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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변수의 굴레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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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4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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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0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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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DUMMY

날이 밝았지만 병사들은 여전히 분주하다. 군번줄 회수를 완료한 시체를 따로 분류하고, 그렇게 분류된 시쳇더미들은 정해진 장소에서 마법으로 불태운다. 아직 전사자의 유해까지 후송할 여력은 없다는 이유였다. 물론 백색 군복을 입은 시체들에겐 그 예우조차 허락되지 않은 모양이다. 마치 도살된 돼지시체처럼 던져지는 적군의 흔적들을, 로빈은 성벽으로 오르는 계단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전투복과 낡은 검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아군과 적군의 피가 뒤엉켜 물들어있었다. 지나가던 병사들이 몇 번이나 그에게 막사로 돌아가 씻으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연신 알겠다고 고개만 끄덕였을 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계단 아래서 들려오는 굵고 낮은 목소리. 시선을 돌리자 익숙한 거구가 눈에 들어온다.

오즈카였다.

그 또한 로빈과 마찬가지로 온몸이 온갖 피로 범벅이었다. 로빈은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지원군의 선두에서 무섭게 적 사이를 휩쓸고 다니던 오즈카의 민첩한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 왔어? 다행이야, 조금만 늦었어도 우리 몰살당할 뻔했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하지만, 미소 끝에 담기는 떨림은 어쩔 수가 없다.


“병사들 사이에서 지나에 관한 이야기가 뜨겁습니다. 적 대대장을 비롯해 다섯 명의 기사를 베었다던데요.”

오즈카가 자신의 육중한 몸을 로빈 바로 아래 계단에 놓았다. 하지만 그의 지친 얼굴엔 로빈과 마찬가지로 대활약을 펼친 동기에 대한 자랑스러움이나 동경 따윈 떠올라있지 않았다.

“그녀는······, 괜찮습니까?”


“어, 군의관들 말로는 며칠 쉬면 괜찮아질 거래. 생명이나 수명에는 지장이 없다더라.”


로빈의 대답에 오즈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단검들을 꺼냈는데, 이미 이가 빠지고 금이 가 있어 재활용하긴 힘들어 보였다. 심지어 다른 한쪽은 허리에서부터 아예 박살이 났는지, 날 전체가 반토막이 나 있었다.

그 단검들을 살펴보던 오즈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군다. 그의 ‘이를 내보이는 웃음’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로빈은 다소 놀란 얼굴로 그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재밌지 않습니까? 기사라는 거.”


오즈카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뭐가?”


“본래 기사들의 기대수명은 일반인의 세 배가량 된다고 하지요. 하지만 실제 평균수명은 일반인하고 비슷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알만한데.”


로빈의 눈이 다시금 역한 냄새를 풍기며 타들어가고 있는 시체를 향한다.


“물론 전사하는 경우도 많지만, 기대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자연사하는 기사들도 많지요. 몇몇 학자들은 그 이유를, 기사들이 소위 영력이라고 불리는 생명력을 전투마다 소진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 들었던 것 같아. 그래서 현역 기사임에도 일반인보다 훨씬 장수하고 있는 기사는, 애초에 엄청난 영력의 소유자로 볼 수 있다고 했지. 근데 그게 뭐가 재미있다는 거야?”


오즈카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자신의 낡고 부서진 단검을 만지작거리고 나서야 입을 연다.


“우리는 훌륭한 도구죠, 로빈. 우린 우리의 생명을 소진해서 적의 생명을 빼앗는 것으로 국가와 가족의 안전을 지킨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우리 앞에 놓여있는 건 우리의 자위를 위한, 영광하고는 거리가 먼, 결코 끝나지 않는 동굴일 뿐인데요.”


“동굴이라······.”


로빈은 실소하며 자신의 검붉은 눈을 감싼다.


“우린 이 더럽고 축축하고 어두운데다가 끔찍하게 긴 동굴을 지나기 위해 꿈을 지불하고 미래를 팝니다. 남은 것은, 상냥하지 못한 미래를 살아갈 패배한 영혼들의 울음소리뿐이지요. 저기 누워있는 목소리들처럼 말이죠.”

오즈카는 그 역할을 다해버린 단검을 성벽 아래로 던져버리며 말을 이어나 간다.

“그러니 재밌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의 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유일한 건, 자신이 가진 세계가 모든 것의 세계처럼 군림하는 왕들의 세계일 뿐인데요.”


“그거 좀 위험 발언인데.”


로빈이 웃었다.


“뭐 어떻습니까.”

오즈카도 낮게 웃었다.

“이 나라는 왕도 없는데.”


앞으로 많이 보지는 못할 테지만, 로빈은 오즈카의 굵은 미소가 맘에 들고 말았다.


“그럼 넌 왜 이 나라를 위해 검을 든 거야?”


질문하는 로빈의 머릿속은 당연히 반역자인 오즈카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째서인지 로빈은 그가 애초에 배신자의 아들이라는 낙인에 대한 반발심만으로 검을 든 것이 아니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오즈카의 반응은 로빈으로선 전혀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다.


“아직 그런 이야기까지 할 정도로 우리가 친해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로빈.”


오즈카가 몸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단지 작은 단검만 없을 뿐인데도, 그의 몸은 그의 입만큼이나 가벼워진 듯 보였다.


“얼씨구? 지 말만 하고 쏙 빠져나가겠다?”


“우리에게 시간은 많습니다. 적어도 전 같이 검을 들고 싸운 사람은 동기 이상으로 생각하니까.”

오즈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그러면서도, 손을 들어 인사를 하는 것은 빼먹지 않는다.

“다시 훈련소에서 봐야겠군요.”


“훈련소?!”


내려가는 그의 뒤를 향해 로빈이 의문을 담아 소리쳤다.


“네, 로빈.”

오즈카가 잠시 돌아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후보생들은 수도로 복귀하랍니다.”


“······아, 그래-.”

오즈카의 모습이 사라지자 성벽은 다시 침묵에 빠졌고, 로빈은 파이튼 성의 풍경을 다시 한번 눈과 머리에 담는다.

곳곳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불쾌한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지만, 로빈은 그것이 무슨 냄새인지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 연기 사이로, 저 멀리 군번줄을 잔뜩 몸에 걸치고 뛰어가는 병사가 보인다.

“······도구들의 일련번호는 챙겨주시겠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의 검을 뽑아본다. 누구의 것인지 영원히 알 수 없을 어둡고 붉은 피가 낡은 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었다. 로빈은 오즈카와 마찬가지로 그 검을 성벽 아래로 던져버린다.


이제 씻어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




지난밤 그들이 출발했던 임시주둔지는 하룻밤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성과 전선을 수복하여 이제 ‘임시’로서의 역할이 끝났기 때문일 것이다.

예비연대로부터 충원되는 병사와 기사들이 끊임없이 전방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부상자들도 모두 후송됐는지 잔뜩 주변을 물들였던 비명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주둔지에 남아있는 자들은 막사를 회수하려는 일부 공병대와, 이제 막 회군한 소나무연대의 병사들뿐이었다.

먼지만이 그들을 반겨주는 그곳에서, 로빈은 쉴 곳을 찾아 흩어지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제대로 된 보급이나 인원 보충도 없이, 한동안 정치인들의 관심밖에 있었던 전선을 오랫동안 묵묵히 수호해왔던 그들이다. 부대가 재편되는 동안만이나마 후방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겐 그것으로 충분하겠지.

멍하니 서 있던 로빈은, 자신의 앞으로 달려온 병사 덕분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연대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제 작전에 참여했던 모든 기사들을 소집하셨습니다.”


“연대장님······?”


자신이 속한 부대의 지휘관이지만, 로빈은 어째선지 별로 설레지도, 긴장되지도 않는다. 그가 지시한 이번 작전은 표면상으론 훌륭하게 진행되었고 그 결과 또한 나무랄 데 없다. 하지만 로빈의 머릿속엔 아직도 지나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타헌의 마지막 미소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짧게 알았다고 대답한 후에, 병사의 뒤를 따랐다.


병사가 안내한 천막에서 로빈을 맞이한 것은, 커다란 원형 탁자와 그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여전히 붕대로 온몸을 덮고 있는 2대대장 둔, 혈색이 아직 채 돌아오지 않은 지나, 그리고 말끔한 모습의 오즈카가 가장 먼저 로빈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 밖에도 훈련소 동기들의 모습이 군데군데 보였지만,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얼굴의 수는 확연히 줄어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로빈은 자연스레 시선을 떨어트리고 만다.


“오, 자네가 로빈슨인가? 아뮤르와 함께 파이튼 성에서 수고가 많았다지?”


로빈의 사고를 덮으며 들려온 중후한 목소리. 원형 탁자 맞은편의 그 주인공은 로빈이 봐왔던 그 누구보다 많은 휘장을 가슴에 달고 있는 중년의 기사였다. 아직 생도이긴 했지만, 무르지는 않은 그의 군인으로서의 직감이 이 남자가 누군지 빠르게 일깨워주었다.


“과찬이십니다, 연대장님.”


경례하는 로빈을 바라보며 남자는 흐뭇하게 웃었다. 짙은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그의 풍채는 군인이라기보단 귀족에 가까워 보였다. 저 남자는 필시 허리춤에 달린 저 화려한 검보다 입으로 더 많은 생명을 저울질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로빈이 지나의 뒤로 자리를 잡자, 연대장이 청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먼저, 워낙 안 좋은 상황에서 적의 기습공격을 받은 터라, 아직 교육 중이던 후보생들까지 불러들이게 된 것에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일러두고 싶네.

하지만 어제 전투에서 그들이 흘린 피가 있었기에 이렇게 연대를 재정비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 그들의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라네.

오히려 정식 기사가 되기 전에 이렇게 실전경험을 해본 게 그대들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앞으로도 국가를 위해 많은 봉사를 해주길 기대하고 있어.”

형식적인 박수가 터져 나온다. 멀뚱하게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뒤늦게 박수를 치는 로빈을 뒤돌아보며, 지나가 특유의 새빨간 혀끝을 깨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허연 낯빛이 다소 걱정되었던 로빈이었지만, 그 미소를 보니 이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 수 있었다.

“내 마음 같아서는 자네들과 같은 훌륭한 인재를 계속 곁에 두고 싶지만, 기사단장님과 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자네들을 수도로 복귀시켜야 하네. 하지만 내가 훈련소에는 잘 이야기 해뒀으니 일주일간은 휴식 및 정비, 외출을 허락해 줄 것이네.”

또다시 환성과 휘파람 소리가 섞인 박수가 터져 나왔다. 로빈은 이번엔 늦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과 똑같이 박수를 치고 있는 동기들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더 높은 목소리로 환호를 내지르고 박수칠 것을 유도하는 자들은 다른 간부와 기사들이었다.


“그럼 이만, 해산!”


“해산!”


“후보생들은 군장 챙겨서 30분 뒤에 주둔지 중앙으로 집합하라! 반복한다-······.”


어수선한 천막을 빠져나와 로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지 않은 기억만을 남기고 지옥에서 벗어나 또 다른 지옥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이 기쁠 리가 없다. 그 와중, 누군가 그런 로빈의 뒤통수를 세게 때리는 바람에 그는 소리를 지르며 화들짝 놀라고 만다.

지나였다.


“야, 그렇게 대놓고 한숨 쉬다가 간부한테 걸리면 뒤지게 욕먹는다.”


“아야야야, 영력 실어서 때리지 말아줄래······? 진짜 아프거든?”

푸념과 함께 지나의 몸을 훑는 로빈의 시선.

“몸은 좀 어때?”


안에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나는 창백한 얼굴뿐만 아니라 몸 곳곳에도 붕대, 그리고 폭주하는 영력을 통제하기 위한 마력의 고리를 걸고 있었다. 영력을 실어 로빈의 뒤통수를 때린 것은 아마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으리라. 괜히 미안해지는 로빈이었다.


“괜찮아. 누군지는 몰라도 응급처치를 기가 막히게 해놨다던데.”


지나의 태평한 대답에 로빈은 경악한다.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아 맞다, 벤······.”


“응? 벤?”


“아, 아냐.”


로빈은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지만, 마법사들의 후드는 보이지 않았다. 후발대로 온 마법사들은 먼저 복귀한 모양이었다. 로빈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난 먼저 갈 건데, 같이 안 가?”


지나는 어느새 군장을 둘러매고 있었다. 그에 로빈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아, 난······, 잠깐 어디 좀 들렸다가.”


“그래 그럼. 집합 늦지 말고.”


로빈은 지나를 보내고 나서 막사들 사이를 헤집기 시작한다. 다행히 공병이 부지런하게 일하지 않은 탓인지, 아직 대부분의 막사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한참을 걸어 다닌 끝에 그가 찾은 곳은 어느 분대용 천막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발을 들였다.


“······.”


천막은 고요했다.

그를 맞아주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이 누워있던 자리는 주인을 잃은 냄비와 책 등, 온갖 잡동사니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모든 자리마다 남아있는 물건들이 적막한 천막을 애써 채우는 느낌이었다.

로빈은 굳은 표정으로 한참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자리에 놓여있던 가죽 수통을 집어 들었다. 그는 천천히 뚜껑을 열고 향기로운 내용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나머지를 천막 안에 골고루 뿌리기 시작한다.

은은한 장미향이 쏟아지는 소리가 천막을 서서히 감싼다. 물줄기가 끝나자, 로빈은 천천히 수통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그는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마치 로빈에게서 전염된 것처럼, 복귀하는 트럭의 안에서도 이어진다.

출렁이는 트럭은 어제보다 훨씬 조용했다. 가장 시끄럽게 불평하던 지나가 깊은 잠에 빠져있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트럭을 짓누르는 무거운 공기의 가장 큰 원인은 트럭을 탄 인원이 올 때와 비교해서 절반으로 줄어있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잠에 빠져든 지나가 부럽다는 듯, 허공을 바라보는 기사 후보생들의 표정과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말끔하게 씻은 그들이었지만, 로빈은 아직도 그들에게서 피어오르는 피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흐흑······.”


검은 단발머리의 여기사, 타피의 흐느낌이 적막을 깬다. 이번엔 멀미 따위가 아님을 로빈도, 다른 동기들도 알고 있다.


“아 시끄러워, 뭘 질질 짜?”


잠이 깼는지, 짜증이 묻어난 지나의 목소리였다.


“지나-”


“나도 알어, 모두가 안다구. 다 아는데 뭘 질질 짜냐고 대체. 뭐 때문에······. 참나.”


로빈은 더 이상 그녀의 짜증을 말리지 않았다. 아니, 말릴 수 없었다.

지나의 말대로, 모두가 알고 있었다. 타피의 눈물도, 모두가 그것을 알고만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그들이 복귀하는 트럭에 오르기 직전, 승전을 자축하는 조그마한 행사가 연대장의 명령으로 행해졌다. 임시주둔지에 세워져 있던 카나반 공화국의 깃발을 철거하고, 그것을 그대로 파이튼 성의 망루에 옮긴다는 것이었다.

그로써 전날 당했던 실수를 반성하고, 다시는 깃발이 부러지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는 결의를 보여주겠다는 게 연대장의 설명이었다. 모든 연대의 기사들은 임시주둔지에서 깃발이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며 경례를 올렸다. 연대장은 기사들과 그 깃발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자네들이 이 깃발을 함께 꽂는 순간을 못 보고 간다는 것이 아쉽군! 모두가 환호할 텐데!”


라고 품위 있는 웃음과 함께 말했다.


타피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로빈은 그 장면을 회상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 중 누구도,

웃으면서 그 깃발을 꽂지는 않았을 거라고.




***




섭정 마누앙이 다시 와인잔을 들었다.

시큼하지만 충분히 달콤한 향이 코를 자극해왔고, 그는 깊은 한 모금을 음미한 뒤에 그것을 속으로 찬미하며 잔을 내려놓는다. 덕분에 그는 다시 서류철에 집중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업무시간 내내, 그가 왕의 대리로서 결재해야 할 서류는 언제나 그렇듯 묵직하게 쌓여있다. 그는 비서를 비롯해 그 누구의 방해 없이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저, 수수한 와인 한 병과 함께.


“······.”


서명하던 그의 손이 멈춘다.

하지만 황금색으로 빛나는 섭정의 집무실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조심스럽게 서류철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 알아봤나?”


허공을 향한 그의 낮은 물음이었다. 놀랍게도, 어디선가 그림자 같은 대답이 들려온다.


“네, 그가 이 도시로 데려온 자는 두 청년인데, 아티카라는 작은 마을 출신입니다. 본인도 그 두 명과 함께 줄곧 그 마을에서 지냈던 걸로 확인됩니다. 한 명은 기사 후보생으로 입소했고, 한 명은 마법대학에 편입했습니다. 기사는 로빈슨 듀켓이라는 이름이고, 마법사는 별다른 성 없이 그냥 벤이라는 이름입니다. 명령은 정기왕명으로 내려진 수색임무였고, 최종 승인은 아우님이신 마법대학 총장님께서-”


“ ‘그냥 벤’이라······.”


“네, 그런데-······.”


마누앙이 다시 와인잔을 들었다. 이 목소리가 주저함을 갖는 것이 흔치 않는 일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뭐?”


“그것이······, 둘 다 출생이 명확하지는 않은데, 20대 초반의 나이입니다.”


마누앙의 미간이 뒤틀렸다.


“20대 초반? 확실하나?”


“네 틀림없습니다. 영력으로도 확인해봤습니다.”


“흐음, 알았다. 물러가라.”


“넷.”


집무실이 다시 침묵에 잠긴다. 마누앙은 굳은 표정으로 날카로운 턱을 쓰다듬으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를 데려온 것이냐, 루디······.”


작가의말

미흡하지만, 언제나 봐주시는 독자분들을 위해 계속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의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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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5막) 그를 위하여, 그녀를 위하여 (1) +20 14.09.17 2,784 84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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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4) +11 14.09.12 2,944 86 29쪽
27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3) +13 14.09.11 2,869 81 21쪽
26 (4막) 붉은 나무의 씨앗 (2) +12 14.09.10 3,052 87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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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막간) 소녀는 올려다보고, 그는 내려다본다 +4 14.09.08 2,804 93 14쪽
»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7) +5 14.09.07 2,976 83 18쪽
22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6) +5 14.09.06 2,896 83 21쪽
21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5) +7 14.09.05 2,701 87 18쪽
20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4) +11 14.09.04 2,743 85 20쪽
19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3) +16 14.09.03 2,916 95 18쪽
18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2) +8 14.09.02 2,608 85 27쪽
17 (3막) 피로 물든 깃발을 꽂아 넣고, 웃는다 (1) +18 14.09.01 3,313 9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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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6) +9 14.08.22 5,428 158 18쪽
6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5) +6 14.08.21 3,987 128 22쪽
5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4) +11 14.08.21 4,753 123 24쪽
4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3) +6 14.08.21 5,193 141 14쪽
3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2) +26 14.08.21 6,177 164 28쪽
2 (1막) 붉은 모래, 시린 달빛, 그리고- (1) +32 14.08.20 8,723 152 26쪽
1 (여는막) 그와 그녀의 한방울 +17 14.08.20 15,698 24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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