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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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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작성
14.09.1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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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글자
19쪽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DUMMY

“아아! 진짜 짜증나네! 뭐 이딴 놈들이 다 있어?!”


지나는 진심으로 짜증을 냈다.

그녀의 밤눈이 나무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에페검에 피 한 번만 묻히면 끝나는 일이라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지나의 검이 그림자를 파고들기도 전에, 뒤에 대기시켜 놓았던 그녀의 분대가 정체불명의 기사에게 습격받고 말았다. 다수의 사상자가 나오는 바람에 지나는 결국 후퇴를 명령해야 했고, 부하들의 안전한 철수를 대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적 무리에게 홀로 포위가 된 것이다.

지나가 짜증을 낸 주된 이유는 포위된 자신의 처지나 철수한 분대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을 노리고 있는 이 괴상한 무리. 그들이 어둠 속에서 자신을 조여 오는 방식이 문제였다.

먼저 기사도 아닌 병사 서너 명이 대놓고 사방에서 자신에게 접근해 온다. 그리고 노골적인 살의가 담긴 영력을 뿌려대며 나무 위를 옮겨 다니는 기사와, 철저하게 영력을 감추고 그림자 사이에서 틈을 노리는 두 번째 기사.

지나가 다가오는 병사에 반응하거나 병사가 먼저 달려들 때면 나무 위에서 치명적인 화살, 그것도 공기를 찢는 듯한 굉음을 내는 우는살(嚆矢)이 날아든다. 그 날카로움과 소음엔 지나가 반응할 수밖에 없고, 그녀가 방어하거나 회피하는 틈을 노려 어둠 속에서 몸을 감추고 있던 두 번째 기사의 치명적인 일격이 날아든다. 만약 그 일격이 효과를 보지 못하면 두 번째 기사는 다시 곧바로 몸을 숨긴다-. 지나를 중심으로 이 짜증스러운 과정이 반복되고 있었다.

기사를 잡기 위해 병사를 먼저 희생시킨다는 발상은 지나에겐 당황스러운 개념이었다. 병사의 희생을 최소로 해야 한다는 기사로서의 의무나, 훈련소에서 배웠던 지휘관으로서의 덕목 따위가 떠오른 건 아니었다.

기사와 진심으로 검을 맞대는 자는 어디까지나 기사여야 한다고. 그것이 기사로서의 당연한 책무라고, 그녀의 고조할아버지에게서 지겹게 들어왔던 탓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사냥’을 하고 있는 저들의 입장에서도 지금 상황은 예상 밖의 흐름으로 가는 중이었다. 지나에게 접근하기로 되어있거나, 그녀의 반경으로 접근하는 모든 병사는 예외 없이 목이 꿰뚫린다. 그들의 희생을 통해 계획된 공격을 감행하지만, 저 샛노란 머리의 기사는 이 과정을 다섯 번이나 버텨내고 있었다. 이제 남은 병사는 셋. 과정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사냥조’ 기사들의 머릿속에 공통으로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지나가 먼저 과감히 움직인 것은 어쩌면 이런 미묘하게 뒤틀린 분위기를 감지한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뒤를 노리던 병사에게 마치 도탄된 탄두처럼 방향을 틀어 달려들었고, 그녀의 전력을 일개 병사가 반응할 수 있을 리는 없었기에 병사는 회색 날의 에페가 자신의 심장을 꿰뚫는 모습을 멀뚱히 내려다보아야만 했다.

병사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나는 그의 멱살을 잡고, 급격하게 식어가는 몸뚱이를 방패삼아 남은 두 병사에게 돌진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용감하게 검과 창을 앞세워 그녀에게 맞섰지만, 한 명은 지나가 내던진 반시체의 정수리에 얼굴이 함몰되고 말았으며, 그녀의 검을 직접 받은 한 명은 그만 검과 목이 하나가 되어 잘려나가고 말았다.


‘오겠지.’


그 짧은 순간에 지나가 피부로 느낀 예상이었지만. 그 방향은 그녀의 예상과 달랐다.


“!”


먼저 튀어나온 적의는 화살이 아닌, 수풀 속에 숨어 있던 안광.

지나가 뒤바뀐 순서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 일격의 날카로움은 그 자체의 위력으로도, 그 의도에 있어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목의 궤도를 노리고 날린 첫 장검의 일격이 막혔음에도 제국의 기사는 물러나지 않고 왼손으로 먹색의 밤하늘 같은 단검을 꺼내 지나의 옆구리를 찔러온다.

지나는 그것마저 오른손으로 쳐내는 것에 성공한다. 영력을 담은 그녀의 오른손은 단순히 단검의 자루를 손등으로 쳐낸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쥐었던 상대의 손가락을 모조리 부러트리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공격이 실패한 제국의 기사가 눈앞의 여인이 지닌 기사로서의 역량을 확실하게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나무 위에서 갑자기 퍼져 나오는, 적의가 깃든 영력. 지나는 곧 화살이 날아들 것임을 직감하여 뒤로 물러난다. 눈앞의 기사를 일합으로 벨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지나의 행동에 제약이 걸리는 셈이었다. 그 틈을 놓칠 리 없는 제국의 기사는 먼저 부서진 손가락으로 단검을 던지며 지나를 향해 도약해 왔다.

지나는 날아드는 단검을 쳐내고, 곧바로 뒤이은 남자의 일격을 막아내면서도 날아올 화살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위태로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판단으로, 지나가 사수의 사선과 눈앞의 남자를 일직선으로 만들기 위해 몸을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순간-


“읏.”

어둠과 침묵 속에서 나타난, 세 번째 그림자.

그 가녀린 몸집이 품고 있는 것은, 분명한 목적을 지닌 날카로운 창.

‘젠장, 처음부터 세 명이었나-.’

바로 앞 남자의 장검이 다시금 머리 위에서부터 날아든다.


위기의 순간-


그러나 지나는 미소 짓는다.


태양 같은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즐겁게 빛을 발한다.

지나는 아예 뒤돌아서서 복부를 향해 날아들던 창의 날을 손가락 사이로 흘리며 쥐어 잡고, 그 단단한 무기의 목을 부러트림과 동시에 에페검의 끝으로 아슬아슬하게 장검을 막아내며 그 간격을 유지한다. 마치 곡예와 같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흥분의 순간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잠시 잊고 있었던 하나의 시선을 깨닫고 말았으니,


‘아이고-.’


이번엔 소름끼치도록 조용하게 발사된, 치명적인 화살 세 대.

지나는 그것들이 자신의 몸에 박히는 광경 말고는 어떠한 장면도 상상할 수 없었다.

가죽이 찢어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익숙한 목소리의 신음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로빈?!”

갑자기 튀어나와 묵직한 화살들의 궤도를 자신의 등을 희생하여 바꿔준 남자.

지나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동시에 로빈은 지나의 머리를 노리던 남자의 장검을 쳐내며 그의 복부를 걷어차버렸고, 그런 로빈의 목으로 날아드는 두 번째 화살을 이번엔 지나가 에페로 베어내 준다.

“그놈 오른손은 박살 내놨어! 사수는 나무 위의 한 놈!”

빠르게 상황을 정리해주는 지나의 외침에 로빈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반응을 확인한 지나는 짧게 숨을 내뱉고, 부러진 창을 대신하여 두 자루의 소태도를 꺼내는 눈앞의 여인을 노려보았다.

“노골적으로 합을 맞추고 그 틈으로 사수가 노려오는 방식이야. 한 번에 끝낼 수 있으면 좋은데. 짜증나 죽겠어.”


지나의 불평에 가까운 푸념에 로빈은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뭐하는 거야, 합이라니? 넌 그거 갖고 있잖아, 멍청아.”


“그거······? 아아-.”


지나가 혀끝을 깨물며 작게 웃었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이런 당연한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저 멍청한 로빈에게 지적받는 꼴이라니. 아무래도 한 잔 사는 건 자신이 될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에페를 가지런하게 고쳐 잡는다.

곧이어 이어진 빠른 도약, 그리고 정직한 내려치기.

그 공격을 두 자루의 소태도를 교차시켜 막으려던 제국의 여기사는 순간 의구심을 품었다.

이런 크고 뻔한 동작으로 에페를 내려치고 있는 지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 까닭이었다. 이를 강하게 쳐내면 아무리 괴물 같은 영력의 소유자일지라도 자세가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면 화살에 곧바로 꿰뚫리는, 자신들이 의도한 흐름으로 가게 된다. 여인은 지원군까지 온 마당에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일격을 날리는 적의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지나는 자신의 에페가 적의 소태도에 닿는 그 순간, 거센 기합과 함께 거대한 영력을 내뿜는다.

아니, 흘려보냈다고 하는 편이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이스누시아 연철이라는 훌륭한 영도체(靈導體)를 따라 여과 없이 흐른 영력은 마치 그 자체가 순수한 야수처럼, 소태도와 여기사의 생명을 동시에 훔쳐버린다. 잘려 나간 소태도와 머리의 단면도는 지나가 봐왔던 어떠한 금속보다도 깨끗하고 짜릿했다.

그 광경에 잠시 넋을 빼앗긴 장검의 기사에게, 로빈의 검이 횡으로 날아든다. 자신의 오른쪽에서 날아든 검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지나 덕분에 오른손을 제대로 쓸 수 없던 그로서는 양손으로 날린 로빈의 일격을 마냥 굳건하게 버텨낼 수만은 없었기에, 뒤이어 자신의 오른발을 강타하는 로빈의 발차기와 넘어지는 자신에게 다시금 꽂혀오는 검의 끝을 방관해야 했다. 물론 그 일련의 과정 동안, 모두가 기대하고 있던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도망쳤나?”


지나가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그녀의 호흡이 정돈되자, 노골적이던 영력의 파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고 밤공기만이 그를 대신하고 있었다.


“오즈카가 후방으로 접근하고 있을 테니, 아마 걔가 처리할 수 있을 거야.”

검을 거두고, 한 걸음 지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로빈은 자신의 무릎에 힘이 빠져버리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주저앉고 만다.

“어어-?”


“로빈!”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지나의 눈에 로빈의 등을 뒤덮은 빨간 강줄기가 들어온다.

화살촉이 훑고 지나간, 세 줄기의 상처.

그 상처의 깊이는 단순히 화살들의 궤도만 바꿨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찢어진 피부 사이에서 얼핏 묻어나온, 기분 나쁜 검은 액체가 지나의 표정을 일그러트린다.


“이런, 독이네.”


예상했다는 듯이, 대답은 로빈에게서 나왔다.


“이-잇! 멍청아!! 좀 더 고상하게 나올 수는 없었어?!”


“하하, 미안. 달리기가 워낙 느려서 말이지. 그것도 겨우 시간에 맞춰서 온 거라 화살을 쳐낼 수-, 야, 너 왜 우냐?”


“몰라!! 이 병신새끼야!!!”

빽 소리를 지르며 로빈의 옆으로 쓰러지듯 무릎을 꿇는 지나. 잔뜩 찡그린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두 손은 로빈의 왼손을 꼭 부여잡은 채로.

여전히 상처투성이 기사의 손이지만, 역시 참 따듯하고 부드러운 손이라고- 로빈은 생각했다.

“가만히 있어 봐.”


“응? 야, 뭐해?”

로빈은 당황했다. 지나가 그의 뒤로 다가가 등을 향해 얼굴을 내밀고는, 새빨간 혀로 상처들을 핥기 시작한 것이다. 워낙 그녀의 혀가 빨간색으로 진했기 때문에 처음엔 아무것도 묻어나오지 않는 듯 보였지만, 피를 내뱉는 그녀의 입가는 순식간에 로빈의 붉은 피로 범벅이 되기 시작했다. 독의 영향인지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야야! 뭐 하는 거야! 그러다 너까지-”


“뱉으면 그만이야. 잠자코 있어 봐, 좀.”

코를 훌쩍이며 대답하는 지나. 화살을 정통으로 맞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독이 발라져 있었다고는 해도 심각한 상황까지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지나의 눈에선 어째선지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로빈의 상처에 검은 흔적이 남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상처를 핥으면서, 독의 역함과는 상관없이 몇 번이나 울컥하며 올라오는 무언가를 참아내야 했다.

“대충 다 됐어. 아직까지 의식이 있는 거 보니, 심하게 퍼진 건 아닐 거야. 일어나봐.”

지나의 부축으로 몸을 일으키면서, 로빈은 그녀의 말대로 어느 정도 무릎과 허리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기사라는 생명체가 지닌 또 하나의 축복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으며 지나를 돌아보는데, 그곳엔 자신의 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젖은 얼굴과 샛노란 눈동자가 있었다.


“으이구, 뭔 짓이야. 이게”


로빈은 자신의 소매로 지나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그런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따스한 손길을 조용히 내버려 두는 지나. 그녀의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맺히려는 것을 보고, 로빈은 그녀의 어깨에서 왼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대신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며 잡는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나에게, 로빈이 웃으며 헐거운 목소리를 흘린다.


“네 어깨보단 손이 더 따듯하고 기분이 좋거든.”


어느새 눈물이 쏙 들어간 커다란 눈동자. 샛노란 빛을 끔벅이는 지나의 입이 열리기 전에, 로빈은 먼저 그녀의 손을 이끌고 앞으로 걸어 나간다.

흩뿌린 피를 제외하면 참으로 아름다운 밤과 숲.

그리고 적절한 바람의 울림.

밤이 더욱 깊어가는 탓인지, 숲의 그림자가 점점 번져옴을 느끼며 로빈은 그 속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이내 그 어둠은 그의 사고를 끊고 무릎에서 힘을 거두어가 버린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지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을 느끼면서, 로빈은 흐려지는 의식의 끈을 놓았다.




***




“커허-”

눈을 뜨자마자 정면에서 자신을 반기는 나무 천장.

오래되어 시큼한 탕나무향이 자신의 코와 머리를 찌르는 걸 느끼며 로빈은 극심한 고통에 신음을 흘린다. 왼쪽으로 보이는 창문에선 이미 높게 떠오른 해가 그의 망막을 괴롭히고 있었다. 깨끗한 침대 위에서,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우-, 얜 또 이러고 있네.”

상황판단을 끝낸 그의 시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침대 옆 바닥에 앉아 팔과 머리를 침대 자락에 올려놓고 잠을 청하고 있는 지나의 얼굴이었다. 비슷했던 예전 상황을 기억하며 그는 작게 웃고 만다.

그녀는 아직도 작전 중에 입었던 너덜너덜한 가죽옷조차 갈아입지 않고, 얼굴의 핏자국까지 씻지 않은 채였다. 그녀가 밤새 자신의 곁에 있었음을 예상하며, 로빈은 조심스럽게 지나의 이마선을 따라 흘러있는 샛노란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겨주었다.

벌겋게 부은 눈가, 채 닦이지 않은 콧잔등과 입가의 핏자국. 기다란 속눈썹을 따라 반짝였던 그녀의 눈물을 기억하고는, 로빈의 얼굴엔 자신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부드러운 볼을 따라 그녀의 붉은 입술로 손가락을 가져가려는 순간, 인기척을 느낀 그의 시선이 방의 구석으로 향한다.

로빈의 침대가 놓인 방은 객실이라기 보단 커다란 병실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꽤나 널찍한 공간이었으나, 있는 것이라곤 침대와 그 옆의 탁자, 그리고 외과도구가 쌓여있는 손수레가 전부였다. 방과 복도와 격리하는 방문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로빈은 쉽게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엔 로빈이 처음 보는 우락부락한 여자가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길러 내린 구불구불한 흑발에,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팔뚝과 넓은 어깨. 초면의 생소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지만, 특유의 굵직한 얼굴선과 한기가 서린 듯한 푸른 눈이 어딘가 익숙한 로빈이었다.


“아, 일어났네. 기다려, 아버지 불러올게.”


“아버지?”


되묻는 그의 말은 듣지도 않고, 여자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으음······.”


오가는 목소리 덕분에 일어난 지나. 그녀는 부은 눈을 비비더니 고개를 들어 로빈을 바라본다.


“좋은 아침. 밤새 있었던 거야?”


미소와 함께 들려오는 그의 질문에, 지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하, 밤새는 무슨······. 그냥 내 탓이니까, 조금 신경이 쓰여서······.”


“걱정 마. 조금 쑤시기는 해도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하거든, 멍청아?”


자신의 머리를 마구 문지르는 로빈의 손을 낚아채며 지나가 쏘아본다. 잡은 손은 살며시 포개어, 굳이 놓지는 않으려 했지만.


“일어났나.”


차가운 목소리가 병실을 찌른다.

가벼운 셔츠차림으로 나타난 베르달의 영주, ‘늑대’ 크라트였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마법사 로브를 걸친 자들이 들어서는데,


“우와, 꼴이 그게 뭐냐.”


“벤?!”

못 봐주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타난 벤. 로빈은 튀어 오르듯 침대에서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두통을 동반한 전신의 고통 때문에 신음을 흘리며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통증과는 별개로 로빈의 표정만큼은 더없이 밝았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어째 볼 때마다 그 말로 인사를 시작하는 것 같다? 으앗.”


다가온 벤을 거칠게 잡아당겨 끌어안는 로빈. 벤은 그 바람에 이상한 냄새가 난다느니 하며 불평을 떠벌렸지만, 그런 그의 입에서도 미소는 떠나지 않고 있었다.


“엇? 고도 씨랑 하파님도 오셨네? 뭐야 또 파견 온 거야?”


벤의 어깨너머로 같은 로브를 입은 고도와 하파를 눈치챈 로빈이 반갑게 말했지만, 돌아오는 건 벤의 낮은 한숨소리.


“하아, 그건 내가 묻고 싶다.”


“응?”


의아한 표정이 떠오르는 로빈. 벤이 그의 품에서 벤이 벗어나자, 하파가 대신하여 곧바로 대답을 내어놓는다.


“루디님이 국가반역죄로 체포되셨습니다. 여기 있는 벤님도 같은 죄목으로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로빈의 표정이 빠르게 경직된다. 그는 방금 자신이 들은 정보를 해석하기 위해 한참을 머리를 굴려야 했다. 물론 그것을 이해하는 게 가능할 리 없었지만.


“······아니, 아저씨가? 벤이? 무슨 말입니까, 그게? 국가반역죄라뇨, 이유가 뭐죠?”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기도 하고, 그것은 내가 약속했으니 내가 대신 대답하지.”


뜻밖에 들려온, 크라트의 무심한 목소리.


약속이라면-?

로빈이 묻기도 전에, ‘늑대’의 입은 이미 가벼워져 있었다.


“네가 어제 보여준 모습은 전체적으로 조잡하고 썩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너 스스로가 그 모양이 되긴 했지만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골칫거리였던 사냥조를 잡는 것엔 성공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좋은 판단을 한 셈이지. 무엇보다도,”

그의 한기가 침대 옆의 지나에게 향한다.

“부하될 자들을 생각하는 그 모습은 맘에 들었다.”


“부하될 자······.?”


로빈이 지나와 눈을 마주한다. 크라트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는 지나도 모르고 있었기에, 서로 같은 표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크라트는 성큼성큼 로빈의 침대로 다가와, 굳은 얼굴로 로빈의 얼굴 한복판을 직시하며 말을 이어 나간다.


“루디는 국가반역죄 따위로 잡혀 들어간 게 아니다. 그놈의 죄는 너를 이곳으로, 나에게 빼돌린 것이지.”


“빼돌······리다니, 저를 왜······?”


방황하는 로빈의 표정 위로 크라트의 굵은 시선이 내리깔린다. 그의 얼굴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쯤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겠지. 그놈이 널 빼돌렸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은, 네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


“그래.”


크라트가 짧은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네 아버지의 이름은 데르하 폰 미트라블루스,

카나반의 41대 국왕 미트라블루스 11세이자, 최초로 폐위된 왕,

마지막 붉은 탕나무라고 불리는,

‘늑대’인 내가 직접 머리를 벤 자.”


그는 로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너는 그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씨앗. 붉은 나무의 씨앗이다.”


작가의말

봐주시는 독자여러분께 감사의 인사 먼저 올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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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9 81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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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701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2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5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4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4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4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3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8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7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2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8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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