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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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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4.08.2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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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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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글자
18쪽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DUMMY

간만에 아무런 외압이 없는, 자연스럽고 상큼한 기상이었다.

그 증거로, 고도는 눈을 뜨자마자 어떠한 신음도 없이 가볍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흐린 시야 아래로 짙은 바다색의 머리칼이 늘어져 있는 것이 보이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침대 옆 탁자로 손을 뻗어 남색 머리끈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능숙한 솜씨로 머리를 묶어 올린다.

마법대학 3학년. 대학생활 3년차-라고는 하지만, 그 시작이 조기입학이었기에 그녀는 아직 17세의 소녀다.

한창 멋 부리길 좋아하고 동년배 소년의 미소만 봐도 얼굴이 붉어질 나이이건만, 그녀에게 꾸미기란 이 작은 머리끈과 교복이나 마찬가지인 로브뿐. 물론 화장 따윈 해본적도 없었다. 굳이 이성에 대한 관심도를 측정해보자면 파충류 애완동물과 동급일는지.

애초에 남자는커녕 인간관계, 파고들면 대화라는 행위 자체에 뜻이 없는 그녀니까.


“······.”


그런 고도이기에 쓸데없는 소릴 지껄였다- 라고, 어젯밤의 자신에 대해 평가하고 있었다.

차가운 달빛아래 붉은 모래 위, 그리고 페어리 아이데아의 무표정. 아무리 그녀라도 입이 가벼워질 정도의 감성은 부릴 수밖에 없었던 밤이었을까.

그녀는 침대에서 벗어나 탁자 앞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세숫대야에 담긴 그녀의 얼굴이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양손으로 수면 위의 얼굴을 흩트리고는 거칠게 세수를 시작했지만, 이미 정신은 더욱 맑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기에 차가운 물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녀는 턱을 따라 흐르는 물을 닦을 생각도 안 한 채 거울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표정이 죽어버린 소녀와 눈을 마주친다.


“······안녕.”


물론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랬다면 무서웠을 것이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짙은 바다색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묶어 올린 뒷머리와 눈썹을 약간 덮고 있는 앞머리. 귀 뒤로 남아있는 잔머리들은 눈동자보단 약간 옅은색이었다. 자신의 모습이지만, 어째선지 저 분홍빛 입술을 열게 만들려면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밝다면 밝다고 볼 수도 있는 얼굴, 그러나 생기가 없는 얼굴.

나는 입이 가벼워질 필요가 있던 것일까.

멍하니 그런 잡다한 생각을 하며, 작은 물기가 모여 턱과 목선을 따라 흐르는 모습을 구경하는 고도. 그녀를 현실로 되돌려놓은 것은 가벼운 노크소리였다.


“네, 들어오세요.”


거울 속에서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의 얼굴이 나타난다.


“죄송합니다, 제가 깨웠나요?”


로브도 걸치지 않은, 흐트러진 모습의 고도를 바라본 남자의 눈동자는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아뇨, 아까 일어났어요. 무슨 용무라도?”


고도는 마음에 없는 얇은 미소로 그를 안심시켜준다. 너저분한 앞치마, 그리고 허리에 달린 주머니와 투숙객 명단으로 보이는 종이. 그녀는 그가 여관의 주인, 또는 종업원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예, 어젯밤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이걸 드린다는 걸 미처 까먹었습니다. 받으세요. 제르나비 씨 앞으로 왔습니다.”


남자가 내민 것은 손바닥 크기의 편지봉투였다.

출처에 대해 물으려던 고도는, 편지를 봉하고 있는 카나반 마법대학의 역삼각 인장을 보고는 고맙다는 뜻의 고갯짓을 하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여관주인의 모습이 사라진 문을 마저 닫기도 전에 그녀는 인장과 함께 거칠게 편지를 뜯는다.

내용은 짧았다. 하지만 글을 따라 눈동자가 움직일 때마다, 고도의 하얀 미간이 점점 구겨지고 있었다.


“······하아.”


소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을 감싸 안으며 그사이에 얼굴을 묻어버린다.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었지만, 답답한 가슴 언저리가 풀어지진 않는다. 울고 싶은 심정이란 이런 것이리라.






“뭐에요 이게?”


어제 식사를 위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고도가 내민 편지를 받아들며 로빈이 물었다.

원형탁자의 중앙에서 늠름하게 위용을 뽐내던 귀리빵 덩어리는 이제 부스러기만 남긴 채 스프접시를 닦아내는 용도가 되어있었다.

어젯밤 그렇게 쳐먹고도 다들 먹성도 좋아- 라고 무심코 내뱉으려던 말을, 고도는 물과 함께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제가 여길 통해 수도로 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는데, 마귀할ㅁ······, 아니 부학회장님이 맡겨두신 서찰입니다. 저도 방금 받았어요.”


대답하는 고도와 눈을 마주치고서, 로빈은 소리 내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2차 명령서. 카나반 왕립마법대학 이론마법학과 3학년 제르나비 고도는 1차 기한에 상관없이 모든 수색범위, 특히 투르탄고지 인근은 반드시 수색을 마치고 복귀할 것.

또한 도중에 계약대상자가 있다면 본인의 임무와 상관없이 먼저 복귀시킬 것. 특히 수습기사대상자는 훈련소 일정이 앞당겨진바, 최대한 빠르게 복귀시킬 수 있도록 할 것. 이상.”


고도가 로빈에게서 다시 받아든 편지를 거칠게 로브의 안쪽에 꽂아 넣을 때까지, 거친 턱을 쓰다듬으며 신음을 흘리는 드렌턴 외엔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런 그들의 얼굴을 한 번 스윽 훑어본 고도는 처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아, 이건 진짜······, 부학회장님은 제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할지 전부 다 알고 계셨다고 볼 수밖엔 없네요. 명령서대로, 여러분은 먼저 수도로 가주셔야겠어요. 계약서랑 제 보증서를 가져가시면 될 거예요.”


그녀는 자루 속에서 서류뭉텅이를 꺼내 드렌턴에게 건넨다. 각자 나눠줄 배려 따윈 그녀의 이성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 짧은 편지 때문에 최소 2주일은 더 방황하게 된 그녀의 심정은 표정만큼이나 뒤틀려있었다.


“허, 훈련소 일정이 앞당겨졌다? 좋은 소식은 아니구만. 일단 아가씨한테는 확실하게 전달이 안된 이야기인가 보네, 허헛.”


드렌턴이 넉살 좋은 웃음을 뱉으며 고도의 안색을 살폈지만, 그녀는 이미 긴 한숨 뒤에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아~! 정말! 좀 편하게 쉬나 했더니이이이이이!!!!!”


비명에 가까운 탄식이 생각보다 우렁찼는지, 부엌에서 다른 여행객들의 아침을 준비하던 주인장마저 무슨 일인가 싶어 나오게 만들고 만다.


“하핫, 너무 상심하지 마, 아가씨. 혹시 알아, 또 누구 찾아서 데려올지.”

하지만 자신을 노려보는 고도의 눈빛에, 드렌턴은 그의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시선을 피해버린다.

“그, 그럼 우린 바로 출발해야겠구만!”


고도는 그대로 이마를 탁자의 가장자리에 박아버린다. 드렌턴이 할 수 있는 것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뿐이었다. 로빈은 뭔가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려 했지만, 드렌턴에게 무언의 제지를 받고는 그만두고 그를 따라 일어나야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드렌턴과 로빈의 시선은 아직도 자리에 앉아 모든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벤에게 향한다. 시선을 느낀 벤은 그들을 차례대로 올려다본 뒤, 마지막으로 끝나지 않는 한숨을 내쉬고 있는 고도의 정수리로 눈을 두었다.


“음, 난 고도 씨를 따라갈래.”


고도는 너무 급하게 고개를 세운 탓에 뒤로 넘어갈 뻔한 몸을 팔을 휘저어 겨우 다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벌어진 입이나 경악스러운 얼굴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벤은 무심한 먹색 눈으로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뭔 소리야 너?”


먼저 반응한 것은 로빈이었다. 그는 벤의 뒤로 뛰어가 앉아있는 그의 얼굴을 잡아당긴다. 얼핏 보면 장난으로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로빈의 입장에선 꽤나 필사적인 요구였다. 대답을 위해 놓아달라는 벤의 손짓이 있고 난 뒤에야 로빈은 그의 얼굴을 해방해주었다.


“급한 건 기사인 너와 아저씨잖아. 난 상관없다고. 게다가 난 고도 씨가 제대로 책임져주고 보장해주지 않으면 수도에 가도 마땅히 할 게 없단 말이야.”

벤이 다시 고도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딱히 수도에 가기 싫은 건 아니지만, 고도가 데리고 나왔으니 고도가 책임을 지는 게 맞잖아요, 그죠?”


고도는 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의 머릿속을 향해 내면의 목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자아 움직여라, 나의 뇌야. 저 궤변을 깰 논리를 만들어줘-’

그러나

그녀의 뇌는 침묵한다.

대답을 대신하여 시린 달빛, 붉은 모래, 페어리. 마구간에서의 그 모든 것을 다시금 떠올려주었을 뿐이었다.


“전 상관없어요.”

그녀가 뱉은 말, 그러나 스스로가 제일 놀란다.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을 뻔했지만, 간신히 턱에서 멈춰 헛기침을 하는 척, 민망함을 모면할 수 있었다. 동시에 벤의 머리 위로 당황하는 드렌턴과 로빈의 표정이 보인다.

자,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명령서를 보니, 수도에 가면 기사 분들은 바쁘실 것 같고, 벤은 말씀대로 제가 직접 뭔가 추천해주기 전까진 수도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니까요. 투르탄고지 인근을 수색하라는 건 아마 최근 그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는 생태계 변화를 조사하고 오라는 뜻일 테니, 마침 저 혼자 다니기엔 위험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고······.”

고도의 마지막 말은 절대 진심이 아니란 걸 적어도 벤만은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둘에겐 ‘이 정도’로 충분했던 모양이다. 드렌턴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눈치였고, 로빈은 여전히 당혹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비는 괜찮나? 투르탄고지라면 가는 데만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텐데.”


드렌턴이 물었다.


“네, 여기 추가 지원금.”


고도가 편지봉투를 털자, 반짝이는 동전이 그녀의 손바닥으로 떨어진다. 앞면엔 성왕(聖王) 미트라블루스 7세의 옆얼굴이, 뒷면엔 카나반 공화국을 상징하는 탕나무가 새겨진 은화였다.


“크으, 공용은화라니. 정말 오랜만이구만.”


은화를 내려다보며 그리움이 넘치는 표정을 짓는 드렌턴. 동봉된 추가금으로 드렌턴과 로빈의 수도행도 지원해줄 수 있다는 (마음에도 없는) 고도의 제안이 있었지만 드렌턴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있던 로빈은 은화나 제안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야, 벤, 괜찮겠어? 바쁘긴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랑 같이 수도로 가면 아저씨가 이것저것 알려줄 시간은 있을 텐데. 같이 좀 여기저기 둘러볼 시간은 있지 않을까?”


로빈이 다시 벤의 옆자리에 앉으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벤을 바라보았다.

물론 평생을 같이 지낸 친구와 이토록 가볍게 작별하리라곤 생각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자신과는 달리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벤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로빈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벤의 시선과 표정은 단호했다.

아니, 무심했다.


“내가 같이 가면 너나 아저씨한테 짐만 될 뿐이야. 안 그래도 아저씬 나보단 기사 쪽인 네가 신경 쓰일 텐데 눈치 없이 눌러앉으면 안 되지.”


“······그래,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로빈의 입은 벤의 무표정과 굳은 입술에 다시 열리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검붉은 눈동자에 걸려있는 미련은 좀처럼 벗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벤의 결정과 행동, 그리고 고집에 대한 의문은 물론 남아있다. 그러나 그와 지낸 시간만큼, 이런 벤의 ‘반응’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로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로빈은 고집을 막아설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아침 식사 뒤로, 준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드렌턴과 로빈은 약간의 식료품만을 구매하고 말을 빌리기로 정했다. 붉은 모래의 가도 위에서 운영하는 여관들은 대부분 국가의 우역(郵驛)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무에 한해서는 차량이나 말의 대여가 가능했다.

한 필을 빌려 둘이 같이 타도 무리는 없다는 주인장의 설명이었으나, 드렌턴이 로빈에게 승마를 가르친다고 고집을 피운 탓에 여관주인은 결국 두 필을 내주는 것으로 합의를 봐야 했다.


고도는 자신과 벤 두 사람이 2주일간 먹을 식량을 아슬아슬할 정도로만 구입하고는, 여관 주인에게 푼돈을 쥐어주며 영수증의 내용을 부풀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정도로 부려 먹히는데 소소한 용돈이라도 취하는 게 뭐가 잘못됐냐는 것이 그녀의 변명이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었는지, 여관주인은 능숙하게 조작에 응해주었다. 그는 줄곧 미소를 잃지 않았는데, 모든 걸 지켜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벤에게 굳이 열심히 설명을 늘어놓는 고도 덕분이었다.




“자, 이제 한동안 못 보겠구만.”


여관 밖으로 나온 네 명.

드렌턴의 호탕한 목소리와 함께 그들은 벌어진 서로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주변엔 이미 성실한 행상인들과 자리를 펼칠 준비를 하는 노점상인들이 곳곳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청명한 하늘. 길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넓은 이 평원에 여름의 따스한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고도와 벤은 적어도 2주일은 있어야 수도로 되돌아올 수 있다. 그때쯤이면 로빈은 이미 훈련소에 입소했을 터.

그리고 훈련소 정규과정은 알려진 것만 최소 1년.

이 뒤로 그들이 만날 날은 꽤나 훗날의 때가 될 것임을, 로빈과 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흠, 뭐어, 너라면 어찌어찌 살아남겠지.”


의외로 먼저 입을 연 것은 벤이었다. 너무도 가벼운 어투에, 뒤에서 엿듣던 고도마저 허탈해지긴 했지만.


“그것참 감동스러운 작별인사구나.”


로빈은 질렸다는 듯이 웃으며 벤에게 다가왔다. 악수를 기대하며 손을 내민 벤이었지만, 돌아온 것은 격한 로빈의 포옹이었다.


“후회는 없어. 이제 시작이잖냐. 다음에 볼 때는 서로 못 알아볼 정도였으면 좋겠다.”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로빈의 목소리에, 벤은 낮게 웃고 만다.


“······잘도 그런 쪽팔리는 말에 이런 쪽팔리는 짓을 하네.”


그러면서도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느새 커져 버린 로빈의 등짝을 거칠게 두드려 주었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시간이 끝나는 순간. 그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는 태도치고는 너무도 가볍게, 두 친구는 인사를 나눈다.


고도와 벤은 말 위에서 어설프게 휘청거리는 로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여관 앞에서 그들을 배웅해주었다. 모든 길이 이 가도와 같이 일직선으로 곧지 않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최악의 경우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들의 뒷모습. 고도라도 그 순간만큼은 굳이 말리고 싶지 않았다.


“흠, 그럼 우리도 갈까요.”


벤의 무심한 목소리는, 고도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게 짧은 감상이었다. 그러나 힐끗 바라본 그의 얼굴엔 이미 미련은 지워져 있었다. 둘은 드렌턴과 로빈이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근데 왜 제가 꼽사리 끼는 걸 그냥 넘어가신 거예요? 이런 거 되게 싫어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네엣? 아아······.”

느닷없이 던진 벤의 질문에 고도는 당황할 수밖에. 역시 이 너저분한 남자, 눈치만은 보통이 아니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뭐, 맞는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끝까지 책임지거나 그런 걸 즐기지는 않지만 어쨌든 공무를 수행 중인 건 저니깐요.”

만족스러운 답변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녀는 예상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벤은 더 공격해 들어오진 않을 모양이다.

단지 흐음- 하며 낮은 신음과 함께 너저분한 먹색 머리를 긁적였을 뿐.


“전 또 그새 저한테 반하신 줄 알고 그랬-, 아니, 죄송합니다. 농담이었어요. 손 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다소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나름 노력해서 꺼낸 말이었지만, 뒤이어 떠오른 고도의 표정을 보고 벤은 식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심을 담아 치켜올린 그녀의 주먹은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위협적이었다.

다시 한번 그런 터무니없는 농담을 했다가는 공격마법이라도 날릴 기세인 그녀에게, 벤은 로빈과 드렌턴 앞에서는 묻어두었던 말을 꺼낸다.

“······먼저 말해두지만, 그 ‘날파리’는 아마 한동안 안 나타날 거예요.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가 말하는 ‘날파리’가 누군지 고도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지만, 고도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아요. 저도 그런 말을 듣고서 바로 다시 보고 싶지는 않거든요.”


벤은 그녀의 말에 피식 웃는다. 그를 보며 고도는 생각한다.

저 인간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가 있구나- 하고.

그 정도로, 벤의 얼굴은 가벼워져 있었다.


“근데 당신 몇 살이에요?”


“숙녀의 나이를 물을 땐 먼저 조금이라도 곤란하다는 듯한 태도 정도는 취해주세요.”


“어, 근데 당신 몇 살이에요?”


“······열일곱이요.”


“뭐야, 숙녀는 개뿔 한참 꼬꼬마네. 반말 까도 되지?”


“그럼 나도 깔 건데?”


“······그럼 내가 손해인 거 같은데.”


그림자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일상. 숲을 통과해 시원해진 바람이 붉은 모래라는 별명을 가진 평원을 핥고 무심하게 지나치는, 그런 평범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여느 일상이란 게 그렇듯이, 흔들리고 금이 가기 전이 가장 평화로운 법.

맑은 하늘엔 구름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지만, 전운(戰雲)은 분명히 공화국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로빈과 벤은 그들의 생각보다 빠르게 이 벌어진 거리가 좁혀지게 되리란 사실을 이런 일상의 하늘 아래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작가의말

1막이라고 써놓긴 했지만, 사실상 서막에 가까운 첫걸음이었습니다.

미흡한 글이지만, 이어져나가는 과정을 함께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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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4 84 19쪽
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4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8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30 8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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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2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8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1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4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4 9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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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6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700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2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5 95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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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3 102 13쪽
»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8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6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2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7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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