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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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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4.09.23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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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글자
10쪽

(막간) 구원

DUMMY

이성과 기억이란 개념을 자각한 순간부터 이미 나는 검을 쥐고 있었다.

누구도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고, 나 또한 한동안은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소질은 이미 상관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말하기를, 내 안에 흐르는 당신의 피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열두 살 때야 알았다.

그리고 나처럼 학교에 가지 않고 가정교사에게서 모든 지식을 배우면서, 남는 모든 시간엔 검을 쥐는 아이가 흔치 않다는 사실도 차츰 알게 되었다.

별로 상관은 없었다.

검을 잡으면 어른들이 칭찬해줬으니까, 그것이 착한 아이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다.


아래에서 피가 흐르고, 가슴이 튀어나오고, 엉덩이가 커지고, 긴 머리에 익숙해져도, 난 검을 위해 모든 몸의 변화를 검에 맞추어갔다. 하루의 시작을 검으로 시작했으며, 하루의 끝을 검으로 맺었다. 그리고 1년의 시작을 검으로 알렸으며, 1년의 마지막을 검으로 내렸다.

그렇게 난 열여덟 살이 되었고, 어른들이 이제 때가 되었다고 웃으며 나를 격려해주었다. 무슨 때가 되었다는 건지는 잘 몰랐지만, 난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서 저택 밖으로 나설 수 있는 자유 시간을 받았다. 입소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즐기라는 게 할아버지의 조언이었다.


허리에 검이 없으니 정말로 허전하다. 무게감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할아버지가 누누이 말했던 ‘검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단계’에는 이미 열 살 때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저, 잡아 휘두를 무기가 없다는 사실이 허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하늘하늘한 원피스도 처음 입어본다. 움직이기에 편해서 좋긴 하지만,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차가워서 영 적응이 되질 않는다. 아랫도리가 추운 것과는 별개로, 내리쬐는 햇볕은 따가워 의미 없는 내 발걸음에 점점 목이 타들어 갔다.

결국 나는 첫 나들이를 곧 입소할 훈련소 근처에 가보는 것으로 정하고 말았다. 참 재미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소리를 내고 말았나 보다. 광장으로 통하는 골목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별 상관은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광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내 무언가가 내 코를 자극했다. 생일 때마다 할아버지가 사주셨던 요거트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향. 생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주인공이 나타났기 때문에 난 망설이지 않는다.

동전 몇 개를 건네주고 대신 받아든 요상한 용기 안에 가아득, 차갑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담겨 있다. 그것을 내게 넘겨준 아저씨는 친절하게 용기 아래에 숟가락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지만, 난 평소 하던 대로 길쭉한 혀를 내밀어 그것을 핥아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는 아저씨에게 맞웃음을 날려주며, 나는 훈련소로 올라가는 언덕을 바라보며 광장으로 파고들었다.

딱히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냥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이름 뒤에 처음으로 소속이란 것을 선사해줄, 그런 곳이었으니까.

그냥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때까지만 있다가 돌아가자- 라고 생각하고, 광장을 따라 선선한 바람을 만끽하며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처음에 그를 보고 느낀 것은 묘한 위화감. 영력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 풋풋함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검붉은 머리에, 마찬가지로 검붉은 눈동자를 하고서 멍-하니 언덕 위를 바라보고 있는 수수한 차림의 남자. 이 사람도 나랑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구나- 라고 나는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 기묘한 이끌림에 나는 어느새 그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만다.


“거기, 촌놈 기사.”


그리고 날 돌아보는, 검붉은 눈동자. 그 선이 굵은 순수한 얼굴에 나는 무언가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곧바로 대답이 없던 그는, 천천히 내 얼굴과 입술을 살펴본다. 그런데 그 시선이 어째선지 전혀 부끄럽지가 않았다. 오히려, 어서 무슨 말 좀 해보라고 독촉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어-, 그거 맛있어 보인다. 이름이 뭐야?”


순간 나는 속으로 웃었다. 아마도 내 얼굴엔 황당함이 물들어 있겠지. 그 답을 알면서도, 난 넌지시 묻는다.


“뭔 이름?”


“그거 말이야, 그거.”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예상대로 내 손에 들려있는 아이스크림 용기. 나는 순간 장난기가 발동해서,


“이건 요거트 아이스크림이란 것인데에에-,”


라며 용기 아래 수저를 꺼내 들어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숟갈 퍼올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입으로 그것을 가져갔는데, 거부하지 않을까-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그는 덥썩 그것을 받아먹었다. 나는 다소 놀라면서도,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호······.”


맛을 음미하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 위로 나는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묻는다.


“너도, 수습기사 후보생이지?”


“응? 어떻게 알았어?”


“그야, 그런 멍청한 표정으로 영력도 감출 생각도 없이 훈련소를 노려보고 있는 수상한 인간은 그 외에 없잖아.”


“아, 그럼 너도?”


반가워 보이는 그의 표정. 두근거림을 감추기 위해, 나는 애써 콧대를 세운다.


“어설픈 영력이나 질질 흘리고, 대충 그림은 그려지네. 아무리 촌놈이라도 영력 감추기 정도는 하고 다녀. 보는 내가 다 불안해. 넌 모르겠지만 저기 있는 기사들이 다 널 노려보고 있을걸?”

하지만 그는 부끄럽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웃을 뿐이다. 그 수줍은 미소가 뜻하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기에, 난 애써 기쁜 마음을 감추며 일부러 과장되게 언성을 높였다.

“아-, 설마? 영력 감추는 것도 몰라~? 이야, 너 어디 지도에도 없는 시골에서 발굴돼서 온 거야?”

대답 대신, 다시금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에게, 난 마침내 좀 더 가까이 다가갈 구실을 잡은 것에 속으로 환호하며 다가간다.

“자, 간단해. 이건 영력의 운용을 깨우칠 필요도 없는 거야. 한밤중에 네가 벌거벗고 길을 걷고 있다고 상상해봐. 그런데 갑자기 네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서 주변이 밝아져 버려. 그리고 사람들이 네 부실한 몸을 보고 비웃기 시작하는 거야. 그럼 네가 해야 할 행동은 뭐겠어?”


“어, 물론 빛을 감춰야겠지?”


“그래. 바로 그걸 상상하고 그대로 한다고 생각해봐.”

그의 붉은 파동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게 느껴진다. 나는 웃으며,

“응, 바로 그거야. 항상 그 감각을 유지하도록 해. 기사로서의 기본이니까.”

라고 말하고 까치발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웠다. 그리고 따듯했다.


“흐응, 항상 이렇게 부끄러운 기분으로 있으라고?”


“불만이야? 그게 정석이라고. 할아버지가 그러셨어.”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꺼내면서 나는 갑자기 울적한 기분이 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검으로 살아가고, 그렇지 않으면 피를 잇기 위한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

만들어진 나의 인생.

이렇게 작게 주어진 짧은 자유에도, 이런 우연한 만남에도, 없을 줄 알았던 내 가슴속의 무언가가 두근거리며 자신을 꺼내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그럼, 3일 뒤에 보자!”


난 이런 내 표정을 그에게 보이기 싫어, 뒤돌아서면서 그에게 작별을 건네려고 했다.


“3일 뒤?”


“3일 뒤에 네 동기가 될 운명이란다~ 앗, 그리고 아이스크림은 저쪽 가게에서 팔아.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 나니까 적당히 먹어.”


“아, 그래? 고마워!”


그의 마지막 표정은 보지 않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어차피 이제는 나와 아무런 고리도 갖지 않을, 그런 사람이니까.

나의 길에 어울려서 같이 걸어줄 사람 따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나에겐 이 짧은 만남과 자유마저도 너무 과한 선물이니까.

그저 고마웠다. 이런 내게 어울려 줘서.

만족해야지. 나의 길이 아닌걸.

내가 누리도록 허락된 것이 아닌걸. 평생 내가 지고 살아가야 할 이름이 아닌걸.

걸음마다 미련을 떨어트리며, 그렇게 사라지려고 했다.

내가 있던 곳으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려고.

그런데.


“야- 잠깐.”


거친 숨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내 손목을 낚아챈다. 그 부드러운 손을 쫓아 뒤돌아보니, 뛰어왔는지 연신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는 그가 있었다. 그 검붉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봐 주면서, 해맑은 미소로, 나를 붙잡고서.


“그······, 아니, 이름을 안 물어봐서. 그래, 저기, 너.”

허리를 펴면서, 숨을 깊게 내쉬고,

“이름이 뭐야?”


나는 내 손목을 붙들고 있는 그의 손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나의 가슴 깊숙한 곳이 흔들리는 것과는 달리, 그의 그 표정은 더없이 정갈하고 맑았다.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친 그 순간,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넘치려는 눈물을 참아내었다.

그의 이 작은 손길은, 나를 피의 구렁텅이에서 빼내는 구원의 빛이었다.

피와 살점만이 흩뿌려질 것이 분명했던 나의 길에 뻗은 작은 축복이었다.

그는 이 짧은 순간 나에게 ‘이유’를 주었다. 회색이었던 나의 세계에 한 방울, 물감이 떨어지는 순간.


“어? 왜 그래?”


“아, 아냐.”

부디, 날 잡은 이 손을 놓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욕심을 부리지는 않기로 했다. 앞으로 그와 함께 나아갈 길을 상상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테니까. 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삼켰던 숨을 뱉으며, 그에게 나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한나. 내 이름은 아뮤르 한나야.”


작가의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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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1) +20 14.09.24 2,442 63 21쪽
» (막간) 구원 +18 14.09.23 2,471 59 10쪽
39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7) +10 14.09.23 2,258 63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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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5 84 19쪽
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5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900 94 19쪽
30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32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9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5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71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3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7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5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7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7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703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3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6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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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7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3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8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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