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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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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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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4.09.1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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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8
추천
81
글자
21쪽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DUMMY

“할아버지는, 가문에서 유일하게 내가 검을 드는 걸 반대한 분이었어.”

도시에선 좀처럼 찾기 힘든, 옛것의 냄새가 물씬한 여관 ‘은벽의 낭만’.

다섯 번의 술자리 끝에 다른 모든 동기들을 물리쳤지만, 지나와 오즈카는 기어이 이곳까지 로빈을 쫓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오즈카는 이곳에 오는 것까지가 한계였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쓰러졌기 때문에 로빈은 오즈카의 육중한 몸과 술기운을 함께 상대하며 힘겹게 그를 방에 던져놓아야 했다. 이어진 술자리 내내 그의 동기들이 그간 오즈카를 바라보았던 시선에 대해 사과하는 의미로 마구 잔을 채워주었던 탓이리라.

그리고 1층으로 돌아오니, 지나가 두 잔의 맥주를 주문해 놓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듣고 싶은 주제였지만, 지나에겐 시끌벅적했던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선 좀처럼 꺼내기 힘들었을 터. 로빈은 주저하지 않고 경청을 위한 맥주잔을 집었다.

“난 다섯 남매 중에 넷째야.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몰라도 다섯 명 모두가 기사의 피를 이어받았었지. 내 바로 위의 오빠가 검을 잡을 때까지도 할아버지는 별말 없으셨어.”

괴로운 말을 시작하려는 듯, 지나는 시선을 한 번 떨어트리고 맥주잔을 끌어당긴다.

“그런데 큰오빠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 그러자 할아버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시더라. 나와 내 여동생만은, 그 저주받은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하겠다고.”


“······.”


로빈의 눈이 지나가 허리에 차고 있는 에페검으로 향한다. 검성의 의지로도 그녀의 운명을 바꾸지 못했던 걸까.

그런 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지나는 얇게 웃으며 이스누시아 연철검의 손잡이를 어루만진다.


“검성의 가문에서, 기사의 피를 갖고, 그리고 귀족의 신분으로 검을 잡지 않는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어. 그걸 알면서도 할아버지는 반대하셨던 거야. 덕분에 본가와 관계가 틀어져 버렸지만, 난 알고 있어.”

지나가 묶어 올렸던 샛노란 머리를 풀어 헤치며 맥주잔의 내용물을 거칠게 들이켰다. 하지만 그 모든 행위가 비죽 흘러나오려고 하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라는 걸, 로빈은 흐릿한 조명에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힘드셨던 거야······. 올해로 이백하고도 열여덟. 그 긴 시간 동안 아들딸들, 손자와 증손자들, 그리고 고손자까지 자신의 이름과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짐을 안고 쓰러져가는 걸 지켜보셨어.

넌 상상할 수 있겠어? 결국엔 피를 흘리고, 피를 흘리게 할 것을 알면서도 후손들에게 검을 들게 해야 하는, 그 끔찍한 굴레를?

할아버지는 더 이상 버티실 수가 없으셨던 거야. 그렇기에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나와 내 여동생만은, 그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으셨던 거지. 결국엔 이렇게 될 걸 알고 계시면서도.”

그대로 고개를 숙여버린 지나의 표정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로빈은 점원에게 맥주 한잔을 추가로 주문한다. 점원이 새로운 맥주잔을 그녀의 앞에 가져다 놓고 나서야 지나의 분홍빛 입술이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서 난 결심했어. 이왕 이렇게 된 거, 할아버지가 전혀 걱정할 필요 없을 만큼 훌륭한 기사가 되기로. 그것만이, 내가 지금 할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로빈은 지나의 부모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그녀가 마시려던 맥주잔을 떨어트리는 바람에 뱉으려던 말이 머리에서 증발하고 말았다.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지만, 탁자 위로 엎어진 맥주가 그대로 지나의 드레스 전체를 적셔버리고 만다.

“하, 나도 취했나 봐.”


난감하게 웃으며, 새빨간 혀끝을 깨무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로빈.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물론 더 묻고 캐내고 싶은 건 많다.

하지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지나는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

그것에 만족하며, 로빈은 앉아있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들어가서 쉬자.”


약간 충혈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는 눈으로 로빈의 얼굴과 그가 내민 손을 번갈아 보던 지나는, 곧 새하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 나이대 여자의 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굳은살과 상처들. 하지만, 로빈은 충분히 따듯하고 부드러운 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부축하며 여관주인에게 다가가는데, 주인은 그들의 모양새를 한번 훑어보더니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아이고 손님, 어쩌죠. 아까 그 덩치 큰 분이 마지막 방이었는데.”


“아, 상관없어요. 그냥 제 방으로 갈아입을 옷 좀 주시고, 아침에 해장이나 준비해주세요.”


“예잇-.”


로빈의 방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로빈의 어깨에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던 지나가 작게 웃는다.


“저 아저씨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로빈도 덩달아 웃었다.


“그러게 말이야.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힘겹게 방문을 열고, 로빈은 힘없이 늘어지는 지나를 침대에 눕힌다. 자신도 적게 마신 건 아니었던 터라,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숫물에 얼굴을 담근 후 냉수를 들이켜야 했다. 그러는 사이 지나가 드레스 차림 그대로 이불속으로 파고들려는 기세였기에, 그는 억지로 그녀를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야, 옷 갈아입고 자야지. 맥주 냄새 밴다고.”


“으으응······.”


그녀가 투정을 부리며 드레스 옆구리의 단추로 손을 가져갔지만, 흔들리는 시선과 두통,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으론 도저히 그 많은 단추들을 풀어낼 수가 없어 보였다.


“자자, 팔 좀 들어봐.”


결국 짧은 한숨을 쉬고, 로빈이 대신하여 능숙하게 단추를 풀어나간다. 반쯤 풀린 눈과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지나.

그러나 단추가 모두 풀려 자신의 드레스가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흐리던 눈동자에 점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한다. 알콜에 찌들었던 그녀의 이성이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지나는 화들짝 놀라며 이불을 끌어안았다.


“뭐 뭐 뭐 뭐 뭐하는 짓이야!?”


“너야말로 무슨 짓이야?!”


갑작스런 그녀의 주먹질에 코를 감싸며, 로빈이 되받아 소리친다. 그녀가 술에 취했기 망정이지, 만약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맨정신이 있었다면 분명 코피가 터졌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여, 여자의 옷을 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벗기는 놈이 어디 있어?!”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며, 로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윽박을 지른다.


“뭐어-?! 아니 같이 샤워까지 했던 마당에 갑자기 뭔소릴 하는 거야 너?!”


“닥, 닥치고 빨리 뒤돌아서 있어! 입는 건 내가 할 수 있으니까!”


잔뜩 적의를 품고 째려보는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던 로빈은,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벽난로 근처의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나 참······. 그럼 난 여기서 잔다. 장비는 선반 위에 뒀어”


그가 소파에 드러눕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지나는 벗은 드레스를 침대 아래로 던져놓고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그녀는 여전히 술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그래, 술기운 때문이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독한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화끈하고 달아오른 얼굴, 그리고 눈물마저 찔끔 새어 나올 정도로 부끄러운 지금의 기분을, 그녀는 술기운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별다른 한기가 없었음에도 굳이 이불을 뒤집어쓴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진정이 되지 않는다. 방 전체를 울릴 기세로 쿵쾅거리는 고동이, 로빈에게도 들릴까 조마조마하여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녀였다. 마구잡이로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슬며시 로빈이 누워있는 소파를 훔쳐보지만, 그쪽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역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라고, 그녀는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결국 지나는 침묵하지 않는 가슴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창밖으로 스며들어오는 달빛은 이미 깊은 새벽을 품고 있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생소한 도시의 침묵.

그녀는 그 적막 사이에서 로빈의 편안한 숨소리를 찾아 비틀비틀 소파로 다가선다.


로빈은 소파의 팔걸이를 베개 삼고, 술기운을 이불 삼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긴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숨소리 곁으로, 지나가 주저앉는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 소파의 끝자락에 팔을 올리고, 그 팔 위에 얼굴을 얹은 채로 가만히 로빈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빤히 보고 있던 그녀의 입가에 좀처럼 보기 힘든, 새빨간 혀와 이가 보이지 않는 미소가 번진다.

지나는 가만히 로빈의 평화를 지켜본다. 그의 굵은 턱선을 바라보고, 그의 생기 있는 입술을 바라본다.

문득, 그녀는 그의 검붉은 눈동자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고요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녀는 살며시, 로빈의 이마를 덮고 있던 검붉은 머리카락을 집게손가락으로 배배 꼬듯이 옆으로 넘기며,


“멍충이.”


라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실례합니다.”


조심스러운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둔탁한 나무소리.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이미 반쯤 날이 서 있던 로빈의 정신을 깨우기엔 이것으로 충분했다.


“아으······.”

얼음바늘로 뒤통수를 찌르는 것만 같은 두통과 동시에 눈가가 불타오르는 듯 지끈거린다. 예상은 했지만, 지독한 숙취였다.

‘······? 얜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간신히 햇빛을 받아들인 로빈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바로 옆에서 소파에 팔을 올린 채 엎드려 자고 있는 지나의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로빈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깨우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숨결이 닿는 거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결국 그녀의 새벽 같은 숨소리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일어나, 침대에서 이불을 들고 와 그녀에게 덮어준 다음에야 노크소리가 들려왔던 방문을 살며시 열어주었다.

“예, 무슨 일이시죠?”

속삭이듯이 얕은 목소리로, 로빈이 문밖에 서 있던 여관주인에게 물었다. 그 의중을 알아챈 주인마저 덩달아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해온다.


“아, 예. 1층에 손님을 찾으시는 분이 와계십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누구지- 라고 생각하며 문을 닫으려는데, 주인이 표정과 손짓으로 그를 저지한다.


“아, 그, 일행분들도 같이······.”


“일행······? 아아, 예. 알겠어요.”

일행이라면 필시 지나와 오즈카를 말하는 것일 터. 하지만 마지막으로 만난 동기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아저씨인가······.’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고 돌아보니, 지나는 이미 턱을 그대로 소파에 박은 채 태양같이 커다란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아, 일어났어? 넌 뭔 술주정을 했길래 거기서 자빠져 있냐.”


“······몰라.”

그녀 역시 기상과 동시에 숙취로 고통받고 있는지, 소파에 몸을 기댄 채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는 중이었다. 얼굴이 약간 벌건 것을 보아, 그녀에게 아직도 술기운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로빈이었다.

“누구야 근데?”


“아, 1층에서 누가 우릴 찾는다는데. 아마도 드렌턴 아저씨일 거야. 먼저 내려갈 테니 천천히 와라.”


“으으응······.”


영혼 없는 대답을 뒤로하고 로빈은 문을 열어 계단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지독한 숙취가 제대로 된 사고를 방해하고 있는 탓에, 그는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있었다.

드렌턴이었다면, 굳이 그를 부르지 않고 직접 올라왔을 거란 당연한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서 더 깊게 생각했다면, 적어도 1층에서 ‘그녀’를 본 직후에 이런 후회를 하지도 않았을 터.


‘아, 미친-, 옷이라도 제대로 입을걸!’


“로빈슨. 폭탄이라도 맞은 것 같은 머리에, 예복은 갈아입지도 않았고, 그나마 겉옷은 보이지도 않는군. 게다가 술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을 한다.”


칼처럼 각이 잡힌 남색의 제복. 그리고 그 위에 덧입은 붉은 재킷과, 허리엔 슈테인울프의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 그리고 분노로 꿈틀거리는 입술 위로 떠오른, 타오르는 듯한 눈매.

짧게 친 붉은 머리가 그녀의 눈빛과 마찬가지로 바싹 불타오르는 듯한 인상의 여성으로. 가슴께에 빛나는 수많은 휘장이 아니어도, 로빈은 그녀를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는 그의 혀엔 침 대신 절망이 말라 있었다.


“미, 밀라 선배님!”


“아아-주 배짱이 좋구나, 로빈슨. 내가 직접 찾아오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그렇게 완벽한 모습이라니.”


그녀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녀가 그 말을 뱉으며 한 발짝이라도 움직였다면, 로빈은 자신의 몸이 베인 것으로 착각하고 온몸을 더듬었을 것이다.


“아, 아니,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이일?”

밀라는 당장이라도 허리춤에 차고 있던 손도끼를 뽑아 들 기세였다.

“네놈, 내가 한 말을 잊은 거냐?”


“······네?”


자, 필사적으로 기억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이마에 도끼가 박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로빈의 뇌는 알콜의 잔재를 밀어내려고 애쓰기 시작했지만, 결국 밀라의 입에서 답이 나올 때까지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만다.


“내가 분명 넌 퇴소식이 끝나는 그 순간부터 근위대 소속이라고 하지 않았나?!”


로빈은 당황한다.

설마 그 말이 뜻 그대로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래서야 변명할 여지가 없다. 첫 출근을 해야 하는 날에 술을 먹고 뻗어있었던 셈이 되는 것이니까.

이 자리에서 밀라가 죽으라고 명령하면 머리를 박고 죽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밀라는 잠시 스스로 숨을 고르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여관의 구석구석을 훑기 시작했다.


“아뮤르와 스파인은 어디 있나?”


“아.”

그렇다. 우수한 성적으로 퇴소한 지나와 오즈카 역시 근위대로 배치받았다는 사실이 떠오른 로빈이었다. 애초에 그들만 여기까지 쫓아온 것도, 세 명이 다 같이 같은 곳에 배치된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죄를 지은 것이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그 안도감이란, 지금의 로빈에겐 더할 나위 없는 위로가 되었다.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로빈은 밀라의 대답을 듣지 않고 곧바로 계단을 날아오르듯이 밟는다. 그의 다급한 손이 먼저 문고리를 돌린 것은 오즈카의 방이었다. 그의 방은 2층 계단의 바로 맞은편이었던지라, 오즈카는 이미 소란을 듣고 이미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로빈이 들어섰을 때 그는 깨질 듯한 머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찬물을 뒤집어쓰고 있던 참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지나에게 가보세요.”


아아 듬직한 오즈카. 로빈은 짧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이번엔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덕분에 나무로 된 바닥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지나가 다시 잠들었다면 이 소리를 듣고 다시 깨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복도의 가장 끝에 있는 자신의 방 앞에 도달하고, 그는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


“야! 지나! 일어-”


“······.”


“······.”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그의 걱정과는 달리, 지나는 그대로 잠들지 않고 분명히 일어나있었다.

말똥말똥한 눈이, 분명히 로빈과 마주쳤으니까.

대신 그녀는 가슴께를 가린 샛노란 머리카락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들은 시선을 주고받았고, 상황을 먼저 판단한 것은 그나마 알콜에서 벗어난 로빈의 머리였다.


“야야, 잠깐, 조용히······-”


여기서 지나가 괜한 소란이라도 피운다면 상황이 곤란해진다. 그런 판단에, 로빈이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야! 너어! 지금 뭐하는 지잇-으-으읍······!”


“야, 좀, 아 좀 가만히······, 지금 아래에 무서운 사람이 와있다니깐!”


한껏 영력을 실어 고함을 지르려는 지나의 입을 간신히 틀어막긴 했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몸부림을 치는 기수대표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 로빈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덩달아 허둥대고 있었다.


“하-, 너희들 진짜 기운이 아주 좋구나.”


“······.”


방문에서 들려오는, 밀라의 밝은 목소리. 로빈은 차마 뒤돌아볼 수 없었다. 보지 않아도, 온 방안을 가득 채우는 밀라의 적의 넘치는 영력이 대신 그의 눈앞에 그녀의 기분을 그려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요번 신입들은 아주 군기가 잘 들어가 있어서 교육시키는 맛이 있겠어.”


로빈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건으로 몸을 가리기에 바쁜 지나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한번 노려보고는, 이내 고개를 떨어트린다.





“야, 그럼 좀 말을 해주지 그랬어.”


“말했거든?! 필사적으로 말했거든?!”


지나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로빈을 밀라가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내려다본다. 세 명의 엉망진창인 신입 근위기사가 마치 벌을 받는 심정으로 탁자에 둘러앉은 이유는, 밀라가 일단 해장부터 하라고 ‘자비로운’ 지시를 내린 덕분이었다.

어제 미리 부탁해놨던 덕분에 여관주인은 신속하게 해장음식을 내놓을 수 있었다. 톡 쏘는 향의 오이피클과, 빵 사이에 끼워서 내놓은 절인 청어, 그리고 토마토수프였다. 이 기묘한 조합이야말로 이 여관의 특색이리라.


“남기지 말고 다 먹는다. 실시.”

식욕이 돌기는커녕 남은 식욕마저 게워낼 지경이었지만, 밀라의 이 위협적인 한마디에 셋은 동시에 음식을 구겨 넣기 시작했다.

“공지할 것이 있으니, 먹으면서 들어라.”

그리고 그런 그들의 위로 밀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래 왕실근위대로 발령받으면 최소 2개월의 수습기간이 주어지지만, 검성님을 통해 들어온 파견요청이 있어 수습기간을 파견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검성이란 말에 지나의 눈동자가 반응하였고, 로빈은 파견이란 말에 씹던 턱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들의 신경을 다시 음식에 쏟게 하는 데엔 밀라의 눈짓 하나로 충분했다.


“선배님, 질문이 있습니다.”


의외로 먼저 입을 연 것은, 묵묵히 자신에게 할당된 모든 음식을 비운 오즈카였다.


“말해봐라.”


“왜 저희입니까? 요즘엔 근위대도 자주 파견을 나간다는 사실은 들었지만, 이제 막 부임한 저희가 근위대의 명성에 흠이 가게 하지는 않을지 걱정됩니다.”


로빈은 오즈카의 질문을 듣고 감탄한다. 자신도 궁금하던 것이지만, 아마 본인이 같잖게 입을 열었다면 면박만 받았을 터. 저런 식으로 돌려서 말한다면 아무리 밀라라도 화를 내지는 못할 것이다. 예상대로, 그녀는 안색의 변화 없이 무심코 답을 내놓았다.


“물론 전례가 없는, 이례적인 조치긴 하다만, 다음 달에 있는 독립기념일행사 때문에 근위대는 곧 비상근무체제에 들어간다. 그렇게 되면 정예근위대 중에선 가용할만한 인원이 부족해지는데, 그렇다고 검성님을 통해 들어온 파견요청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너희라도 보내기로 윗선에서 정해진 것이다. 따라서 오늘 너희는 근위대장님에게 배속신고만 하고 내일 바로 출발한다.”

그녀는 대답을 마치고, 바로 깨끗해진 그릇들을 확인하고는 위엄 있는 목소리를 이어간다.

“다 먹었으면 출발한다. 나와라.”

여관의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붕이 없이 내부가 그대로 드러난 사륜차량이었다. 밀라가 운전대를 잡았고, 조수석엔 지나가, 뒷좌석엔 오즈카와 로빈이 누군가의 커다란 덩치 덕분에 낑겨 앉아야 했다.

“······그런 몰골로 입성하는 것 자체가 근위대의 치욕이다. 오늘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감아 줄 테니,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샤워하고 근위대 정복으로 갈아입는 것에 5분 주겠다. 알겠나?”


“넷!”


잔뜩 구겨진 예복에 푸석한 머리. 눈에선 아직 숙취의 핏기도 빠지지 않았고, 심지어 지나의 드레스엔 쏟은 맥주 자국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마도 이런 몰골로 궁궐에 들어가는 근위대는 자신들이 처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로빈은 밀라가 운전에 집중하는 사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그러다 옆거울을 보니 앞에 앉은 지나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인 표정인지라, 결국 둘은 동시에 꿈틀거리며 창밖으로 얼굴을 돌려야 했다. 오즈카는 그런 그들을 보고 한숨을 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쥘 뿐이었다.


작가의말

추석의 후유증은 잘 극복하고 계신지요.


독자분들에게 감사의 말씀 드리며,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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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8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30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7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2 86 29쪽
»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9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1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4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4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5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6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700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2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5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3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3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4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3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8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6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2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7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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