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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시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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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조회수 :
272,790
추천수 :
2,587
글자수 :
788,474

작성
10.08.06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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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로라시아 연대기 - 16.이단자와 아라스 금화(1)

DUMMY

프레이르는 ‘거울의 방’ 입구 앞에 서서 크게 한숨을 내쉬며 심호흡을 했다. 무언가 긴장되는 일을 준비할 때마다 그가 으레 하는 행동이었다. 허파를 가득 채운 공기를 내뱉을 때마다 프레이르는 공기와 함께 긴장감이 몸 밖으로 배출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종종 이렇게 심호흡을 하곤 했다.

그는 그렇게 한동안 마음을 가다듬으며 ‘거울의 방’의 정문을 노려보았다. 그가 노려본다고 해서 문이 저절로 열리거나 겁을 집어먹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런 행동을 함으로서 화려하고 엄숙한 ‘거울의 방’의 분위기에 위축되려는 자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카뮈르 왕궁에서 공식적인 회의가 열릴 때마다 주로 사용되는 ‘거울의 방’은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왕자인 프레이르조차도 별다른 용건이 없으면 이곳에 들어가는 것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주기적으로 나라의 굵직굵직한 의제들이 논의되는 중추원 회의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중추원 회의는 레인가드의 실세 중의 실세들이 모여서 국정을 논의하는 회의였기 때문에 아무런 실권이 없는 프레이르는 지금까지 참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 프레이르는 왕실 대표라는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형식적인 지위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프레이르로서는 처음으로 공식적인 권한을 부여 받은 셈이었다. 살롱에의 등장이 프레이르의 사교계 입문이었다면 중추원 회의 참석은 프레이르의 첫 번째 정치적 행보였다. 이런 중요한 자리를 앞둔 그가 긴장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말이었다.

프레이르는 뛰는 가슴을 느끼며 자신의 옆자리에 위치한 알베로를 바라보았다. 항상 냉정하고 침착함을 유지하는 알베로 역시 오늘만큼은 긴장감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음장처럼 창백했던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데서 프레이르는 알베로의 마음 상태를 읽을 수 있었다.

“뭐, 딱히 긴장하지 않아도 될 거에요, 알베로 경.”

프레이르는 일부러 태연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알베로를 안심시키듯이 말했다. 이런 말은 연장자인 알베로가 하는 것이 어울렸지만 프레이르는 알베로에게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 취급을 받는 것은 딱 질색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알베로를 격려했다. 이 말에 알베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긴장하지 않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옷깃을 단정히 세웠다. 유행에 한참 뒤떨어진 옷이었지만 깔끔하고 단정하게 다려진 알베로의 복장은 그 성격만큼이나 빈틈이 없어보였다.

“부족한 저이지만 제 모든 능력을 다해 프레이르 전하를 보필하겠습니다.”

알베로가 결연하게 말했다. 그 믿음직스러운 말에 프레이르는 싱긋 웃어보였다.

“믿고 있을게요.”

프레이르는 이렇게 말하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양쪽 문 옆에 서 있던 샤를의 시종들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며 문을 열어주었다. 프레이르는 알베로와 함께 ‘거울의 방’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거울의 방’에 들어선 프레이르는 곧바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상보다 빨리 왔던 모양인지 최고급 마호가니 나무로 만들어진 탁자의 좌우에는 서너 명의 귀족들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프레이르는 그 귀족들 중에서 꿈에서라도 보기 싫을 정도로 지긋지긋한 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우리의 대표께서 납시었군요.”

리처드 대공은 여전히 특유의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프레이르와 포옹을 하려는 듯이 과장된 태도로 팔을 벌렸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없이 싸늘했다.

“리처드 대공.”

프레이르는 딱딱한 미소를 지으며 리처드 대공과 형식적인 포옹을 나누었다. 프레이르는 그 와중에도 리처드의 눈가에 불쾌하다는 듯한 찡그림이 머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도 아마 리처드와 마찬가지로 일그러져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많이 긴장하신 모양이군요. 이마에 땀이 맺히셨네요.”

리처드가 프레이르를 배려하는 듯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이것이 오직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무더워서요.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나네요.”

프레이르는 리처드의 얼굴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러자 리처드는 피식 웃으며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뭐, 전하께서는 많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국왕 폐하께서 전하께 요구하시는 것은 거수를 하는 전하의 오른손이지, 전하의 두뇌가 아니니까요. 전하께서는 그저 국왕 폐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끔 손만 들면 될 겁니다. 의회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지요.”

정중한 말투였지만 그 내용은 대단히 모욕적이었다. 다른 귀족 의원들은 이 발언에 놀란 모양인지 연신 프레이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리처드 대공이 회의에서 거칠게 나올 것이라 예상한 프레이르는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프레이르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자 리처드는 ‘흥’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는 프레이르의 호칭에 관해서 걸고 넘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제 왕실을 대표하는 분이 되셨으니 뭔가 다른 호칭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군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속담처럼 무언가 근사한 호칭을 붙인다면 전하께서도 무슨 신통한 능력을 발휘할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리처드 대공이 잔뜩 뒤틀린 목소리로 프레이르를 비꼬았다. 그는 프레이르가 별다른 능력도 없으면서 왕실 대표로 지명되었다면서 빈정거리고 있었다. 영악한 프레이르가 그 말뜻을 놓칠 리 없었다.

“그런 신통력은 제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보여드릴 테니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리처드 대공.”

이번에는 프레이르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제가 국왕이 되었을 때, 대공님께는 특별히 무시무시한 신통력을 질려버릴 정도로 보여 드릴 테니 지금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프레이르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정적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이 말에 다른 의원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리처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 말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하지만 전하께서 국왕이 되시는 것이 먼저겠죠."

그는 얄밉게 프레이르에게 빈정거린 뒤,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리처드와의 조우가 끝나고 다른 의원들과도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머지 중추원 의원들도 ‘거울의 방’에 입장했다. 포르테빌 대공과 알타미라 후작은 프레이르에게 따뜻한 웃음을 지어보였으나 레스터 공작과 세르티프 백작, 톨리 남작 등은 프레이르에게 고개만 까딱해 보였다. 그들의 눈에는 프레이르에 대한 명백한 적개심이 어려 있었다.

이윽고 모든 의원들이 입장하자 한 시종이 큰 소리로 외쳤다.

“국왕 폐하께서 납십니다!”

시종의 외침과 함께 아이자크 경을 대동한 샤를이 ‘거울의 방’으로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위엄 있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는 기품 있는 태도로 중추원 의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 가장 상석의 앞에 섰다. 잠시 동안 의원들을 둘러본 샤를은 미소를 지으며 모두에게 착석을 권했다. 샤를의 권유가 떨어지자 중추원 의원들은 모두 자리에 앉은 뒤 샤를을 바라보았다. 프레이르 또한 샤를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궁금해하며 그 입술에 집중하였다. 그런 프레이르에게 샤를은 잠시 동안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생각한 샤를이 비서관인 아이자크 경에게 신호를 보내었다. 샤를의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아이자크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서기관에게 눈짓을 하였다. 착석한 의원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서기관은 그제야 깃펜을 들고 기록을 준비했다. 서기관이 깃펜에 잉크를 묻히는 것을 확인하며 아이자크 경이 말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139회 중추원 정기 회의가 회기에 들어갑니다.”

아이자크 경의 말에 프레이르는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중추원 회의가 시작된 것이었다.


“경들, 일단 이 나라의 중요한 현안을 처리하기 위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싶소.”

샤를이 처음 운을 뗐다. 간략하고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은 개회사였다. 프레이르는 이 개회사야말로 길게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샤를의 성격을 잘 반영하였다고 생각했다.

샤를을 짤막하게 감사를 표한 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의제는 최근 레인가드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이단에 대한 문제요. 지금까지 우리는 이단에 대해 그들이 언젠가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으며 관용적인 자세를 유지해 왔소. 하지만 최근의 현상을 보면서 짐은 우리의 정책의 방향에 관해 전면적인 재검토를 해야 할 때가 왔다고 확신하게 되었소.”

샤를의 말에 중추원 의원들은 모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이미 최근 이단자들이 확산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 4년 전, 에우로텐에서는 로버트 마일러라는 신학 교수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와 수도원의 세습화에 반대하여 <세속화된 교회에 대항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세속화되고 타락한 칼레타 교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서 교회의 잘못을 66개조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그리고 이 글은 곧바로 에우로텐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수많은 민중과 지식인들, 그리고 기존의 교회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세속화된 교회에 대항하여>라는 글에 호응하여 교회에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로버트 마일러가 속한 칼브리지 대학은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교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더욱 확대하여 교회의 전면적인 개조와 신앙의 회복을 외쳤다. 그들은 스스로를 종교 개혁가, 혹은 ‘다시 돌아온 자’라는 뜻의 에우로텐어인 ‘뷔그노’라 부르며 기존의 칼레타 교회에게 개혁을 요구했다.

교황을 중심으로 한 칼레타 교회는 이 뷔그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로버트 마일러를 파문하는 등 곧바로 탄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앙의 회복과 진정한 구원, 그리고 허례허식을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종교 개혁가들의 주장은 더욱 거세졌고, 뷔그노의 신앙 회복의 열기는 마른 벌판에 번진 불길처럼 거세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뷔그노의 사상은 최근 에우로텐에 인접한 니블헤임과 레인가드에도 전파 되고 있었다. 경건한 칼레타 교인이지만 이단에 대해 관용적인 자세를 보여왔던 샤를은 지금까지 여타 이단과 마찬가지로 뷔그노들을 눈 감아 주었다. 그러나 뷔그노들의 교세가 카시네예프 대학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기존의 교회를 위협할 정도까지 세력을 확장하게 되자 성직자들은 샤를에게 대책을 마련할 것을 요구해왔다.

“이 뷔그노라는 이단자들에 관해 무언가 방침을 세워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 대다수의 성직자들의 의견이오. 따라서 짐은 오늘 회의에서 뷔그노들에 대한 기본적인 방침을 세우기를 기대하고 있소.”

샤를은 이렇게 말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좌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샤를의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이제 더 이상 뷔그노의 문제를 교회에만 맡긴 채 손을 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자신의 제안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샤를은 라시드 대주교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그렇다면 일단 이 의제를 처음 전달했던 라시드 대주교의 말을 들어봅시다.”

샤를은 이렇게 말하며 대주교에게 자리에서 일어서라는 신호를 보냈다.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노성직자는 기침을 하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주교의 비서관은 이 성직자를 부축하면서 그의 손에 지팡이를 쥐어주었다. 지팡이를 지지대 삼아 비틀거리며 의자에서 일어선 대주교는 샤를에게 말했다.

“지팡이를 짚어야만 일어설 수 있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주님께선 저에게 통풍이라는 시련을 주시는 군요.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대주교의 사과에 샤를은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계속 이야기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대주교는 공손히 샤를에게 감사의 표시를 한 뒤 말문을 열었다. 프레이르는 라시드 대주교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통풍이 걸려 초라한 수족과 정반대로 그의 목소리는 완고하고 단호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80세에 다다른 성직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찬 음성이었다.

“레인가드의 가장 고귀하신 분들이시여. 저는 지금 레인가드의 성직자를 대표하는 자로서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레인가드에는 주님의 자연법을 거역하고, 교황 성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들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단들은 스스로를 뷔그노라 부르며 가증스럽게도 자신들이야말로 정통 신앙의 계승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그저 로버트 마일러라는 자의 꾐에 넘어간 악마의 하수인일 뿐입니다. 정통 교회의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은 결코 진정한 칼레타 교인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주교는 이렇게 말하며 품 속에서 한 인쇄물을 꺼냈다. 프레이르를 비롯한 몇몇의 의원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 책자를 살펴보았다. 그 것은 로버트 마일러가 지은 <세속화된 교회에 대항하여>였다.

“이 책자에서 로버트 마일러라는 자는 성찬식의 의미를 자신의 뜻대로 곡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육체의 현신이라는 칼레타 교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성찬식에는 그저 상징적인 의미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대주교의 말에 뷔그노의 교리에 관해 잘 몰랐던 의원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이 이단적인 주장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라시드 대주교는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킨 뒤 말을 이어나갔다.

“로버트 마일러의 이단적인 주장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성서의 내용을 왜곡하여, 교회가 지켜야 할 의식은 오직 성서에 기록된 성찬식과 세례식뿐이며, 그 밖의 성자나 성 축일은 모두 허례허식에 불과하다며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이것은 성자와 성 축일을 지정한 교황청의 권위에 반하는 주장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소위 칼브리지 학파라 불리는 교수들이 교회의 의식은 물론 교회의 권위까지 문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라시드 대주교는 이렇게 말하며 탁자를 쾅 내리쳤다. 그의 어조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들은 아벨 신께 기도하거나 예배하는 데 있어서 성직자나 교회의 의식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개인의 믿음과 성서 뿐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그들은 교황청이라던가, 고해성사와 같이 성직자의 권위에 연관된 모든 의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태껏 많은 이단자들을 봐왔지만 이들처럼 기존의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은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프레이르는 라시드 대주교의 말에 대단히 충격을 받았다. 정통 칼레타 교인인 그는 지금까지 이런 이단자들에 관해서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만약 대주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뷔그노라는 이단자들은 분명 대단히 위험한 인물들입에 틀림없었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프레이르뿐만이 아니었다. 거울의 방은 마치 벌집을 들쑤시기라도 한 것처럼 웅웅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대주교의 말에 샤를과 포르테빌 대공은 대단히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리처드 대공과 레스터 공작은 주먹을 꽉 쥔 채 분노에 찬 표정으로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한편 톨리 남작은 어느새 <세속화된 교회에 대항하여>라는 책자를 구겨버리고 있었다. 중추원 의원들 중에서 침착하게 대주교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은 오직 알타미라 후작과 다프 브라쇼브 호민관뿐이었다.

“저는 지금까지 이런 이단자들이 오직 저 저주 받을 마일러 교수가 머무르고 있는 에우로텐에만 존재한다고 믿어 왔습니다.”

라시드 대주교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혐오감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카시네예프 대학을 방문하면서 저는 이러한 저의 믿음이 더없이 어리석은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대주교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비서관에게 손짓을 했다. 비서관은 대주교의 곁으로 다가와 그에게 한 서류를 넘겨주었다. 아르카디아 대성당의 봉인이 찍혀 있는 그 서류를 들어 보이며 대주교가 말했다.

“이것은 <세속화된 교회에 대항하여>라는 책자에 동조하여 교황청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작성한 카시네예프 대학 교수들과 학생들의 명단입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뷔그노라고 성서 앞에 맹세하였으며 ‘진정한 신앙의 회복’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선서했습니다.”

대주교는 이렇게 말하며 샤를에게 서류를 제출했다. 샤를은 침통한 표정으로 그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봉인을 뜯고 명단을 확인했다. 프레이르는 샤를의 파란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드는 것을 발견했다.

샤를은 한참 동안 그 명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른 위원들에게도 명단을 보여주었다. 명단을 받아든 위원들은 샤를과 마찬가지로 놀라운 표정을 금치 못했다. 명단의 이름을 확인한 사람이 늘어날 때마다 방 안의 웅성거림은 커져갔다.

이윽고 트라바나스 백작이 프레이르에게 명단을 넘겨주었다. 프레이르는 얼른 그 명단을 받은 다음 이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어째서 사람들이 이렇게 동요했는지 알 수 있었다.

명단에는 언뜻 봐도 60~70명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중에서도 박사에 해당되는 교수들은 어림잡아 30명은 되는 듯했다. 그들 대부분이 살롱에서 지식인으로 크게 존경을 받는 카시네예프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들이었다.

프레이르는 그들의 이름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개중에는 프레이르도 아는 이름이 몇몇 있었다. 특히 유명한 궁정 화가이자 예술 관련 교수인 마텔 베이커의 이름을 발견한 프레이르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종교화를 많이 그리기로 유명한 그가 이단자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모든 사람들이 명단을 돌려보자 대주교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위협적으로 말했다.

“이것만 보아도 이 이단자들이 이미 얼마나 많이 카시네예프에 침투했는지 깨달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대학을 중심으로 이 저주 받을 이단자들이 확산되는 것에 단호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대주교는 이렇게 말하며 다시 기침을 했다. 그리고 그는 비서관에게 지팡이를 넘겨준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주교의 말에 샤를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대주교에게 질문을 건넸다.

“참으로 엄청난 자료요, 라시드 대주교. 이 명단이 사실이라면 분명 하루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오. 하지만 그 전에 짐은 그대가 어디서 이런 것을 구했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구려.”

샤를의 질문에 대주교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제 비서관인 토마스 군이 카시네예프 대학의 다른 교수를 통해서 입수한 것입니다. 딱히 토마스 군의 자료가 아니더라도 이미 대학가에서 이단이 창궐한다는 소식은 폐하께서도 접하셨으리라 봅니다만...”

대주교가 떠보듯이 샤를에게 말했다. 그 말에 샤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대주교의 말은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에우로텐은 칼브리지 대학이 뷔그노의 중심이었다면 레인가드는 카시네예프 대학이 그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렇다면...”

샤를과 대주교 양쪽의 눈치를 보던 다프 브라쇼브 호민관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추기경 예하께서는 어떤 대책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호민관의 질문에 대주교는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정석대로 이단 심문과 종교 재판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일단 이 명단에 있는 자들을 철저히 심문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공정한 종교 재판을 거쳐 이단으로 판명될 경우 교황청의 명령에 따라 화형에 처해야 할 것입니다.”

대주교의 거침없는 발언에 리처드 대공과 레스터 공작을 비롯한 대다수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통 칼레타 교인인 그들은 대주교의 말대로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샤를은 그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뷔그노라고 선서한 교수 30명은 카시네예프 대학과 살롱에서 대단히 존경 받는 박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중에는 카시네예프 왕립 아카데미 회원도 스무 명 가까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지식인들을 그대로 화형 시켜버리는 것은 레인가드에 너무나도 큰 손실이었다.

샤를의 마음을 읽은 프레이르는 지금이 자신이 나설 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옷깃을 정돈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 때 프레이르의 뒤에 서 있던 알베로가 프레이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프레이르에게 작게 속삭였다.

“전하, 지금은 가만히 계시는 것이 상책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교회에 관련되어 발언을 하다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자칫 이단을 두둔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습니다.”

알베로의 조언에 프레이르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어요, 알베로 경. 일단 물러나 있어요.”

프레이르의 작지만 단호한 명령에 알베로는 다시 자리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프레이르는 샤를에게 눈짓을 했다. 프레이르가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은 샤를은 프레이르에게 발언권을 넘겨주었다.

샤를에게서 발언권을 얻은 프레이르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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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로라시아 연대기 - 14.공작의 갈등(4) +11 10.07.12 1,769 17 23쪽
47 로라시아 연대기 - 14.공작의 갈등(3) +7 10.07.10 1,738 18 10쪽
46 로라시아 연대기 - 14.공작의 갈등(2) +2 10.07.08 1,771 15 9쪽
45 로라시아 연대기 - 14.공작의 갈등(1) +6 10.07.07 1,847 21 23쪽
44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5) +3 10.07.03 1,765 16 13쪽
43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5) +2 10.06.30 1,760 13 22쪽
42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3) +2 10.06.29 1,800 19 12쪽
41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2) +2 10.06.29 1,807 16 12쪽
40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1) +5 09.12.24 1,941 13 12쪽
39 로라시아 연대기 - 12.인명록(3) +8 09.12.22 1,989 15 19쪽
38 로라시아 연대기 - 홀트 백작의 보고서 전문 +6 09.12.22 1,967 13 5쪽
37 로라시아 연대기 - 12.인명록(2) +4 09.12.21 1,881 15 8쪽
36 로라시아 연대기 - 12.인명록(1) +6 09.12.20 1,907 17 11쪽
35 로라시아 연대기 - 11.우정의 대가(3) +9 09.12.20 1,997 14 19쪽
34 로라시아 연대기 - 11.우정의 대가(2) +4 09.12.19 1,977 14 10쪽
33 로라시아 연대기 - 11.우정의 대가(1) +6 09.12.19 2,025 15 12쪽
32 로라시아 연대기 - 10.결투의 미학(3) +3 09.12.18 2,102 17 9쪽
31 로라시아 연대기 - 10.결투의 미학(2) +7 09.12.18 2,097 17 6쪽
30 로라시아 연대기 - 10.결투의 미학(1) +5 09.12.17 2,172 14 11쪽
29 로라시아 연대기 - 결투 +3 09.12.17 2,180 1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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