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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153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4.09.20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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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8
추천
73
글자
21쪽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4)

DUMMY

로빈은 어색해진 공기를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멈칫하는 가슈펠라르의 본대와 당혹감이 역력한 윌리안의 표정.

검붉은 눈동자가 그 모든 것을 살피기도 전에, 로빈의 기사로서의, 그리고 지휘관으로서의 이성이 먼저 거센 목소리를 내뱉었다.


“중앙을 돌파하겠다! 양익은 적의 측면을 묶고 기사들이 먼저 길을 터라! 포위될 걱정은 하지 마! 우리 용사들을 믿어라!”


영력이 담긴 울림이 병사들의 가슴에서 환성을 이끌어냈고, 그 중심에는 로빈의 굳건한 표정과 높이 뽑아든 검이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신분과 그 책임에서 잠시 벗어난 로빈이었다.

그는 능숙하게 용사들을 이끌고 전선을 와해시켜 나간다. 기세를 빼앗긴 가슈펠라르군의 유약하게 허물어지는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후방의 기사와 용사들이 침투할 수 있도록 전열을 유도하고 있었다.

로빈의 직접적인 활약과 지휘 덕분에 형성된 전선의 틈 사이로 베르달의 용사들이 거침없이 밀고 들어간다. 적의 측면이 건재했다면 곧바로 포위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

그러나 로빈의 의중을 읽은 베르달군 양익의 기사들이 훌륭하게 그들의 발목을 잡아준 덕분에 중앙돌파는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용병대의 기습을 위한 시간지연을 목적으로 얇게 포진된 가슈펠라르 중앙군의 전선이, 도리어 개개인의 전투력이 월등한 베르달군에게 압도되는 형상을 만들어준 것이다.


로빈은 처음으로, 지휘관으로서의 쾌감을 맛볼 수 있었다.

한 몸처럼 기사들과 연계하는 베르달의 용사들, 자신의 명령과, 그리고 그 의중을 정확하게 간파하여 수행하는 베르달의 기사들. 이들의 앞에만 서 있을 수 있다면, 그 누구라도 부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 분노와 당혹감을 같이 씹으며 돌아서고 있는 윌리안의 얼굴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전장에서 그 누구보다도 가장 당황스러운 얼굴은, 자신이 제의했던 이 기습이 적의 의표를 찌르며 전세를 뒤흔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페르난도 용병단 천인대장 페드로였다.

그가 바라보고 있던 것은 처음부터 오직 베르달 중앙군의 후미. 설마 그들이 직접 자신들의 퇴로에 마력지뢰를 놓는다는 자살행위를 했을 줄은, 그의 상식으로는 상상하기도 힘든 것이었다. 선두에서 이끌던 기사들이 뒤틀린 마력의 기운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터였다.


“으읏-! 멈춰라! 멈춰!”


한가득 영력을 실어 외쳐보지만, 그의 목소리는 마력의 폭풍에 묻혀 증발하고 만다.

달리는 관성과 더불어 굉음에 놀란 말들이 덩달아 날뛰는 바람에 기병대의 허리는 점점 더 지뢰밭으로 묻혀들어가고 있었다. 페드로의 목소리가 닿은 후방의 기병대만이 유일하게 전열을 추스를 수 있었다.


“대장님!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적 좌익의 후방에도 지뢰가 깔려있을지 모릅니다!”


다급한 부하의 목소리, 하지만 페드로 역시 숱한 전장을 거쳐 왔던 베테랑. 그의 눈은 곧바로 당혹감에서 벗어나 빠르게 전장을 읽는다.


“기습이 실패한 순간 이미 이곳에서의 우리 역할은 끝난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퇴각을-”


“멍청아!”

페드로의 분노가 담긴 일갈.

“페르난도 용병단의 일원으로서 계약을 이행하지도 않고 꽁무니를 빼겠다는 말이냐?! 설사 우리가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왕자의 목을 따서 의뢰인에게 줘야 해! 좌익은 위험하다! 우리가 왔던 길을 되돌아 우익의 중앙을 돌파할 것이다!”


“하, 하지만 대장님!”

부하의 흔들리는 시선이 저 멀리 전장을 향한다.

“본대가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뭣?!”

그의 말대로, 높은 환호와 함께 페드로의 시선을 잡아끈 전장에선 이미 가슈펠라르 본대의 퇴각이 시작되고 있었다. 양익이 이미 베르달군에 의해 와해되기 직전인 상황이라, 그대로 중앙전선을 유지한다면 베르달군에 의해 포위가 될 거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미 전황은 가슈펠라르 중앙군의 후퇴를 위해 남겨진 양익이 시간을 끄는 형색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퇴각한다. 아- 젠장 이걸로 계약금의 반은 날려 먹게 생겼군. 단장님께 한소리 듣겠는 걸.”

미련을 남기지 않은 깔끔한 퇴각 명령과 함께, 페드로와 남은 기병대는 서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물론 말의 반환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채로.




짧았지만 강렬했던, 평원의 전운이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




“자, 결정해라 왕자. 추격섬멸전이냐? 아니면 이대로 수도로 입성이냐? 그것도 아니면 베르달로 돌아가서 호흡을 가다듬겠나?”


멋대로 자신의 이름을 빌려서 퇴로에 마력지뢰를 배치한 일에 대해 벤과 옥신각신하던 로빈에게, 온몸을 적군의 피로 뒤집어 쓴 크라트가 다가오며 큰소리로 물었다. ‘늑대’는 나름 벤의 계획이 마음에 들었는지, 소름끼치게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벤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 대장님. 다치신 곳은-”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빨리 결정이나 해라, 작은 왕. 너밖에는 할 수가 없는, 중요한 결정이다.”


로빈은 고개를 들어 먼지와 함께 작아져 가는 가슈펠라르군의 후미를 바라본다.

이미 남겨진 양익은 정리가 끝난 상태, 모든 군세가 피로 익숙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자신이 한마디의 말만 내뱉으면, 저 흐려져 가는 군세의 모든 피를 뿌려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붉은 눈의 가주, 그녀의 할아버지이자, 자신을 원수라고 여기고 있는 그 노인의 목숨을 비롯한 피바람을.


“여기서 저들을 풀어주면, 수도에 귀환해서 다시 귀족파를 규합할 수도 있겠죠?”

로빈의 시선을 거두지 않은 물음에 크라트가 고개를 끄덕인다.

“시간을 주면 지금보다도 더 큰 규모의 귀족군을 모을 수도 있을 테고, 수도에서 농성은커녕 요격만으로도 우리에게 벅찬 군세가 모일 수도 있겠죠?”

다시금, 크라트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좋습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로빈은 자신의 검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피를 털어내고 검집으로 되돌려 넣는다.

“추격은 하지 않습니다. 복귀도 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천천히, 수도로 가도록 하죠.”


“엉? 진짜로?”

그의 결정에 의문을 단 것은 벤이었다.

“너무 느긋하면 그대로 집어삼켜질 수도 있는데?”


“날 위해 쓰러져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잊지 말라던 사람도 있었고, 그것을 듣지 말라던 사람도 있었지.”

로빈은 작게 웃으며 크라트와 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난 그 목소리를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가겠어. 하지만 겁먹은 것처럼 보이기는 싫어. 대장님, 당분간 베르달을 비우셔도 되시겠습니까?”


가만히, 그 차갑고 깊은 푸른 눈으로 로빈을 바라보던 크라트도 결국 자신의 검을 털고 검집에 넣는다.


“베르달은 잠시만이라면 올리에게 맡겨도 된다. 이곳에 진을 치고 하룻밤 묵으면서, 전장을 정리하고 재보급을 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로빈의 인사를 받은 크라트는 곧바로 영력을 실은 목소리로 주변의 용사들에게 명령한다. 용사들은 그에 곧바로 가슈펠라르 병사들의 시체에서 무기와 보급품을 챙기고, 군번줄을 끊기 시작했다.


“왜? 맘에 안 들어?”


말 위에서 미묘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벤을 향해 로빈이 물었다. 하지만 그와 눈을 마주친 벤은 어깨를 으쓱할 뿐.


“아니, 그건 아닌데. 뭔가 좀······, 이상하다고 해야 하려나.”


“이상해? 대장님 말이야?”


“아니.”

벤이 고개를 젓는다.

“너 말이야.”


어설픈 몸짓으로 말에서 내려오는 벤에게 로빈은 짧은 헛웃음과 함께 그 의미를 묻는다.


“나? 내가 뭐? 아, 그야 뭐, 한낱 시골뜨기 기사에서 왕자로 하루아침에 신분상승을 했으니 좀 이상하긴 하지.”


“아아니, 그게 아니라.”

벤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오른팔로 로빈의 목을 휘감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목소리니 명분이니 뭐니 했지만, 사실 이 느긋한 수도진출의 목적, 전혀 다른 것에 있지?”


“······.”

로빈은 탄식과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이 친구 앞에서는 어떠한 허세나 포장도 통하지 않는다. 저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한 눈을 가진 크라트마저 간파하지 못한 걸 이 마법사친구는 무슨 마법을 부리는지, 너무도 가볍게 뚫고 들어와 버린다.

이런 벤이 싫지는 않은 로빈이었지만, 만약 자신이 왕이 된다면 앞으로 꽤나 고생하겠다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그런 그의 눈에, 저 멀리서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는 지나와 오즈카의 모습이 보인다. 말과 사람의 것으로 피칠갑을 한 채로, 시선만은 이쪽을 향해 빛내면서.

“뭐 그래. 네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힘없는 목소리로 로빈이 대답했다. 벤은 그런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곧바로 따라가 본다.

분명, 지나라는 이름의 기사였지.

그런 뒤에 다시 눈이 마주치고, 또다시 속을 내비치는 기분이 들었던 로빈이 수줍게 웃으며 말한다.

“그래서, 이건 마음에 안 들어?”


실실 웃고 있는 그의 검붉은 눈을 잠시 훑어보고는, 벤은 친구의 목을 묶고 있던 팔을 내리며 짧게 한숨을 내쉰다.


“아니, 더 재밌는데.”


둘은 마주보며 씨익-, 미소를 나누었고, 벤은 곧바로 마력지뢰의 해체를 도와달라고 찾아온 하파를 따라나서며 로빈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그가 떠나감과 동시에 오즈카와 지나가 그의 앞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으며 그에게 예를 표한다.


“국립기사 소위 아뮤르 지나, 그리고 동 오즈카 스파인. 생존과 임무 완수를 보고드립니다.”


더 이상 자신과 눈을 마주하려 하지 않는 두 동기를 내려다보며, 로빈은 짧게 한숨을 뱉고는 자신의 검붉은 머리를 벅벅 긁는다. 결국 그는, 하기 싫었지만 결국은 할 수밖에 없었던 ‘명령’이라는 걸 내려보기로 한다.


“야, 날 왕자로 모시겠다고 했으니, 내 명령엔 무조건 복종하는 거 맞지?”

로빈의 목소리에 다소 장난기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내심 불안해하며, 지나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내가 왕이 되기까지, 그리고 왕이 된다고 해도 사적인 자리나 독대할 때는, 날 동기인 ‘로빈’으로 대할 것. 이게 내 명령이야. 당연히 받들어야겠지? 충실한 부하들아?”


“······받들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 상황에 해당되는 것인지?”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지나의 모습에 로빈은 더욱 기세등등하여 대답한다.


“아, 물론. 다들 바쁘니까. 우리 얘기하는 것 따윈 듣지 않을-, 커헉!”


로빈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신의 얼굴로 날아든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얻어맞는다. 영력이 실리진 않았지만, 코피를 터트리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그리고 뒤로 발라당 넘어진 로빈의 위로, 그 주먹의 주인인 지나가 태양 같은 눈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이---! 병신새끼야아아아-!! 왕자씩이나 돼갖고 아직도 그런 무모한 짓을 해-?! 그 영감탱이가 은퇴하기는 했어도 연대장까지 했던 사람이야! 네까짓 게 그렇게 멋대로 돌진해서 목을 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우으······, 영감탱이? 아아-.”

허리를 굽히고 자신에게 침까지 튀기며 소리치는 그녀의 얼굴에, 붉은 눈을 가졌던 가슈펠라르 노인의 얼굴이 겹쳐서 떠오른다.

역시 보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이쪽이 할 말은 없다.

결국 로빈은 오즈카의 도움으로 힘겹게 일어나며 사과해야 했다.

“아, 그건 미안. 진짜 미안. 나도 모르게 피가 거꾸로 솟더라고.”


“그걸 말이라고-! 내가 얼마나 걱정한-, 읏?”


라며, 지나는 다시금 주먹을 먹일 기세로 로빈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대로 로빈이 자신을 품에 안았기 때문에 모든 사고가 정지하고 만다.

어느샌가 넓어진 가슴과 팔로, 피로 더럽혀진 그녀의 어깨와 샛노란 머리를 감싼 채. 조용히 속삭이는 로빈.


“수고했어. 그리고 죽지 않아서, 정말 고마워. 지나.”


지나는 한껏 힘이 들어갔던 팔을, 서서히 내린다.


“······당연하잖아. 명령받았으니까.”


로빈은 자신의 가슴 언저리가 눈물로 젖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지나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녀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어주었다. 그녀가 스스로 그의 가슴에서 빠져나오자, 로빈은 이번엔 오즈카의 우직한 어깨를 끌어안았다. 물론 그 거대한 근육을 한 번에 품을 수는 없었지만.


“오즈카도, 날 따라주고 날 위해 검을 들어줘서 고마-, 야, 근데 너 냄새가 심각하다야.”


지나만큼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지는 못할 모양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오즈카의 얼굴엔 미세한 억울함이 떠올라있었다.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됐는지 생각해보시죠······.”


“아니, 그건 아는데. 그래도 너무하잖아 이건. 지나는 같은 꼴이어도 향기로운데.”


“햐, 향기?! 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변태같이!”





멀찍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올리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주인을 향해 비죽 웃음을 내뱉는다.


“아버지,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 여자가 지금 왕자에게 주먹질을 한 거 같은데. 저거 반역죄 아냐?”


물론 진심이 담긴 말은 아니었다. 어디서나 볼법한 사랑싸움이라는 걸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대답하는 크라트의 얼굴엔 어떠한 표정도 떠올라있지 않았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더니, 인연은 참으로 질긴 것이로군. 대를 이어서도 그 비극을 이어가려는가-.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늑대’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진지를 구축하느라 바쁜 용사들을 향해 거침없는 발걸음을 옮긴다.




‘너의 아들만큼은 반드시 행복하게 해주겠다.’




***




언제나 그랬듯, 묵묵히 집무실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서류를 살펴보던 카나반의 섭정- 마누앙의 귀에 거슬리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숨을 몰아쉬며 노크도 없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자신의 아들이자 근위대장인 쥬넨.

마누앙이 그에게 입을 열기도 전에, 쥬넨이 먼저 다가와 신문 한 장을 내민다.


“아버님-! 이걸 보십쇼!”


마누앙은 그에게서 받아든 신문을 내려다본다. 1면의 머리기사를 독차지하고 있는, 굵고 짧은 한 문장.


‘붉은 나무가 승리했다!’


그것과 함께 실린 사진엔 로빈과 베르달의 늑대가 나란히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기사의 본문은 별다를 게 없이, 선왕의 숨겨놓았던 씨앗이 왕의 복귀를 거부하는 귀족파를 상대로 베르메스 평야에서 벌인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왕자와 그를 따르는 군대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수도를 향해 진군해오고 있다는 마무리를 잊지 않고서.


“가슈펠라르는?”


신문을 내려놓으며, 무심한 어투로 마누앙이 물었다.


“예, 몸은 온전히 보존한 채로 퇴각하여, 일단은 병사들보다 먼저 수도로 복귀할 예정이랍니다. 도착하는 대로 귀족회의를 소집할 예정이라고······.”


“······흠.”


쥬넨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더욱 많은 대답과 명확한 계획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마누앙의 반응은 짧은 한숨,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연스럽게 서류 더미로 다시 시선을 옮기려는 그의 시선을 붙잡으며 쥬넨이 다급하게 입을 연다.


“아버님! 이대로 가슈펠라르에게 완전히 주도권이 넘어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귀족파를 규합하여 왕자에게 대항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고만 있다가는 어느 쪽이 이기든 우리는 축출당하고 말 겁니다!”


그에 마누앙은 펜을 멈추고, 조용히 그 깊은 먹색 시선을 자신의 아들을 향해 쏘아본다.


“그것은 네 근위대로서의 판단이냐, 아니면 니바르토라는 이름으로서의 판단이냐?”


“옛······?”


뜻밖의 화살에 쥬넨은 당황할 수밖에.


“너는 내 후광을 받기 싫다는 이유로 가문의 아무런 도움 없이, 스스로 노력하여 그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을 보아, 넌 네 자신보다는 우리 집안을 위해 그 자리에 오른 것처럼 행동하는구나. 내가 근위대장의 힘을 빌리기 위해 너에게 그리하라고 강요라도 했더냐?”


“그, 그건 아닙니다, 아버님! 다만······-”


“네 본분을 잊지 마라, 쥬넨. 넌 니바르토이기 전에 왕실근위대장이다. 난 네게 가문을 위한 귀족이 되라고 한 기억이 없다.”


“하지만-”


마누앙이 펜을 내려놓는다. 그것에 쥬넨은 말을 삼켜야 했지만, 마누앙의 얼굴엔 분노를 비롯한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은, 니바르토라는 이름으로서, 귀족으로서, 아버지로서의 부탁이 아니다. ‘섭정’으로서 내리는 명령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근위대장’이 그것을 받드는 것이다. 알았느냐?”




***




샹들리에에서 내리쬐는 밝은 조명과 온갖 향응이 넘쳐나는 접대실에 모인 귀족들.

하지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눈엔 저마다 불안과 초조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긴 기다림 끝에 그곳으로 금발과 붉은 눈을 빛내는 노인이 들어서자, 모두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간다.


“정숙하시오!”

하지만 그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노인의 목소리가 접대실을 내리쳤다.

“모두 알고 있듯이, 왕자의 군대가 이곳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섭정과 니바르토가는 지레 겁을 먹고 움직이지도 않고 있지! 우리의 몸을 보존하기 위해선 우리가 직접 뭉쳐서 움직여야 합니다!”


“하, 하지만, 이제 남은 가용 병력이 없지 않습니까? 근위대장은 니바르토의 아들, 우릴 위해 움직여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부탁해보시지요!”


젊은 귀족의 외침에, 윌리안은 붉은 눈을 빛내며 그를 쏘아보았다.


“병력은 있습니다. 다만 아직 우리 손에 없을 뿐이지요.”


“우리 손?”


그의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한 귀족의 무리들이 눈을 빛내며 윌리안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노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모두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우리의 사병을 지원받아서 편성된 북부전방사단의 예비대를 되돌려 받으면 되는 것이오!”


“무슨 소릴-!”


“최전방을 비워두잔 말이오?!”


“당치도 않습니다!”


접대실이 귀족들의 원성과 경악으로 소란스러워진다. 하지만 노인의 붉은 눈은 흔들리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향해 분노를 흩뿌린다.


“다들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 이것은 단순히 귀족들의 안위에만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란 말입니다! 다시금 그 미친 왕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습니까? 그깟 최전선 하나 버리는 것으로 국가를 지탱하자는 뜻입니다!”

윌리안의 불타는 눈이 접대실을 채우고 있는 귀족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살펴보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윌리안 본인은 자신이 충분히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저 분노로 미쳐버린 늙은이의 발작이었던 것이다. 그 분위기를 눈치채고, 윌리안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난 미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정신을 차리고 있습니다. 재산을 털어서 용병까지 고용한 제 뜻을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모두 니바르토처럼, 왕당파 귀족들처럼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겁니까?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리고 여러분이 그의 아버지에게 했던 짓을, 그가 과연 용서하고 넘어갈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 씨앗이 왕좌에 앉는 순간, 제2의 피바람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윌리안의 짙은 호소에 귀족들은 갈등한다. 그들은 곧 끼리끼리 모여서 흔들리는 눈빛으로 자신들의 손익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윌리안의 군세에 가담했던 자들은 끝까지 그에게 협조할 것을 주장하였고, 지금이라도 물러나 사태를 지켜봐야 한다는 무리도 있었다. 북쪽의 예비대를 뺀다고 해도, 적이 그렇게 빠르게 그 사실을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짧은 혼란 사이로, 그들을 재촉하는 윌리안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진다.

“시간이 없습니다. 나를 따를 자들은 지금 당장 움직이십시오! 전 당장 북쪽으로 통신을 보내어 우리 가문의 이름으로 되어있는 병사들을 복귀시킬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저들을 상대하기에 충분하니, 절 돕지 않은 자들의 이름은 그 후에 거론하지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윌리안 경.”


갑작스러운 침묵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윌리안의 뒤로 나타난 사내에게 향한다. 그리고 곧 그 침묵은 환호와 미소로 바뀐다.


“오오, 쥬넨!”


“니바르토인가! 결국 움직여주시는군!”


“근위대라면 든든하다. 충분히 할 만하지!”


하지만 그런 쥬넨을 돌아보는 윌리안의 눈엔, 고마움보다는 날카로운 의심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의심에 화답하듯이, 쥬넨은 청중의 표정을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윌리안 가슈펠라르. 근위대의 이름과 권한으로, 당신을 국가반역죄로 체포합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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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4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8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30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7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2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9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1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4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4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5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6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700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2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5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4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3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4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3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8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7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2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7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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