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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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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4.09.1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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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글자
19쪽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DUMMY

섭정집무실은 침묵에 잠겨있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사라져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던 섭정, 마누앙의 뒤로 수많은 귀족들이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감히 먼저 말을 꺼내는 자는 없었다.

저마다 ‘그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참이었으나, 그 누구도 집무실에 수많은 그림자가 깔리는 내내 아무런 반응이 없던 섭정의 침묵을 깰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정적을 깨는 노크와 함께 섭정실의 황금색 문이 열린다. 모습을 드러낸 자는 문의 도금보다도 찬란한 금발을 지닌 노인. 그의 소름 끼치도록 붉은 눈이 모여 있는 청중을 빠르게 훑었고, 마지막으로 어둠 속의 묻혀있는 섭정의 등을 향한다.


“선왕의 씨앗이 남아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만.”

얇지만 중후한 목소리. 모든 귀족의 시선이 금발의 노인에게 꽂힌다. 단 하나, 마누앙의 깊은 먹색 눈동자를 제외하고.

“대충 다 모인 것 같은데 한번 말씀을 시작해보시죠.”

그 자체만으로도 마누앙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 차갑고 날카로운 노인의 어투였다. 여러 명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시 근위대장이, 그날 자신의 갓난아이를 대신 희생하여 막내 왕자를 빼돌렸던 것 같습니다.”


시선은 여전히 창밖으로 향한 채, 마누앙의 음침한 목소리가 집무실을 채운다.

경악이 번지는 와중, 금발노인의 목소리만큼은 계속해서 흔들림이 없다.


“그때 당시의 근위대장이라면, 루디 드렌턴말이지요? 그가 살아있었군요. 물론 각하께서는 그가 돌아온 것도 알고 계셨겠지만.”


노인의 말에 청중이 술렁였지만, 마누앙은 조용히 뒤돌아서면서 시선을 흘리는 것만으로 그 소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예, 알고 있었습니다. 직접 저에게 씨앗이 있다고 알려주러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체포하지 않았던 겁니까?!”


노인의 노성이 모두를 움츠리게 만든다.

이것은 분명, 영력이 실린 목소리.

하지만 대답하는 마누앙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다.


“그가 수도로 데려온 청년은 두 명이었고, 그들 모두를 일단 제 시선 아래 두려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론 씨앗을 빼돌리게 되는 구실을 주게 됐으니, 그것은 제 불찰입니다. 사과드리지요.”


“사과?!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잖소, 섭정!”

노인과 마누앙의 시선이 정면으로 맞붙는다. 그사이에 끼어버린 다른 귀족들은 숨을 죽인 채 침묵 속에서 눈치만 볼 뿐.

대치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고, 노인의 노성이 다시 튀어나온다.

“내 아들을 죽이고 나라를 개판으로 만든 자의 핏줄이오! 그 존재가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나라도 움직여야지.”


“움직이다니, 무슨 뜻입니까?”


마누앙의 차가운 시선에 금발의 노인은 콧방귀를 끼며 몸을 돌린다. 성큼성큼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그를 멈춰 세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기세로, 노인의 목소리가 복도를 통해 울려 퍼진다.


“우리 가슈펠라르 가문이 그 저주받은 씨앗을 마저 지워버리겠소! 실종되었다던 둘째 왕자의 수색도 우리가 독자적으로 다시 시작할 것이오! 다시 그런 놈의 핏줄로 왕좌가 채워지고 싶은 꼴을 보기 싫다면 여러분은 날 따르도록 하시오!”


그의 마지막 말은 모여 있는 청중을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노인의 목소리에 압도되기는 했으나, 쉽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마누앙의 차가운 탄식이 섞인 요청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독자적으로 군사를 움직이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내일 상황보고 때 다시 논의하도록 하지요. 일단은 해산해주시길.”


그러자 모든 귀족이 동시에 섭정을 향해 허리를 굽혔고, 곧이어 노인의 분노를 따라 복도를 향해 빠져나간다.

그 뒤에 남은 얼굴은 근위대장 쥬넨과 두 명의 근위대. 쥬넨은 부하들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하고서, 마누앙 맞은편의 소파에 몸을 내려놓는다.


“어떡하실 겁니까, 아버님? 자칫하다간 이대로 귀족파가 분열됩니다.”


하지만 들려오는 마누앙의 대답은 의외의 내용과 차분함을 담고 있었다.


“가슈펠라르가 한꺼번에 동원할 수 있는 군대가 어느 정도지?”


“······따로 용병이나 해결사를 고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병만으로 오천은 될 겁니다. 만약 그를 따라나서는 다른 귀족파 가문이 있거나, 용병까지 고용한다면 일만까지도 불어나겠지요.”


“일만이라. 흐음······, 알았다, 나가 보거라.”


“옛? 하지만-”


“내일 상황보고 때 이야기하자.”


“······알겠습니다.”


쥬넨은 짧은 경례와 함께 집무실을 나선다.

다시금 완벽한 고요를 되찾은 집무실에서, 마누앙은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의 먹색 눈이 흐린 조명 아래서 빛나기 시작했고, 마누앙은 그림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브린.”


“예.”


“하나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다.”





***





로빈의 망막을 괴롭히던 태양은 어느새 산등성이 너머로 얼굴을 감추었다. 자신의 흔적을 하늘에 흘려놓고 서서히 무너져가는 그 모습을, 로빈은 침대 등받이에 기댄 채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기사의 피가 선사한 초인적인 회복능력 덕분에 신경을 짓누르던 독은 빠르게 중화되었지만, 로빈은 병실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이유로 모두를 내보낸 것도 그저 그곳에서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었을 뿐이었다.

혼란스러운 건 아니다. 다른 모든 이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정신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그렇기에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나타난 익숙한 얼굴에도 그는 별 어려움 없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괜찮냐?”


마법사 로브는 어디에 던져놨는지, 헐렁한 흰 셔츠와 검은 바지로 가볍게 나타난 벤이었다. 문이 없는 병실이었던 탓에 벽을 대신 두드린 모양이었다.

여전히 너저분하게 기른 검은 머리와, 짙은 쌍꺼풀 아래 먹색 눈동자. 지겹게 봐왔던 얼굴이지만, 로빈은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긴장이 풀리는 것을 즐길 수 있었다.


“괜찮냐니, 어느 쪽이?”

로빈이 웃으며 되물었다.

그 미소가 벤에겐 대신 대답이 되었는지,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로빈의 침대로 다가선다. 로빈은 그제야 벤의 허리 뒤에 붙어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작은 소녀를 눈치챌 수 있었다.

후드를 푹 눌러쓴 덕분에 표정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하얀 피부에 그보다 더 흐린 머리카락, 그리고 굉장히 특이한, 눈동자 안의 소용돌이는 확실하게 로빈의 관심을 끌어당긴다.

“그 애는?”


“응? 아-”

벤도 그제야 소녀의 존재를 눈치챈 모양. 어지간히 저 모양새가 익숙한 모양이라고, 로빈은 생각했다.

“이리스라고, 사정이 있어서 잠시 봐주고 있는 녀석.”


“······뭔가 불법적인 냄새가 짙게 나는데.”


“네가 상상하는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 마.”

벤이 창문 아래 벽을 등지며 침대 위로 올라선다. 이리스 또한 주저하지 않고 그런 벤을 따라 올라와 침대에 걸터앉는 바람에, 로빈은 펴고 있던 다리를 거두어야 했다.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벤.

“왕자시라고?”


그 터무니없는 가벼움에 로빈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그래, 벤은 이런 놈이었지.

저 특유의 투명함으로, 껍질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자신에게 경어를 쓰며 받드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는 로빈이다.


“뭐 그래도 넌 별로 상관없잖아?”


“상관이 없기는!”

벤이 생기 없던 눈을 부라리며 질책해온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건이자 순간인데 왜 내가 상관이 없어?”


“하핫, 그게 또 그렇게 되나?”


로빈의 미소가 다시금 창밖을 향한다. 이미 태양은 흔적마저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고, 어렴풋한 밤하늘이 대신 시야를 덮고 있다. 그의 먼 시선을 눈치채고, 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참으로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친구의 질문. 로빈이 즉답할 수 있는 단어는 정해져 있었다.


“글쎄······.”


“글쎄라니, 뻔한 거 아냐? 왕이 되거나, 왕이 되지 않거나. 그거잖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냐.”


벤이 로빈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더니 이리스를 건너뛰어 그의 옆으로 다가온다. 낡은 침대가 그런 체중을 이기지 못해 비명을 지른 것은 당연했지만, 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왜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


“그래? 그럼, 너라면 어쩔 건데?”


단순한 반항심이 아닌, 진심으로 조언을 구하는 물음이었다. 그 의도를 모를 리 없는 벤은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한다.


“나? 나라면. 음, 우선 생각해보자.”

벤의 침침했던 눈동자가 다시금 빛나는 순간이었다.

“이 나라의 모든 혼란이 이것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확실히 18년 동안 왕좌가 공석이라는 사실은 내부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문제가 많아.

정통한 후계자가 없다는 핑계로 지금 섭정을 필두로 한 귀족파는 시간을 좀 더 끌다가 국민투표로 넘어가겠다는 속셈이겠고. 그걸 필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왕당파에겐 붉은 나무의 씨앗이란 존재가 유일한 희망이 되겠지. 왕이라는 중심이 있다면, 분열된 국정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는 희망.

뭐, 진짜로 왕당파가 왕족에 대한 충성만으로 움직이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어깨로 몸을 기대오는 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벤이 말을 이어 나간다.

“어찌 됐건, 왕이라는 변수만으로 크게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상태에서 묵묵히 그걸 거부하고 찌그러져 있는 건 내 성격에 안 맞아. 만약 나였다면, 당장 수도로 향할 거야. 하지만 그 선택에 있어 유일한 변수는-”


“드렌턴 아저씨.”


로빈이 벤의 말을 대신 맺었다.


“그래.”

벤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아저씨는 인질이나 다름없으니. 이쪽이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처우가 결정될지는 그들 마음이지. 하지만 네가 빠르게 움직여서 권리를 내세우고 왕위가 계승되면, 적법한 왕의 최측근이자 왕실의 혈통을 지키는 데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는 아저씨를 그냥 처형해버리기엔 그들에게도 위험부담이 크지.”


무심코 나온 처형이라는 단어에 로빈은 시선을 떨어트린다.

자신을 위해. 자신은 모르고 있었던 자신의 피를 위해, 드렌턴이 했던 행동.

‘늑대’ 크라트의 입에서 흘러나온 18년 전의 그 전말을, 로빈은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루디는 그때 반쯤 미쳐버린 귀족파 놈들에게서 너를 빼내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했다. 심지어, 갓난아기이지만 혹시라도 왕자의 얼굴을 기억하는 놈이 있을까 스스로 지 자식새끼의 얼굴을 난자하면서까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로빈이 받았던 충격은, 술이라도 들이키지 않는 한 한동안 그의 가슴에서 씻어내기 어려울 정도의 묵직함이었다.

한적한 시골 거뭇한 오두막에서 항상 자신을 반겨주던 드렌턴의 사람 좋은 미소와 무슨 일만 생겼다-하면 바로 달려와 주었던 듬직한 모습.

그 뒤에 숨겨져 있었던,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아저씨의 상처.

로빈은 길고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쌌다.


“아저씨가 날 뭐라고 생각하든, 난 아저씨에게 목숨을 빚졌어.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사라진 아저씨의 아들을 위해서라도, 난 기필코 아저씨의 얼굴을 봐야겠어.”


“그게 답이야?”


의도가 깔려 있는, 벤의 물음.


“답?”


“그게 진짜로 네가 원하는 답이냐고. 솔직히 말해서, 네가 지금 기사의 제복을 입고 있는 것도, 그리고 이곳에 와있는 것도, 그 어떤 과정에 너 스스로가 원하는 진정한 답이 기저로 깔려 있었어?”


대답은 알고 있다.

그리고 정해져 있다.

하지만 로빈은 바로 입을 여는 대신에, 잠시 자신의 속을 들여다볼 줄 아는 유일한 친구를 바라본다.

이 친구는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가벼움에 로빈마저 휩쓸리게 한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빈은 굵은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난 고도 씨가 내민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전쟁터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피를 흩뿌릴 때까지만 해도, 네가 걱정한 대로 완벽한 스스로의 답이 아니었어. 그저, 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지.”

로빈은 수많은 별이 박혀있는 밤하늘로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이건 아니야. 벗어날 수 없다든가 붉은 나무의 씨앗이라든가 하는 문제가 아냐. 일단은, 아저씨의 얼굴을 봐야겠어. 이게 나의 답이야.”

로빈의 검붉은 눈동자는, 창문을 뚫고 내리쬐는 달빛이나 조명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야 마음에 드는 친구의 표정에, 벤은 짧게 웃고는 반쯤 졸고 있는 이리스를 데리고 침대에서 벗어난다.


“어, 벌써 가려고?”


“기다리는 손님이 계시니.”


벤과 로빈의 시선이 입구에서 나무로 만든 맥주잔 두 개를 들고 서있는 지나에게 향한다.

그녀 또한, 제복이나 가죽옷은 벗어 던진 가벼운 차림이었다. 로빈과 눈이 마주치고, 수줍은 미소와 함께 맥주잔을 들어 보이는 그녀였다.

방을 나서는 벤에게 작게 목례를 하고, 이리스에겐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고 난 다음에야, 지나는 조심스럽게 로빈의 침대 곁으로 다가온다.


“환자에게 술이라니.”


질렸다는 표정으로 맥주잔을 받아드는 로빈.


“약속은 약속이니까. 네가 사는 거다?”

지나는 혀끝으로 웃으며 침대에 등을 기대앉는다. 때문에 로빈은 그녀의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선이 고운 가녀린 목선을 대신 감상할 수 있었다.

“미안, 많이 복잡할 텐데. 괜히 온 건 아닐까 모르겠네.”


그녀답지 않은 목소리에, 로빈은 도리어 과장되게 웃으며 대답한다.

“하- 뭔 소리야. 언제부터 네가 그렇게 눈치가 있었다고?”


그가 기대했던 것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드는 지나의 얼굴. 하지만 그녀는 맥주잔을 끌어안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약속은······, 역시 지켜야지. 얘기 해줄게. 선왕폐하, 아니 네 아버지가 왜 그렇게 되셨는지.”


“응?”


왜 굳이 지금 그 얘기를 해야 하나-, 의문이 들었지만, 로빈은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기에 가만히 있기로 했다.


“네 아버지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어. 젊었을 때부터 줄곧,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네 어머니와 결혼을 하고 너를 비롯한 아이들을 낳을 때까지도, 계속해서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어. 당장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는지라,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네 아버지는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았지.”


“이루어질 수 없다니, 그 여자가 귀족파였어?”


로빈의 맥주가 섞인 질문에 지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후에 귀족파인 가슈펠라르 가문과 결혼을 하긴 했지만, 그 여자는 귀족은 아니었어.”

그녀의 작은 웃음이 전해진다.

“그녀는 검성의 증손녀였어.”


“검······성?”


떨어뜨릴 뻔한 맥주잔을,

로빈은 간신히 다잡는다.


“응, 검성. 하지만 예로부터, 왕족과 검성의 가문은 서로 엮이지 말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어. 서로 견제해야 할, 의회 권력의 중심에 있는 왕과 군사력의 중심에 있는 검성이 결탁하게 되면, 결국엔 독재라는 형태로 변질할 테니까.”

짧은 한숨과 한 모금의 맥주와 함께 지나의 말이 이어진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네 아버지와 그 여인은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지. 잦은 밀회와 그 교류의 시간을, 가슈펠라르 가문의, 그녀의 남편에게 들켜버렸어.

그리고 문제는 거기서 시작됐어. 네 아버지의 대처가 너무 극단적이었던 거야. 귀족파의 대표이기도 했던 가슈펠라르 가문의 그를, 근위대장을 통해 죽여 버렸거든.”

로빈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야기의 흐름을 간신히 쫓아가고는 있었지만, 여유롭게 맥주를 들이켜며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그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나는 무심한 어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대전쟁 이후 200년간 간신히 기틀을 잡아왔던 왕당파와 귀족파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어. 귀족파는 독재의 시작이라며 거세게 반발했고, 왕당파는 이왕 일이 벌어진 거 다급히 네 아버지를 부추겼지.

적당한 구실을 붙인 피의 숙청이 이어지고 본궁은 피폐해져 갔어. 그대로 가다간 지방 귀족들까지 가세한, 대규모의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

그때 대군과 함께 수도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베르달의 영주 ‘늑대’ 크라트였어. 그는 그저 친한 친구의 만행을 자신의 손으로 끝내고자 했던 거였지만, ‘늑대’는 네 아버지의 친구이기 전에 귀족가문 ‘니바르토’의 일원.

그가 직접 나서서 네 아버지를 베어버리자, 귀족파들도 덩달아 사병을 앞세워 궁에 난입하더니 왕족의 씨를 말려버리자며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지. 크라트가 왕의 머리 하나만으로 모든 혼란을 잠재우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면, 귀족파는 그의 핏줄까지 모두 없애야 후환이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그 뒤로는, 뭐, 너도 아는 바야.”

지나는,

말을 마치고 맥주잔을 주욱 들이켰다.

거의 입도 대지 못한 로빈을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엔

더할 나위 없이 밝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어때? 네 아버지의 비극이라는 점만 빼면, 안주로는 괜찮은 이야기 아냐?”


“······.”


로빈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런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도 무거워진 가슴 때문에 도무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태양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햇빛처럼 밝은 미소로 그를 내려다보던 지나. 하지만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도 로빈은 마음이 따뜻해지지가 않는다.

그가 알고 있는, 평소의 그늘 없는 그녀의 미소가 아니었으니까.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은, 그런 미소였으니까.


“그럼, 잔도 비었으니 난 이만 가볼게. 편히 쉬고, 내일 다시 얘기하자.”


그런 얼굴을 하고서 가볍게 ‘다시’라고 말하지 마-.

손이 닿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표정으로 이 방을 나가지마-.


그렇게 말하고 싶은 로빈이었지만, 말라비틀어져 가는 그의 입술 사이로 간신히 새어나온 말은 벌어진 상처를 헤집는 지나의 붉은 혀처럼, 따끔하고도 슬픈 진실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녀······, 아버지가 사랑했다던 그 여자는-”


“응? 아, 그녀는 그 직후에 가슈펠라르 가주에 의해 처형당했어. 가문을 모독하고 이 모든 비극을 시작했다는 이유로. 궁금하다면 알려줄게. 그녀의 이름은 아뮤르 한나.”


문턱을 넘어 사라지는 그녀의 표정을,

로빈은 끝내 바라보지 못한다.




“우리 엄마야.”


작가의말

언제나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백, 오타가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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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2 84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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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6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28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5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0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7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0 87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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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4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3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3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3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2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7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6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1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7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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