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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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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049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4.09.0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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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4
추천
83
글자
21쪽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DUMMY

창공에 맡겨두었던 정의의 소멸로 타오르는

그 이름을 불러보아라

허락되지 않았던 광기를 정립하고 나면

눈에 비친 정경은 진정 환희의 찬가

그곳에 곧 생명의 북소리가 울리매,

정지된 영혼의 메아리 요동치고 시작되는 눈물로 찬란한 어둠이 걷힌다

깨어날 생명은 눈물 속에 있다

깨어날 생명은 눈물 속에 있다


- 방랑기사 슈토 몬타나 作, 「사선에서」



====




무거운 검압이 허공을 찢는 굉음은,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가고 뒤통수가 찌르르 울리게 만든다.

한 사람의 생을 가르는 검은 이렇게나 무겁다. 이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기사 중에 그 누구도 이를 가볍게 여기는 자는 없으리라.


그중에서도 같은 기사와 검을 맞대는 것.


이는 단순한 영력과 영력의 충돌이라고만은 설명할 수 없는, 이른바 ‘생명을 갉아 먹는다’고 표현될 정도의 체력 소진과 압박감을 기사들에게 선사한다. 상대방의 ‘피’을 빼앗기 위해선 자신의 ‘피’도 내놓아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일. 그렇기에 기사끼리의 싸움엔 과시도, 허세도 소용이 없다. 그들은 그저 하나하나의 합에 모든 가능성을 걸어야 한다.


지나는 왼쪽 허벅지에 한줄기 붉은 자상(刺傷)을 허용하는 대신 상대방의 눈에 에페를 찔러 넣는다. 그 후 곧바로 반회전하며 이어진 그녀의 동작으로, 흰 제복의 여기사는 목으로 터져 나오려는 붉은 폭포를 감싸 쥐며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성문 앞의 시체가 네 구로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헉, 하아, 후우-.”


다시금 땅에 에페를 꽂아 넣는 지나의 숨과 손이 같은 박동으로 떨리고 있다.

최대한 빠르게 회복하려 했지만, 호흡은 이미 목까지 차오른 상태에서 좀처럼 내려가질 않는다. 그녀가 소진한 것은 영력도, 체력도 아닌, 그저 호흡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달빛 아래 창백했던 그녀의 낯빛은 이제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했고, 생기가 돌던 붉은 입술은 이미 말라비틀어진 보라색이 되어 있었다.


“야, 지나.”


성문 뒤에서 로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지나의 귀에 닿았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채 고르지 못한 호흡으로 검을 뽑으며, 영력이 실린 목소리를 터트려 패기 있게 소리칠 뿐이었다.


“다음은 누구냐!”


로빈은 휘청거리는 그녀의 다리를 알아채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하지만 마법사 하파의 마른 손이 그를 제지한다.


“잘됐지 않습니까, 적들의 자존심을 이용해서 충분히 시간을 끌어주고 있어요.”


‘잘됐다’라는 평가가 어디까지나 전술적인 관점임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로빈은 심기가 불편했다. 하파의 말대로 작전의 양상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통신병으로부터의 연락은 아직 없었지만, 왜소한 지나의 어깨를 빌어 파이튼 성의 깃발은 아직 카나반 공화국의 상징인 붉은 탕나무를 뽐내며 밤바람에 춤추고 있었다.


“쟤, 지금 완전히 무리하고 있다구요.”


아직 로빈은 다른 기사의 영력을 완벽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나의 상태가 여태껏 봐왔던 그 어느 때보다도 위태롭다는 사실은 그녀의 어설픈 만용을 통해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뮤르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입니다. 이걸로 우리 군의 사기도-”


“그놈의 아뮤르- 아뮤르, 검성의 손녀니- 뭐니, 이봐요.”

로빈은 순간 훈련 생도라는 자신의 계급을 잊은 듯, 분노에 타오르는 검붉은 눈을 하파에게 들이밀었다.

“난 시골출신에다가 방금 전까진 우리나라 검성의 이름도 몰랐어요. 한마디로 무지에서 오는 자유였죠. 하지만 쟤는 어떨까요? 당신이 저 녀석의 몸을 본 적 있어요? 온몸의 상처보다도 깊게 파고든 할아버지의 이름을,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짊고 살아왔을 거란 말이에요. 지금 쟨 스스로 가혹한 시험에 들고 있는 거라고요! 그놈의 아뮤르라는 이름 때문에!”


공화국에서 가장 위대한 기사의 피를 잇고 있는, 아직 훈련도 끝나지 않은 풋내기 생도 하나가 브린타이나 왕국의 정규기사를 넷이나 격파했다-.

어떻게 보면 대외선전용으로도 훌륭한 이야기였지만, 로빈은 마땅치 않은 상황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지나에게 의지하고 있는 지금 상황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를 제지하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는 마법사. 하파의 시선은 냉정했다.


“이름 있는 가문의 기사란 그런 겁니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배경, 저런 이름을 지니고 태어난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앞선 그림자를 밟으며 앞에 놓인 그 길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동정할 필요도, 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도 기사라면, 이 시대에 태어난 기사라면, 그런 감성적인 생각은 집어치우십시오.”


하파의 날 선 대답에, 로빈은 터져 나오려는 고함을 겨우 삼킨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는 아뮤르라는 이름이 지나에게 갖는 의미를 그저 가벼운 혜택 같은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성문 앞에서 그 저주받은 피를 흘리고 서 있는 그녀를 보며, ‘그 이름’이라는 무게를 견디며 살아온 지나의 시간은 감히 그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걸 깨달았다.

62위의 자신이 1위의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로빈에겐 지금으로선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



“과연 아뮤르다. 적이지만 칭찬할 수밖에 없구나.”

한동안 잠잠하던 백색의 군대의 선봉에서 굵은 대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의 중앙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나오는 그의 손에서는 줄곧 어둠만을 머금었던 검이 모처럼 달빛을 받아 날카로움을 내뿜고 있었다.

성문 앞에 쓰러져 있는 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숫자의 휘장과, 앞서 선두에서 그들을 이끌던 그의 당당한 모습은 그가 쥔 검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증거들. 이제는 반쯤 빛을 잃은 지나의 눈이 어둠 속에 흐릿한 그의 그림자를 찾는다.

“초임기사 특유의 허세를 이용해 일부러 어리숙한 영력을 연기하여 내 부관의 방심을 끌어내고, 그 뒤에도 정예기사 세 명을 연달아 벤 것, 매우 훌륭했다. 이것이 진정 그대의 초전이라면 내 감히 또 다른 아뮤르의 등장이라고 선언해도 무방했겠지. 하지만,”

그가 도약이 가능한 거리까지 접근했음에도 지나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정말로 이것이 그대의 초전이기에 약점을 감출 수가 없는 모양이구나. 경험 부족은 어쩔 수 없이 티가 나는 법이지. 움직임 하나하나에 영력을 너무 낭비하더군. 이젠 호흡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지 않나?

게다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도 성문에서 물러서지 못하고 있는 걸 보아하니, 너와 네 부대는 우리와의 정면 대결이 아니라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이라는 뜻일 테고, 즉 성내의 병력은 하찮은 수준이며 전방에서 전투 중일 다른 부대의 지원을 기다리는 중이겠지.

알겠나? 지금 너희는 전술적 허점까지 노출하면서 고집을 부리고 있는 셈이야. 또한, 그렇게 바닥을 드러내면서도 마지막까지 혼자서 그렇게 무리를 하고 있는 건, 뒤에 남겨진 성안에 변변찮은 기사가 단 하나도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겠지.”

그의 마지막 목소리는 로빈의 가슴에 따갑게 꽂혀버리고 있었다.


브린타이나의 대대장은 천천히 지나를 향해 검을 겨눈다. 느긋한 몸짓이었지만,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무거울 그의 검이 곧 자신에게 날아들 것을, 지나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너희가 기다리는 카나반군은 곧 격파될 것이다. 이곳엔 아무도 오지 않아. 내가 멍청해서 너희들의 장단에 놀아주고 있었다고 생각하나? 나는 그저 우리 왕국군의 기사가 ‘아뮤르’라는 이름을 직접 무너트리는 광경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지휘관의 희미한 웃음.

“하지만 내가 너를 너무 얕봤던 모양이다. 네 ‘의미 없는’ 소모에 대해선 정중히 사과하지. 나 역시 지휘관이기 전에 한 명의 기사.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내 피는 그대와 검을 맞대라 하는군.”

지나는 천천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불안정했던 호흡은 간신히, 억지로 눌러버렸고, 흐릿했던 시야는 어느새 남자의 빛나는 검 끝에 고정할 수 있었다.


“1중대장! 결투가 끝나는 대로 곧바로 성안의 모든 것을 도륙한다, 알겠나?!”


“옛.”


“좋아.”

부하에게서 대답을 받아낸 남자의 걸음이 멈춘다. 검을 내리친다면, 곧바로 지나의 정수리로 향할 수 있는 거리.

“브린타이나 제국의 기사, 중령 카스라 이레이. 아뮤르의 검을 받게 되어 영광이다.”


지나의 에페검이 먼저 달빛과 바람을 가른다.

바로 전까지 제대로 서 있기조차 버거워 보였던 인간의 일격이라곤 믿을 수 없는 예리함이었다.

검을 쥐고 있는 카스라의 왼손을 노리고 들어온 에페의 날은 그의 호흡을 끊는 완벽한 기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검을 쥔 손목을 약간 비틀어내는 것만으로 지나의 일격을 검으로 쳐내고는, 동시에 무리한 기습으로 자세가 흐트러져있던 지나의 복부를 오른손으로 강타한다. 그녀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간 것은 물론이었다. 공교롭게도 땅을 향해 무너지던 그녀의 몸은, 처음 그녀가 베었던 부관의 몸뚱어리 덕분에 곤두박질치지 않을 수 있었다.

로빈은 그 순간 바로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를 제지한 것은 하파였다. 답답함에 소리를 내지르는 로빈.


“놔 봐요! 저러다 죽겠어요!”


“지금 그녀를 도와주러 나가도,”

하파의 표정은 여전히 겨울 호수의 얼음 같았다.

“당신은 도와줄 수도 없을뿐더러 그녀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잖-”


-휘유우우우우우우우


갑자기 들려온, 소름 끼치는 바람 소리.

로빈은 목소리를 멈추었다.

그 바람 소리의 근원은, 어느새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나있는 지나의 입술이었다.

기다란 휘파람처럼 한숨을 부는 그녀의 새빨간 혀 아래로 더욱 붉은 강 한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생명의 북소리가 울리매, 정지된 영혼의 메아리 요동치고, 시작되는 눈물로 찬란한 어둠이 걷힌다.」”


주문을 읊는 듯, 나직한 지나의 목소리. 곧이어 다시 깊은숨을 짧게 내쉬고, 그녀는 자세를 고쳐 잡는다.


“노래인가?”


비웃음이 섞인 카스라의 질문이었다. 지나는 그에게 손으로 어서 오라는 도발적인 손짓과 내보이며, 그가 품은 것보다 가벼운 비웃음과 함께 새빨간 혀끝이 섞인 표정으로 나직이 대답했다.


“아니, 좋아하는 시구야.”


이번에는 카스라의 도약이었다.

지나는 자신의 사고보다 빠르게 머리 위로 파고들어 온 검을 순간적으로 벗어나며 옆으로 흘릴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영력으로 그 공격을 정면으로 받았다가는 자신의 검이나 어깨, 둘 중 하나는 박살 나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카스라의 노림수였다.

그 짧은 순간, 카스라는 자신이 처음 공격을 가한 복부로 그녀의 왼손이 약간 내려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필시 갈비뼈 두 대는 부러졌을 테지.

그의 예상대로, 그녀의 몸은 회피를 위해 균형을 잃고 그대로 측면을 노출하고 만다. 그녀의 얇은 검은 더 이상 공략 대상이 아니었다.

카스라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왼발로 지나의 다리를 걷어차 버렸고, 그 충격은 샛노란 지나의 눈동자가 밤하늘과 피로 젖은 바닥을 동시에 담았을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그녀의 몸통을 향해, 카스라의 검이 다시금 살의를 빛낸다. 그 살의를 막아줄 에페는 이미 그녀와 함께 땅에 나뒹굴고 있었다.


‘적어도 팔 하나!’


이것이 카스라의 확신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순간, 그는 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쓰러지는 지나에게서 가슴이 오싹해질 정도의 불길한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순간 멈칫했지만, 그녀의 에페는 여전히 그녀의 의지와 함께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검을 내리칠 수가 없었다.

도무지 이유를 짐작하지 못한 그가 천천히 위화감의 근원을 찾아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카스라는 자신의 목에 박혀있는 단검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단검이 자신의 부관에게 결혼선물로 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나는 그 부관의 몸뚱어리에 부딪힌 순간, 그의 품에서 단검을 빼내어 복부에 숨겨놓았던 것이다.


“너, 너 이년······, 어느새-”


왈칵 쏟아지는 핏줄기가 그의 목소리를 대신한다. 카스라는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고, 지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시선의 높낮이를 역전시킨다.


“정지된 영혼들의 원망이라고 생각하셔.”


그녀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에페를 주워 그의 심장에 꽂아 넣는다. 그리고는 재빠른 동작으로 그의 목에 꽂혀있는 단검을 빼내고는, 지휘관을 잃었다는 당혹감과 분노로 숨을 죽이고 있던 흰색 군대를 향해 내던진다. 고요한 숲에 새로운 비명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돌격! 성문이 닫히기 전에 돌입한다!”


비명을 신호로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흰색 군세가 파도와 같이 지나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무너지는 그녀의 몸을 잡아 세운 것은 로빈의 굳센 손이었다.


“로빈.”

지나가 흐린 눈으로 로빈의 얼굴을 찾아 입을 열었다.

“너와 네 분대가 제일 앞에서 막아줘. 저쪽에 적어도 세 명의 기사가 남아있어. 어떻게든-, 어떻게든 병사들을 지키-······.”


“알았으니까 입 다물어 지휘관.”


“너어, 그리고 한 번만 더 도와주느니 어쩌니 했다가는 뒤질 줄 알아······.”


“의무병!”


로빈이 지나를 둘러매고 성안으로 들어오며 소리쳤다. 그의 부름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벤이었다.


“벤! 응급처치할 수 있어?”


“응, 이론은 알아.”


“지휘 천막으로 부탁해!”


로빈은 지나를 벤에게 맡기고, 곧바로 검을 뽑아 들어 성문을 향해 달려간다.

벤은 지나의 차가운 몸을 의무병의 도움을 받아 천막으로 옮길 수 있었고, 그녀를 간이침대에 올려놓은 뒤에야 천천히 살펴볼 수 있었다.

이미 그녀는 의식이 없었다. 양쪽 전완근은 이미 핏줄이 터져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고, 영력의 파동도 불안정하고 미세한 상태였다.


“개판이구만.”


벤의 중얼거림은, 단순히 지나의 몸 상태뿐만 아니라 성 밖의 소란에도 통용되는 것이었다.




로빈이 다시 성문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성벽 위 전투마법사들의 포격이 시작된 참이었다.

왕국의 백색 군대는 쏟아지는 공격 마법들을 정면으로 받아냈지만, 그들의 마법사가 펼친 보호막 덕분에 찢겨나가는 병사의 수는 극히 일부였다.


“들어온다!”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현란한 휘장의 흰색 제복을 입은 왕국군 하나가 카나반의 병사들을 베어 넘기며 성문으로 들이닥쳤다. 로빈은 서둘러 그와 검을 맞댄다.


“기사냐?! 대대장님의 원수를 갚겠다! 아뮤르를 데려와라!”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브린타이나의 기사.

갑작스레 맞이하게 된 첫 기사전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로빈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그를 이길 수 있는 공략들만이 넘쳐나고 있었다.

로빈은 그가 내리친 검을 일부러 힘없이 흘려내어 그의 자세를 무너트리고는, 그의 손목을 휘감아 비틀어버린다. 손목이 탈골되면서 내지른 남자의 비명은 전장의 소음에 묻혀 사라져버렸고, 그의 가슴을 찌르는 로빈의 검에 망설임은 없었다.

곧이어 기사를 따라 들이닥친 두 명의 적병도, 비슷한 방식으로 로빈의 검에 쓰러진다.


그러나 적 마법사들의 반격으로 인해 성벽 위에서의 포격 지원은 잦아들고 있었고, 성문으로 밀고 들어오는 하얀 물결의 굵기는 두터워져 가고 있었다. 점점 함성보다 짙은 비명이 성문을 장악하기 시작한 게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다급한 로빈이 하파의 얼굴을 찾아 이리저리 헤맸지만, 그가 찾을 수 있었던 건 쓰러져가는 공화국의 병사들뿐이었다. 결국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는 얼굴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타헌!”


“예엣-!”


“성벽 위에 있는 분대원들 다 내려오라고 해! 성문에서 조금만 버티자! 마법사들과 부상병을 내성으로 후퇴시킬 시간을 벌어야 해!”


“알겠습니다!”


전황으로만 보면 지금이 성내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려야 할 때임을 로빈은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쉽사리 진입을 허가하면, 내성으로 물러나기도 전에 성벽 위의 병사들과 마법사들은 퇴로를 잃은 채 학살당할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가 진입을 저지하고 시간을 끌어야 한다. 지나가 정신을 잃기 전 내렸던 명령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로빈의 검붉은 시선이 마침내 하파의 얼굴을 찾아낸다. 그녀는 성벽 위에서 보호막을 유지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파님! 부상병들과 성벽 위의 마법사들을 내성으로 후퇴시키십시오! 제가 시간을 끌어보겠습니다!”


영력이 힘껏 실린 목소리다. 하파가 듣지 못했을 리 없다. 그녀는 시선은 전방으로 고정한 채, 로빈이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세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로빈은 곧바로 다시 성문 아래로 뛰어들었다.

이미 병사들만으로는 저지선을 유지하기는 버거워 보였다. 방패를 들고 있는 병사들이 이가 부러질 정도로 죽을힘을 다해 길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하나, 둘 쓰러져가는 와중에 전선이 점점 밀려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타헌! 비켜!”


명령은 받은 병사가 순간적으로 방패를 치워버린다. 갑작스럽게 저항이 없어진 틈 사이로 브린타이나 병사 두 명이 쓰러지듯 몸을 무방비로 노출했고, 그들은 곧바로 로빈이 뒤에서 던진 창에 목이 찢기고 만다. 그 시체를 딛고 뛰어오른 로빈의 기세에, 지휘관을 잃은 분노로 가득 찬 군대조차 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양쪽의 방패병을 엄폐물 삼은 로빈의 검은 닿는 곳마다 피를 흩뿌린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해져 있었다.

조금 전 지나가 성문 앞에서 보여주었던 광경은 확실하게 그의 뇌리에 박혀, 무분별한 영력 사용에 대한 경고를 질러대고 있었다.

선명하게 보이는 검의 궤도, 그것이 파고들 틈. 자신을 향해 직접적으로 날아오는 노골적인 살의에만 대응한다.

제복과 피부가 다소 베이는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익숙한 목소리의 비명이 들려오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검을 휘두르는 그 한 번의 힘과 그다음의 ‘얼굴’만을 의식하려 애쓰고 있었다.


“-!”


하지만 그 냉정은, 옆구리를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한기로 인해 빠르게 멈춰버린다.

시야 밖에서 그의 냉정을 찢고 들어온 창.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지만, 생전 처음 맛보는 고통으로 그의 사고는 냉정과 함께 흐려지고 말았다.

그제야 느껴지는, 강한 적의를 품은 영력. 적 기사는 흰색 물결의 그림자 아래에서 조용히 때를 노리고 있었으리라.

로빈을 공격한 기사는 자신이 창이 로빈의 창자까지 꿰뚫지 못한 것을 깨닫고 짧게 혀를 찬다. 물론 같은 실수를 저지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옆구리를 감싸 쥔 채 흔들리는 로빈을 향해, 그의 두 번째 적의가 바람을 가른다.

로빈은 그 순간, 목소리를 잊을 정도로 놀라고 만다.

자신의 목을 꿰뚫으리라 의심하지 않았던, 그 거침없는 창끝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멀어진 것이다.

그것이 창이 멀어진 게 아니라, 자신의 몸이 뒤로 나가떨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뒤에서 그의 목덜미를 잡아끈 타헌의 얼굴이 얼핏 스쳐 지나간 순간이었다.

그 후줄근한 병사는, 미소라고 부를 것도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곤 곧바로 방패를 치켜들어 먹이를 놓쳐 분노한 기사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제 후퇴해야 합니다!”


타헌의 그 모습 뒤로 로빈이 무언가 소리치기도 전에 다시금 누군가가 그의 몸을 낚아챈다.

피투성이가 된 하파와 어느 마법사가 양쪽에서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성벽과 광장은 어느새 비어있었다. 끌려가다시피 광장을 가로지르는 로빈의 눈에 성문을 돌파한 백색의 군세가 들이닥치는 것이 보인다.

내성으로 후퇴한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로빈은 당장 눈앞으로 다가오는 적군의 표정 대신, 어딘가 누워있을 지나의 얼굴을 먼저 떠올린다. 로빈이 검을 쥔 오른손에 다시 영력을 실은 순간-


“······뭐지?”


성 밖이 요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익숙한 나팔소리가 로빈의 귀를 때린다.

그가 기억 속에서 이 나팔소리를 찾아내려 애쓰는 와중에, 마법사 한 명이 그들에게 다가와 외쳤다.


“하파님! 아군입니다! 1,3대대가 전방의 적을 격파하고 선발대를 보냈습니다!”


그의 말대로, 성문 밖에서 밀고 들어오는 새로운 군세가 로빈의 눈에 보인다. 그 위로 나부끼고 있는 건 분명한 탕나무 깃발이었다.


작가의말

「 타헌 - 카나반공화국 북2군 전방사단 소나무연대 2대대 1소대 3부분대장. 향년 3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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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3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6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28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5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0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7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0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2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2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3 83 18쪽
»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5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698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2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4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3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3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3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2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7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6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1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7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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