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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48,255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4.09.15 17:50
조회
3,030
추천
81
글자
22쪽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DUMMY

“아버지······?”


로빈은 지나와 오즈카를 돌아보고, 다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본다.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한 탓이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분명 자신에게 닿아있었다.


“아, 아직 모르나? 아니, 그럼 됐어. 내가 실언했군.”


마치 가볍게 말을 흘린 것처럼, 남자는 피식 웃는 것으로 대화의 길을 끊으려 했지만 로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자, 잠시만요, 영주님.”


“대장이라고 불러라.”


“아, 네, 대장님. 방금 아버지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제 아버지를 아십니까?”


로빈은 출생과 부모, 자신의 핏줄과 관련된 모든 미련을 일곱 살 때 끊었다.

파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무의 구렁텅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인연이라는 끈이 가장 가까이 닿아있었던 드렌턴에게서도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한 그 순간부터였을까. 로빈은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는 피를 그저 자신의 사고가 시작되는 출발점,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잊어버린 끈의 끝자락이, 만난 지 5분도 채 되지 않은 낯선 남자의 입에서 참으로 가볍게, 참으로 무심하게 튀어나왔다. 로빈은 지나와 오즈카가 말리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거칠게 남자를 향해 자신의 몸을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주는 책상 위에 걸친 다리에 미동조차 없이, 로빈이 만들어낸 그림자 아래에서조차도 시선만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기가 서린 그 눈빛은 거만과 굳건함 그 자체.


“물러나서 생각해라 꼬마야. 나에게 저지르고 있는 이 무례보다도, 너 자신에게 먼저 물어봐. 넌 네 그 질문에 대한 영향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나?”


“영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가 아는 한, 네 아버지는 이미 죽었다. 단순히 네 가벼운, 본능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물음이라면 이걸로 충분한 대답이 되겠지. 그 이상을 원한다면, 스스로 먼저 답을 찾고 와라.”


로빈은 그 차가운 위압에 한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답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아, 정말 멍청하군. 너는 네 옆에 아뮤르라는 이름을 가진 자를 두고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냐?”


로빈은 무의식적으로 지나를 뒤돌아본다. 그녀의 표정 또한 다소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저 커다란 눈동자 속에서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인가.

검성의 이름과 검성의 피를 이어받은 지나를 바로 옆에서 바라보며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녀가 그녀의 인생에 걸쳐 그 이름으로부터 받은 그 모든 영향을 어떻게 생각했던가.

같은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로빈은 단 한 번도 그것을 축복이라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눈물을 보았고, 그녀의 상처를 보았기 때문에.

하지만 어찌 보면, 지나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도 검성이라는 거대한 이름과 피였기에 가능했던 것. 눈앞의 이 차가운 남자가 지금 자신에게 어째서 그 정도 크기의 해답을 요구하는 것인지, 로빈은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뜻은 알겠습니다만, 솔직히 저한테 흐르는 피가 아뮤르라는 이름만큼 저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야, 저는 생각하기 시작한 이래로 계속 고아로 살아왔고, 아 물론 말씀하신 대로 가벼운 본능적 호기심에서 묻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로빈이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자식이 부모를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영향이니 뭐니, 그런 헛소리는 집어치우시고 신경 쓰이게 만드셨으니까 당장 알려주십쇼.”


지나는 경악했다. 오즈카는 길게 한숨을 쉬며 이마를 감쌌다.

마른 탕나무향이 피어오르는 비좁은 집무실 안에서, 로빈의 급발진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미묘하게도, 가장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들을 안내한 노인과 당사자인 영주였다.

노인은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미세한 웃음을 짓더니,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마치 남자가 무엇을 지시할지 아는 눈치로.

그에 비해 영주는 점점 불안해져 가는 로빈의 눈을 계속해서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싸늘한 침묵은 로빈의 체감으로도, 그리고 실제로도 길었던 터라, 로빈은 점점 자신이 방금 저지른 행동에 대해 이성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끝에 일어난 것은, 선명한 후회.


“터무니없는 놈이군. 요샌 훈련소에서 이따위로 가르치나?”

그의 차가운 입과 눈은 지나를 향한 것이었다.

명색이 기수대표. 하지만 지금의 지나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를 대신하여 한 대 쥐어패라고 한다면 기꺼이 따를 의사는 있었지만.

“허나, 네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실언을 한 것 또한 사실이니.”

로빈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지만, 영주는 쉽게 그것을 허락하진 않는다.

“네 복무 태도를 보고 결정하기로 하겠다. 네 아버지처럼 행동한다면 네 아버지처럼 대우받을 것이고, 내 마음에 든다면 기꺼이 입을 가볍게 하고 기다리마. 30분 뒤에 전투수색이 있다. 용사 열 명이면 되겠지.”


“······죄송하지만 ‘아버지처럼’이라고 말씀하셔도 전 그분을 알지도 못합니다.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 그거야-”

영주가 책상 위로 올린 다리의 위치를 바꾸며, 느긋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네 아버지를 죽인 게 나거든.”






“야, 괜찮아······?”


정말로 둘러볼 것이 없는 삭막한 대합실. 누런 조명 아래서 빛을 반사하고 있는 건 반쯤 칠이 벗겨진 벽과 곳곳에 금이 간 화강암 바닥뿐. 이곳은 미적 감각 따윈 허락되지 않는 곳인가-.

로빈은 정문에서 가까운 의자에 앉아, 지나가 조심스럽게 내미는 차를 받아들면서 생각했다.


“오랫동안 생각하지도, 생각할 생각도 없었던 아버지의 정체를 아는 최초의 사람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라는 걸 걱정하는 거면 난 괜찮아.”


“멍청아, 괜찮을 리가 있냐.”


로빈은 볼멘소리를 하며 옆에 따라 앉는 지나의 얼굴을 의아하게 바라본다. 자신이 방금 한 말은 농담이 약간 묻어있긴 했어도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에게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조금의 기억이나 흔적이라도 남아있었다면 감상은 달랐겠지만, 로빈은 평생 ‘혈육’이라는 개념에 발을 담가본 적이 없었으니까.


“뭐, 괜찮으면 안 되는 거야?”


로빈의 반응이 답답하다는 듯, 새빨간 혀끝을 살짝 내미는 지나.


“너, 저 인간이 누군지 모르지?”


“응. 그러고 보니 이름도 듣지 못했네.”


“베르달의 영주. ‘늑대’ 크라트 니바르토. 너희 아버지께 악감정은 없지만, 저 인간이 누구누구의 목을 베었다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야. 근데 네 아버지가 그에게 목을 베였을만큼 미움을 받았다면, 그건 도의적으로 좀 큰일이라는 뜻이라구.”


“하- 또 니바르토냐······.”


로빈은 질렸다는 듯이 고래를 푹 숙인다. 어쩌면 카나반 전체에 저 이름이 깔려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피어오를 때쯤, 지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응, 일단 섭정 마누앙 니바르토의 막냇동생이긴 한데, 엇갈려도 보통 엇갈린 게 아니라서. 오히려 서로 적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겠지.”


“음? 어쩌다가?”


지나는 대답 전에 차로 한 모금 홀짝- 목을 축인다.


“일단 저 뭣 같은 성격을 보면 알겠지만, 귀족이라기보다는 군인으로서 자신의 길을 걸어왔거든. 그것도 이런 살벌한 최전방에서, 베르달이라는 독자적인 세력을 훌륭하게 구축하면서 말이야.

베르달의 독립적인 군세는 섭정을 포함한 귀족파에겐 줄곧 눈엣가시였지. 왜냐면 크라트는 굳이 따지자면 왕당파였거든. 듣기로는 폐위된 선왕과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다지?”


“그런 사람이 왜 왕이 폐위될 때까지 가만히 있었던 거야?”


“아, 가만히 있었던 건 아냐. 그건 왕이 폐위된 이유와도 연관되어 있는데, 오히려 그는-”


“준비 끝났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오즈카. 그 또한 수다를 떨고 있던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제복은 벗어버리고 민무늬 셔츠 위에 후줄근하고 냄새나는 가죽을 둘러싼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근위대 특성상 짧은 단검은 보급받기 어려웠던 터라, 그의 양 허리춤엔 두 자루의 환도가 그를 대신하고 있었다. 로빈은 짧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아, 다짜고짜 전투수색이라니. 어쩐지 너네까지 말려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하네.”


“알면 갔다 와서 한잔 사. 못한 얘기도 더 해줄게.”


지나가 특유의 샛노란 미소를 지어보인다. 저런 얼굴을 볼 때면 여지없이 힘이 빠지는 로빈인지라, 그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로 둘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어제 술 때문에 그렇게 혼나놓고도 그런 소리냐. 그래도 그런 안주라면 내가 기꺼이 한 잔까지는 사줄게.”


로빈의 대답에 지나는 새빨간 혀끝을 내밀며 쿡쿡 웃었다. 그리고는 빠질 생각하지 말라며 오즈카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바람에, 로빈은 마침내 마음속 어딘가를 끌고 내려가던 짐을 털어버리고 웃음을 뿜을 수 있었다.




***




“아, 이거 엉덩이가 너무 아픈데.”


달빛마저 저물어가는 짙은 어둠.

그 어둠만큼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를 달리고 있는 군마 위에서 벤의 투정이 들려온다. 그것도 혼잣말이 아닌, 앞서서 달리고 있는 여마법사 하파를 향한 일종의 휴식 권유였다.

말을 바꿔가면서 내달린 지 몇 시간이나 지났지만, 하파의 조급함은 말에게 피로가 쌓여갈수록 더해져만 가고 있었다.


“차량으로 추격해 올 겁니다. 거리를 벌려놓지 않으면 위험해요.”


아르다르에서 빠져나오며 이미 봉쇄된 외벽의 성문을 강행돌파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도주경로가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간신히 말을 훔쳐 타고 나오긴 했지만, 그들이 신속하게 차량을 이용해 추격해온다면 곧 따라잡혀도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을 벤이 알 리가 없다.


“아- 이게 뭔 고생이야아.”


그나마 승마 경험이 있는 고도는 양호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리스를 앞에 안은 채로 고삐를 쥐어야 했기 때문에, 전신에 근육통이 올라오기 시작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바꿔 탈 말도 없는 상태. 지금 달리고 있는 군마가 지친다면 그것으로 도주는 끝날 상황이었다.


“읏, 잡혔네요.”

하파의 목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것은, 분명한 차량의 소음. 뒤쪽 저 멀리 어둠을 뚫고 비춰오는 전조등은 벤의 우둔함으로도 명확하게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불안이었다.

“옆으로 비켜서세요!”

하파의 외침에 고도는 말을 도로의 가장자리로 몰았다. 하지만 달리는 것도 겨우 제어하고 있는 벤이 그런 조율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하파는 결국 벤의 후방까지 속도를 늦춘 뒤에야 주문을 외울 수 있었다.

짧은 중얼거림 후,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도로의 중앙. 벤은 그 위로 희미한 문양이 그려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단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마력지뢰라니, 쟤들 중에 기사가 있으면 소용없지 않을까요?”


“뭐든 해야죠!”


슬슬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오기 시작한 하파였기에 벤은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곧 한마음이 되어 마력이 폭발하는 소리를 기대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굉음은커녕, 바퀴소리만 커져 올 뿐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들려온, 신경이 곤두서는 파열음.

벤은 자신의 오른쪽 귀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그것이 빠르고 작은 물체가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같은 것’이 두 번째 파열음과 함께 도로 바닥에서 불꽃이 되어 튀어 오른 후였다.


“뭐야, 뭐야?! 바로 쏴버리는 거야?! 체포도 안 하고?!”


기겁하는 고도와는 달리, 벤은 침착한 편이었다.

총이라는, 평소 흥미 있던 무기를 처음 접하는 상황인데, 하필 자신이 표적이 된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숲입니다! 조금만 더!”


하파의 외침대로, 어둠 끝으로 나무 군집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 속도라면 숲으로 들어서기 전에 따라잡힐 것이 분명해 보였고, 이대로 숲에 무사히 진입한들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벤은 그렇게 판단했기에, 순간적으로 하파를 향해 소리친다.


“하파님, 이쪽으로 올라타세요.”


“네?”


그의 의도를 읽지 못한 그녀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아 빨리 일로 올라타시라고요.”


벤의 짜증 섞인 대답을 듣고, 하파는 능숙하게 말을 몰아 벤의 군마 곁으로 다가온다. 이미 그녀의 말은 한계에 가까웠는지, 불안정한 호흡으로 간신히 근육을 지탱하고 있었다. 하파는 벤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벤의 등 뒤로 몸을 실었다.

벤의 손가락 끝에서 희미한 초록빛이 아른거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곧이어 방금 전까지 하파를 태우고 있었던 군마의 호흡과 함께 기도로 빨려 들어갔다.

하파의 시선에 군마의 눈이 까맣게 번져가는 모습이 들어온 것은 그 직후였다. 곧이어 군마가 크게 휘청거리더니, 몸의 모든 구멍에서 엄청난 양의 피를 쏟기 시작한다. 결국 말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뒤집어지며 나뒹굴었다. 커다란 몸집에서 나온 피는 도로 전체를 덮었고, 뒤이어 따라오던 군용 차량은 갑자기 날아든 말의 몸뚱어리를 피하려다 핏길에 미끄러지며 도로 옆으로 벗어나고 만다.

모든 광경을 지켜본 고도의 눈이 다시금 자신에게 향하자, 벤은 혀를 깨물지 않기 위해 애쓰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어차피 힘들었어, 저 아이는.”


“아니, 그게 아니라······, 하아, 됐다.”


곧 주변이 어둠에 삼켜졌고, 달빛을 대신하여 숲이 그들을 품는다. 바퀴소리는 멀어졌을 뿐 멎은 것은 아니었던 터라, 그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밤 속을 헤쳐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의 폭이 점점 좁아진다고 느껴질 때쯤, 작은 검문소가 그들을 맞이했다.


“신분증을.”


군마들은 바닥난 체력 대신 달리던 탄력만으로 버티고 있었던 걸까, 바리케이드 앞에 멈추는 순간, 말들은 동시에 고꾸라지며 긴 숨을 내뱉는다. 그들의 역할이 다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전투마법사 대위 아센 하파. 베르달의 영주님께 급한 용무가 있어 찾아왔습니다.”


쓰러진 말들이나, 하파와 고도의 얼굴에 떠오른 급박한 표정, 벤의 호기심과 이리스의 무표정은 전혀 상관하지도 않고, 병사는 하파가 내민 신분증을 빠르게 훑는다.


“통과.”


바리케이드가 마저 올라가기도 전에 그들이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멈춰라!”

숲을 울리는 영력의 호통과 함께 근위대 정복을 입은 기사가 창을 들고 나타난다. 그의 뒤로, 남색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소총과 석궁을 이쪽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수배 중인 범죄자다! 국가반역자란 말이다! 어서 이쪽으로 넘겨라!”


고도가 이리스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으며 침을 삼킨다. 지금 움직이려고 했다간 납탄과 볼트가 자신들을 찢을 것임을 하파와 벤도 잘 알고 있었다.

바리케이드를 지키던 병사는 그런 추격자들을 슬쩍 돌아본다. 앞으로의 행동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무표정이었기에, 하파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문을 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사는, 고함을 치던 기사에게 손을 내밀며 나지막하게 말한다.


“신분증을.”


그 반응에 다소 당황한 것은 하파와 고도도 마찬가지, 이에 기사는 얼굴에 분노의 핏줄이 올라온다.


“이해를 못 하나?! 지금 위급한 공무 중이란 말이다! 어서 그들을 넘겨! 그렇지 않으면 너도 같은 죄목으로 베어버리겠다!”


“신분증.”


짧아진 목소리.

결국 기사는 분노를 참지 못한다.

체중을 최대한 집중한 두 번의, 참으로 기사다운 도약으로, 그는 바리케이드 바로 앞까지 뛰어들 수 있었다. 창을 그대로 내지르면 저 오만한 병사의 목을 꿰뚫을 수 있을 바로 그 거리에서, 기사의 전진은 멈추고 만다.


“오, 이건 좀 쓸 만하겠는데? 역시 수도 출신이라 다르네.”


엉성한 가죽으로 이어 붙인 옷. 신발은 너덜너덜해서 없는 것만도 못해 보였고, 짧게 감탄한 목소리는 경박하기 그지없다. 온몸을 검은 칠로 위장한 여인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사의 손에 들려있던 창을 훑어보며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물론 근위대의 손도 그대로 창을 붙들고 있었다.

팔꿈치부터 깔끔하게 잘려 나간 채로.


“대장, 점점 늦어지는 거 보니 살찌신 거 아닙니까? 슬슬 관리 좀 하시죠. 맥주 좀 줄이시라고요.”


이어지는, 신분증을 요구하던 병사의 푸념.


“야, 시끄러. 저쪽 마법사년이 주문 외우려고 해서 보고 있느라 그런 거야.”


어둠 속 푸른 시선이 하파를 향한다. 그러나 적의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잘려 나간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고 있던 기사는, 달빛조차 품지 않고 다시 궤도를 그리는 여인의 검에 목이 잘려 비명조차 없이 생을 마감하고 만다.

자신들의 지휘관이 당한 순간, 마땅히 불을 뿜어야 할 총구는 침묵하고 있다. 저 우람한 여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안광들이, 숲의 어둠 속에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고의적인 적의를 통해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돌아서며, 여인은 기사의 피가 묻어있는 자신의 월도를 어깨에 걸친 채로 경박하게 웃었다.


“무기랑 탄약, 타고 온 거 다 내놓고 꺼져.”

자존심이라는 이름의 머뭇거림 뒤에, 남색 군복의 병사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둠 밖을 향해 도망치고 만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끝까지 지켜보던 여자는, 창에 붙어있던 팔을 자신의 월도로 툭툭 쳐내며 하파에게 다가왔다.

“자, 그럼 손님들께선 우리 아버지께 무슨 볼일이신가?”

한기가 서린 푸른 눈빛이 검은 먹칠 사이에서 더욱 돋보이게 빛을 발한다.

“대답이 마음에 안 들면 내 기분대로 주물러 버릴 거야.”



그 와중에 ‘주무른다’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불쾌해한 것은 벤뿐이었다.




***




어둠에 익숙해진 로빈의 검붉은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온다.

그가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자, 뒤따라오던 십여 명의 병사들도 덩달아 숨을 죽인다.


“국경초소까지 얼마나 남았지?”


“아직 10분은 더 가야 합니다.”


검은 칠로 얼굴을 덮은 병사의 대답이었다.


“그럼 저것들은 저기서 뭐 하는 거야?”


“······아마도 적의 전투순찰대이거나, 관측병, 또는 척후일 수도.”


로빈의 눈이 더욱 가늘어진다.


“둘-, 아니 세 명, 검은 군복인데. 아실레마제국 놈들이네.”


“이상합니다. 아실레마가 이렇게 서쪽까지 들어올 만한 이유가 없지 말입니다. 저대로 쭉 가면 브린타이나 국경입니다만.”


병사의 의심과, 로빈의 짧은 고민.


“내가 처리하면 접근해. 먼저 가겠다.”


“예.”


마치 오랫동안 같이 생활을 한 듯, 자연스럽게 자신을 따라주는 병사들.

지휘엔 아직 미숙한 로빈이었지만 그들이 자신에게 맞춰서 움직여준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베르달 용사들의 능숙함과 배려에 대한 짧은 감탄은 제쳐두고, 여기서 모두를 움직이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있는 상황. 로빈은 명색이 기사인 자신이 나서야 할 차례라고 판단했다.

바람 소리에 맞추어 조심스럽게 불빛으로 접근하는 로빈. 움직일 때마다 상대의 검과 투구에서 반사되는 달빛이 더욱 명확해진다. 저들도 충분히 경계하고 있지만, 기사로는 보이지 않는다. 숲이 흔들리는 소리에 맞춰 로빈이 뛰쳐나간 것은, 그들의 모든 등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뒤에서 찌른 검이 목을 꿰뚫고 앞으로 튀어나온다. 로빈은 그대로 팔에 영력을 담아 검을 휘둘러, 목을 꿰뚫은 그 상태로 바로 옆 병사의 안면까지 검의 궤적을 그린다.

영력을 통해 강화된 기사의 근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상대의 반응을 허용하지 않는 묵직함과 신속함이었다.

로빈은 세 번째 병사가 칼집에 손을 대려는 순간, 그의 얼굴을 잡고 거칠게 바닥으로 내팽개치며 올라탄다. 로빈의 엉덩이에 자신의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걸 생생하게 느낀 병사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입을 틀어막고 있는 거친 손과 눈동자 바로 앞에서 빛을 흘리는 검이 그에게 침묵을 선사한다.


“묻는 말에 친절하게 대답해주면 돌아가게 해주겠다.”

달빛을 등진 로빈의 검붉은 눈동자 아래에서 부들거리는 몸으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병사.

“제국의 병사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정찰이냐? 아니면 다른 본대가 있나?”

로빈은 손바닥 아래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고, 살며시 틈을 벌려주었다.


“사, 사냥조다······. 브린타이나 국경 쪽으로 우회한다고 해서-”


“사냥조?”


로빈의 되물음에 대한 대답은, 어느새 뒤로 다가온 부관의 입에서 대신 나온다.


“아실레마제국의 2군단장직할 특작부대인 야간 사냥조를 말하는 겁니다. 기사와 훈련된 병사로 이루어진 분대 단위의 조직인데, 가끔 정찰이나 수색임무를 하는 우리 군을 역사냥하는 놈들로, 이쪽에 악명이 좀 있습니다.”


“······대장님은 알고 계셨던 건가?”

이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로빈은 다시 붙잡은 안면을 압박하며 낮은 목소리를 흘린다.

“브린타이나 쪽으로 우회라면, 남쪽으로 파고 들어온다는 말이냐, 아니면 북쪽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냐?”


“부-, 북쪽.”


‘젠장, 지나의 분대가 수색 중인 구역이잖아.’

로빈은 잠시 고민에 빠진다. 밑에 깔린 병사의 신음소리가 잦아들 무렵에야, 그는 부관을 돌아보았다.

“나뉘어서 철수한다. 부관, 네가 몇 명 이끌고 바크달룬으로 돌아가서 보고해. 그리고 일부는 오즈카 소위의 분대를 찾아서 사냥조의 후방으로 접근하라고 일러라. 난 일단 아뮤르 소위 쪽으로 가보겠다.”


로빈은 되돌아오는 대답을 듣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뛰쳐나간다. 밤의 숲은 이미 그에겐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그가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광경이 머릿속에서 자꾸 떠올랐기 때문에, 그는 달빛을 통해 스며드는 불안감을 아무리 빨리 달려도 씻어 낼 수가 없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9

  • 작성자
    Lv.81 그리핀
    작성일
    14.09.15 19:57
    No. 1

    추천글 보고 왔는데 한번에 정주행 했어요 다음 편도 기다려 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15 20:02
    No. 2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4 주정
    작성일
    14.09.27 09:57
    No. 3

    그가 익숙하고 싶지 않은 ->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잘 보고 갑니다.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09.27 12:40
    No. 4

    앗 주정님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재밌게 봐주신다니 기쁘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2 陋街
    작성일
    14.10.04 16:39
    No. 5

    그들의 능숙함과 배려에 짧은 대한 감탄을..
    추천보고 오늘 정주행 중입니다. 재밌네용^^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0.04 17:00
    No. 6

    누가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으셨다니 작가로서 기쁠 따름입니다 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2 Sunshin
    작성일
    14.12.08 00:50
    No. 7

    과제도 잊고 지금까지 멍하니 봤는데, 대단합니다...
    몰입도가 장난이 아니군요. 이 정도의 퀄리티는 진짜 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좋은글 계속 읽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4.12.08 01:29
    No. 8

    Sunshin님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미흡합니다만 재밌게 봐주셨다니 기쁘네요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1 배고파요
    작성일
    16.08.18 11:28
    No. 9

    35% 두자루의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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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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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3) +16 14.09.26 2,864 69 16쪽
42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2) +18 14.09.25 3,033 73 14쪽
41 (6막) 왕의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1) +20 14.09.24 2,442 63 21쪽
40 (막간) 구원 +18 14.09.23 2,469 59 10쪽
39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7) +10 14.09.23 2,258 63 21쪽
38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6) +11 14.09.22 2,657 93 20쪽
37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5) +17 14.09.21 2,540 81 19쪽
36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4) +14 14.09.20 2,619 73 21쪽
35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3) +11 14.09.19 2,643 84 25쪽
34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2) +23 14.09.18 2,693 96 19쪽
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4 84 19쪽
32 (막간) 붉은 장미 +7 14.09.16 3,094 93 11쪽
31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7) +15 14.09.16 2,899 94 19쪽
»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6) +9 14.09.15 3,031 81 22쪽
29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5) +10 14.09.13 2,838 86 17쪽
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4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9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2 87 22쪽
25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1) +9 14.09.09 2,775 86 25쪽
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4 93 14쪽
23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6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6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701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3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6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16 (막간) 일상생활 속 일상성연구회 +16 14.08.31 2,764 86 12쪽
15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7) +11 14.08.30 2,936 88 20쪽
14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6) +2 14.08.28 3,124 84 16쪽
13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5) +11 14.08.27 2,799 90 25쪽
12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4) +15 14.08.26 3,234 97 18쪽
11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3) +3 14.08.25 2,968 101 15쪽
10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2) +6 14.08.24 3,600 102 21쪽
9 (2막) 그리웠던 악취, 생소한 향기 (1) +14 14.08.23 3,530 102 18쪽
8 (막간) 캉페온 광장의 노을 +4 14.08.22 3,943 102 13쪽
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8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7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3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8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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