테 화가 난다.”


로빈은 깊은 한숨을 쉬며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지나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로빈, 타고난 영력의 크기나 가문의 이름값은, 위대한 기사가 되는 데에 생각보다 도움이 되지 않아. 내가 처음 검을 잡았을 때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지.

‘위대한 기사를 만들기 위해선 다른 위대한 기사를 수없이 죽여야 하고, 그렇게 위대해진 기사보다 더욱 위대한 것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기사’라고.

난 내가 죽을 장소를 따로 정해놓지 않았어. 물론 그게 이곳이 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처음부터 내 검이 미칠 수 있었던 범위가 그냥 여기까지였을 뿐이라고-, 그렇게 봐야 하는 거야. 그거에 네가 억울해할 필요는 없어.”


“······.”


로빈은 자신이 괜한 투정을 부렸음을 깨닫고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이미 네 살 때부터 그릇을 평가받아왔다.

자신을 향한 기대와 그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대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결국 그녀 자신인 것이다.

어쩌면, 개죽음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억울한 것은 자신 쪽이었을까.

사고의 흐름에 거기까지 미치자, 로빈은 문득 드렌턴이 자신에게 했던 ‘만류’를 떠올린다. 그 걱정 많은 아저씨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로빈의 머리를 스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결국 네 계획대로 할 수밖에 없겠어. 다만,”

지나가 웃었다.

“나도 너랑 같이 하겠어.”


로빈은 그녀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나름 진지하게 접근했는데 반응은 역시 이 모양이다.


“너, 여태까지 내가 한 말을 뭘로 듣고-”


“쉿.”


지나와 로빈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성벽 아래 숲속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 어둠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지나의 태양 같은 안광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로빈이 작게 속삭인다.


“적이야?”


“몰라, 천천히 다가온다.”


로빈은 조심스럽게 내성 쪽으로 다가가, 아래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낸다. 그에 병사들은 재빠르게 장비를 챙기고, 성벽 위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다시 곁으로 돌아온 로빈에게, 지나가 의아한 듯이 빨간 입술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응이 너무 빨라. 설마 근처에 주둔 중이었던 부대가 있었나? 그러면 큰일인데.”


그녀의 말대로, 만약 근처에 성을 다시 제압할 수 있을 수준의 적 부대가 남아있었다면 양동작전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최악의 예상이 현실이 된다면 지휘관으로서의 해야 할 마땅한 판단은 신속한 작전 취소와 후퇴, 또는 기약 없는 ‘버티기’. 그러나 대대에 전투마법사가 없기 때문에 다른 아군과 연락을 취할 어떠한 수단도 없다.

적어도 2대대 전체가 시간을 버는 사이, 한 명이라도 빠져나가 1,3대대에 작전이 실패했다고 알려주기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3개의 대대가 전부 패퇴하는 상황만큼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왔다.”


로빈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병사들은 저마다 숲을 향해 활과 총을 겨누었다. 샛노란 눈을 빛내던 지나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하지만,

잠시 후 숲속에서 나타난 무리는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무엇보다도, 백색 군복이 아닌 남색 군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아뮤르 지나 소대장님을 찾고 있습니다. 소나무연대의 후발대입니다.”


남색 무리의 제일 앞에 있던 여인이 마법사 후드를 벗으며 소리친다. 그에 지나와 로빈은 서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마주 보고는, 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대해 어찌할 바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어,어,어, 뭐야? 후발대? 그런 거 못 들었는데, 뭐지? 적의 첩자인가? 뭐야 뭐지? 쏴야 하나? 응?”


“야야, 치, 침착해. 널 찾잖아. 오늘 부임한 일개 소대장 따위를 적들이 어떻게 알겠어?”


“일개? 따위? 너 뒤지고 싶냐? 이 몸은-”


그들의 말다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대답을 기다리다 못한 마법사가 다시금 망루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암구호 물어보세요. 그러면 되잖습니까.”


“아 맞다! 암구호!”

지나는 잠시 사고가 멈춘 듯, 허공을 바라보다가,

“야, 로빈. 오늘 암구호 뭐냐······?”

라고 속삭였다. 이 말엔 로빈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던 다른 병사들조차 고개를 저으며 긴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다락에 소음. 이딴-”


이딴 걸 지휘관이랍시고- 라고 불만을 털어놓으려던 로빈의 입을 틀어막고, 지나가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다락!”


“소음. 이제 열어주시겠습니까.”


“성문 열어!”


명령과 동시에, 지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내리듯 계단 아래를 향한다. 성을 들어서는 무리는 대략 50여 명쯤 되는 병력이었다. 그중엔 선두에 있던 여자를 비롯하여 다섯 명의 전투마법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나무연대 예비대 소속 전투마법사 아센 하파라고 합니다. 보충인원의 합류가 늦어 후발대로 2대대를 지원하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만, 성은 이미 되찾으신 모양이군요.”


얇은 눈매와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이 인상적인 마법사였다. 지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는 얼굴로 그들을 지휘관 천막으로 안내했다.

로빈은 그 광경을 흐뭇하게 망루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모든 가능성이 뒤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자신들이 여기서 살아남을 확률이 늘어났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후발대가 선발대 사이로 섞여 들어와 보급품 위주의 군장을 풀기 시작하면서, 병사들 사이로 침체했던 분위기가 다소 살아나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들을 찬찬히 훑어보던 중, 로빈은 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자신이 봐서는 안 되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말이 되질 않았기 때문에 로빈은 처음엔 잘못 본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결국 시선을 놓지 못하고, 미간을 구긴 채 그 얼굴을 재차 확인하고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빼액 소리를 내지르고 만다.


“벤?!”


작가의말

언제나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 지적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1

  • 작성자
    Lv.24 주정
    작성일
    14.09.26 20:35
    No. 1

    생존 확률이 늘어났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26 20:38
    No. 2

    주정님 계속해서 감사드립니다 ^^;
    든든한 지원군입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8 나카브
    작성일
    14.10.31 16:10
    No. 3

    예비군 훈련장에서 불알친구를 우연히 만났을 때와 같은 심정일지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0.31 18:32
    No. 4

    저같은 경우는 신검받을 때 우연히 불알친구를 만났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3 패스트
    작성일
    14.11.19 16:49
    No. 5

    트력 > 트럭
    정독하고 있답니다. 하하.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1.19 16:52
    No. 6

    오오 감사합니다! 이런 잘 안보이는 오타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0 에크나트
    작성일
    16.02.13 00:18
    No. 7

    주인공이 무슨능력을 가지고있는지는 모르지만... 뭐든하겠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2.13 19:43
    No. 8

    에크나트님 계속해서 감사합니다 :D
    뭘 할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몽중정원
    작성일
    16.04.19 06:06
    No. 9

    병사들이 몸에 걸친 ...(중략)... 백색의 중갑옷으 바라보며

    - 이 부분은 적군 병사들의 갑옷을 얘기하는 것 같은데 이거 적군한테 바보 보정을 너무 심하게 부여하는 것 같네요. 아군은 야간 작전을 위해 금속 갑옷을 벗고 무기엔 검칠을 했는데 적군은 야간 경계를 서면서도 자신의 눈에 띄는 백색 갑옷에 아무 처리를 안 한다고요? 검칠한 상태로 둔다거나 매일밤 따로 검칠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갑옷 위에 망토나 천이라도 둘르도록 하면 눈에 덜 띨 텐데 그런 것 하나 없다는 거잖아요.
    이 초소에서 경계를 하고 있는 병사들이 성벽에서 경계를 하는 병사들이었다면 여건의 차이로 좀 말이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어두운 숲 속에서 야간 경계하는 모습으론 부적절한 상황이어서 너무 어이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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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4.19 13:28
    No. 10

    몽중정원님 계속해서 감사드립니다!
    묘사가 부족한 탓에 혼란을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합리성을 갖추도록 퇴고시에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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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57 가로괭이
    작성일
    16.08.29 15:56
    No.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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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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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3) +16 14.09.26 2,864 69 16쪽
42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2) +18 14.09.25 3,032 73 14쪽
41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1) +20 14.09.24 2,442 63 21쪽
40 (막간) 구원 +18 14.09.23 2,469 59 10쪽
39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7) +10 14.09.23 2,258 63 21쪽
38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6) +11 14.09.22 2,655 93 20쪽
37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5) +17 14.09.21 2,540 81 19쪽
36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4) +14 14.09.20 2,619 73 21쪽
35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3) +11 14.09.19 2,643 84 25쪽
34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2) +23 14.09.18 2,692 96 19쪽
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4 84 19쪽
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4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9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30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8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2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9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2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5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4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5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6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701 87 18쪽
»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3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5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4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4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4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3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8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7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2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8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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