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
크라수스가 크게 웃었다.
“하하 자네 말대로 벌주는 필요없네. 이런 역대급 사업 제안은 오랜만이야. 이거 이거 동방에서 새로운 별이 나타났구먼.”
나는 겸손히 고개를 숙였다.
“부모별의 보호와 관심이 필요한 아기별입니다.”
“아기별이라··· 부모별은 폼페이우스인가?”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사업가는 사업가와 통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뒤로는 내 편에 서겠다?”
“신도시 사업 제안으로 제 의지를 집정관 각하께 보여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절 받아주신다면 공동 투자의 대가로 사업 지분 2할만 가져가겠습니다.”
“자본을 공동투자하는데 지분을 2할만 가져가겠다고?”
“공정한 지분율입니다. 집정관께서는 토지 조성부터 원로원 설득까지 모든 행정 절차를 진행하셔야 하죠. 또한 도시 조성에서 생길 귀족들의 견제와 마찰 등 여러 위험을 부담하셔야 합니다.”
크라수스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눈앞의 것에 욕심내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사업가일세. 자넨 이미 완성된 사업가로군.”
“칭찬 감사합니다.”
“어디 보자. 토지를 비밀리 매입하는데 여섯 달, 원로원 의견을 모으는데 여섯 달 정도 걸릴 것 같군.”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도시 설계에 제가 가담해도 되겠는지요? 이집트 영지에서 얻은 도시 설계 경험을 이번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 의견 정도는 낼 수 있도록 해주지.”
“감사합니다.”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얻을 것은 다 얻었다.
* * * * * * * * * * * * * * * * * * * * *
한 달 후 브린디시움 원형극장.
이집트에서 건너온 신전 위문 공연은 사흘 내내 만원을 이루었고, 로마 병사들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다.
“다음 순서는 아프로디테 신전입니다. 뜨거운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새하얀 신관복을 입은 아프로디테 신전 무희들이 굳은 얼굴로 무대에 올랐다. 반드시 라이벌을 꺾고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엿보인다.
하프와 북이 어우러진 음악 속에 느린 춤사위가 시작되었다. 신전제의를 연상케 하는 안무가 리듬을 타며 빨라진다.
골반을 튕기는 격렬한 춤사위.
병사들의 안타까운 탄식이 들려온다.
“펑퍼짐한 신관복 때문에 안보이잖아.”
그때였다.
무대 연출이 호스를 들고 나타났다.
쏴아아.
펌프로 뿜어올린 물줄기가 무희들의 신관복을 적셨다.
반짝이는 젖은 머리칼. 투명해진 아찔한 신관복. 뇌쇄적인 아찔한 미소.
흠뻑쇼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아까와 같은 아찔한 골반 튕기기가 이어졌다. 출렁이는 몸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와아아아아!
막혔던 혈이 뚫린 기분이다. 엄청난 함성이 쏟아졌다.
“여러분들, 재무관 푸블리우스 뽑아주실거죠?”
네에에!
군인들이 함성으로 대답하였다.
“멋진 공연을 보여준 아프로디테 신전에 큰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마지막 순서는 바스테트 신전입니다.”
무대 연출이 어두워진 무대에 의자 다섯을 놓았다.
도각 도각.
고양이 가면을 쓴 무희들이 걸어온다. 높은 굽 샌들에서 늘씬하게 뻗은 다리가 이집트 고양이의 각선미를 보는 것 같다.
어두운 무대에 보이는 거라곤 하이라이트 조명에 비춰진 의자 다섯. 어느새 고양이 무희 다섯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띠리링 띠링.
느린 안무에 늘씬한 다리가 느리게 움직인다. 고양이 요가 자세처럼 매끈한 몸매를 드러내는 듯 하다가··· 허공에서 빠르게 다리를 교차시켰다.
치마가 펄럭이면서 헉 소리가 터져나왔다.
“방금 봤냐? 속옷 안입은 것 같아.”
“뭐?”
병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보여줄 만큼 보여준 것인지 좀처럼 다리를 꼬지 않는다. 밀당을 아는 고양이 같았다.
집중력이 흩뜨러질만한 타이밍에 번개같이 꼰 다리가 바뀌었다.
“아씨 또 못봤어.”
감질맛 나는 공연에 병사들이 안달했다.
차르르 차르르.
탬버린 소리가 빨라지면서 필살기가 터졌다.
와아아아아!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치마 올리기(?)에 원형 극장이 들썩였다.
에이스 무희가 손을 흔들며 관객의 호응에 답했다.
“여러분, 푸블리우스님 투표 아시죠?”
“걱정마. 무조건 찍어줄게.”
무희들은 군통령 걸그룹이었고, 병사들은 군통령에 열광하였다.
“이집트 최고다.”
“아냐 그리스가 최고지. 아까 금발 여신 못봤냐?”
“고양이가 최고다. 나 개종할거야. 오늘부터 고양이 신 믿을란다.”
“로마에 아프로디시아스를 지어달라.”
만족스러운 공연에 만족스러운 호응이다.
나는 박카스 잔을 들고 귀빈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귀빈석의 법무관에서 수석 백인대장까지 군단 주요 간부들 모두 칭찬일색이다.
“병사들이 이렇게 좋아할 줄이야.”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소. 내 폼페이우스 각하께 꼭 보고드리리다.”
“도움이 되었다니 준비한 보람이 있네요.”
나는 풀로를 불러 준비한 상자를 가져오도록 했다.
알싸한 냄새가 귀빈석에 풍겼다.
“킁킁 이 냄새는?”
“후추입니다.”
같은 무게의 금과 맞먹는다는 그 비싼 후추가 선물용 유리 단지에 담겨 있었다.
허어···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졌다.
“이, 이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소.”
“부담갖지 마십시오. 험한 원정에 오르는 분들께 드리는 작은 정성입니다. 잘 먹고 승리하여 돌아오길 바랄 뿐입니다.”
로마인이 좋아하는 조미료 1순위가 생선 소스 가룸, 2순위가 후추다.
후추를 거절할 로마인이 몇이나 될까.
뻣뻣한 군인들이었지만 몸은 솔직(?)했다.
후후후.
“푸블리우스님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 그리하리다.”
망나니 푸블리우스 자식.
평판이 워낙 안좋아 신전 무희 공연에 뇌물을 찔러줘야 반응이 나온다. 망나니 덕분에 선거운동 A에서 Z까지 하드코어로 단련하는 기분이다.
선거 운동으로 로마 지방 도시를 훑고 다닌지 한 달.
해적 전리품으로 빼돌린 200만 데나리우스를 절반이나 썼다. 정치인 선거 자금에 어째서 수천 억을 쓰는지 뛰어보니 알 것 같다. 가는 곳마다 돈 뿌리는게 장난 아니다.
신전 건축 공약에, 값비싼 뇌물에, 선거 유세 비용에 돈 안깨지는 곳이 없다. 그래도 뿌린 돈은 제 역할을 해주어 다행이다. 나는 한 달만에 망나니를 대세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바쁜 만큼 얻는 것도 컸다.
지방 도시에 인맥을 만들고, 아폴론 신전과 이시스 신전 건설을 허가받고, 로마 시장에 내 상품을 소개하는 등 알찬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접대 연회를 마치고 나니 밤이 깊었다.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군영을 빠져나왔다.
보레누스와 직속 대대가 마중나왔다. 어두운 밤길에 등유로 밝힌 횃불을 보니 마음이 편해진다.
“많이 지쳐보이십니다. 하루라도 육지에서 쉬는게 어떻겠습니까?”
“배에서 자면 돼. 다음 도시가 어디지?”
“항구 도시 타란토입니다.”
“하룻밤 이동하면 딱이네. 이집트에서 온 소식은 없어?”
“상류 범람이 시작되었습니다.”
“나일로미터 예상 수위는?”
“작년보다 팔꿈치 셋 가량 높다고 합니다. 홍수가 예상된다는군요.”
3년 연속 평작을 웃돌더니··· 드디어 꽝이 나왔다.
밀로 먹고 사는 이집트에게 나일강 수위는 중대한 문제다. 수위가 낮으면 가뭄이 찾아오고 수위가 높으면 홍수가 찾아온다. 홍수로 물이 늦게 빠지면 그만큼 파종 시기가 늦어지고 작황이 나빠진다.
걱정이다.
폼페이우스가 해적 토벌처럼 식량 보급을 맡길 텐데 밀 생산이 줄어들면 동방 원정에 보급할 밀이 충분할까?
이집트로 돌아가 의논을 해야할 것 같다.
그때였다.
“조심하십시오.”
풀로가 번개같이 몸을 날려 날렸다. 커다란 풀로의 몸이 나를 덮쳤다.
챙그랑.
튜닉 안에 껴입은 흉갑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저격입니다 대장님.”
보레누스가 재빨리 대응 지시를 내렸다.
“정면 방향 적 습격 발생. 1 백인대는 방진을 구축하고 햇불을 끈다. 2 백인대는 항구 주변을 정찰한다. 적과 조우하면 섣불리 교전하지 말고 내게 연락하라.”
횃불이 꺼지자 구름속 어슴풋한 달이 유일한 빛이 되었다.
쉬벌··· 암살이라니···
암살은 그리스계 제국 전통놀이라 조심하며 살아왔다. 몇 년 조용하길래 마음 좀 놓나 싶었는데··· 막상 당하고 보니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심장이 미친듯이 요동쳤다. 풀로가 아니었다면 오늘밤 나는 죽었다.
투캉 투캉.
재차 투척이 일어났지만 스쿠툼 방진에 쉽게 막혔다.
“건물에 숨어서 노리는 것 같습니다. 풀로 곁을 떠나지 마십시오.”
“... 알겠어.”
어둠 속 인기척이 사라졌다. 암살자는 두 번의 시도가 실패하자 미련없이 모습을 감췄다.
2 백인대가 항구를 수색했지만 개미 한 마리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민간인 집을 일일이 수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법은 하나,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브린디시움을 떠났다.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륵 뱃전 난간에 기댔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서양 역사를 보면 간간이 미친 왕이 나오지 않나?
그만큼 암살이 잦기 때문에 그렇다. 암살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여 피해망상증이 되고, 증세가 심해져 미쳐버리고 만다.
그리스계 제국이야 암살이 전통놀이고, 로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로마 황제중 38%만이 주어진 수명대로 살았다. 절반이 넘는 62%가 암살, 자살 등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보레누스, 누구 같아?”
“... 범인 말씀입니까?”
“응.”
“상대 후보일 가능성은 적습니다. 이곳에 선거운동원을 보내지 않았고, 당장 로마에서 푸블리우스와 선거전을 하느라 바쁠테니까요.”
“그럼 누구지? 이집트 시종장이려나···”
“셀레우코스 제국쪽이 아닐까요? 최근 왕자님께서 로마와 부쩍 가까워진 왕자님을 경계하는 세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앗!
너무 바빠서 잊고 있었다.
아버지의 암살.
올해 아버지가 암살당한다. 원역사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버지와 나를 동시에 노린다는 것일 테지.
내가 위험하다면··· 아버지도 위험하다.
“안티오키아 소식을 구해봐.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알겠습니다.”
당장 출발한다 해도 로마에서 안티오키아까지 왕복 한 달이 걸린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마음속 불안감을 안고 선거 유세를 계속했다.
시칠리아 시라쿠사, 캄파니아 네아폴리스··· 목표했던 곳을 모두 돌고 지지를 얻어냈다.
로마 공략의 포석을 두었다는 기쁨도 잠시. 로마의 목젖 오스티아에 도착했을 때 암살 소식이 전해졌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제기랄, 범인이 누구야?”
“안티오키아 주둔 대대에 물어봤지만 그쪽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정황상 궁전 내부에서 일어난 일 같습니다.”
빠드득.
“안티오키아로 갈 것이다. 모두 배에 올라타도록.”
나는 품안의 파피루스와 갈대펜을 꺼내 푸블리우스에게 서신을 작성했다.
로마에서 할 일은 다했다. 나는 급한 사정을 알리고 재무관에 당선되면 찾아오겠노라 약속하였다.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바닷바람이 차가워졌다. 나는 머리를 식히며 대응책을 찾았다.
“상단 정보로는 부족해. 들려오는 소문을 취합하는 수준으로는 안돼. 원하는 정보는 사전 접촉하여 얻어낼 수 있어야 해.”
“정보 조직을 만드시겠습니까?”
“보레누스, 추천할만한 사람 있어?”
“라소나스 부인 어떨까요?”
“라소나스가 누구지?”
“알렉산드리아 네크로폴리스 하이에나파 두목입니다. 부인과 함께 조직을 운영했는데 그 부인이 제법 똑똑합니다.”
“아! 기억나. 그리스어 라틴어 다하는 이집트인이었잖아.”
“레토아는 신전과 인슐라 조직을 연계하며 혹시 모를 이탈을 막고 있습니다.”
정착촌 시민이 정착촌을 몰래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전과 인슐라에 이중 소속되어 감시망이 펼쳐져 있다.
“이집트에 돌아가면 만나보기로 하지.”
보름 후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였다.
죽은 사람은 아버지 한 명이 아니었다. 형 둘이 죽어있었다.
이 정도면 확신이 간다. 반사 이익을 가장 많이 본 놈이 범인이다.
안티오코스 13세.
나는 왕좌에 오른 삼촌을 바라봤다.
“형님과 조카 둘이 그리 가서 안되었네. 황망한 소식을 전해 미안할 따름이군.”
······
-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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