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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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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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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4.09.10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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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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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글자
22쪽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DUMMY

로빈은 10여 분 전부터 가렵기 시작한 종아리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새로 배급받은 기사단정복의 재질이 뭔지는 몰라도 그의 몸에 익숙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그는 전방 15도 각도로 시선을 고정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으로 그 가려움을 잊으려 했다. 지금 종아리를 긁기 위해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강단 위의 저 악마와도 같은 훈련대장이 자신을 핑계로 또다시 수료식의 처음으로 되돌아갈 게 분명하니까.

길게 잡아야 10분 남짓한 수료식을 위한 반복연습만 두 시간째. 훈련생도들의 얼굴엔 무표정으로 덮인 안타까운 짜증이 올라와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세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인지 뱉지 않아야 할 구령이나 박자를 놓치는 훈련생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졸지에 모든 소리 없는 원망을 한꺼번에 받게 된 범인들은 대역죄라도 지은 마냥 안절부절못했다. 마음 여린 여기사 타피는 세 번째로 박자를 틀렸을 때 결국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좋아. 5분간 휴식!”


다섯 번 연속으로 실수 없이 수료식을 마치자 그제야 드렌턴은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의 명령과 동시에 대강당은 온갖 탄식과 쓰러지듯 주저앉는 훈련생도들 때문에 부산스러워진다.


“와,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물론 로빈이 욕과 함께 주저앉으며 처음 한 일은 종아리를 벅벅 긁는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짝다리를 짚는 것 외에 별다른 휴식을 취하지 않는 오즈카는 경외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대단하다 진짜.”


“여태까지 받은 훈련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여유 넘치는 오즈카의 대답이었지만, 허리춤의 단검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얼굴에서도 지루함은 벗겨낼 수 없어 보였다. 그가 굵직한 목을 풀기 위해 턱을 잡고 격하게 꺾자 둔탁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서, 그는 손을 들며 다가오는 지나를 향해 간단히 목인사를 했다.


“안녕? 할 만들하니? 열등한 패배자들아?”


그녀의 목소리는 강당에 있는 모든 동기생의 눈초리를 받기 충분할 정도로 명랑했다. 최종평가와 파견지에서의 활약을 통해 훈련생대표로 선발된 지나는 다른 생도들이 개고생을 하는 것에 비해 우월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의 역할은 수료식을 위해 강단으로 올라올 기사단장에 대한 경례와 충성선서를 읊는 게 전부였던 것이다.

때문에 지나는 두 시간 내내 강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편히 앉아 경례박자를 놓친 동기를 향해 야유 섞인 조롱만 날리고 있던 참이었다. 사실, 타피가 울음을 터트린 책임의 절반은 크게 비웃음을 터트린 지나에게 있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나보다 세니까 봐준다, 시벌.”


진심이 담긴 로빈의 비난에도 지나는 크게 웃으며 힘을 잃은 그의 등을 두드릴 뿐이었다.

그녀의 정복은 은빛으로, 다른 생도들의 남색 정복과는 그 차이가 두드러졌다.

재봉선을 따라 수놓인 붉은 나뭇잎들이 돋보이는, 깔끔하고 짧은 드레스였다. 목부터 골반까지 몸의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 상당히 매혹적인 느낌이었다.

게다가 샛노란 머리를 단정하게 말아 올리고, 드러난 귀에는 붉게 빛나는 루비귀걸이. 동기들은 난생처음 접하는, 화장까지 한 그녀의 모습은, 기사라기보단 명문 귀족가의 외동딸과도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실체를 아는 동기들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서 ‘아름답다’는 생각보다는 ‘가식적이다’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들은 스타킹으로도 감출 수 없는 그녀의 수많은 상처들 또한 머리에 담아두고 있을 터.


“이거 봐, 이거. 이스누시아산 연철이래! 알지? 이스연철은 연대장급만 쓰는 거? 근데 기사단장님이 특별 하사하신 거란다.”


“오늘 그 말 듣는 거만 세 번째다······.”


또다시 회색빛이 도는 에페를 뽑아 자신을 향해 내밀어 자랑하는 지나를 보며, 로빈은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별다른 치장도, 무늬도, 영롱한 빛도 없는, 겉보기엔 볼품없는 검이었지만, 그것이 적에게 노획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기사들뿐이었다.

보통 강철로 제련하는 일반무기와는 달리, 연철무기는 그 물리적 내구도가 강철무기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력의 전달 및 발산이 강철보다 훨씬 수월하기 때문에, 기사들에겐 결과적으로 연철무기가 강철무기보다 압도적으로 효율적인 병기가 된다.

그중에서도 이스누시아산 철광석으로 만든 연철무기는 영력의 흐름이 가장 뛰어난 명품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생산량이 적고, 게다가 현재 이스누시아 지역은 아실레마제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공화국 내 그 희소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국가 공인 대장장이의 보증서가 요구되지 않는, 용병이나 해결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유로운 암시장에서마저도 이스누시아산 연철무기라고 거래되는 것의 대부분이 모조품이라는 게 카나반의 현실이었다.

때문에 검성의 고손녀라는 최강의 배경을 가진 지나도 여태껏 쉽게 접하지 못하던 것이 바로 이 이스누시아산 연철무기였다. 그런 진귀한 무기를 이제 갓 훈련소를 마치는 지나에게 하사했다는 것은, 기사단 내에서도 꽤나 파장을 일으킨 일이었다.


“네 살 때부터 유일하게 갖고 싶은 선물이었는데 이렇게 받을 줄은 몰랐엉, 헤헷. 이제 잘 때도 끌어안고 잘 거야.”


“하루하루 겨우 빌어먹는 거지가 눈앞에서 생일선물로 조랑말을 받았다고 좋아하는 꼬마를 보는 기분이 이럴까.”


이제 로빈은 실컷 놀렸는지, 지나는 촐랑촐랑 오즈카에게 다가가 그의 눈앞에서 검을 이리저리 흔들며 한껏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오즈카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의 행동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감쌌다.


“지나, 그 검을 한 번만 만져 봐도 될까요?”


“미안하지만, 몇 번을 부탁해도 안 돼! 꺄아하하하하하하하핳~”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강단으로 뛰어나가는 그녀를 보며 로빈도 오즈카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싸맸다.


“저딴 게 대표라니, 이번 기수는 망했어.”


“그래도 전장에선 훌륭했지 않습니까.”


오즈카의 짧고, 무심한 한마디의 평.


“아······, 뭐어. 그래, 그랬었지······.”


로빈에게 ‘첫 전투’는 그다지 즐거운 기억이 아니었다.

벤에게 넘겨주며 봤던 지나의 창백한 얼굴,

비어버린 분대의 천막,

그리고 전투 뒤에 남겨진 ‘영광스러운’ 승리의 씁쓸한 뒷맛을 알아버린 로빈은, 자신이 절대로 전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의 성적에 비하면 특혜에 가까웠던 근위대를 거절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섭정에게는 패기롭게 현장지휘관에 흥미가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로빈을 지배한 건 단순히 지휘에만 욕심이 있었다거나, 피가 튀고 생명이 꺼져가는 그 광경에 희열을 느끼고 흥미를 붙였다는, 그런 메마른 감상이 아니었다.

‘기사를 완성하는 것은 훌륭한 검과 무자비한 훈련이 아니라 적과 아군의 피로 온몸을 뒤집어쓰는 것’이라는 아실레마 제국의 초대 검성, 아론 드리브달의 격언을 너무도 이르게, 그것도 뼈저리게 이해해버린 로빈이었다.



“자, 주목!”

강당을 울리는 드렌턴의 호통에 늘어져 있던 생도들은 고무줄처럼 빠릿해진다. 로빈도 다르지 않았지만, 그는 계단에 앉아 자신의 검을 갓난아이처럼 어루만지고 있는 지나 덕분에 웃음까지 참아야 하는 고충이 더해졌다.

“변경사항이 있다. 귀족 대표님들을 포함한 귀빈들께서 본성의 호출 때문에 부득이하게 퇴소식에 참석을 못 하시게 됐다.”

아무런 목소리도, 어떤 표정도 강당 내엔 없었지만, 환호를 내지르고 싶은 속마음은 이 순간 모두가 하나가 됐으리라.

“하지만,”

드렌턴이 강당을 크게 한번 둘러본다.

“영광스럽게도, 기사단장이시자 공화국의 검성, ‘아뮤르 한센’ 경께선 바쁘신 일정에도 불구하고 수료식 참석을 철회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식순은 변경하지 않는다. 공화국의 기사다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알겠나?”


“옛!”

강당을 무너트릴 기세의 대답. 드렌턴은 만족스러운 듯이 웃으며 단상으로 올라섰다.

“자 그럼, 퇴소식을 시작하겠다. 일동 차렷.”



모두가 우렁찬 목소리로 경례를 올리고, 충성맹세를 하는 식순 내내 로빈의 눈은 대담하게도 전방 15도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검성 아뮤르 한센’이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그의 의식은 계단 아래의 지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나 또한 드렌턴의 입에서 자신의 고조할아버지 이름이 나온 그 순간부터 얼굴에 표정을 지우고 있었다. 단상을 바라보는 눈은 여전히 태양처럼 빛나고 있지만, 저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로빈도 지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을 정의 내린 그 이름의 존재를, 지나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로빈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에, 그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다음은, 훈련생대표의 충성맹세가 있겠습니다. 다른 귀빈들을 대신하여 자리를 빛내주실 검성님을 향하여 큰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드렌턴의 말이 끝나자마자 폭포와도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그 소란의 무질서 덕분에 로빈은 고개를 돌려 강당으로 모습을 드러낸 노인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새하얗게 새버린 꽁지머리에, 지저분하게 방치된 꼬불꼬불한 흰 수염.

깊은 주름이 박힌 얼굴엔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시종일관 눈웃음이 떠나질 않는 파인 눈에 지혜라곤 보이지 않는다.

작은 몸집에 비해 지나치게 커다란 소매의 예복을 입은 탓에, 얼핏 보면 허리에 차고 있는 짧은 환도(環刀)를 지팡이 대신 짚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예복은 심지어 카나반 기사단을 상징하는 남색은 단 한 땀도 박혀있지 않은, 순백의 모시옷 그 자체였다.


“······?”


이 순간, 노인의 모습을 훔쳐보거나 대놓고 바라본 모든 생도의 머릿속에 같은 의문이 떠오른다.

저 사람이 진정, 카나반 최강의 기사이자 200년 전 대전쟁을 직접 겪은 유일한 기사,

‘흐름의 검성’ 아뮤르 한센이란 말인가?

총알은커녕 화살 한 대도 제대로 쳐내지 못할 것 같은 저 노인이?


잦아들지 않는 박수 사이를 헤치며, 노인은 매우 느긋하게, 한껏 미소를 지으면서 강당을 가로지른다. 강단에 오르는 몇 개의 계단도 그에겐 벅찬 일이었는지, 옆에 있던 헌병의 부축을 받고 나서야 그는 간신히 단상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박수 소리는 노인이 단상에 이르고, 드렌턴이 손을 들어 보이면서 서서히 잦아든다.


“훈련생대표, 입장.”


주저함이 없는 발걸음으로, 지나가 절도 있는 동작과 함께 강단으로 올라선다.

그리고 자신의 고조부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훈련생대표, 국립기사 소위 아뮤르 지나, 오늘부로 영광스러운 공화국 기사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섰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수료 및 퇴소를 신고합니다.”

그녀의 조교보다도 정확한 경례를 받으며, 검성은 드렌턴에게서 받은 공화국의 탕나무 깃발을 지나에게 넘긴다. 그녀는 깃발을 받아들고 나서, 칼 같은 동작으로 180도 회전하여 생도들을 향해 깃발을 펼쳤다.

“이 순간부터, 우리의 검은 우리의 것이 아닌 공화국의 것이다!

우리는 공화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절대로 피를 흘리지 않는다!

우리가 죽는 곳은 우리의 운명이 아닌 국가가 정해줄 것이다!

우리의 적을 베어 넘기는 것이 아니라 공화국의 적을 베어 넘긴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면, 우리는 공화국의 병사로서 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카나반에 영광 있으라!”


“기사단에 영광 있으라!”


강당의 모든 생도들은 지나의 충성맹세에 답하는 외침 속으로 영력을 듬뿍 싣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패기의 진동은 강당을 울렸으며, 실내였음에도 지나가 쥐고 있는 깃발이 그들의 영광으로 펄럭였다.


그리고 뒤이은 환호-.


그것은 모든 것이 끝난,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하는 기사들의 벅찬 함성이었다. 강단 위에서 지나는 두 팔을 벌리고 펄쩍펄쩍 뛰며 환성을 질렀다. 여기저기서 그녀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기사들이 넘쳐났고, 타피와 같은 부류는 울음을 터트리면서 웃었다.

이 시끄럽고 무질서한 광경을 향해 드렌턴을 비롯한 교관들은 미소를 지으며 퇴장할 뿐,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않는다. 그들도 한때는 저렇게 환호성을 질렀던, 그런 시절이 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배치된 곳으로 발령이 나기까지의 짧은 시간이, 그들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자유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로빈의 주위로 여러 동기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연신 술 약속을 권유하고 왕실근위대 배치를 축하하는 인사를 건네는 바람에, 로빈은 감당 못할 횟수의 약속을 잡고 난 후에야 강단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소란 틈에 지나와 검성이 천막 뒤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천막으로 가려진 강단 뒤로 다가섰다. 온갖 기재들이 즐비한 창고 같은 공간이었다. 희미한 조명 아래로, 로빈은 지나와 검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서 걸어 들어가던 노인이 걸음을 멈추고, 지나를 돌아본다.

지나 또한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그를 바라본다.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턱에 힘이 들어가고 만다. 그의 이름을 물려받았기에 박탈당하고 고통받은 지나의 시간. 그리고 그 실체를 옆에서 직접 지켜본 로빈으로선, 그들의 만남이 어떤 식으로-


“하라부지이이이이~”


“아이구 내 강아지~~~~”


“보고시펐쪙!”


“허이구, 내 새끼 얼굴이 반쪽이 됐네! 내 이 교관노무 시키들 확 다 짤라버릴까부다!”


지나가 노인의 품으로 달려들어 앙탈을 부리기 시작했고.

덩달아 노인도 콧소리를 내며 지나를 강아지마냥 마구 쓰다듬었다.

충격적인 광경에,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며 탄식을 뱉고 말았다. 이런 장면은 그로선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지나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고조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로빈은 막연하게 그를 ‘아뮤르’라는 이름의 원흉쯤으로 여겨왔었다. 자신의 예상이 멋지게 빗나갔음은 물론이고, 지금 저 둘의 모습을 보니 어쩌면 검성이야말로 아뮤르라는 이름을 버틸 수 있게 붙잡아준 유일한 혈육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로빈이었다.


“감동스러운 가족상봉 감상 다 했으면 자네도 이리 오게나.”


노인이 부드러운 어투로 허공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허공을 향한 것이 아님을 로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앞으로 나선다.


“죄송합니다! 국립기사 소위 로빈슨 듀켓입니다. 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검성은 별다른 반응 없이 혀를 차며 웃을 뿐, 오히려 그의 품에 안겨있던 지나가 고개를 돌려 로빈을 노려본다. 훌쩍거리는 코와, 채 닦지 못한 눈물이 맺혀있는 그녀의 눈가를 보고, 로빈은 자신이 꽤나 중요한 순간을 방해했다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렇군! 자네가 로빈인가?”


“옛! 그렇습니다-. 어, 어떻게 제 이름을······?”


당황한 것은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검성이 일개 초임기사의 이름을 알고 있을 이유는 딱히 없을 터이다. 하지만 곧 그 의문은 지나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노인이 직접 풀어주었다.


“루디에게 얘기 들었네. 내 손녀딸이 신세가 많았다지?”


루디라면-


“드렌턴 아저씨······? 아저씨를 아십니까?”


“알다마다. 내 후배이자 제자인데.”


검성이 껄껄 웃었다.


“······예엣?!”


이것은 로빈에겐 또 하나의 큰 충격이다. 드렌턴의 과거에 대해 겸연쩍은 부분은 있었지만,

검성의 제자? 검성의 후배?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시골에 숨어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가족에 가까운 자신들에게는 단 한마디도 없이?


혼란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로빈을 보고 검성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그리곤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지나의 등을 로빈을 향해 떠미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가거라. 동기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오늘 밤은 즐겨야지.”


“하지만-”


한발, 자신에게 다가서는 그녀를 노인은 부드러운 손짓으로 제지한다.


“난 저택에 있을 테니, 내일이라도 찾아오면 되지. 오늘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너희의 시간이야. 후회 없이 즐겨라.”


말을 마치며 노인은 로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뜻을 알아챈 로빈은, 우는 소리를 내며 주저하는 지나의 어깨를 잡고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그들의 모습이 빛으로 삼켜질 때까지 노인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저 아이가······?”


허공을 향한, 노인의 나지막한 물음.


“네.”


그에 답하며, 창고 안쪽에서 드렌턴이 모습을 드러낸다.


“너 말이야, 정말 괜찮겠느냐?”


검성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드렌턴을 올려다보았지만, 이미 되돌아올 대답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예, 이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겠지요.”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지만 뭐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찌 됐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 정도다. 알다시피, 난 ‘그쪽 피’에는 관여를 못 해서 말이지.”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드렌턴이 허리를 숙인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노인은 눈을 크게 뜨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너 되게 유해졌구나?”


고개를 든 드렌턴의 얼굴에 걸려있는 것은, 어딘가 묘한 미소.


“······그렇습니까.”


둘은 그 후로 말없이 웃음을 주고받았다.



그 사이, 로빈은 아직도 코를 훌쩍거리는 지나를 반강제로 강당으로 끌고 나올 수 있었다. 드렌턴에 관한 일은 제쳐두고, 그는 자신이 걱정했던 상황이 벌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편한 얼굴이었다.


“좋은 분인 것 같네.”


그가 누구를 평하는 것인지, 지나가 모를 리 없다.


“당연하지! 내가 유일하게, 그리고 제일 사랑하는 가족인데!”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아버지를 친구에게 자랑하는 것마냥, 지나는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얼굴로 활짝-, 태양 같은 미소를 내보인다.


“다행이네.”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그것이 로빈의 진심이었다.

그런 그를 살짝 올려다보고는, 지나는 문득 아까의 대화에서 놓친 부분이 기억나 로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근데, 드렌턴이 누구야?


“아, 말하자면 긴데-,”


계단을 내려서는 그들을 발견한 동기들이 환영의 환성을 터트린다.





***





“실례합니다. 총장님.”


“아, 들어오게.”


카나반 왕립마법대학 ‘아스트로바톰’의 총장, 디쿠젠 니바르토는 비서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서둘러 보고 있던 삼류연애소설을 숨기고 대신 서류뭉치를 책상으로 올려놓는다. 저 까다로운 비서에게 일은 안 하고 놀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면 어지간히 피곤해지는 탓이다.

비서가 육중한 나무문을 여는 것에 다소 시간이 지체되었는데, 예전에 어떤 우락부락한 학생이 문을 걷어차며 들어오는 바람에 문고리가 망가졌다는 부학회장의 언급이 있었다. 물론 이렇게 훌륭하게 시간을 끌어주는 용도가 되었기에, 디쿠젠은 당분간은 문을 고칠 생각이 없었지만.


“읏, 죄송합니다. 이놈의 문을 고쳐야지 원. 여기, 왕명이 하나 내려왔습니다.”


말끔한 로브를 걸친 비서가 내민 것은 인장이 찍힌 명령서. 디쿠젠은 그것을 보자마자 노골적으로 주름을 구긴다. ‘왕명’이라고는 해도 결국은 자신의 형인 사람이 구실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걸 반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봉투의 인장은 이미 뜯겨있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그는 비서에게 왕명이 오면 바로 뜯어보고, 자신에게 보고할 가치가 있는 것만 가지고 들어오라고 일러두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봉투의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바로 비서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었다.


“그래, 내용은?”


“네, 벤이라는 이름의 이론마법학과 3학년 학생을 입궐시키라는 명입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자마자 디쿠젠의 먹색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오랫동안 본인을 모셨던 비서조차 몇 번 보지 못했던 광경을 연출했는데, 바로 직접 왕명이 담긴 봉투를 열어본 것이다.


“벤이라면, 제르나비가 맡은 그 ‘그냥’ 벤 말인가?”


“그렇습니다.”


디쿠젠은 빠르게 왕명이 적힌 종이를 훑었다. 그것의 마지막, 공란에 휘갈겨진 서명을 확인하고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비서를 올려다본다.


“분명 제르나비가 수색임무에서 데려온 기사 중에 루디 드렌턴 이라는 자가 있었지? 부학회장이 말해줬었는데.”


“맞습니다.”


디쿠젠이 낮게 웃기 시작한다. 그는 한참을 이마를 짚은 채로 웃었는데, 비서조차도 낯선 광경이라 딱히 반응을 못 하고 있었다.


“답장을 보내. 총장의 권한으로 학기 중의 본교 학생을 멋대로 차출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고.”


디쿠젠의 말에, 비서는 놀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네? 하지만-”


“불만이면 섭정이 직접 여기로 오라고 그래. 동생이 술이나 한잔하자고 했다고.”


“······알겠습니다.”


비서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인사와 함께 서재를 나선다. 디쿠젠은 다시 삼류소설을 꺼내는 대신, 명령서가 담긴 봉투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낮게 웃었다.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작가의말

추석 즐겁게 보내셨는지요?

이제 연참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뭐 저야 항상 하던 모양으로 할 뿐이지만,

어쨌든 계속 관심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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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6) +11 14.09.22 2,655 93 20쪽
37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5) +17 14.09.21 2,540 81 19쪽
36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4) +14 14.09.20 2,619 73 21쪽
35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3) +11 14.09.19 2,643 84 25쪽
34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2) +23 14.09.18 2,692 96 19쪽
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4 84 19쪽
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4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8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30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8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2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9 81 21쪽
»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2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4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4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5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6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701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2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5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4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4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8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4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599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29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3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8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7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2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8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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