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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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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4.08.26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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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DUMMY

“앗, 죄송합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너무 의식해서 피하려다 오히려 반대편 사람에게 부딪친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반응은 똑같이 대답 없는 싸늘한 시선뿐.

도시인파로 물든 거리가 익숙하지 않은 촌놈에게 베풀 선의 따위,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로빈은 그 싸늘함마저 만끽하고 있었다.

드렌턴에게 소개받은 여관 ‘은벽의 낭만’은, 역시나 아저씨 취향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도시적이지 않고 고전의 향이 늘씬하게 깔린 곳이었다. 그러나 그런 풍미는 로빈에겐 숲내음만큼이나 지루했기에, 그는 그곳에서 배만 채우고(물론 도시의 기름진 음식은 끔찍하게 맛있었다) 서둘러 거리로 나온 것이다.

회색빛 도시에서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많은 건물과 노점상, 모든 유흥거리를 제치고 처음으로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지상전철의 정류장. 그곳에서 남색 정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매표소직원에게 한참의 설명을 들은 후에야 그는 손에 정기권 하나를 쥘 수 있었다.

손가락 두 개 크기의 얇고 딱딱한 물건이었다. 처음 접하는 물건에 대한 감상덕분에, 어설픈 시골청년은 자신이 이미 뒤로 줄을 서있는 사람들로부터 차가운 회색빛 짜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환승’이라는 개념을 재차 직원에게 물으려 했지만, 결국 기다리던 사람들의 온갖 짜증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전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잿빛 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가죽좌석, 그리고 로빈에겐 충격인 이 모든 것이 자신들에게는 그저 지루한 일상이라는듯 무표정한 사람들. 그들의 죽은 표정과 무거운 침묵 덕분에 로빈이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거대한 ‘기계’의 움직임으로 경악하는 시간은 더없이 짧아진다.

로빈은 친절한 매표소 직원의 설명대로 입구 위에 그려진 노선도를 찾았다. 모든 정보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불쾌도 필요 없이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로빈은 약간의 씁쓸함을 삼켰지만, 덕분에 자신이 가는 방향이 어디인지, 지금 무시무시한 쇳소리를 내며 열리는 저 문으로 빠져나가야 할 때임을 알 수 있었다.


“하- 저게······.”


결코 길지 않았지만 원대했던 여정의 끝에서, 로빈은 기분 좋게 말을 삼킨다.

그가 도시 사람들을 괴롭히며 도착한 곳은 주변의 샛길들을 한곳에 모으고 있는 거대한 광장이었다. 도시에 들어서면서 보았던 온갖 장소 중에서도 단연 가장 넓은 곳이었다.

물론 단순한 공터는 아니었다. 곳곳에 긴 의자와 가로수가 놓여있어 회색에 지친 도시인의 감성을 달래주고 있었다.

이 거대한 광장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요소는 역시 중앙에 놓여있는 거대한 분수. 원형 대리석이 꽤나 높은 층을 이루고 있어서, 힘껏 고개를 들어야 꼭대기에 놓인 빨간색 탕나무 장식을 시야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웅장했다.

무지개를 만들며 낙하하는 폭포들 안에서부터 층마다 다른 명도의 조명이 물길을 비추었기 때문에, 마치 금가루가 날리는 듯한 풍경이었다. 그 모든 것이 매력적이기는 했지만, 붉은 기가 감도는 로빈의 눈을 사로잡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광장의 북쪽, 나선형의 언덕길로 향해있었다.

그곳은 마치 도시의 중간에 뜬금없이 우뚝 서있는 산처럼 보였다. 광장이 끝나는 그 지점부터 시작된 굽이길이 뱀처럼 언덕을 휘감고 올라가는 형상이었다. 그 높은 정상에는 여러 건물이 있는 듯이 보였으나, 그 언덕이 워낙 높고 넓었던 탓에 정확히 판별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로빈은 그곳이 자신이 찾던 곳임을, 언덕길이 시작하는 광장의 끝에 새겨진 표지판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수습기사 훈련소’


물론 정식입소는 드렌턴이 모든 서류작업을 마치고 돌아와야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은벽의 낭만’에서 식사를 마친 로빈은 문득 자신의 운명이 정해질지도 모르는 장소가 궁금해졌고, 결국 구닥다리 여관에 앉아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그냥 한 번 와보고 싶었다- 라는 가벼움이었다.

하지만 훈련소(정확히는 언덕길의) 입구는 외벽의 검문소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중한 경비태세를 보이고 있었다. 오늘은 먼 치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생각에 로빈은 입맛을 다셨다.

분위기에 휩쓸려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이 전혀 모르는 분야에 자신이 전혀 모르는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성급히 발을 내미는 일이다.

막상 눈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이 묘한 기분을 단순히 미지의 세계를 향한 설렘이라고 치부했었지만, 이렇게 직접 머리에 담고 보니 그 한편에는 역시나 불안이 숨 쉬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아티카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다. 계기라는 것은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역시 지금 저 언덕을 보고 거칠게 뛰는 이 심장은 불안보다는 기대라는 피를 전신에 뿌려주고 있다. 따로 긍정적인 암시를 걸려고 하지 않아도 먼저 반응해버리는 몸에,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지어본 적 없는 요상한 미소를 피어내고 있었다.


“거기, 촌놈 기사.”


가까이서 들려온, 밝고 높은 목소리.

흠칫 놀란 로빈은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로빈의 눈을 자극한 것은, 찬란하지만 지저분하다는, 서로 이질적인 함께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노란 머리카락.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온 그 빛은 분명 화사했지만, 샛노랗다기보다는 황금색에 가까운 미묘한 무게감을 지닌 머리카락이었다.

그 화사함에 대해 지저분하다고 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빗질이라곤 평생 하지 않은 듯이 여기저기 뻗친 잔머리들 때문이었는데, 이마를 대부분 덮고 있는 앞머리조차 아무렇게나 한쪽으로 넘겨버린 느낌이 강했다.

그 아래로 머리색보다 훨씬 돋보이는, 태양과 같은 눈동자가 로빈의 눈을 간지럽힌다. 그 안의 동공은 너무도 얇아서, 마치 대낮의 고양이를 보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섬뜩함이었다. 거기에다 눈꼬리까지 살짝 올라간 인상이었으니, 로빈은 눈앞의 이 여인이 자기보다 훨씬 작은 체구를 지녔음에도 이쪽을 내려다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살짝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코와 입술에 하얀 무언가를 마구 묻혀놓은 상태였다. 반액체로 보이는 새하얀 그것은 햇빛을 받아 수정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출처가, 여자의 왼손에 들려있는 작은 용기에서 나왔음을 로빈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로선 처음 보는 물건이었으나, 그녀의 코와 입술에 묻은 것을 보아하니 그 용도는 대강 짐작이 간다.


“오-, 그거 맛있어 보인다. 이름이 뭐야?”


난생 처음 보는 금빛의 머리카락, 구름처럼 하얀 피부를 지닌 여자의 존재감, 그리고 그 눈빛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거만한 태도, 갑작스러운 반말-, 등등을 모두 제치고 가장 먼저 로빈의 관심을 끈 것이,

다름 아닌 그 용기 안의 내용물이었다.


“······뭔 이름?”


소녀라고 불릴 나이는 벗어난 듯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든다. 그녀는 고개조차 움직이지 않고 그 매서운 눈동자만으로 자신의 손과 로빈의 얼굴을 훑는다. 그녀가 묻고자 하는 것은, 어느 쪽의 이름이 궁금하냐는 것일 테지만-


“그거 말야, 그거."


로빈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투명한 용기 안에서 서서히 녹아가는 하얀 물체.


“······이건 요거트 아이스크림이란 것인데에에-”


그녀는 말을 끊지 않고, 반대편 손으로 용기의 바닥에서 작은 일회용 숟가락을 뽑아내었다. 그녀는 그것을 사용하는 대신 코와 입을 박아서 내용물을 먹고 있었을 터.

그녀가 내용물을 한가득 담은 숟가락을 로빈의 입을 향해 내밀었고, 로빈으로선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지만, 장난기 가득한 그녀의 미소와 코끝을 간질이는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를 견디지 못하고 덥석 받아먹고 말았다.


“오오······.”


맛있다-라는 말마저 잊어버릴 만큼 충격이었다. 이렇게 차가운 음식은 처음 접해보는 그였다. 게다가 이 달콤함과 새콤함, 그리고 묘하게 중독되는 향까지.


“너, 수습기사 후보생이지?”


황홀경에 빠진 로빈의 표정 위로 그녀가 물었다. 그녀는 동시에 아이스크림이 담긴 용기로 새빨간 혀를 내밀었는데, 능숙한 혀놀림으로 아이스크림의 표면을 핥아낸 그녀의 코와 입술은 다시금 차갑게 반짝이고 있었다.

저런 걸 내게 먹였나-라는 생각이 스쳤으나, 로빈은 더럽다는 생각 대신 다소 야릇한 기분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응, 어떻게 알았어?”


“그야, 멍청한 표정으로 영력을 감출 생각도 안 하고 훈련소를 노려보는 수상한 인간은 후보생 외엔 없으니까.”


“아, 그럼 너도······?”


노골적인 그녀의 비웃음 너머로, 드렌턴이 고도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분명, 기사나 마법사는 서로를 식별할 수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에게선 묘한 거만함 외에는 어떠한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두 어깨끈으로만 형태가 유지되고 있는 새하얀 원피스를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며 나타난 이 여자가-


“근처에선 보기도 힘든 촌놈 행색에, 어설픈 영력이나 질질 흘리고. 대충 그림은 그려지네. 아무리 촌놈이라도 ‘영력감추기’ 정도는 하고 다니라구. 보는 내가 다 불안해. 넌 모르겠지만 저기 있는 기사들이 다 널 노려보고 있을걸.”


그녀가 가리킨 곳은 방금까지 로빈이 바라보고 있던 언덕길의 입구였다. 기사단의 훈련소답게, 경비도 일반 병사가 아닌 기사들이 담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혀 그 사실을 몰랐음은 물론, 하나 더 부끄러운 사실을 들켜버린 로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을 수밖에 없었다.


“와, 설마-”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끊임없이 멍청해지는 로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터진 놀라움이 과연 본심일지, 아니면 과도한 조롱의 의도였는지는 로빈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아니, 영력 감추는 것도 몰라~? 이야, 너 어디 지도에도 없는 시골에서 발굴돼서 온 거야?”


‘묘하게 날카롭네······.’


로빈은 대답대신 다시금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붉은 모래의 가도를 달리면서 드렌턴은 승마에 관한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았지, 기사에 관련된 이야기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호기심에 로빈이 묻기라도 하면 ‘가면 다 알아-’라고만 둘러댔을 뿐.

결국 왕년에 잘나갔던 기사라는 아저씨에게서 배운 거라곤 말 위에서 혀를 깨물지 않는 방법뿐이었다.


“아휴, 좋아. 내가 알려줄게. 자, 간단해.”

그녀가 숟가락으로 로빈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말했다. 로빈의 의사는 이미 상관이 없는 듯했다.

“이건 영력운용의 심화과정을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거야. ‘기분’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우려나? 아무튼, 한밤중에 네가 벌거벗고 길을 걷고 있다고 상상해봐. 그런데 갑자기 네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서 주변이 밝아져. 그리고 사람들이 네 비실한 몸을 보고 비웃기 시작하는 거야. 그럼 네가 해야 할 행동은 뭐겠어?”


이상한 예시라고 생각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어, 음, 빛을 감춰야겠지?”


“그래. 바로 그 ‘쪽팔리는 기분’을 상상하고, 지금 그 느낌 그대로 한다고 생각해봐.”


“으음······.”


로빈은 그녀의 말대로 최대한 민망한 상황을 상상하려 애쓴다. 너무 몰입한 나머지 살짝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제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그였다.


“응, 그거야. 항상 그 감각을 유지하도록 해. 기사로서의 기본이라구, 기본.”


마치 강아지를 칭찬하듯 대견해하며 아이스크림을 핥는 그녀.


“으음, 항상 이렇게 부끄러운 기분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흐응? 불만이야? 그게 정석인데?”


“······.”


로빈은 마지막 말을 삼켰다. 어느새 그녀가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하얀 원피스를 나부끼며 그에게서 멀어져갔기 때문이다. 짧은 만남, 하지만 미묘한 미련에 그가 그녀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그녀가 먼저 아이스크림이 잔뜩 묻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럼, 3일 뒤에 보자~.”


“3일 뒤?”


어벙한 표정으로 되묻는 그에게, 그녀는 노란 머리 위로 크게 손을 흔들고는 새빨간 혀끝을 살짝 깨물며 웃었다.


“난 3일 뒤에 네 동기가 될 사람이란다~? 아, 참 아이스크림은 저쪽 가게에서 팔아. 너무 많이 먹지는 마~”


“오! 그래? 고마워!”


아이스크림이라는 소리에 로빈은 몸이 먼저 반응하여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가진 돈으로 얼마나 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맛이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 맞다. 이름을 안 물어봤네.’


문득 그녀가 걸어간 방향을 돌아봤지만, 넓은 광장에 이미 황금빛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멈춰 주변을 모두 둘러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묘하게 으스스한 기분이 든 로빈이었다.


‘······3일 뒤.’


아이스크림을 즐길 틈도 없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그는 가게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




“······왜 그러냐?”


드렌턴이 여관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반쯤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침대에 쓰러져있는 로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으윽······, 아이스, 아이스크림을······.”


“아이스크림?”


드렌턴이 로빈의 신음이 흐른 곳으로 눈을 돌리자, 탁자 위에 투명한 용기가 수북히 쌓여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신음보다 걸쭉한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차는 드렌턴.


“야 이 멍청한 놈아, 아이스크림을 이렇게 한꺼번에 처먹으면 당연히 배탈이 나지.”


“몰, 몰랐어······.”


연신 앓는 소리를 내는 로빈의 얼굴 앞에 드렌턴이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뭐냐고 묻는 대신에 처참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로빈.


“네 신분증명서랑 입영통지서다. 보증인은 내 이름으로 되어있어. 통지서엔 훈련소 일정이랑 준비물이 써있으니까 준비해. 입소는-”


“3일 뒤지?”


거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빈을 내려다보는 드렌턴.


“어떻게 알았어?”


“으, 아까 오후에 광장에서 동기가 될 아이를 만났어. 이것저것 들었지.”

그리곤 비어있는 아이스크림 용기를 가리킨다.

“저것도······.”


‘너무 많이 먹지는 마’라던 그녀의 가벼운 충고를 좀 더 무겁게 들었어야 했다고, 로빈은 후회하는 중이었다.


“흠, 걔한테서 영력지우기도 배웠냐?”


“어, 티나?”

로빈의 창백한 얼굴에 잠시나마 화색이 도는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간단하던데.”


“뭐어, 그렇지.”


드렌턴은 짧게 대답한 후 맞은편 침대에 앉는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어보려던 로빈은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가벼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근데 아저씨, 노란색 머리가 흔하진 않은 거지?”


“······노란색 머리? 금발?”


로빈은 곧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언뜻, 드렌턴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늘은 로빈이 확실히 인지하기 전에 곧바로 사라졌지만, 그 흔적에서 오는 묘한 위화감을 로빈은 놓치지 않는다.


“어, 응. 아까 말한 그 동기라는 애가 노란, 그니까 금발이었거든. 도시에 와서도 처음 보는 거라, 혹시 다른 인종인가-해서.”


로빈은 다소 어색한 침묵을 예상했으나, 드렌턴의 대답은 의외로 신속하게 돌아왔다.


“그 애는 귀족일 거다.”


“귀족?”


“그래. 이 나라, 카나반 공화국에는 왕족 말고 의회를 구성하는 네 가문의 정통귀족들이 있다. 그중 가슈펠라르 가문이 화려한 금발과 소름 끼칠 정도로 붉은 눈동자로 유명하지.”


“흐음?”

로빈이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아니, 금발이긴 했는데 붉은색 눈동자는 아니었어.”


“허어?”


살짝 미간을 찡그리는 드렌턴.


“응. 분명 노란색이었어. 머리보다도 밝은 노란색.”


“······그래?”

드렌턴이 미묘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단순히 가슈펠라르 가문의 피가 섞인 아이일 수도 있겠군. 뭐, 중요한 건 아니니.”


로빈도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의 내용물을 꺼냈다.

드렌턴이 준비하라고는 했지만, 통지서에 명시된 바로는 대부분의 물품을 훈련소에서 지급해 주는 것으로 나와 있었기에 별도로 발품을 팔 필요는 없어 보였다. 밑에는 간단한 약도와 함께 훈련소로 오는 방법이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이미 한 번 가봤으니까.’


라고 생각하며 통지서를 봉투로 다시 집어넣으니, 눈앞에 드렌턴의 거친 손바닥이 보였다. 그 위에는 은색으로 반짝이는 동전 3개가 놓여있었다.


“혹시 모르니 가지고 있어라.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먹고, 가고 싶은 데 있으면 가고 말이야.”


“어, 고마워 아저씨.”


마치 영원한 작별을 하는 사람들처럼 무겁게 눌리는 분위기에 로빈은 마냥 기뻐하지는 않았다. 그의 표정을 눈치챈 드렌턴이 헛기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난 지금 바로 입성한다. 네가 입소하는 건 아마 못 볼 거야. 퇴소에 맞춰서 너한테 연락하마.”


“뭐야, 난 또 뭐라고. 훈련소인데 별일 있겠어? 너무 걱정하지 마.”


익살스러운 로빈의 말에 드렌턴은 혹시나 자신의 의중을 들켰나 싶어 연신 컷흠-하며 헛기침을 해대었다.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니까. 몸조심하고. 뭐든 너무 앞서가려고 하지 말고, 딱 중간만 해 중간만. 알았지?”


“어중간한 건 내 특기니까.”


로빈이 웃었다. 드렌턴은 잠시 로빈의 검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마지막 헛기침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언제 봐도 참 굳센 손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로빈은 그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남자 대 남자로서, 기사 대 기사로서의 첫인사였다.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방을 나가려는 드렌턴의 뒤로 로빈이 물었다.


“아, 그건 그렇고 아저씬 어디서 복무하는데?”


드렌턴은 씨익-, 특유의 걸걸한 미소를 지으며,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대답한다.


“곧 알게 될 게다.”


작가의말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5

  • 작성자
    Lv.22 렉쩜
    작성일
    14.09.15 16:33
    No. 1

    훈련소 들어갔는데 조교가 아는사람!근데 나만 집중적으로 굴린다! 생각만해도 씐나네요! 아이 씐나!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15 17:52
    No. 2

    으잌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4.09.21 23:41
    No. 3

    다이어트 중인 독자에게 아이스크림을 묘사하시다니... 그것도 요거트....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21 23:49
    No. 4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레허닝님!
    그, 그럼 저지방이란 설정으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4 주정
    작성일
    14.09.25 10:02
    No. 5

    훈련소 입소해서도 드렌턴에게 편하게 반말하려나요 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25 12:02
    No. 6

    주정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설마요 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8 나카브
    작성일
    14.10.31 14:20
    No. 7

    거기 로빈 교육생 차렷합니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답 소리 작습니다. 목소리 크게 합니다! 교관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후다닥)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0.31 14:41
    No. 8

    탈영시킬 셈입니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5 미소녀세라
    작성일
    15.07.10 11:22
    No. 9

    앞으로 굴려지는 소리가 들리네요 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7.10 13:33
    No. 10
  • 작성자
    Lv.99 시드씨드
    작성일
    16.02.17 23:32
    No. 11

    성급을 -> 성급히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2.19 16:14
    No. 12

    시드씨드님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몽중정원
    작성일
    16.04.09 00:34
    No. 13

    아티카로 돌아갈 생각은 말끔하다
    -> 아티카로 돌아갈 생각은 이미 말끔히 없어졌다

    '말끔하다'의 사용이 좀 미묘하게 느껴지네요. 말끔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티 없이 환하게 깨끗하다'인데 이는 주로 물리적인 깨끗함을 뜻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더럽히는 원인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죠.
    즉, 작가님은 '아티카로 돌아갈 생삭은 깨끗이 사라졌다'라는 뜻이겠지만 '깨끗이 사라졌다'를 '말끔하다'로 치환하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티카로 돌아갈 생각'은 깨끗한 백지 상태가 아닌 이를 더럽히거나 방해하는 원인 또는 오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티카로 돌아갈 생각'으 '오물'로 치환하면 '오물은 말끔하다'라는 문장이 됩니다. 치환된 문장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니 말끔하다의 사용이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04.11 21:29
    No. 14

    몽중정원님 계속해서 감사드립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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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 수작수집
    작성일
    17.05.06 15:49
    No. 15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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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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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3) +16 14.09.26 2,863 69 16쪽
42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2) +18 14.09.25 3,032 73 14쪽
41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1) +20 14.09.24 2,442 63 21쪽
40 (막간) 구원 +18 14.09.23 2,469 59 10쪽
39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7) +10 14.09.23 2,258 63 21쪽
38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6) +11 14.09.22 2,655 93 20쪽
37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5) +17 14.09.21 2,540 81 19쪽
36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4) +14 14.09.20 2,618 73 21쪽
35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3) +11 14.09.19 2,643 84 25쪽
34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2) +23 14.09.18 2,692 96 19쪽
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4 84 19쪽
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4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8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30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7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2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8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1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4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4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5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6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700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2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5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3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3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4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2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7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6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1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7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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