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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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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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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4.09.18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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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글자
19쪽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2)

DUMMY

수도에서 접했던 술집들과는 또 다른 풍경.

전체적으로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똑같았지만, 어째 그 주범이 거친 목소리들뿐이었다. 그것도 얼굴에 잔뜩 검은색으로 위장한 거친 남자와 여자들로, 저마다의 무기를 철컹거리며 술잔을 부서져라 박아대는 그들의 행태는 고도에겐 영 어색하면서도 불편한 소란이었다.


“여기.”


그런 군상을 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벤이 술잔 세 개를 든 채 낑낑거리며 옆자리에 앉는다. 고도는 그중에서 와인의 향이 나는 잔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안고, 알콜의 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크랜베리주스를 왼쪽에 멍하니 앉아있던 이리스에게 밀어준다. 벤과 함께 리스에게 술을 먹여도 괜찮은가에 대한 짧은 토론 끝에, 결국 술은 아직 먹이지 말아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수렴한 덕분이었다.


“로빈은 아직도?”


분홍빛 입술을 와인으로 축인 고도의 질문. 벤은 그에 별다른 감흥 없이 어깨를 으쓱한다.


“으응. 벌써 3일이나 지났는데, 언제까지 침대에 박혀있을지.”


벤이 로빈의 병실에서 불타오르던 친구의 검붉은 눈동자를 본 뒤로 3일이 지났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그곳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곧바로 뛰쳐나올 기세이던 로빈이, 어째서 갑자기 아무런 만남도 허용하지 않고 그곳에 묶여있는지 벤으로선 알 방법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던 지나라는 이름의 기사, 어젯밤 그녀를 만나 로빈에 대해 물었지만, 그녀는-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했을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듣지 못했다. 그저, 차마 더 캐물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던 지나를 보고 대충 짐작할 수밖에.


“그나저나, 왕이라니······.”


짧은 숨을 내쉬며 턱을 괴는 고도.


“그러게.”


벤은 무심코 그런 그녀의 시선을 따라 쫓는다.


“······그럼 내 수색임무 보상은 도대체 얼만큼을 요구해야 하지?”


“그게 고민이었냐······.”


질린 표정을 하고 있는 벤의 얼굴을 돌아보며 고도가 큭큭 웃었다.


“당연하지! 일이 이대로 잘 풀리면, 난 끊긴 줄만 알았던 왕가의 혈통을 찾아낸 대학생이 되는 건데! 장학금으로 끝날 일이 아니야 이건.”


“고생은 드렌턴 아저씨가 다하고 있지만 말이지.”


“시끄러.”


주스의 건더기를 오물거리며 티격태격 다투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이리스의 동작이 멈춘다.

고도와 벤은 동시에 그것을 눈치채고, 더불어 떠들썩했던 술집의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은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술집의 허름한 나무문을 박차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난 게 원인이었다..

베르달에서의 첫날밤, 자신들을 추격대로부터 지켜(?)주었던 영주 크라트의 딸, 올리였다.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안에 있던 병사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자, 병사들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우르르 술집을 빠져나간다. 그녀의 시선이 구석에 있던 셋에게 닿았고, 큰 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벤은 무언가가 일어났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봐, 너희도 본궁으로 일단 와라. 잠만 자고 있는 왕자님을 깨워야 할 시간이야.”


“무슨 일이죠?”


남아있는 맥주를 깨끗하게 비우며 벤이 물었다.


“귀족파 대표 중 한 명인 윌리안 가슈펠라르가 사병과 용병을 소집 중이라는 첩보다. 목적은 뭐 뻔하겠지.”


성큼성큼 뒤돌아나가는 올리.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벤은 고도가 잔을 비우는 것을 기다린 뒤에, 곧바로 건더기에 집착하고 있는 이리스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어이, 왕자. 슬슬 일어나라.”

햇빛과 적막만이 가득했던 병실로 무거운 한기가 들어선다.

‘늑대’ 크라트는 ‘환자’의 의사는 상관없다는 듯이, 거친 발걸음으로 침대에 다가서며 무심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가슈펠라르가 군을 일으켰다. 목적은 왕가의 마지막 숨통. 너의 목이겠지.”


위협에 가까운 그의 전언에도, 로빈의 검붉은 눈동자는 그 어떤 흔들림이나 동요도 없이 오직 창밖의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라트는 거기서 더 나아가진 않는다. 보채지도 않고, 그를 끌어낼 생각도 없다.

그저 로빈이 눈동자에 담고 있는 하늘을 함께 바라볼 뿐.

로빈이 입을 열기 전까지 크라트는 자신의 한기 서린 목소리를 머금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대장님은, 어째서 저를 거두어주시고, 옹립하려 하십니까?”


결국, 로빈은 침묵을 포기하고 생기라곤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목소리로 크라트에게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고정한 채였다.


“옹립?”

그러나 로빈의 예상과는 달리 크라트는 크게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누가 널 옹립한다고 했나? 네가 왕이 되건 되지 않건 그건 너의 선택이지 나의 의지가 아니다.”


로빈은 천천히, 비웃음이 가시지 않은 ‘늑대’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렇다면 왜 저를 당장 베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친구였던 제 아버지도 서슴없이 나서서 베셨지 않습니까?”


뼛속까지 시릴 듯한 푸른 시선으로, 크라트는 고통이 남아있지 않은 환자의 얼굴을 노려본다.

“내가 그를 벤 것은, 내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부연은 필요 없었다. 이 대답이야말로 가장 깔끔한 설명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너져가는 친구와, 무너져가는 친구의 공화국. 그 모두를 지키기 위해 그가 해야 했던 최후의 행동.

그리고-,

“그리고 너를 거두어들인 이유는, 내 칼이 네 아버지의 목을 훑기 전에 그가 했던 마지막 부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약속을 받아들였을 땐 이미 늦어버린 뒤여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원히 지키지 못할 맹세라고 생각했지만.”


루디가 속죄의 기회를 주었다- 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어느새 로빈이 깊은 눈으로, 자신의 표정과 정면으로 맞대어 오고 있었으므로.


“그렇다면, 지금까지 지나왔던 그 모든 시간에도 불구하고, 대장님은 아버지와의 약속을 위해 제 옆에서 검을 드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베르달의 ‘늑대’, 크라트다.”

‘늑대’의 입에서, 모처럼 희미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지.”


크라트답지 않은 가벼움은, 오히려 크라트였기에 더욱 선명한 확신으로 다가온다.


“······그렇습니까. 그럼 우리에게나 저들에게나 이제 필요한 건 명분이겠군요.”

로빈이 자신의 하반신을 덮고 있던 새하얀 이불을 걷어낸다. 그리곤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발을 바닥에 딛고 몸을 세운다. 이미 등을 감싸고 있던 붕대는 풀어버린 상태였다.

“그건 제 목이면 충분하려나요?”


로빈의 씁쓸한 웃음. 그런 그에게 검집을 내밀며, 크라트는 낮게 웃었다.


“맘에 드는 명분이군, ‘왕자’.”




***




빛깔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칙칙한 돌벽.

어떠한 휘장도, 어떠한 문양도 허락하지 않는 영주의 회의실이었지만, 실내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인원과 새로운 얼굴이 즐비했다.

기다란 탕나무 탁자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영주의 상석을 중심으로 양옆에 참모를 비롯한 많은 지휘관이 착석을 완료한 상태였다. 처음 크라트가 자신의 자리를 로빈에게 권했으나, 로빈이 그를 정중히 사양하고 말단석을 자청하여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크라트가 그를 왕자라고 소개하기 전까진 누구도 그를 유심히 지켜보지 않았다.


“이야- 대장 한 건 하셨잖수! 왕자님이라니?”


“드디어 이 촌구석 생활도 꽃이 피겠구먼! 이봐 왕자님? 빵빵한 보급 좀 부탁혀요?”


참모들의 반응은 다른 의미로 폭발적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로빈에게 악수를 청해왔고, 술을 꺼내오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다 올리에 의해 저지당하는 자도 있었다.


“아, 요지는 그게 아니고. 다들 들었겠지만-, 저 왕자 때문에 가슈펠라르의 늙은이가 군대를 일으켰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모이라고 한 것이다. 좀 닥치고 앉아있어. 왕자 좀 냅두고.”


크라트의 만류에 그제야 회의실이 안정을 찾아간다. 그 와중에 로빈은 크라트의 입에서 가슈펠라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눈으로 지나를 찾고 있었는데, 그녀가 오즈카를 비롯한 다른 말단 기사들과 함께 탁자에서 멀리 떨어진 벽에 기대어,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명이 닿지 않는 구석이라, 정확한 그녀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규모는?”


올리가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회의의 시작이 될 만한 주제였기에 모든 시선과 이성이 대답하는 크라트의 입술로 모여든 것은 당연했다.


“서쪽의 예비연대를 맡고 있던 가문 소속 정규군까지 끌어모아 가슈펠라르의 이름으로 사병 약 5천. 페르난도 용병단 소속 1개 대대 약 1천. 동조한 귀족파의 사병이 약 3천. 예상 총병력이 도합 구천에서 일만으로, 2개 연대 규모다.”


“이쪽은 어떻습니까?”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로빈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지나가 얼굴을 보여주기를 원한 것이었지만, 그녀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는 일은 없었다.


“뭐, 이쪽도 재편하고 죄다 끌어모으면 비슷하게는 되겠지. 다만.”

크라트의 시선이 탁자 위에 펼쳐진 전술지도로 향한다.

“알다시피 우리는 두 개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게다가 아실레마 쪽에선 최근에 2군단의 그 미친년이 왔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어. 따라서 국경수비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남겨둔 채로 요격을 나간다면 가용한 인원은,"

그의 머릿속에서, 짧은 시간 동안 복잡한 계산이 이루어진다.

“3개 대대, 삼천 정도?”


동시에 주변에서 와아-하고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 울림에 당황한 로빈은 처음엔 이것이 자조적인 웃음인가 싶었지만, 그가 돌아보는 모든 얼굴에선 진심으로 즐거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의 정체를, 누런 이를 내보이며 소리치는 어느 남자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대장! 왕자님 앞이라고 물러터진 거요?! 그깟 안방에서 떵떵거리다 오는 귀족 놈들 잡는데 뭐 대대 세 개나 필요해? 두 개면 되지 두 개.”


그리고선 또 여기저기서 더욱 격한 웃음이 터진다.

로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그런 그들의 웃음소리 위로 크라트의 탄식이 나온다.


“멍청이들아, 내가 신경 쓰이는 건 귀족파 놈들이 아니라 페르난도 용병단이다. 그놈들은 얕봐선 안 된다. 충분히 야전에서 변수가 될 수 있는 놈들이야.”


“아~ 그러고 보니, 페르난도라면 블라고슬로바에서 날렸던 놈들이잖아? 해결사협회 소속의?”


“브린타이나나 우리나라 왕실 정규군에 정식 배속된다는 소문도 있던데, 용병단장이 이참에 한자리 꿰차려고 하나?”


저마다의 의견이 오가면서 회의실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제 논의의 중점은 요격하는 아군의 숫자가 아니라 그 장소에 있었다. 숲을 끼고 싸우자는 쪽과, 평야에서 싸우자는 쪽이 갈린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숫자가 적으니 지형의 이점을 살려서 싸워야 할 거 아냐?”


“무슨 소리야?! 숫자에선 밀려도 전력에선 밀리지 않는다고! 기사나 병사들이 마음 놓고 휘저을 수 있고 지휘하기도 편한 평야에서 싸우는 게 유리한 게 당연하잖아!”


마치 작전회의가 아닌, 소란스러운 시장바닥과도 같은 분위기.

로빈은 자신이 껴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잠자코 그 광경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즈카나 지나, 하파와 고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묘한 어색함을 뿜어내는 존재를 눈치챈 크라트가 낮지만 명확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거기 마법사,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


그의 목소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그 대상에게 향한다.

조명도 제대로 닿지 않는 탁자의 끝에서, 평온한 표정으로 손을 들고 있는 청년은 대부분의 참모들에겐 생소했지만 몇몇에겐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벤?”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읊조리는 로빈. 지목받은 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경악하고 있는 옆자리 고도의 표정을 한 번 돌아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숲에서는 전투를 벌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무심하고, 힘도 들어가 있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크라트만큼은 그 표정에서 단호함을 읽을 수 있었기에 곧바로 되묻는다.


“이유는?”


“숲과 나무. 이 정도면 설명이 되지 않을까요?”


짧은 고민 후에,


“······하, 과연 그렇군.”


크라트가 웃는다.

하지만 벤의 대답과 크라트의 웃음을 이해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금 벤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으로 그의 입을 열게 할 수 있었다. 결국 답답한 표정으로 덥수룩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설명을 시작하는 벤.


“그러니까, 숲을 끼고 싸우기보다는 숲과 나무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싸우는 편이 낫다는 말입니다. 즉, 드루이드와 페어리, 나아가 엘론족에게도 점수를 딸 수 있는 기회로 보자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아실레마가 대규모로 이쪽을 침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숲이라는 천연보호막이 껄끄럽고, 그 숲을 자신들이 불태워버렸을 때의 후폭풍이 귀찮기 때문이잖아요? 그 점을 저들에게도 최대한 이용하자는 겁니다.”


짧은 침묵 후에, 곧바로 수긍하는 감탄의 소리가 회의실을 채우기 시작한다.


“음, 과연. 이렇게 빚을 만들어 놓으면 후에 아실레마 놈들이 작정하고 쳐들어올 때 더더욱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어.”


“명색이 나무의 깃발을 내걸고 싸우는데 숲을 더럽힐 수는 없지.”


마침내 모든 참모의 의견이 통일되는 순간이었다. 로빈은 고개를 돌려 벤과 눈을 마주치며 큰 미소를 내비쳤고, 벤은 그런 로빈을 향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자, 그럼 전장은 베르메스 평야로 정하겠다. 각 대장들은 수비대와 요격대 편제 다시 수정해서 제출하고, 보급계획과 진지구축계획 세워서 오늘 밤까지 집무실로 갖고 와. 출격은 놈들의 움직임에 따라 유동적으로 하겠다. 해산!”


로빈은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참모와 기사들을 헤쳐 가며 그가 잡은 것은, 막 회의실을 빠져나가려고 하던 지나의 손목.

로빈은 지나와 함께 있던 오즈카에게 고갯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그녀를 끌고 회의실 반대편에 있는 빈 접대실로 향했다.


“내일 보자고 했으면서, 오지도 않았잖아.”

자신의 그림자에 가려진 지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로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질책이라기 보단 가벼운 농담에 가까운 어투였으나, 그녀는 어떠한 표정도 내비치지 않은 채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을 뿐.

그 짧은 침묵을 견딜 수가 없어 로빈은 그녀의 상처투성이의, 부드러운 손을 붙잡는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지나.”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작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더할 나위 없이 편한 미소.

하지만 로빈은 그 편한 미소에, 가슴의 어딘가가 찢기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어째서 경어를 쓰는 거야······?”


“근위기사로서 왕세자에게 그 본분을 다할 뿐. 왜냐고 물으셔도,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넌 그걸로 괜찮아? 지금 내 목을 치겠다고 달려오는 사람, 따지고 보면 네 할아버지잖아? 내 옆에서 검을 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는 있는 거야?”


로빈이 그녀의 양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그의 눈동자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지나는 다시 고개를 떨구며 편안한 목소리를 흘린다.


“왕이 되실 분에게 충성합니다. 제 피 속에 어떤 이름이 흐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


“중요하지 않다면 왜 아뮤르라는 이름으로 날 대하는 건데?!”


결국 로빈은 소리를 지르며 지나의 어깨를 더욱 강하게 다그친다.

그림자 속에서 올라온 것은,

가득 투명한 눈물을 담고 있는, 그녀의 태양 같은 눈동자.


“전-, 한 자루의 검······. 검으로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그 이외는······, 아무것도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제게 원할 수 있는 건 오직 제가 죽을 장소. 그것만을 명령하시면 됩니다.”


끝내 눈물을 삼키며, 제복의 소매로 살짝 넘친 그 흔적을 닦아내는 지나.

그녀는 똑바로, 로빈의 흔들리는 검붉은 눈동자를 바라본다.

다른 어떠한 말도 듣지 않겠다는 듯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로빈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곳에 서 있는 한, 그 절대적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한,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로빈은 천천히, 그녀의 뺨을 어루만진다. 그녀가 그 손에 입술을 맡기고 싶어 하는 바람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리고 그 바람을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부탁할게. 절대로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죽지 마. 죽는다면, 반드시 내 곁에서 눈을 감도록. 그 외의 장소에서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어.”


지나가 로빈의 손을 잡아 내리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허리를 굽힌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접대실을 빠져나가는 지나의 그림자조차 붙잡지 못하고, 로빈은 긴 한숨과 함께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린다.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고서. 절대적이기에 한없이 무력한 자신의 굴레를 탓하면서, 그는 절규를 삼킨다.


“······로빈.”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목소리는, 여전한 무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벤.


“아아, 벤! 아까는 쩔더라! 넌 언제 그런 공부를 다-”

로빈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온 벤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찬다. 참으로 허약한 그의 일격이었지만, 기사로서 어떠한 대비도 하지 않았기에 로빈은 비명과 함께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야-! 무슨 짓-”


“넌, 왕이 될 사람이야.”

로빈이 따지기 위해 고개를 들었지만, 그 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친구의 표정이었다.

“네가 네 입으로 답이라고 말했어. 네가 원하는 것이라고. 어쨌든 넌 수많은 이름을 네 이름에 지고 나아가야 할 입장이 되었어.”


“······.”


“멋대로 눈물을 보이지 마. 멋대로 상처를 만들지 마. 어떠한 상처가 생기든, 너에게 이제 눈물은 허락되지 않아. 그런 모습은 더 이상 모든 사람이 올려다볼 수도 없고, 보게 되어서도 안 되는 거야. 이제 곧 너를 위해 죽어갈 사람들이 저 밖에 있어.”


고개를 숙이는 로빈을 잡아끌다시피 일으켜 세우며, 벤은 나직이 말을 맺는다.





“너에 대한 그들의 각오를 헛되게 하지는 마라, 로빈. 그 중엔 나도 있으니까.”


작가의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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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3

  • 작성자
    Lv.88 百花亂舞
    작성일
    14.09.18 21:35
    No. 1

    재밌게 보고 갑니다. 좋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18 21:37
    No. 2

    백화난무님 항상 감사합니다~
    맘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5 조쉬라이먼
    작성일
    14.09.19 01:41
    No. 3

    지나와 로빈..어떻게 안되겠습니까?ㅠㅠ
    요즘 가장 기다리는 글입니다 감사해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19 02:07
    No. 4

    조쉬라이먼님 재밌게 봐주신다니 감사드립니다 ㅠㅠ
    지나와 로빈은..... 어찌 될런지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4 주정
    작성일
    14.09.27 12:52
    No. 5

    멋쟁이 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27 13:04
    No. 6

    힘이 안되니 말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눈솔
    작성일
    14.10.04 23:09
    No. 7

    박력 넘치게 여자를 잡아!를 기대햇는데.. 흑.
    왕의 의무를 다해야하나요 ㅠㅠ 그냥 둘이 잘됫으면 좋겠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0.04 23:10
    No. 8

    눈솔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저도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5 아라짓
    작성일
    14.11.02 22:41
    No. 9

    ",그렇다면 왜 저를 당장 베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내] 친구였던 제 아버지도 서슴없이 나서서 베셨지 않습니까?"
    -> 내는 빠져야 맞는듯 합니다.
    "[공화국]을 받드는 기사로서, 왕세자에게 그 본분을 다할 뿐. 왜냐고 물으셔도,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읽어본 바로는 아직 왕국인데 [공화국]은 좀 이상해 보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1.02 22:48
    No. 10

    앗 아라짓님 지적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약간 복합적인 정치형태로, 일단 명칭은 공화국으로 설정된 상태입니다. 사실 따지고보면 100%왕국도, 100% 공화국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3 패스트
    작성일
    14.11.20 13:20
    No. 11

    공화국에는 왕이 없기 때문에 왕세자를 받는 게 본분이라고 볼 수는 없죠. 그냥 '기사로서'만 들어가면 문제 없어 보이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1.20 14:09
    No. 12

    아아 그렇군요! 제가 요지를 잘못이해하고 있었네요.. 지금 보니 대사의 의미자체가 앞뒤가 안맞는....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5.01.16 00:08
    No. 13

    와 진심 쩐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1.16 03:31
    No. 14

    에볼루션님 계속해서 감사드립니다 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9 궤도수정
    작성일
    15.05.21 14:57
    No. 15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6.25 02:23
    No. 16
  • 작성자
    Lv.99 니푸르
    작성일
    15.06.23 23:16
    No. 17

    좀 심하게 재밌습니다^^ 이런 보물들이 숨어 있어서 망할 서버에도 불구하고 문피하 올수 밖에 없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6.25 02:22
    No. 18

    라루사님 계속해서 감사드립니다!
    보물이라니 과찬이세요 ㅠ 그나저나 서버때문에 다들 고통받고 계시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5 미소녀세라
    작성일
    15.07.18 15:37
    No. 19

    벤이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7.18 18:33
    No. 20

    벤도 주인공! O_o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0 에크나트
    작성일
    16.02.13 05:49
    No. 21

    여러 주인공이라니..개인적으론 여러주인공이라는건 다중인격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같은 사람에겐 소설에 몰입감을 해치는 요소죠. 아니 몰입을 할수가 없죠. 그냥 이야기를 따라갈뿐이지 나가 한명이듯 주인공도 한명..뭐 저는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론..굉장히 아쉽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2.13 19:48
    No. 22

    에크나트님 진중한 의견 감사드려요!
    어설픈 군상극이라 몰입에 방해가 되셨나봐요 ㅠ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 수작수집
    작성일
    17.05.06 15:50
    No. 23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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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3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3) +16 14.09.26 2,864 69 16쪽
42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2) +18 14.09.25 3,033 73 14쪽
41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1) +20 14.09.24 2,442 63 21쪽
40 (막간) 구원 +18 14.09.23 2,469 59 10쪽
39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7) +10 14.09.23 2,258 63 21쪽
38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6) +11 14.09.22 2,655 93 20쪽
37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5) +17 14.09.21 2,540 81 19쪽
36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4) +14 14.09.20 2,619 73 21쪽
35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3) +11 14.09.19 2,643 84 25쪽
»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2) +23 14.09.18 2,693 96 19쪽
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4 84 19쪽
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4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9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30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8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2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9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2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5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4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5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6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701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3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5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4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4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4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3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8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7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2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8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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