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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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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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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21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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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글자
19쪽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5)

DUMMY

“아이구, 이거 날 여기다 박아놓고 까먹기라도 한 줄 알았어.”


기분 나쁜 음영이 편하게 숨 쉬는 것조차 끈질기게 방해하는 어둠 속에서, 드렌턴은 쇠창살 너머로 나타난 옛 친구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주변의 어둠마저 끌어모으는 듯한 마누앙의 깊은 먹색 눈은 어둠과 한기에 익숙해진 드렌턴에겐 쉽게 눈에 띄는 빛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드렌턴은 마누앙의 낮은 목소리에 다소 놀란다. 언제나 눈앞 상대의 존재 따윈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대화를 시작했던 그가, 지금은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답을 원하고 있었으니까.


“뭐, 대답하지 않으면, 사형이라도 시키시려구 그러시나?”


잔뜩 비꼬아보지만, 결국 그는 마누앙의 질문을 기다린다.


“너는······, 우리가 왕을 어떻게 인도해야 했다고 생각하나?”


가장 당연하고도, 필요했던 질문.

그러나 그는 18년 동안 이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자신의 동생이 왕의 목을 베어버리기 한참 전부터 그는 이것을 묻지 않았다. 왕이 빛을 잃어가던 그 순간까지도, 그는 이것을 묻지 않았다.


“하, 근위대장이였던 나에게 어떤 대답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


“······그래? 그렇다면 너는 어째서 그 씨앗을, 바로 그 나무를 베어버린 장본인인 내 동생에게 보낸 거지?”

드렌턴은 대답할 수 없었다. 마치 그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마누앙은 곧바로 다시 무거운 입을 열었다.

“너의 그 굳은 신념에 따르면 크라트는 네가 가장 먼저 복수해야 할 대상이 아니던가?”


“그는,”

마누앙의 말끝을 훔치며 드렌턴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는, 적어도 왕을 저버리지 않았어.”

마누앙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눈빛으로 그 해답을 요구하고 있을 터.

“나는······, 크라트가 왕의 목을 베는 순간 바로 그 옆에 있었다.”


“······.”


“왕은 그를 보자마자 뭐라 말도 못 할 정도로 반갑게 그를 포옹하더군. 그 또한,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난 행복한 얼굴로 왕을 끌어안았다. 그의 검이 왕의 피를 흩뿌린 건 짧은 대화가 오고 간 직후였지. 마낭, 그러고 나서 그가 어떻게 했는지 아나?”

침묵.

“떨어진 왕의 목을 부여잡고, 말 그대로 서럽게 통곡했어. 미안하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소리치면서 말이야. 평생 눈물이라곤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남자의 그런 모습은, 근위대장이였던 내가 왕의 목이 떨어진 것을 보고 나서도 감히 움직일 수 없는 광경이었어. 알겠나? 나는 그가 왕을 시해했다는 사실에 분노해. 하지만 그가 왕을 저버렸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 그렇기에 난 씨앗을 고민하지 않고 그에게 넘길 수 있었던 거고.”


“······그런가. 귀족파의 대표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왕가의 몰락을 지켜본 나는, 결국 왕을 저버린 게 되는 것이군.”


“아아니, 그건 아니야.”

드렌턴은 보이지 않는 친구의 표정을 올려다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다는 게 너희들의 태도였어.”


“······그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변명은 필요 없는 거겠지.”


“흥, 이제 와서 갑자기 무슨 소릴.”


마누앙은 쇠창살 너머로 깊은 한숨을 내보낸다.

비겁한, 기회주의적이라는 오명을 무릅쓰고 지금부터 자신이 할 행동과 각오에 대해서는 굳이 이 옛 친구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때와 같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이 옛 친구를 설득하지 않는다.

다만, 빛이 새어 들어오는 출구로 발걸음을 향하며 이렇게 작게 말을 건넬 뿐.


“조금만 더 그러고 있어라. 곧 끝날 테니.”


그 목소리는 분명하게 드렌턴의 귀로 흘러들어왔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의문도 던지지 않았다.




***




마누앙이 그의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 그를 반긴 것은, 불타는 눈과 입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마누앙이 들어서자마자 쥬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누앙에게 달려들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섭정!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귀족 대표를 체포하다니?!”


“이제 와서 귀족을 배신하겠다는 뜻인가?! 미친 왕의 자식에게 머리를 낮추겠다는 것인가?!”


“당신이 그 자리에 오른 게 다 우리 덕분이란 걸 잊었소?!”


예상은 했던 상황이지만 역시 표정이 굳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마누앙이다. 그는 벌레처럼 엉겨 붙는 귀족 무리 사이를 쥬넨의 도움으로 헤치며 겨우 자신의 책상에 앉을 수 있었다.


“윌리안님은,”

몰려드는 인파를 향해 내뱉은 마누앙의 첫마디. 그 이름은 모두를 잠시 침묵시키는 데 성공한다.

“최전방 전선에서 자신의 이름을 이용하여 예비대를 철수시키겠다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계획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것도 왕의 씨앗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도 전에 말이지요.

즉, 왕세자의 등장은 그에게 있어 구실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이것은 제가 독자적으로 정보와 증거를 수집하여 근위대에 제출한 상태이니, 확인하실 분은 확인해보셔도 괜찮습니다.”


그의 말에, 귀족들은 잠시 말을 잊을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그, 그럼 윌리안님이 애초부터 반란을 꾀하고 계셨다고······? 말도 안 돼!”


“아니······, 분명, 최근에는 니바르토가에서 섭정을 계속 유지하는 상황에 대해 심하게 반대하시긴 했지. 왕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귀족파가 왕을 몰아낼 수 있었던 구심점이 자신의 가문이라고 생각해왔으니.”


“그래, 저번 회의에서도 마치 군대를 끌고 오면 협조하지 않은 귀족들은 숙청할 듯한 분위기였어······.”


그들은 서로 목청을 높이며 혼란에 휩싸인다.

단순히 왕자에 대한 분노만으로 움직여왔다고 생각한 윌리안이 만약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정세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귀족의 이름에 달려있는 군세로는 카나반 내에 비교할 가문이 없는 가슈펠라르였기에, 저번 회의에서 보였던 윌리안의 태도, 그리고 마누앙의 이 설명으로 미루어보면, 윌리안의 저의는 분명해지는 것이었으니까.


“그, 그렇다면 섭정! 왕자는 어찌해야 합니까? 곧 수도로 들이닥칠 텐데, 우리에겐 그를 막을 수단이 없잖소?”


턱 아래로 추잡한 살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늙은 귀족의 다급한 표정. 마누앙은 그의 탁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한숨을 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왕자가 우리 모두를 도륙이라도 하실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의 여유롭고 평온한 목소리에 당황한 사람은 질문을 했던 늙은 귀족뿐만이 아니었다.


“그럼 어찌할 거라 생각하오? 우린 그의 아비를 몰아내고 그의 형제들을 죽였단 말이오!”


“여러분이.”

마누앙의 먹색 눈동자가 소란을 짓누르며 빛을 빨아들인다.

“여러분이, 왕의 목을 베었습니까? 아뇨, ‘베르달의 늑대’가 그러했지요. 여러분이 왕자의 형제들을 도륙했습니까? 아뇨, 가슈펠라르 가문이 그러했지요.”

귀족들이 멀뚱히 서로 얼굴을 바라본다. 그런 그들의 엉성함 위로 마누앙이 말을 맺는다.

“윌리안 경이 계획하고 주도한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시면 안 됩니다.

그는 자신의 죄악을 귀족파 전체로 끌어들인 인물입니다. ‘그 사건’ 이후 곧바로 저를 섭정으로 내세운 것도, 국민투표에 맞춰서 자신의 군대를 소집하려고 했던 것도,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아들을 핑계로 왕가를 도륙했던 것도, 모두 그의 궁극적인 목표를 위한 초석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18년간의 혼란을,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 이 혼란을 저나 윌리안 경이 잠재울 수 있다고 보십니까? 분열된 내각, 혼란스러운 국정. 그것을 틈타 쉴 새 없이 국경을 두드리는 적국들. 그 중심엔 바로 저, 섭정과 가슈펠라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혼란의 중심에서 이를 잡아줄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얇은 손가락으로 청중을 가리킨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우리 ‘공화국’에 필요한 그것이 바로 ‘왕’이라는 직책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그 가벼운 권력의 향응을 위해 모든 의무를 포기하실 겁니까? 정녕 이 국가는 여러분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까?

그러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저는 저와 모든 가문의 선조들, 그리고 과거의 모든 왕이 피와 눈물을 흘리며 지켜낸 공화국이 이렇게 흐려져 가게 둘 수 없습니다.”

안경을 쓰며, 마누앙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앞으로 올라온 서류를 책상에 펼친다. 이미 모든 귀족들은 갑작스러운 마누앙의 태도에 할 말을 잃고 끔뻑끔뻑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펜을 들고, 서류를 넘기며 마누앙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왕자의 아버지, 왕자의 형제들, 그리고 국가와 귀족. 18년 전 그날과 18년 동안의 모든 책임은 저와 윌리안 경이 지겠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그랬듯, 그저 공화국의 기틀이 되어주십시오. 그것뿐입니다.”

섭정이 천천히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고, 쥬넨은 곧바로 침묵하는 귀족들을 집무실 밖으로 안내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참으로 가식적이고 졸렬하게, 그들은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마누앙은 알고 있었기에, 그는 그들의 뒷모습에게서 딱히 어떠한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님, 정말 이것으로 된 겁니까?”

둘밖에 남지 않은 집무실. 쥬넨은 책상 맞은편 소파에 천천히 몸을 내려놓으며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근위대에 제출했다는, 윌리안이 군대의 소집을 명하는 그 전문. 브린을 시켜 날짜를 조작하신 것이지요? 왜 왕자에게 맞서기를 포기하시는 겁니까? 왜 모든 책임을 윌리안과 나눠지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너는 방금 내가 저들에게 했던 말 중에 진심이 얼마나 섞여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안타까운 표정의 아들은 바라보지도 않고, 마누앙은 무심하게 내뱉듯 입을 열었다. 뜻밖의 질문에 쥬넨은 말문이 막혔고, 그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노인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너는 내가 성공적인 지도자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내가 단순히 권력만을 추구하는, 귀족파의 대표라고 생각하느냐? 그것도 아니면, 내가 훌륭한 신하였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아버님은······-”


쉽게 입을 열려는 자신의 아들을, 마누앙이 깊은 눈으로 노려본다. 정에 연연한 대답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리고 동시에 본인이 직접 대답을 내놓는다.


“나는 모두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결국 18년간 귀족들을 통합하지 못했고, 가슈펠라르가 다른 마음을 먹는 것을 막지 못했고, 왕이 빛을 잃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공화국에 나만 한 죄인이 있느냐?”


“······아버님이 그렇게 생각하셔도,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쥬넨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거칠게 집무실의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마누앙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곧바로 서류더미로 시선을 내리고 묵묵히 펜을 움직일 뿐이었다.




***




“아으~ 드디어 학교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고도가 자신의 바다빛 머리 위로 기지개를 켜며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를 흘렸다. 베르달군의 주둔지에서 꽤나 벗어난 곳의 언덕. 다소 축축한 잔디와 잡초를 침대 삼아 그녀는 그대로 몸을 밤하늘에 맡겨버린다. 자신과 그녀 사이에 있던 이리스를 덩달아 눕히며, 벤은 고도의 시선을 쫓아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기말시험이네.”


“아아-! 벤, 너 공부는 하지도 못했는데 어쩔래?! 괜히 또 내가 혼난다고!”


“왕자를 따라 종군했다고 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


“퍽이나.”

그들이 눈에 담은 하늘은, 동아리방 창문을 통해 가끔 올려다보던 그것과 분명 똑같았지만 확연하게 다르기도 했다. 시야에 꽉 차는 커다란 달을 바라보며, 고도는 자신이 이렇게 야외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누워 밤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었나-, 잠시 과거를 되짚는다.

모든 걸 내려놓는다는 것과, 모든 걸 뺏겼다는 사실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었지만, 그녀에겐 나름 색다른 해방감을 준 경험이었다. 때문에 평소라면 관심조차 없었을 상대에게 그녀는 넌지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요번 전투 때 한 건 했다며? 진짜 의외로 전투마법사에 소질이 있는 거 아냐?”


“······전투마법사라기보다는 그냥 짤막한 대비를 제의했을 뿐이야. 그건 그렇고, 의외라니 또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 한다.”


“칭찬하고 있는 건데?”

고도가 쿡쿡 웃으며 하늘에서 시선을 거둔다.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이리스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다가, 벤의 알 수 없는 표정과 함께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만다.

“왜?”


고도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벤은 짧은 침묵 뒤에 입을 열었다.


“넌, 사람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어?”


“뭐어?”

고도는 뭔 괴상한 질문을 하냐고 그를 다그치려 했지만, 달빛과 별 아래로 드러난 벤의 얼굴을 보고서는 한번 말을 삼킨다. 어째선지 그가 스스로를 향해 질문을 하고 있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고도 또한 그녀답지 않게 그 진지함을 받아들여, 짧은 침묵 뒤에 입을 연다.

“왜, 내가 눈물도 없는 냉혈썅년으로 보여?”

농담을 섞어 대답을 유도하지만, 벤은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다. 할 수 없지- 라는 표정으로, 결국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금 뒤로 누워버리는 고도.

“내가 말했었나? 난 고아원 출신이야. 제르나비라는 이름도 그곳에서 받았어. 나이도 그곳에서 받았고, 생일도 그곳에서 받았지. 뭐, 그때도 고아원 애들이랑은 그닥 잘 지내지 못했어. 그냥 가르쳐주면 배우고, 먹을 걸 주면 먹었고. 가는 곳마다 말썽만 일으키는 덕분에 시설도 계속 옮겨 다녔지. 그러다가 열두 살 때쯤에, 나랑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가 있는 곳으로 옮기게 됐어.”

그녀의 시선이 어느새 잠에 빠진 이리스를 향한다.

“참 귀여운 아이였지. 무뚝뚝하고 까탈스러운 나에게도 유일하게, 끈질기게 다가와 준 아이였으니까. 내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어. 덕분에 남은 고아원 생활이 즐거웠지. 사람과의 관계라는 게 어떤 것인지, 그때야 마침내 조금씩 알 수 있었어.”


“그 고아원이란 거.”

벤이 이리스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말했던 그······-”


“맞아.”

고도가 빠르게 대답했다.

“말했듯이 그런 시설들은 예산이 부족해서, 나도 열다섯 살 때 고아원을 나와야 했어. 적성검사랍시고 내쫓기 위한 구실을 통과해서 말이야. 그건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지. 근데 그 적성검사 때 알게 된 사실이 있었어.”

그녀가 이리스의 평온한 이마를 쓰다듬는다.

“그 아이, 인형이었더라구.”

벤은, 표정을 지운 얼굴로 이리스를 쓰다듬는 고도를 바라본다. 하지만 때맞추어 달빛을 가린 구름 탓에 그녀의 눈빛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전혀 몰랐어. 눈치챌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에겐 어떤 인간보다 인간적이었던 아이였는데. 그 소식을 듣자마자 걔 방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고아원장이 비싼 값으로 팔았다고 하더라.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른다고 했어. 단순히 인형을 좋아하는 변태영감이었을 수도, 연구하고 싶었던 대학의 교수였을 수도 있지.

내가 아는 건, 그 사람이 마법대학과 관련되었다는 것뿐이었어. 참 사람 일이란 요상하지. 내가 그때 손에 들고 있던 적성검사표에서는 ‘마법’이라고 짤막하게 쓰여있었거든. 그 순간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 때문에 눈물을 흘렸던 때야.”

고도는 말을 마치고 이리스의 곁에 누워 소녀에게 팔베개를 넣어준다. 벤에게서 어떤 반응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고도는 마치 지루한 이야기라도 끝내는 어투로, 가볍게 웃음으로 마무리한다.

“뭐,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살고 있어. 혹시라도, 대학에서 그 아이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해서. 돈도, 배경도 없는 내가 그럴 수 있으려면 오로지 내 실력과 노력만으로 오르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런데 중요한 기말을 앞두고 이런 곳에서 너 같은 놈이랑 이상한 일에 휘말릴 줄은······, 에휴.”


“흠, 그건 좀 미안하네.”


“알면 됐단다.”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이리스 때문에 고도는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벤을 올려다본다. ‘이것 좀 봐봐’라고 입모양만으로 소리치면서. 그런 모습에 벤은 피식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다.


“반강제로 끌려와 놓고, 넌 큰 불평도, 불안해하지도 않고 따라와 주네.”


“무, 뭐······, 그거야, 너넨 내 책임이니깐······.”


삐죽 입술을 내밀며 불평하는 고도. 벤은 그런 그녀를 보며 다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말하고 있지만, 분명 그녀는 학회장과 자신까지 가세한 주변의 상황에 큰 답답함을 느껴왔을 것이다. 본인의 목적을 위해, 본인의 유일했던 ‘인간관계’를 위해 모든 관계를 포기하고 앞만 보고 달려온 그녀에게, 자기라는 존재는 큰 약점이 아닐까.


“내일, 만약 큰 전투 없이 수도에 들어가게 된다면 로빈에게 말해볼게.”


“뭘?”


달빛이 투과하는 바다처럼, 큰 눈망울로 올려다보는 고도에게, 벤은 무성한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네 상황 좀 봐줄 수 없겠냐고.”


“하, 말은 고맙네요. 하지만 마법대학은 철저하게 왕가 쪽이랑은 분리돼서 운영하는 게 원칙이야. 로빈이 시작부터 나 같은 거 때문에 그 원칙을 깨게 만들 수는 없지.”


벤은 다소 놀란다. 그녀가 자신을 ‘따위’라는 말로 낮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역시 그녀답다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아! 벤님! 여기 계셨군요!”

갑작스레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벤과 고도는 동시에 언덕 위로 고개를 돌렸다. 전투마법사 하파였다.

“왕자님이 찾으십니다. 야영은 중단하고, 곧바로 수도를 향해 움직이기로 했어요.”


“전투라도 벌어집니까?”


벤이 물었지만, 하파의 표정은 전투를 앞둔 마법사치고는 밝았기에, 벤은 다음 그녀의 입에서 들려온 대답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아뇨, 귀족파가 왕자의 입성을 환영한다는 통신을 보내왔어요!”


작가의말

아이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편두통때문에 잠깐 누웠다가 일어난다는게 일어나보니 해가 져있네요ㅡㅡ;;

언제나 봐주셔서 감사드리며,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으면 지적해주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7

  • 작성자
    Lv.88 百花亂舞
    작성일
    14.09.21 23:33
    No. 1

    정말 좋네요. 오늘도 잘보고 갑니다. 이렇게 재미진 소설, 정말 감탄하게 되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21 23:35
    No. 2

    백화난무님 빠른 댓글 감사합니다 ㅠㅠ
    재미있으시다니 정말 글쟁이로서는 가장 기쁜 칭찬이 아닐까 합니다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7 아인.
    작성일
    14.09.22 14:18
    No. 3

    도륙이라고 -> 도륙이라도

    지도라도 하나 올려주시면 글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22 14:23
    No. 4

    아앗 아인님 봐주시고 오타지적까지, 감사드립니다!
    지도말씀이시군요. 슬슬 필요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이참에 생각해봐야겠네요!
    의견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3 낭만클럽
    작성일
    14.09.25 06:42
    No. 5

    정말 재미있습니다.

    이틀만에 여기까지 달려왔어요 :) 앞으로 잘부탁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25 12:03
    No. 6

    낭만클럽님 재밌게 봐주셨다니 감사드립니다!
    저야말로 앞으로 잘부탁드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3 낭만클럽
    작성일
    14.09.25 06:42
    No. 7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25 12:03
    No. 8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24 주정
    작성일
    14.09.27 16:12
    No. 9

    냉혈썅년! 왠지 어감이 좋군요?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27 16:24
    No. 10

    으잌ㅋㅋㅋ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눈솔
    작성일
    14.10.04 23:42
    No. 11

    흠.. 권력이양이 이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 있나요? 애초에 이럴거면 섭정은 왜 반역혐의를 그들에게 씌운걸까요. 감정기복? 판단력저하? 너무 휙휙 지나가는 기분입니다.. 으음.
    너무 순탄해요. 사람 사이의 일이, 심지어 피와 권력이 얽힌 일이 이렇게 쭉 풀리다니?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0.04 23:55
    No. 12

    눈솔님 계속해서 감사드려요!
    음 설명을 드리자면, 섭정의 경우 철저하게 권력유지에 초점을 두고있기보다는, 국가라는 개념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습니다. 애초에 미친왕이든 미친왕의 자식이든 그에게는 하나의 변수이자 수단일 뿐이지 적대하거나 우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어쩌면' 분열된 기틀을 잡을 수도 있는 왕이라는 직책이, 사적인 감정으로 국가의 안녕을 위협하는 귀족대표보다는 낫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때문에 마누앙이 처음부터 반역혐의를 씌운 이유는 간단합니다. 중심이 될수있는 씨앗을 빼돌렸기 때문이죠. 바로 그 부분에서 드렌턴은 그를 잘못 이해하고 있던 겁니다. 이부분은 좀더 보시면 이해하실 수도 있겠네요..
    부족한 점이 설명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깊게 관심가져주셔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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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52 영점일
    작성일
    14.10.10 18:44
    No. 13

    목을 한번에베었으면 유언은 어케남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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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0.10 19:26
    No. 14

    찹쌀떡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언....이라는 것이 어떤 부분을 말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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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75 미소녀세라
    작성일
    15.07.18 15:50
    No. 15

    완전 재밌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5.07.18 18:33
    No. 16

    무사님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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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 수작수집
    작성일
    17.05.06 15:51
    No. 17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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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3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3) +16 14.09.26 2,862 69 16쪽
42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2) +18 14.09.25 3,030 73 14쪽
41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1) +20 14.09.24 2,439 63 21쪽
40 (막간) 구원 +18 14.09.23 2,467 59 10쪽
39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7) +10 14.09.23 2,256 63 21쪽
38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6) +11 14.09.22 2,654 93 20쪽
»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5) +17 14.09.21 2,539 81 19쪽
36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4) +14 14.09.20 2,617 73 21쪽
35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3) +11 14.09.19 2,642 84 25쪽
34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2) +23 14.09.18 2,691 96 19쪽
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2 84 19쪽
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3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6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28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5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0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7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0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2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2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3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5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698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2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4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3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3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3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2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7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6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1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7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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