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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045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4.08.24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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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8
추천
102
글자
21쪽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DUMMY

“핫, 마낭! 18년만인가? 너도 폭삭 늙었구만, 그래.”


듣는 이까지 들뜨게 만드는 걸걸하고 호탕한 목소리. 무법자를 연상시킬 정도로 덥수룩한 가시수염에 후줄근한 셔츠, 거기에 방자한 태도까지 더한 드렌턴의 존재감은 섭정의 집무실이란 공간 자체를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의 막사처럼 뒤집어 놓고 있었다.


“······마낭이 아니라 마누앙이라고 수천 번은 말했던 것 같은데, 루디.”


카나반 왕국의 섭정, 붉은 탕나무의 저주받은 권위를 대신 짊어진 귀족대표 마누앙 니바르토.

그는 자신을 부르는 드렌턴의 호칭에 대해 오래된 습관처럼 반사적으로 대답하면서도, 눈앞의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짙게 바라본다.


“18년 동안 나라를 거하게 말아 드셨어 그래? 카핫!”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소파에 반쯤 누워있는 드렌턴은 왼손의 와인 잔을 찰랑거리며 조롱을 날린다. 감정을 겉으로는 좀처럼 내보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섭정, 마누앙이었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리는 표정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맹세를 저버리고 도망친 놈이 말은 잘하는군. 그러고도 왕실근위대라고 할 수 있나?”


물론 어투 자체에 동요는 없었으나 명백한 적의가 담긴 반격이었다.


“맹세?”

드렌턴은 와인과 조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받아들인 피의 맹세는 왕을 향한 것이지 섭정 따위에게 한 게 아니야. 선왕께서 암살당하신 그 시점부터 이 국가에 나의 피를 바칠 곳은 없었어.”


“암살이라니, ‘처형’을 잘못 말한 거 아닌가? 아니면 아직도 그 ‘집행’을 ‘암살’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건가? 역시 넌 변한 게 아무것도 없군. 여전히 그런 허무맹랑한 음모론을 맹신하는 것으로 네 근위대로서의 실패를 정당화하다니, 한심하구나.”


날 선 먹색 시선에 그에 못지않게 날카로운 혀. 마누앙은 천천히, 드렌턴의 우락부락한 두 눈을 끝까지 응시하면서 서류로 뒤덮인 책상으로 향한다. 드렌턴은 그가 앉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잔을 들어, 숨도 쉬지 않고 순식간에 비워버린다.


“하! 집행? 숙청이겠지. 선왕께서 승하하신 같은 날에 기다렸다는 듯이 제1, 2 왕위계승자였던 태자님과 공주님께서 쓰러지시고, 둘째 왕자님마저 실종된 것이 우연이라고 믿는 놈이 있다면 내 앞으로 좀 데려와 줘. 뇌를 꿈속에서 끄집어내 줄 테니까. 갓난아기였던 막내왕자님까지 도륙당한 그 참상이, 단순히 빛을 잃은 왕 하나만을 처단하기 위한 정의로운 집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냐?”

마누앙의 입에서 비웃음을 지우기 위해 드렌턴은 멈추지 않는다.

“곧바로 너를 섭정으로 내세워 의회를 장악한 귀족파의 유연한 움직임도 전부 갑작스러운 우연이었겠지? 너희들의 애도하는 방법은 참으로 독특하더군. 신나게 욕할 땐 언제고 왕좌에 앉아 왕을 애도하다니.”

분명한 적의를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거한의 은퇴기사. 영력을 감출 생각이 없었던 그를 제지하기 위해 복도에서 대기하던 두 명의 근위기사가 검을 쥔 채 들이닥친다.

하지만 드렌턴은 그 적의를 와인에 대신 담아 마누앙 앞에 있던 잔에 채워주었을 뿐이었다. 속삭이듯 작아진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정면으로 맞이하고 있는 입장에선 여전히 확실한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도,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야 마낭. 수색임무를 가장해 네놈들이 놓친 왕의 씨앗을 색출해 뿌리 뽑겠다는 그 의중을 내가 모를 것 같나? 18년이야, 18년. 왕좌가 비어있는 채로는 이 혼란을 잠재울 수 없어. 그건 아직까지도 왕당파귀족의 지지를 못 받고 있는 네가 제일 잘 알 테지?”


마누앙은 침묵을 지킨 채 향이 느껴지지 않는 와인으로 입술을 축인다. 눈앞에 앉아 있는 후줄근한 사내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었다. 근위기사들을 손짓으로 내보내고, 육중한 금빛 도금의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검푸른 입술이 열린다.


“붉은 나무의 씨앗······. 그 씨앗이 아직 남아있긴 했던가?


“그 독기서린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살아만 계셨다면 왕세자의 이름으로 폐하의 곁에 서 있었을 분이다!”

드렌턴의 언성이 높아진다.

“네가 충성을 바쳤어야 할, 마땅히 18년 전에 왕좌에 앉으셔야 했던 분이란 말이다! 너희 뱀 같은 반역자 놈들만 아니었다면 말이야!”

드렌턴이 목 아래까지 차오른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육중한 몸을 뒤로 물렀지만, 늘어진 옷과 꾀죄죄한 수염 아래로 감춰진 그의 단단함은 마누앙에게 그가 어느 때보다도 번거로운 존재가 되어 돌아왔음을 알려주는 경고와도 같았다.

“잘 생각해라 마낭. 네가 진정으로 충성을 바쳐야 했던 상대를 말이야. 난 네게 기회를 주는 거다.”


마누앙은 옛 친구를 차가운 눈으로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드렌턴 또한 불타는 눈으로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서리 같은 정적은 드렌턴이 꾸깃꾸깃한 봉투 두 개를 마누앙의 앞에 던져두고 뒤돌아 나갈 때까지 지속되었다.


“옛 친구로서 부탁 하나 하지. 내 보직을 기사단 훈련교관으로 배치해 주겠나?”

그리고 드렌턴은 방을 빠져나가며 마지막으로, 영력이 실린 목소리를 내뱉는다.

“너희를 위해서 검을 들기는 싫으니까.”


드렌턴이 사라지고 나서도 마누앙은 한동안 입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옛 친구가 따라준 와인을 비우고 나서, 그는 천천히 봉투를 찢고 내용물을 굳은 표정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브린.”


“예.”


마누앙의 부름에,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그림자처럼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수색임무에 대해 조사해서 보고해라.”


“예.”


그리고 다시 섭정의 집무실은 적막에 휩싸인다.

긴 한숨을 쉬며 안경을 벗어 내려놓는 마누앙의 손끝엔 약간의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얼굴을 휩쓰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깊은 눈의 어둠은, 결코 빛을 잃지 않는다.


“남서문 검문초소장 소위 하이만 자이에프······?”


뒤이어 두 번째 봉투를 열어본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낯선 이름을 중얼거려야 했다.





***





“비가 안 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도의 불평이었다.

길이 다소 험하기는 했어도, 로빈과 벤의 고향인 ‘아티카’ 주변의 오데라 숲이 여행하기는 더 편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은 반대편의 오데라 숲과는 달리 한여름의 뜨거운 햇빛을 차단해주지 못하는 무능한 숲이라는 게 원인이었다. 게다가 불화살처럼 꽂히는 햇볕이 숲의 습기까지 모조리 증발시키고 있는 바람에 고도는 마치 증기탕 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지금 자신이 보는 뒤틀린 공간이 아지랑이 때문인지, 끈이 풀려가는 자신의 정신 탓인지, 그녀는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시원하게 비라도 쏟아져 주면 좋겠지만, 그럼 여벌의 옷도 다 젖게 된다.

힘든 것과 눅눅한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녀는 다시금 한숨과 함께 욕설을 중얼거린다.


“야, 정신 차려.”


몽롱한 정신에 들려오는 목소리마저 몽롱하다. 하지만 곧이어 맑은 기운이 정수리에서부터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말 그대로, 시원한 물이 고도의 머리에서부터 바다색 머리카락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앞서가던 벤이 고도의 몰골을 보고는 다가와 가죽수통의 물을 머리에 뿌려준 것이다. 서로를 향한 가식과 경어가 사라진 3일이라는 기간이, 꽤나 두 사람 사이의 허물을 벗겨준 모양이었다.


“아아, 시원해.”


축축한 비라면 몰라도 이건 환영이다. 고도는 상의와 로브가 어느 정도 젖는 것은 상관없다는 듯이 묶어 올린 머리까지 풀어 헤치고 호의를 즐겼다. 물론 그녀완 달리 목적의식이 남아있던 벤인지라, 중요한 식수를 모두 써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고지가 멀지 않았잖아. 정신 좀 차리지?”


그는 아쉬워하는 눈으로 올려다보는 고도에게 면박을 준다.

어느새 지도는 벤의 손에 들려있었다.

붉은 모래의 가도 위에서 드렌턴, 로빈과 헤어진 지 3일째 되던 날, 투르탄고지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이미 의욕을 잃어버린 고도에게서 뺏어버린 것이다.

그 뒤로 다시 3일이 지났으니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고지의 ㄱ이라도 보여야 하건만, 대놓고 자신을 짐짝 취급해달라고 시위를 하는 고도 덕분에 생각보다 지체된 상황.

자신의 기다란 바닷빛 머리가 머금은 물기를 마치 걸레처럼 쥐어짜는 그녀를 보면서, 벤은 그녀를 따라나서겠다고 당당히 말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만류의 욕설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독도법이 정상이라면 지금쯤 숲이 끝나야 하는데. 아니, 좀 봐봐.”


벤이 고도의 눈앞으로 지도를 내밀며 물었다. 그녀는 두 손을 머리카락에서 떼지 않은 채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하려 했지만, 결국엔 지도로 시선을 떨어트려야 했다.


“흐으으응······, 아니, 제대로 본 거 맞어. 지금쯤 숲이 끝나야 해.”

그녀가 머리를 흔들면서 자연스럽게 허리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본래 날카로웠던 그녀의 이미지를 약간 청초하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본인은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지만.

“근데 지도가 워낙 오래된 거라, 틀려도 어쩔 수 없어.”


“······왕명으로 내려온 임무에 이런 지도를 주냐, 보통?”


벤은 고도의 로브 끝자락을 당겨서 그녀를 억지로 걷게 만든다. 이대로 냅두면 곧바로 쉬다 가자고 주저앉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방향은 북쪽의 높이 솟아오른 언덕. 저 정도 높이라면 목적지가 보일 수도 있으리란 판단이었다. 다른 곳보다 잡초와 수풀이 우거졌기에 벤은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보기보단 경사가 있었는지라, 고도의 로브를 끄는 데 필요한 힘이 서서히 늘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앗.”


벤의 발아래 펼쳐진 것은 분지, 아니 거대한 구덩이였다.

마치 거대한 삽에 의해 깎여나간 모양으로, 그가 언덕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 처참한 구덩이에서 밀려 나온 찌꺼기, 즉, 가장자리였다.

올라왔던 길은 반대편 절벽에 가까운 경사면에 비하면 아주 귀여운 수준이었다. 지도에 나와 있지도 않았거니와, 주변의 풍경과는 시대적 의미에서의 괴리가 느껴질 정도로 묘한 장소였다. 가장 먼저 벤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그 거대한 구덩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믿을 수 없는 규모의 폐기물과 쓰레기들.


“이건 뭔-”

아, 그런가.

이것은 국가 차원의 쓰레기 매립지일 수도 있겠다.

주변의 우거진 수풀, 마땅해야 할 악취마저 풍화되어버린 바람을 보니 상당히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이겠지. 벤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잊어버린 벤의 뇌가 어색함을 경고한 것은 그때였다.


“어?” “어?”


흐느적거리며, 반쯤 감은 눈은 바닥을 향한 채, 자의성이라곤 이성과 함께 지워버리고 터덜터덜 잡힌 로브의 소매를 따라오던 고도의 걸음이 벤을 지나친다. 그녀가 마땅히 발바닥을 받쳐줘야 할 대지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눈치챘을 땐 이미 그녀의 몸은 구덩이를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


“흐갹-”


무너지는 몸으로 고도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행동은 반사 신경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뿐. 그녀는 자신의 소매를 잡고 있던 벤의 손목을 낚아챈다. 하지만 역시, 그는 기사가 아니었다.


“어?” “어?”


둘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가파른 경사면으로 뒤엉킨 채 굴러떨어진다.






“아으-.”

고통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각인이라고 누군가 그랬던가. 고도는 그 격언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동시에 역한 기름 냄새까지 그녀의 몽롱했던 뇌를 마구잡이로 휘저어 놓는 중이었다. 대지를 대신하고 있는 이 쓰레기더미 사이로 날카로운 금속이라도 튀어나와 있었다면 치명상을 피하기 어려웠으리라.

그런 생각이 들자, 문득 자신의 머리와 몸을 감싼 채 같이 굴러버린 벤의 얼굴이 바로 위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야, 벤? 살아있으면 좀 비켜.”


고도는 자신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머리와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팔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맙다거나 괜찮냐는 말이 먼저 아니야?”


“애초에 네가 억지로 끌고 온 덕분이잖아. 인제 와서 상냥한 척은.”


“······상냥한 척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게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으니까 그런 거야. 네가 죽기라도 하면 난 다시 아티카로 돌아가야 한다고.”


“어휴, 낭만적이기도 하시지.”


고도는 짧은 신음과 함께 일어나 로브와 머리에 묻은 흙과 오물을 털어낸다. 허벅지와 무릎이 조금 까진 것 말고는 괜찮은 듯 보였다. 그에 비해 등이 완전히 쓸린 벤은 셔츠의 찢어진 부분이 선혈로 살짝 물든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고통과는 별개의 의미로 굳어져 있었다. 그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려던 고도는, 그 표정과 시선을 눈치채고 그를 따라 앞을 내다본다.


“······스케빈저네.”


고도는 그 이상의 별다른 감상 없이 자루를 뒤져 공격마법스크롤을 꺼낸다.

낮잠을 방해받은 짐승의 그림자가 쓰레기더미 사이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체구는 10세 안팎의 인간 아이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저렇게 집단으로 온다면 기다란 주둥이 끝에 달린 톱니 같은 송곳니와 지저분하고 날카로운 손톱은 충분한 위험요소다.

혐오스럽게 기다란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스케빈저 무리는 고도와 벤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뭐야 저건? 거대한 쥐?”


탐욕스럽게 코를 킁킁대며 기어오는 괴물들에게 벤은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다.


“비슷한데, 더 지저분한 애들이야. 최근 이 주변의 야생동물 문제는 쟤들이 원인이었던 거 같네.”


‘스케빈저’가 평범한 야생동물이었다면 곧바로 그 실체가 파악되자마자 지방영주 차원에서의 대책이 마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케빈저는 야행성의, 그것도 인간의 눈을 피할 줄 아는 꽤나 영악한 동물. 인간들이 이런 곳을 ‘수색’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넘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저것들이 문제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무리 그 악랄한 ‘마귀할멈’이라고 해도 한낱 이론마법학과 3학년생 한 명에게 토벌 임무를 맡기진 않았을 터.

고도가 스크롤을 펼쳐본다. ‘발화’라고 적힌 주문서를 보며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가오는 스케빈저가 네다섯 마리 정도였다면, 마력을 증폭시킨 발화주문을 통해 두세 마리 정도를 불태워버리는 것으로 나머지 모두를 쫓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무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열 마리가 넘는 대가족. 두세 마리 불태우는 것으로 나머지 모두를 물리치기엔 무리가 있다. 오히려 가족을 잃은 분노로 더욱 매섭게 달려들지도 모른다.

귀찮아서 아무렇게나 집어온 스크롤이 하필 이거였다니, 고도는 입술을 깨문다. 이상한 남자와 이런 냄새나는 곳에서 위기를 맞이할 줄은-,


‘냄새?’


고도는 고개를 돌려 아직 주저앉아 있는 벤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위기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멍청한 남자.


‘······.’


고도의 손에 들려있던 스크롤이 가운데서부터 불타기 시작한다. 그녀가 주문을 외운 것이다.

일회용 스크롤.

그 말은,

기회는 단 한 번뿐.


“벤! 엎드려!”


스크롤이 고도의 손 위에서 완전한 재가 되어 흩날린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반대편 손가락으로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며 앞을 가리켰다. 가냘픈 손가락의 끝이 가리킨 곳은 다가오는 스케빈저 무리의 가운데.

고도의 외침에 따라 최대한 바깥으로 기어가 엎드려있던 벤은 생각보다 길어지는 침묵에 살며시 고개를 들었지만,

곧이어 숲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일어난 엄청난 폭발 때문에 그는 그 자세 그대로 나뒹굴어야 했다.

‘발화’지점에선 폭발과 동시에 높은 불기둥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이미 폭발의 여파로 스케빈저들의 형체는 사라진 상태였다. 동시에 불기둥에서 번진 불길이 쓰레기 사이를 강처럼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어서 연쇄적인 폭발이 구덩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다.


“뭐야? 뭘 한 거야 너? 엄청난데? 뭔 마법이야?”


벤은 원망이나 핀잔이 아닌, 순수한 감탄의 의미로 고도를 올려다봤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시큰둥했다.


“내가 직접 한 게 아니란다. 이런 산업쓰레기 중엔 가연성 폐기물이 많아. 작은 불씨에도 금방 타버리기 때문에 혹시나 한번 해봤을 뿐이야.”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라고 굳이 덧붙이지는 않는다. 눈앞의 폭발 규모와 화재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지나칠 정도로 거대했다. 말하는 중간에도 계속되는 연쇄폭발, 번지는 불길. 고도는 순간 침을 삼킨다.

“야! 빨리 벗어나야 해! 좀 있음 이 구덩이 전체가 불타오를 거야!”


그녀의 외침에 벤도 정신을 차렸는지 황급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아직 불길이 가장자리까지는 닿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빠르게 번져나가는 불길에 휩싸일 것이 분명했다.

그의 먹색 눈이 주변과는 달리 완만한 경사의 길을 찾아낸다. 오른쪽으로 재빨리 뛰어간다면 불길이 번지기 전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로!”


벤이 튀어 오르듯 일어나 고도의 손목을 낚아챈다. 아프다고 불평할 틈이 없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에 욕은 삼키기로 한다. 그의 손에 이끌려 어느 정도 달리고 난 후에야 고도의 눈에도 생명의 활로가 똑바로 들어왔다. 눈도 좋네-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으으, 여기 있는 거 찾아보면 팔만한 게 있을 텐데.”


불타는 쓰레기들을 바라보는 벤의 입가로 고물상으로서의 아쉬움이 흘러나온다. 그런 벤을 향한 고도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너 고물상이 아니라 그냥 거지근성 충만한 바보 아니야?”


불길이 번지는 구덩이는 그야말로 화산처럼 벌겋게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쓰레기더미 사이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스케빈저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울퉁불퉁한 쓰레기들 덕분에 고도는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지만, 그때마다 벤이 지탱해 주었기에 빠르게 열기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얏! 뭐야?”

때문에, 앞서 달려가던 벤이 갑자기 멈춰 섰을 때, 고도는 그대로 그의 등에 얼굴을 박을 수밖에 없었다. 원망이 담긴 욕과 함께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벤은 대답 없이 폭발과 함께 화염이 솟구치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렇게 멈춰 있었다.

“야? 벤? 야, 뭐해?”


아직은 거대한 불길에 어느 정도 동떨어져 있었으나 시간을 지체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 고도는 어느새 자신의 손목을 놓은 벤의 손을 역으로 잡고 그를 잡아끌려고 했다. 하지만 꿈쩍도 않고 시선을 거두지 않는 벤. 곧이어 그가 발을 떼긴 했으나,

그 방향은 그가 바라보고 있던 불길의 한가운데였다.


“잠깐 기다려.”


그는 짧고 무심한 말만 남긴 채 불길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고도가 욕과 함께 뭐라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지만, 그의 발걸음에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의 그의 그림자가 화염에 휩싸였고, 홀로 남은 고도는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고도의 ‘고도다운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을 했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혼자서 이 지옥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급박한 환경, 돌발적인 벤의 행동,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황 등이 그녀의 이성을 옭아매 그녀는 한동안 불길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시간상으로는 10초도 되지 않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고도에게는 그 10초가 마치 학회장 서재에서의 근신기간처럼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야! 너! 뭐하는 짓-”


기세 좋게 멱살이라도 잡으러 벤에게 뛰어갔지만, 고도의 그 기세는 발걸음과 함께 서서히 사그라진다.

벤이 들고나온 것, 아니, 안고 나온 것이, 그녀의 바닷빛 눈동자에 확연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너무도 새하얗고 가느다란 팔로 벤의 목에 매달려있는 소녀.

그을린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기다란 은색 머리카락이 폭발의 후폭풍에 휘날리고 있었다.

투명한 피부와 아담하고 깨끗한 체구, 잘록한 허리선을 따라 부드러운 윤곽을 드러낸 다리.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조금의 그슬린 자국이나 긁힌 상처 하나 없는, 기이한 모습의 소녀였다.

주변을 불태우고 있는 화염보다 강렬하며 선혈보다 짙은 붉은색과, 깊은 해구처럼 빛나는 푸른색이 뒤섞이지 못한 채 상하를 이루는 몽환적인 눈동자.


그 신비로운 시선으로, 소녀는 분명하게 고도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작가의말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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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2 84 19쪽
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3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6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28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5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0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7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0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2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2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3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4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698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2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4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3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5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3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3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2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7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6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1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7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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