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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060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4.09.23 16:52
조회
2,256
추천
63
글자
21쪽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7)

DUMMY

“허허, 참, 너희들도 엄청난 일에 휘말려 버렸구나.”

왕립마법대학의 총장, 디쿠젠이 책상 너머 벤과 고도를 바라보고 웃는다. 공결확인서에 서명하는 그의 손을 바라보며 그제야 고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혹시나 또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을까 겁났던 그녀였다.


“그래, 제르나비. 이번 일로 무엇을 배웠느냐?”


“네에?”

이 망할 영감탱이가 또 무슨 소릴-

“배울 게 뭐 있었겠어요, 억지로 끌려가서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다가 돌아왔는데.”


“하하, 하긴, 그렇구나.”

디쿠젠은 실없이 웃으며 서명한 확인서를 둘에게 넘기고는 다시 읽던 연애소설을 꺼내 든다. 착실한 비서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왕자의 환영연회에 참석하라고 부탁함으로써 얻어낸 자유 시간을 허투루 날리기 싫었던 것이다. 고장 났던 서재의 문이 깨끗하게 고쳐진 뒤로는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한 참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기말고사가 끝나면 슬슬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잖아. 너희는 어쩌기로 했나?”


“저는 전투마법사를 생각 중입니다.”


“저는 연구원으로 지원할 거예요.”


단호한 벤과 고도의 대답.


“흐음, 연구원이라.”


고도는 디쿠젠의 반응이 의아했다. 벤의 전투마법사를 거르고 자신의 연구원이란 직책에 더욱 관심을 보이다니? 저 인간이 저렇게 나오면 괜시리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왜 그러시죠?”


“음? 아니, 아니다. 그래······, 연구원이라. 나쁘지 않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책상 위로 뛰어올라 저 멱살을 붙잡고 ‘대체 또 뭐가 문젠데!?’라고 소리치고 싶은 고도였지만, 떨리는 입술과 함께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그럼, 저는 다시 보람찬 과외를 해줘야 하니, 달리 말씀하실 것 없으시면 이만 가볼게요.”


동시에 꾸벅, 하고 인사를 하며 서재를 나가려는 그들의 뒤로 다시 디쿠젠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아, 벤은 잠깐만 남거라. 조금 할 이야기가 있으니.”

고도는 바닷빛 눈동자를 불태우며 벤을 노려보았고, 그는 입모양으로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어깨를 으쓱한다. 결국 고도가 불안함만을 남기고 서재를 빠져나간 뒤에야 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디쿠젠의 책상에 다가갈 수 있었다.

“음, 다른 건 아니고 그냥 뭐 좀 묻고 싶어서 그러네.”

소설에서 눈은 떼지 않은 채로, 가볍게 입을 여는 디쿠젠.


“네에.”


“제르나비는 어땠나?”


“네에?”


벤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내려다보지만, 디쿠젠은 여전히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말 그대로, 요번에 제르나비는 어땠나?”


“어땠냐니······-.”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리며 부연설명을 요청한 벤이었지만, 디쿠젠의 입은 자신의 입이 열리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가 무슨, 어떤 분야의 대답을 원하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벤은 그냥 떠오르는 대로 답하기로 했다.

“그냥 뭐, 불평 없이 잘 따라와 줬습니다. 이리스도 잘 챙겨주었고.”


“흠, 그래?”

잠시 묘한 미소를 떠올리는 디쿠젠. 그가 글씨를 읽어 내려가던 눈동자를 잠시 멈춘다. 고도에 대해 무언가를 고민 중인가- 라고, 벤은 그 깊은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볼 때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요번에 자네에 관해 여러 가지를 듣긴 했는데, 자네······, 정말로 ‘전투마법사’가 되고 싶은 겐가?”


갑자기 자신에게 향한 총구에도, 벤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는다.


“흐음······, 뭐어, 정확히 말하자면 전투마법사로 ‘시작’하고 싶다는 거죠.”


“그렇군.”


대답과 동시에 다시 시선을 소설로 옮기는 그에게, 벤은 짧은 한숨과 함께 물었다.


“끝인가요?”


“응? 아, 그래. 묻고 싶은 건 이게 전부네. 가 봐도 되네.”


“네, 그럼.”

꾸벅- 허리를 굽히고 벤은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서재의 문고리를 잡는 순간, 그의 머리에 얼핏 스치는 한 가지.

그 짧은 순간에 그는 이것을 물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뒤통수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묘한 의구심에 결국 입을 열었다. 최대한 가벼운 어투로, 지나가듯이.

“총장님.”


“응? 뭔가?”


“혹시, 2, 3년 전쯤에 고아원에서 ‘인형’을 구입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벤은 곁눈질로 그의 표정을 살펴보려고 했지만, 디쿠젠의 얼굴은 여전히 소설책에 파묻혀 있었다.


“글쎄.”


그리고 들려온 그의 무심하고, 짧은 대답.


‘······부정하진 않나.’


벤은 대답에 대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문고리를 돌렸다.




***




‘죽겠다······.’


얼굴도 모르는 귀족이 내민 술잔을 억지 미소로 받아든 게 벌써 몇 번째던가.

휘황찬란한 음식과 술, 그리고 악단으로 채워진 대합실에 여태까지 로빈이 만난 ‘아는 얼굴’이라곤 잠시 얼굴을 비친 크라트와 올리뿐. 그런 그들마저도 자신들의 더러운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며, 술 한 잔만을 로빈과 나누고 사라져버렸다.

대놓고 언성을 높인 왕당파와 귀족파 귀족들 사이에 벌어졌던 약간의 혼란을 제외하면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연회였다. 정작 그 주인공인 로빈은 술기운과 어색함에 눌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를 구원해줄 얼굴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역시 억지로라도 벤을 초대했어야 했나- 라는 생각에 잠긴 로빈의 머릿속에 떠오른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후우······.”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한숨을 내뱉는 로빈. 곧이어 그는 오로메와 함께 나타나 덴쿠레라고 자신을 소개한 대학생이 경박한 몸짓으로 술을 권하는 것을 받아 마시며 다시금 억지웃음을 짓는다. 그가 동아리에 대해 뭔가를 신나게 설명하려는 찰나 오로메가 그를 끌어낸 덕분에 로빈은 간신히 그의 수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한잔이라도 더 술잔을 받으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가 올 것 같다고 느낀 그 순간, 로빈은 대합실이 다소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


그녀를 바라본 다른 귀족들의 반응도 로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엔 그녀가 누군지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지만, 곱게 아래로 빗어 내린 그 특유의 샛노란 머리카락과 사랑스러운 태양빛 눈동자, 매혹적으로 새빨간 입술, 살짝 분칠한 투명한 뺨은, 그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빛이었다.

수료식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지나는 순식간에 식장의 분위기를 바꿔놓는다. 어깨와 몸의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농염한 귀족풍의 드레스였기에, 귀족들이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로빈의 앞으로 다가와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리고 난 뒤였다.


“복귀를 축하드립니다, 전하. 검성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 관계로, 아뮤르가의 기사로서 이렇게 미숙하게나마 대신 축하의 말을 전합니다.”


“아······, 앗,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예쁘네.”


“그야, 오늘만큼은 예뻐 보이고 싶었으니까.”


마찬가지로 속삭이듯 쿡-, 웃는 지나. 그러나 어째선지 그 작은 말의 끝을 아련하게 흐려버린 그녀였다.

그 순간 자신의 표정만큼 ‘넋이 나갔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얼굴이 없을 것임을 로빈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기에 그는 달아오른 고개를 황급하게 돌려야 했다. 지나에게 빼앗겼던 사고와 집중을 되찾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자마자 들려오는 귀엣말들은 썩 유쾌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 저 아이가 그녀의 딸인가······?”


“하, 무슨 낯짝으로 왕자에게······.”


“가슈펠라르 놈들 표정 좀 봐. 볼만 하군!”


로빈이 그 괘씸한 목소리를 찾으려 고개를 돌린 순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지나를 보고 영력을 실으려던 입을 굳게 다물고 만다.

그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자리, 로빈의 곁에 있음으로 자신이 들어야 할 평가를. 자신의 어머니로 비롯된 그 모든 일들을. 그리고 대를 이어 둘에게 연결된 그 저주의 고리를.

그런 그녀에게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이, 로빈은 견딜 수가 없어 거칠게 술을 들이켰다. 그러나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머릿속이 비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갈증만 늘어가고 있었다. 그 갈증은 그의 목이 아닌 가슴에서 부르짖는 것이었다.

지나는 이 저주받은 고리에 얽매이는 대신 자신을 위해 검을 들겠다고 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로빈은 그녀에게 어떠한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지나가 그녀와 자신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눈물을 변명하는 순간에,

로빈은 반박하지 못했다.

진정으로 이것이 자신과 그녀를 위한 정답일지도 모른다고, 무심코 이성이 정해준 방향으로 마음속에 가라앉았다. 그는 그녀를 바로 앞에 두고도 그 정답을 거부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과, 정답을 알아채고 돌아선 그녀의 뒷모습이 기억나버린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왔던가.

그 절대적인 무능함이 싫어서, 그 고리를 보란 듯이 끊어버리기 위해서였다.

나는 아버지와는 다르다. 그리고 다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대로 간다면,


“······뭐가 달라.”


로빈의 검붉은 눈동자가 빛난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식장에 그녀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좀 더 멀리, 먼 곳을 향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하얀 드레스의 그림자가 접대실의 복도로 사라지는 것을 잡아낼 수 있었다.

로빈은 그의 목적지와 상태를 물어보는 모든 목소리들에게 술기운 때문에 피곤하다는 기계적인 답을 내뱉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사라진 지나의 뒷담화에 정신이 없는 귀족들은 왕자의 목적지에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그리운 향기를 밟아가며 그림자를 쫓아, 복도로 들어선다.

복도를 따라 수많은, 손님들을 위한 접대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로빈은 취기의 어지러움조차 잊어버리고 계속 안으로, 안으로 파고 들어간다. 그리고 흔들리는 사고의 끝에서, 이제 막 문이 닫히고 있는 방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로빈은 온기를 느낀다.

마찬가지로 맞은편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는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돌아가 줘. 난 괜찮으니까. 저들이 뭐라 하던, 난 괜찮으니까. 널 위한 식장에 네가 없으면 안 되잖아.”


너머에서 들려온,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밝은 목소리.

그러나 답하는 로빈의 목소리는 잔뜩 내리깔려 있다.


“상관없어.”


“······다시 말하지만, 난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너도 날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상관없어.”


“아니, 상관있어. 섭정이 말했어. 18년간의 그 고통을 다시 느끼게 하지 말아 달라고. 그리고 나도 동감이야. 나는 엄마랑은 달라. 하지만 결국엔 엄마와 똑같이 되고 말 거야. 그리고 너도-”


“상관없어.”


“왜 상관이 없어! 널 위해······, 우릴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잖아······. 모두가, 역사가, 시간이, 안 된다고 하잖아······.”




“······상관없어.”


로빈은 조심스럽게 가벼워진 문고리를 돌린다.

그에게 등을 내보인 채, 저만치에서 떨고 있는 지나의 가느다란 어깨와 허리가 로빈을 맞이한다.

그리고 조명이라곤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방에서 들려오는

얇은 눈물 소리.


로빈은 문을 닫고, 그녀에게 다가간다.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날 위해 네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하잖아······. 비참함만이 우리의 결실이 될 거야······. 우리의 목소리는 반복되는 역사의 탄식 아래 묻히고 말 거야······.”


“상관없어.”

로빈이 떨리는 그녀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낮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한다.

“사랑하니까.”


어깨의 떨림이 멈췄고, 로빈은 그대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자신과 얼굴을 마주보게 한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떨어지는 굵은 눈물방울을 손으로 훔쳐내느라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로빈은 그런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댄다.

촉촉한 눈이 마주치고,

곧이어 코가 스치고,


“상관없다고. 내가 널 사랑하니까.”


입술이 포개어진다.


운명을 거부하기 위해, 그를 밀어내기 위해 로빈의 가슴팍에 올렸던 지나의 양손이, 어느샌가 애타게 그의 옷깃을 쥐어 잡고 있었다. 눈물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달콤한 입맞춤 후에, 지나는 달빛을 등진 채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다시 아래로 숙인다.


“다시······, 다시 한번만 말해줘.”


“······내가 널 사랑하니까?”


“다시······.”


“내가 널-”


그대로 양손을 로빈의 목에 감싸며 지나의 붉은 입술이 로빈의 입술을 덮쳐온다. 장미와인의 향이 코끝을 맴도는 키스와 함께, 로빈은 눈물을 머금은 지나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 어떤 연회의 만찬보다 황홀하고, 그 어떤 연주보다 감미로운 목소리가 서로의 입술을 오간다. 눈을 떼지 못하는 명화를 바라보듯 눈동자에 서로의 얼굴을 담는다. 절대로 놓치지 않고 싶은, 따스한 정경이었으니까.

거친 호흡과 함께 둘의 입술이 잠시 안타까운 작별을 고하고, 로빈은 지나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을 풀지 않고서 그대로 구석진 침대로 다가가 그녀의 달빛으로 빛나는 몸을 다정하게 눕힌다.


“벗기긴 아까운 드레스인데.”


로빈이 지나의 입술 바로 위에서 속삭였다.


“······싫음 말고.”


달빛 아래서도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 얼굴로, 지나가 입술 바로 아래서 속삭인다.

이어진 입맞춤과 함께 로빈의 부드러운 손길이 지나에게서 드레스를 천천히 떼어놓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새하얀 피부. 그 부드러운 결을 스치는 한기에, 지나는 당황하며 손을 내린다.


“왜, 부끄러워?”


“다, 당연하지······, 워낙 상처가······-”


로빈은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는 지나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작게 웃는다. 그 표정이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서 그대로 목선을 따라 입을 맞추고, 가슴과 허리선을 따라 그녀의 피부에 새겨진 흉터들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예뻐. 전혀 흉하지 않아. 오히려 매력적이라구.”


“뭐, 뭐, 뭐라는 거야······. 빨리 올라와 얼굴이 안 보이잖아······.”


로빈은 웃으며 지나의 요구에 응해주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상처들을 보듬어 주면서, 천천히 그녀와 숨소리를 맞교환했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 아래에선 그 흉터들은 더 이상 흉터가 아니었다.

그들은 지나가 지나쳐온 모든 시간들이자,

그녀가 희생해온 모든 온기들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안고 가야 할, 이름의 짐이었다.

로빈은 이 굴곡들을, 눈물로 축축한 시간들을,

같이 안고,

보듬어주며,

자신의 온기와 목소리로 채워주고 싶었다.


몸이 몸을 원하는 욕망을 넘어, 그들은 서로의 영혼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지나······.”


깊은 입맞춤 뒤에 이어진 로빈의 작은 부름에, 지나는 양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는다.


“응······. 상냥하게.”

대답은 필요 없었다.

그의 검붉은 눈과 쑥스럽게 마주하는 지나의 샛노란 시선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깍지를 낀 두 남녀의 손가락 사이로 달빛이 피어오른다. 짧은 긴장과 두려움이 지나의 숨소리 사이에 섞여서 새어 나왔지만, 로빈은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운 손길과 숨결로 그 모두를 끌어안았다.


“읏······.”



그들에게 이어진 잔혹한 끈을 잘라버리며, 행복에 겨운 교성이 밤과 함께 어우러진다. 기쁨의 떨림이 멎지 않는 지나의 눈에서,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눈물이 새어나온다.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로빈은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붉은 고통이 남아있던 자리에 두 사람의 교감이 대신 자리를 잡는다. 뜨겁게 흘러들어오는 로빈의 체온과 목소리에, 지나는 그 기쁨을 견딜 수 없다는 듯 계속 뜨거운 눈물과 신음을 흘린다.

로빈의 입술은 계속해서 그녀의 눈물과 숨소리를 훔치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계속해서 속삭여주면서.



그리고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묘한 한기. 깊은 침묵. 로빈은 숙취에 가까운 두통과 함께 눈을 뜬다.

아직 작은 창문을 통해 선명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흐려진 시야 속에서, 사랑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지나······?”


손을 더듬어, 마지막까지 그녀와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던 그 자리를 짚어본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익숙한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다시금 쓰린 한기가 느껴져 침대 위를 더듬어보지만, 셔츠는 보이지 않고 외투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그녀의 드레스.

그것을 본 순간, 로빈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밀고 올라오는 불안감을 간신히 억누르며,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오늘만큼은 예뻐 보이고 싶었으니까.’


그녀의 무심했던, 그 말.

쉽게 흘려버렸던 그 말이 독이 잔뜩 발린 비수처럼 로빈의 가슴을 파고든다.

이 한기, 이 공백, 그리고 향기만 남겨놓은 채 두고 간 드레스.

이것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울먹였던 그녀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작별.


로빈은 그 향기마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어 드레스를 강하게 끌어안는다.

그녀의 온기는 더 이상 없다. 그녀의 향기는 흐려져만 간다.

그리고 그녀는 이곳에 없다. 명확했다. 모든 것이.

그래서 그는 그녀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참아야 한다.




‘그녀를 위하여.’





작은 창문 아래, 달빛을 품은 남자의 흐느낌이 작은 방을 채워만 갔다.



결국 그것만은 참을 수 없었기에.




***




“음? 누구신가?”

카나반 공화국의 검성, 아뮤르 한센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왕자의 귀환, 요동치는 권력의 흐름, 그리고 군의 정점에서 이제부터 자신이 취해야 할 모든 일들을 고민하고 있던 것이다. 새벽이라기엔 늦은 시간, 자신의 침실로 들어서는 낯익은 얼굴은 그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가움이었다.

“아이구, 우리 강아지가 이 시간엔 웬일로······-”

기쁜 얼굴로 침대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손녀에게 달려들 기세였지만, 그는 천장의 창에서 흘러들어오는 달빛 아래로 드러난 지나의 표정을 보고 말았다. 그 빛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손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그에겐 익숙했기에 더욱 슬픈 표정.


“하아-, 할아버지. 나 되게 노력했다?”

지나가 한숨과 함께, 가볍게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에 걸맞게 되기 위해서.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고 그에 걸맞은 업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엄마처럼은 절대로 살지 않기 위해서. 결혼 따위는 물론이고 누군가를 절대 사랑할 일은 없을 거라고 몇백 번이나 다짐하면서, 나 나름대로 되게 노력했어.

그러니까 이 마음도, 쉽게 져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 미련은 남지 않을 거라고.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내 안에 흐르는 피의 존재이유니까. 그리고 이건 나만이 아닌, 그를 위해서, 그를 위해서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할아버지······-”

그녀가 그대로 주저앉으며, 자신의 것이 아닌 셔츠 위로 가슴을 움켜쥔다. 그 손끝엔 너무도 간절한 영력이 담겨 있어 피부를 찢고 피까지 배어 나왔지만, 그녀가 가장 크게 고통을 느끼는 곳은 그보다 훨씬 더 안쪽이었다.

“나······, 여기가 너무 아파······. 너무 아파서, 무너져 내릴 것 같아······. 나 어떡해 할아버지······? 정말 이렇게 아파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이대로 살 수 있을까? 이대로 모든 걸 잊고 살 수 있을까? 나, 엄마처럼 미쳐버리는 건 아닐까? 어떡해 할아버지······? 나 너무 아파······. 그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아픈 거야? 응? 할아버지, 나 어떡하면 좋아······?”





‘그를 위하여.’





소리도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지나에게 다가가, 노인은 조용히 자신의 손녀를 안아준다. 그제야 지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 높여 울기 시작한다.

하지만 공화국의 검성조차도, 그녀의 떨리는 어깨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로서는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던 경험. 그리고 그것이 이어진 운명에 대한 측정할 수 없는 미안함.

검성의 굳은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진다.


“.......미안하다. 이 이름을 물려받게 해서, 정말 미안하구나······, 한나야······, 지나야······, 정말 미안하다······. 이 무슨 저주받은 운명이란 말입니까······, 세뮈엘이시여······.”




축복이 가득했던 밤하늘, 그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또 다른 방안에서, 또 다른 흐느낌만이 달빛과 어우러져 누군가의 가슴에 묻어만 간다.


작가의말

드넓은 창공 한가운데 버려진 파도 없는 물결

거친 바다의 심연 속에서 나는 너를 만난다

 

내 머릿속 흘러넘치는 파동 속에서 너는 미소지었건만

눈을 뜨고 지상으로 내려오면 네 미소는 나를 향하지 않는구나

그래도 나는 슬프지 않단다 원망하지 않는단다

시린 허상의 물결 속에선 언제나 나에게 미소지어주었으니까

언젠간 지상에서도 날 향한 너의 손짓이 닿을 거라 생각하니까

 

비록 우리의 흘러가는 이 물결이 허상이더라도

너의 미소가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 가는 걸 방관할 수밖에 없는 용기와 운명을 지녔더라도

지상의 너에게 미세한 온기하나조차 건네주지 못하더라도

 

-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그저 너를 바라볼 수 있고 푸른 바다 속 너와 함께 꿈의 도로를 질주할 테니까!

그저 나의 세계에서 너와만 웃을 테니까!

 

잔인한 운명의 고리가 우릴 경멸해도 고개를 끄덕여 줄게

이것이야말로 평생 동안 우리를 짓이겨줄, 잔인한 온기일 테니까

 

지상의 너를 바라보고

바닷 속 너에게 미소 짓는다

 

드넓은 창공 한가운데 버려진 파도 없는 물결

거친 바다의 심연 속에서 나는 너를 만난다

 

음유시인 에스더 올랑드르 作 「바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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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7) +10 14.09.23 2,257 63 21쪽
38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6) +11 14.09.22 2,654 93 20쪽
37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5) +17 14.09.21 2,539 81 19쪽
36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4) +14 14.09.20 2,617 73 21쪽
35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3) +11 14.09.19 2,642 84 25쪽
34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2) +23 14.09.18 2,691 96 19쪽
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2 84 19쪽
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3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6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28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5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0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7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0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2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2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3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5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698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2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4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3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3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3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2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7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6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1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7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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