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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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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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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4.08.21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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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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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글자
22쪽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DUMMY

불이 꺼진 1층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방까지 빌릴 돈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 돈마저 먹고 마시는데 모두 쏟아부은 것인지, 거친 숨소리와 술냄새를 풍기며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자들이었다.

고도가 살며시 계단을 밟으며 역한 공기 사이로 고개를 내밀자, 이제 막 누군가의 그림자가 입구로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입구 옆의 창문으로 다가간다. 날 선 달빛을 받으며 여관 뒤로 사라지는 그림자는 분명 벤의 것이었다. 그가 뒤편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고도는 살며시 문을 열고 밖으로 따라나선다.


‘붉은 모래’의 밤은 고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소름끼치는 풍경이었다.

이 정도의 완벽한 고요는 수도출신의 그녀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어색한 감각으로, 숲이 멀리 있는 탓인지 새소리도, 곤충의 울음도, 야생동물의 울부짖음도 없었다. 다만 파도 같은 바람소리만이 저 멀리서부터 밀려올 따름이었다.

그 한기를 견디지 못하고 고도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며 몸을 움츠린다. 그녀가 모퉁이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을 땐, 이미 벤의 그림자가 마구간의 어둠에 삼켜지고 있었다.

고도는 무의식적으로 뒤꿈치를 들어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른다. 마구간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작은 말소리가 서서히 정적을 부수기 시작한다. 익숙한 음성이었다. 그녀는 입구 쪽으로 다가서서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항상······밖으로······했던 거지.”

명확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그림자에서 새어나오는 건 분명 벤의 목소리.

“······는······했지······아무것도······뭐?”


말소리가 끊겼다. 고도는 자신이 목소리를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싶어 몸을 기울여 좀 더 문에 밀착하기로 했다.


“뭐하세요?”


갑자기 마구간에서 튀어나온 벤.

고도는 훔쳐 듣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현명하다고 자부했던 두뇌가 상황대처에 있어 두 번째로 절망하는 순간이었다.


“아으······, 저기, 이건······”


“들어오래요.”


“네?”


기대하지 않았던 벤의 반응에 어리벙벙한 고도.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벤은 성큼성큼 그림자를 향해 걸어 들어간다.

하지만 고도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한참이나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그는 들어오라고 말했다. 마치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처럼.


“와보세요.”


마구간 안쪽에서 벤의 재촉이 들려온다. 머뭇거리던 고도는, 결국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벤의 목소리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죄송해요,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어요.”


“한밤중에 여기까지 미행해놓고 엿들으려는 게 아니었으면 뭐에요?”


“닥쳐요. 근데 누구하고 이야기하는 거였어요?”


여태까지- 라고 덧붙이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밤중의 그를 감시했다는 흉악한 인상을 주기는 싫었으니까.

고도는 텅 빈 마구간을 둘러보았지만, 벤과 자신을 제외한 어떠한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덕분에 혼자 이런 곳까지 와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벤을 상상하게 됐지만, 그건 그거대로 다소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나.”


갑자기 어린 여자아이의 명랑한 목소리가 자신의 발밑에서 들려오자, 고도는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치고 만다. 덕분에 안장을 걸어놓는 기둥에 뒷머리를 박아버렸지만, 뒤이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모든 쪽팔림과 고통을 동시에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페어리?”


이번엔 강의나 교재, 논문 따위를 애써 기억할 필요도 없었던, 그야말로 본능적인 중얼거림이었다.


“오, 너 내가 보이는구나?”

그 작은 ‘생물’은 장난기 충만하면서도 약간의 놀람이 가미된 표정으로 고도를 올려다본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네 쌍의 반투명한 날개가 진동을 시작하자, 마구간을 모두 채울 정도는 아니어도 얼굴을 마주하기엔 충분히 눈부신 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곤 그 빛에 만족한 듯, 커다랗게 씨익 웃더니 한 뼘이 채 안 되는 몸을 튕기듯 날아올라 순식간에 고도의 얼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고도는 저도 모르게 목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마력이 요동치는 걸 보니 마법사지? 내 목소리가 들려? 내 모습은 또렷이 보이고?”

얼굴에 비해 터무니없이 커다란 눈.

그리고 그 속에서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고도의 얼굴을 훑는다. 살짝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가루가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 찬란함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가루가 아니라 작은 빛의 덩어리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고도는 생각했다.

머리에 비해 지나치게 가느다란 팔과 다리, 모든 것을 지탱하는 얇은 몸까지, 모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어 마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작은 태양과도 같았다.


“어······, 네······.”


고도는 자신의 지성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의 가장 멍청한 표정으로, 간신히 우물거리며 대답할 수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경어가 튀어나온 것은 이 작은 존재의 존재감이 고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엿볼 수 있는 반응.


“흐음~ 자연내성이 꽤 높은가 보네. 마력이 높은 마법사라도 날 보는 건 쉽지 않은데······, 영광인 줄 알라고, 마법사.”


“하, 영광은 무슨······.”


페어리의 말에 벤이 코웃음을 치며 지푸라기를 던진다. 그러자 페어리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벤에게 달려들어 그의 푸석한 머리카락을 쥐어뜯기 시작했고, 그들이 엎치락뒤치락하자 마구간이 황금색으로 난장판이 되어간다.

빠르게 비행하는 작은 태양을 멍하게 쫓는 고도의 바닷빛 눈동자.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한 계산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엘더 드루이드들과만 어울리는 페어리가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보통 인간’과 허물없이 지내는 페어리라니, 모든 강의의 내용과 교재의 내용, 백과사전은 물론이고 괴상한 논문마저 가득 차 있는 그녀의 머리로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런 영감탱이들이 뭔 재미가 있어서 붙어 다니겠어?”

어느새 다시 눈앞에 나타난 페어리의 말에 고도는 소스라치게 놀라야 했다.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입 밖으로 뱉었나 싶어 입을 손으로 가리지만, 그런 고도를 놀리듯이 페어리는 빙글빙글 회전하며 그녀의 눈앞으로 풀쩍 날아들었다.

“미안하지만 어느 정도 마력 결계는 해두는 게 좋을 거야. 자연 친화력이 높은 마법사들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생각하는 게 바로 들리거든.”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대목이었다. 고도는 간신히 이성과 경계를 되찾을 수 있었다.


“페어리가 어째서 이런 곳에 있죠? 엘더 드루이드들과 함께-”


페어리는 다시 공중회전하며 고도의 얼굴에 더욱 가깝게 달라붙는 것으로 그녀의 말을 끊는다.


“말했듯이 그런 재미없는 할아범들과는 더 이상 있기 싫을 뿐이야. 그리고 자꾸 페어리-, 페어리 할래? 고도라고 했지? 내가 너를 그 이름 대신에 계속 인간이나 필멸자라고 부르면 좋겠니? 내 이름은 카모라 숲의 아이데아. 너희 말로는 그렇게 부르면 돼. 존댓말은 하지 말고.”


말을 마치며 고도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바람에, 그녀는 움찔하고 만다.


“아, 네. 아니, 응······. 근데 카모라 숲이라면······?”


고도는 카모라 숲이 여기서는 한참 떨어진 아실레마 제국의 동쪽에 위치한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페어리라는 존재는 숲에 거주하며 필멸자들로부터 숲을 지키는 숲의 수호자.

그런 수호자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나와 있다는 것은-


“참고로 말하지만 추방당하거나 파문당한 건 아냐. 난 내 의지로 돌아다니는 거라구.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줬음 좋겠네.”


고도는 순간 다시 자신의 생각이 읽힌 줄 알고 흠칫했지만, 마력결계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감이 좋은 페어리구나-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여행 중이야?”


고도는 그대로 아이데아를 사이에 놓고 벤과 마주 앉았다. 페어리와 직접 대화한다는 흔치 않은 영광이자 행운을, 그녀는 쉽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행······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뭐어, 자세한 건 말해봤자 재미도 없을 거야.”


겉으로 흐르는 아이데아의 대답에도 고도는 호흡을 늦추지 않는다.


“벤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야? 아니, 애초에 벤은 어떻게 너를 볼 수 있는 거지?”


그녀는 페어리가 자연내성, 즉, 자연친화력에 특화된 마력을 지닌 자들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 태생이 그러한 드루이드들, 그중에서도 엘더 드루이드나 우연한 일치로 마력의 호흡이 맞는 일부 마법사들만이 그들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루이드나 마법사는커녕,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일반인에 불과한 벤이 어떻게 그녀를 볼 수 있는 건지, 고도로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흠, 그게 말이야. 나도 모르겠단 말이지.”

아이데아가 대답과 함께 퉁명스러운 눈길로 벤을 쏘아보았지만, 그는 이미 흥미를 잃은 표정과 함께 건초더미에 누워 눈을 감은 상태였다. 카모라숲의 페어리는 그런 벤의 평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조심스레 날아가 그의 푸석하게 뻗친 먹색 머리를 비비 꼬며 심술을 부렸다.

“이 새끼를 처음 본 게······, 어디 보자······. 너희 시간으로 15년 전이었지, 쪼그마한 놈이 혼자 낑낑대며 오두막을 짓고 있더라고.”


‘······뭐?’


고도는 고개를 갸웃한다.

벤은 스스로가 스무 살 남짓이라고 했었다. 15년 전이라면 그의 나이 많아야 대여섯 살.

위험한 숲의 한가운데에서 어린아이가 스스로 집을 짓고 산다? 고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낮았던 출입구, 자신의 몸에도 약간 작은 감이 있었던 침대. 전체적으로 아담했던 식기들. 그것들은 이제야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날 보고 놀라지도 않아, 무서워하지도 않아. 그냥 벌레 취급해버리더라. 근데 마력은 잘 느껴지지도 않는 주제에 신기하게 날 볼 수 있었단 말이지. 그래서 마침 여행도 질렸었고, 말동무나 해줄 겸 지금까지 그 숲에 죽치고 있었어.”


“얘를 보는 게 그렇게 신기한 일이에요? 이해가 안 되네. 그냥 시끄러운 날파리일 뿐인데.”


“아주. 충분히. 신기한 일이에요. 사실 저도 지금 긴가민가하거든요.”


고도는 약간 실례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벤에게 달려드는 아이데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벤의 등을 후려치는 것에 성공한 아이데아가 다시 그녀를 돌아볼 때까지 이어진다.


“이놈한테 들었는데, 마법대학생이랬지? 마법대학이면······, 여기가 카나반이었던가? 카나반 왕립 마법대학? 아스트로바톰?”


“네, 아니, 응”


눈앞의 요정은 손바닥 크기의 작은 존재. 그러나 그 커다란 눈동자를 통해 느껴지는 마력의 존재감과 위압감 탓에 계속 존댓말이 튀어나오는 건 고도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이데아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천진난만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나쁜 곳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실레마의 마법사협회 애들은 너무 잔인한 생각만 해. 그래서 옆에 있으면 기분이 더러워. 숲에 대한 존경도 없고 말이야.”


‘그건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고도였지만, 페어리가 좋게 평해주는 것에 토를 달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문득 돌아누운 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근데 왜 여기까지 나와서 숨어있어요? 어차피 벤 아니면 아무도 못 볼 텐데.”


“원래 가끔 밖에서 저 날파리랑 노가리 까다가 자요. 안 그래도 로빈이 맨날 뭐라 하는데, 아무 데서나 혼잣말하는 미친놈으로 취급받고 싶지도 않고요. 몰래 따라온 거 민폐 아니니까 안심하고 들어가서 마저 주무세요.”


벤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아이데아가 고도의 머리 위로 날아오른다.

달빛이 그리 어둡지 않은 밤이었지만,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의 오라가 주변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고도는 그저 할 말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날 볼 수 있는 진‘짜 마법사’를 만난 건 오랜만이라 반가웠어.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듣고 싶은 것도 많겠지만, 숲은 너희처럼 밤이라고 잠에 빠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만 가봐야겠네.”


넋을 놓고 있던 고도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일생에 단 한 번일지도 모르는 기회를 쓸데없는 잡담으로 날려버렸다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그녀가 읽었던 책과 논문에서는 마법사가 페어리와 조우하는 것을 여러모로 놓쳐선 안 되는 기회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인간(그중에서도 마법사)이 마력의 운용에 있어서 특화된 종족이라면, 페어리는 그 마력의 본질을 이해하고 신체와 정신에 부합되는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즉, 마력의 궁합이 잘 맞는 마법사와 페어리가 서로 협조할 수만 있다면, 기존의 통념적인 것과는 차별화된 마력운용을 개발, 또는 전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분석이었다.

실제로 몇몇 출처가 불확실한 논문에서 그런 사례를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 고도였기에, 혹시나 자신이 지금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대마법사가 될 기회를 날린 것이 아닐까라는 깊은 불안이 그녀를 덮쳐온 것이다.


“저, 저기! 혹시 내일이나, 아니면 나중에라도 만날 수 있을까?”


고도의 다급한 목소리에 황금빛의 아이데아는 무표정과 함께 짧은 한숨을 뱉는다. 그녀의 커다랗고 날카로운 눈이 자신의 머릿속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에 고도는 순간 숨을 삼켰지만, 아이데아는 차가운 표정의 끝에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해해. 하지만 눈앞의 작은 것에 너무 매달리려고 하지는 마. 숲이 너를 그곳으로 이끈 건 우연이 아닐 거야. 그리고 그 운명의 실이 나보다는 저기 자빠져있는 저 인간에게 더욱 확실하게 닿아있다고 장담해.

세뮈엘님이 축복하사 숲에서의 만남은 언제나 극적이고 영원한 법이거든. 지금의 나는 너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할 거야. 그니까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


고도는 아이데아가 밤하늘 속으로 멀어져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의중을 알아챈 것도,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이 남자에게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것도, 모든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도는 아쉬운 한숨을 내쉰다.

아이데아가 마지막에 했던 말은, 그 출처가 현명의 대명사 페어리였기에 부끄럽다기보다는 납득이 갔다. 하지만 납득이 안 가는 쪽은, 이성으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역시 붙잡아야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본심이었다.


“뭔 소리 하는 거예요, 저게?”


벤이 일어나 앉았다. 화사한 빛이 없어진 탓인지, 어둠에 마저 익숙해지지 못한 눈은 그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덕분에 그 역시 지금 자신의 처참한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겠지-.

고도는 대답에 앞서 짧은 한숨을 흘렸다.


“시간이나 분위기나 진지할 이야기가 나올 때이긴 한데요, 댁하고 나하곤 만난 지 이제 며칠이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기엔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그렇죠. 그런 거 저도 싫어해요. 그럼 이만-” “제가 처음 입학했을 때.”

고도가 일어나려는 벤의 상의를 잡아당겨 엉덩방아를 찧게 만들었다.

“전 실망했어요. 명색이 왕립마법대학인데 애들 수준이 너무 낮았거든요. 심지어 조기입학이었지만 전 정말 끝내줬죠. 정문에 발을 디딘 그 순간 전부터 수석이란 단어는 놓친 적이 없었거든요.”

벤이 긴 하품과 함께 돌아누웠지만 고도의 입은 멈추지 않는다.

“입학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총장님이 절 호출하셨죠. 전 정말 떨렸어요. 학회장님이라니! 국제이론마법학회장님이라니! 서재에 들어가서 얼어있는 저에게 학회장님이 종이 한 장을 보여주셨어요. 제 입학 증명서였죠. 거기에 뭐라고 쓰여있었는지 알아요?”


‘성적은 우수하나 매사에 이기적이며 성취에 집착을 보임.’


고도가 카나반 왕립마법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할 당시 그녀의 입학증명서에 쓰여 있던 단 한 줄의 평가.

어떤 이유에선지 학회장은 그녀에게 5년 동안의 대학생활목표를 ‘수석졸업’이 아닌 ‘명예졸업’으로 권유했다. 이는 곧, 1등이 아니어도 좋으니 5년보다 짧은 학기로 대학을 졸업하라는 의미였다.

고도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당시엔 고작 한 명의 신입생에게 대학의 총장이자 국제이론마법학회장이 직접 말을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로 몰고 가는 분위기였기에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때는 학회장의 말을 좀 더 사회성을 기르라는 정도의 잔소리로 받아넘겼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그 후 이어진 2년의 대학생활 동안 고도는 단 한 번도 학년수석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달리 부정행위를 한 것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마법교수들의 논문과 이론에 직접적으로 반박할 수 있을 정도로 학업에 열중, 열의에 찬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훌륭한 성적과 동시에 주변과의 마찰은 깊어져만 갔다. 동기들의 평범한 시샘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 만족시키는 것은 스스로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교수가 단체연구과제를 줘도 멋대로 혼자서 모든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남의 의견은 일절 흡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적은 언제나 좋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적은 좋았다’-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그 일방적인 성격을 좋게 말하는 사람은 없어도,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높은 점수를 받게 해주는 그녀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 또한 없었다.

그러나 고도의 이러한 독선적인 모습이 해를 거듭해 반복되자, 모든 이가 그녀의 곁에 있기를 꺼리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머지않아 학회장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3학년 첫 학기가 시작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도는 학과로부터 믿기 힘든 처분을 받았다.


‘이론마법학과 3학년 제르나비 고도를 3주 근신에 처한다.’

그녀에게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어지는 학회장의 짧은 조언이자 협박.

‘앞으로 동아리활동에 불참하거나 대외활동이 결여 된 학년수석을 달성할 시에도 같은 징계에 처함.’


그녀로서는 정말이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대학 입장에서 자신은 누구보다도 유능한 인재다. 애초에 대학설립의 의도가 이러한 인재의 양성에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높은 점수를 받으면 징계라니?

고도는 학회장이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반발보다는 순응을 먼저 시험해보기로 했다.

그녀는 입학 이후 처음으로 조별 토론이라는 것을 해보았으며, 자신의 보고서가 아닌 모두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타인의 의견을 수용했고, 끔찍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물론 바뀐 학습방식에도 결과는 항상 그렇듯 가장 좋은 점수였다.

그녀는 살짝 기대해보았지만, 학회장은 가차 없이 그녀를 근신에 처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잘할 수 있는 것을 억지로 못 한다는 건 그녀의 성격과 상식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녀는 고민한 끝에 이번엔 자신의 행동양식을 바꿔보기로 했다.

남들에게 친절하게 대했고, 도움을 주었으며,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했다. 대외자원봉사도 지원했다. 흥미는 없었지만 동아리활동도 시작했다. 속뜻은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이제 착한 학생이에요.’라고 포장을 해본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학기가 끝나기 전 다섯 번의 근신이라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여름방학 도중 그 다섯 번째의 근신 때에, 도서관에서 부학회장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전 정말 그 빌어먹을 노인네가 저한테 뭘 바라는지 알 길이 없어요!”

고도가 분통을 터트렸다.

고도는 마법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이 어려운 해답 또한 페어리에게 바란 것이었다.

페어리는 절대로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때때로 예언까지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상대방에게서 그 뜻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용하려는 본심이 느껴진다면 절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따라서 아이데아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거라고 한 이야기는, 부끄럽지만 같은 맥락의 진실이었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에 왜 아쉬움을 느꼈던 것일까.

책 속의 내용을 믿지 못해서? 아니면 그 방정맞은 페어리를 믿지 못해서?


그녀가 불편한 진심으로 생각해낸 결론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내 도움이 안 될 것들에 대한 짜증’이었다.

그렇다. 그녀에게 겉으로 보이는 이기심은 문제가 아니었다.

고도는 세상의 만물과 추상적인 모든 개념들을 단지 자기 자신의 이(利)로만 판단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정답을 깨달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이 문제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자신을 만들고 지탱하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부정하는 순간 스스로와 그 앞을 부정해버리는 것이다.

쉬울 리, 아니, 가능할 리가 없다.

“하아아아아아, 이런 얘기 아무한테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좀 후련하네요.”

고도는 피곤함이 배어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벤에게선 어떠한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자요?”


“아, 다 끝났어요?”


“닥쳐요.”


작가의말

아직 많이 부족한 글입니다.

봐주시는 독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 작성자
    Lv.24 주정
    작성일
    14.09.24 06:35
    No. 1

    좋게 말하는 사람은 없어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좋게 말하는 사람도 나쁘게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24 13:21
    No. 2

    앗 수정하겠습니다
    주정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5 흰코요테
    작성일
    14.11.02 04:40
    No. 3

    뭔 사회성이야. 쓰레기 같은 것들이 사회성 타령하고 있네. 그런거 거절이지. 애초에 옳고 그름에서 틀렸고, 거기에서 끝이고. 그리고 이것과 별개로 사회도 그런 사회 싫고, 여기에서 또 끝이고. 그리고 사회와 별개로 그런거 기대하는 쓰레기들 친구하기 싫고, 거기에서 또 끝이고. 들어가기도 싫은 사회의 친구 하기 싫은 버러지들이 애초에 들어간 사회의 애초에 된 친구였어도 거절할 쓰레기 어거지로 떼쓰면서 뭘 기대하는 거야? 당연히 안되지. 그냥 그런 사회 떠나버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1.02 11:59
    No. 4

    엌 코요테님 감사드립니다!
    고도가 그럼에도 집착해야하는 이유가 뭘까요 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추세추종
    작성일
    15.07.05 19:44
    No. 5

    고도 이년 보면 볼수록 쌍년이네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7.06 00:50
    No. 6

    까탈시런 도시여자-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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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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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3) +16 14.09.26 2,864 69 16쪽
42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2) +18 14.09.25 3,032 73 14쪽
41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1) +20 14.09.24 2,442 63 21쪽
40 (막간) 구원 +18 14.09.23 2,469 59 10쪽
39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7) +10 14.09.23 2,258 63 21쪽
38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6) +11 14.09.22 2,655 93 20쪽
37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5) +17 14.09.21 2,540 81 19쪽
36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4) +14 14.09.20 2,618 73 21쪽
35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3) +11 14.09.19 2,643 84 25쪽
34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2) +23 14.09.18 2,692 96 19쪽
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4 84 19쪽
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4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8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30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7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2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9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1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4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4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5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6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700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2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5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3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3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4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3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8 158 18쪽
»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7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2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7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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