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시아 연대기 - 14.공작의 갈등(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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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문의 내력을 되짚어 보던 로딤체프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겨우 길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아벨 신은 끝내 그의 가문에 행운을 내려주기를 거부한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돌려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수치심과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남편과 눈이 마주치자 몸을 떨었다. 그녀의 뺨에는 아까 공작의 거친 손에 얻어맞은 손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약 4시간 전, 그는 친구인 알타미라 후작으로부터 한 편지를 받았다. 알타미라 후작은 이 편지를 대단히 다급히 쓴 모양이었는지 편지는 제대로 봉인조차 되지 않은 상태여서 쉽사리 뜯어져버렸다. 그 차분하고 온화한 친구가 당황하여 편지를 쓰는 모습을 상상하며 로딤체프 공작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편지를 읽어내려가면서 공작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 편지에는 이제는 <늑대부인의 시>라는 이름까지 얻은 한 시와 함께 경솔한 행동을 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는 내용의 글이 담겨 있었다. 비록 로딤체프 공작은 시나 예술에 그다지 조예가 없었지만 그 시를 읽자마자 그것이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그는 자신의 부인이 지금까지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편지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격노한 공작은 당장 부인을 찾아가 시의 내용이 사실인지를 추궁했다. 처음에 부인은 완강히 부인했지만 로딤체프 공작이 마치 그녀의 목을 조를 기세로 덤벼들자 결국 겁에 질려 모든 것을 실토하고 말았다.
그리고 로딤체프 저택의 사람들은 처음으로 무뚝뚝한 로딤체프 공작이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5년 전 그의 병사들이 임무에 태만하다가 난쟁이족의 공격에 요새 하나를 상실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조차도 공작은 이렇게 화를 내지 않았었다. 완전히 침착성을 잃어버리고 부인의 뺨을 때리던 그를 하인 네 사람이 뜯어 말려야 할 정도였다.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머리가 마비된 그는 당장 포르테빌 대공에게 결투를 신청하기 위해서 뛰쳐나가려 했다. 아내의 애처로운 부탁을 단호히 뿌리치며 그는 외출복을 입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가 문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에 알타미라 후작이 그를 찾아왔다. 알타미라 후작은 편지만으로 로딤체프 공작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로딤체프 공작에게 직접 찾아와 섣부른 결투는 자제하고 일단 단 하루만이라도 기다려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로딤체프 공작은 당장이라도 포르테빌을 찢어죽이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에 후작의 요청을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알타미라의 설득에 로딤체프 공작은 오늘 하루만 어떻게든 참아보겠다고 약속해주고 말았다. 평소 로딤체프 공작은 명석한 알타미라 후작의 판단을 존중해왔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알타미라 후작은 귀족 사회의 동향에 밝았으므로 그의 말을 들어서 공작이 손해를 본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알타미라 후작이 어떠한 선물을 가져오더라도 결투는 감행할 생각이었다. 이 결투에는 그의 명예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감히 그의 아내를 건드린 포르테빌의 피를 보기 전에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었다. 이런 불명예를 당한 이상 결투 없이 물러선다는 것은 스스로를 겁쟁이로 만드는 행동이었다.
로딤체프 공작은 그의 주먹을 피가 나도록 꽉 쥐었다. 얼굴이 반반한 그 대공을 생각하자 다시 억눌러왔던 분노가 폭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포르테빌의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자 그는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다음 눈 앞에 놓인 거울을 맨손으로 있는 힘껏 내리쳤다.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거울이 깨지며 공작의 피가 무수한 파편과 함께 흩뿌려졌다.
공작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자 깜짝 놀란 공작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허겁지겁 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공작의 피를 서투른 솜씨로 닦아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닿자 공작은 팔을 싹 빼낸 다음 경멸스런 표정으로 그의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잔뜩 주눅이 든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로딤체프 공작은 그 모습에 일말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내에 대한 그의 애정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본래 그의 아내인 돌로레스 로딤체프는 살롱에 나서길 좋아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즐겨하는 전형적인 카시네예프 귀부인이었다. 알타미라 후작의 살롱에서 존중 받는 귀빈이었던 그녀는 카시네예프를 떠나면 견디질 못하는 그런 부류의 여자였다. 그녀는 한 때 남편을 따라 공작의 영지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는데, 남부의 척박하고 건조한 땅과 그곳에서 우글거리는 수천 명의 거친 병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족 사회와의 단절을 도저히 못 견뎌냈다. 결국 그녀는 남편을 따라 레인가드의 변방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카시네예프에 눌러 앉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반면 로딤체프 공작은 5천 명의 군대를 수족처럼 자유자재로 부리는 뛰어난 장군이었으나 살롱이나 파벌 싸움 등 소위 ‘귀족 생활’ 같은 것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었다. 그는 항상 변방에서 난쟁이족의 위협으로부터 레인가드와 자신의 영지를 방어하는 역할을 맡아왔기 때문이었다. 1년 중 카시네예프에 머무르는 시간은 채 1달도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왕실의 큰 행사가 있을 때 얼굴을 잠시 비추는 정도였기 때문에 그가 우아한 살롱의 멋을 즐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렇게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던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알타미라 후작 때문이었다. 알타미라 후작의 사촌동생이었던 돌로레스는 알타미라 후작의 중매 하에 로딤체프 공작과 결혼하게 된 것이었다. 돌로레스는 친구이자 유능한 장군인 로딤체프를 자신의 가문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기기 위한 알타미라 후작의 포석인 셈이었다.
그러나 알타미라 후작이 간파하지 못한 것은 돌로레스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방탕하고 문란한 여자였다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은 남편 없이 버티던 그녀는 포르테빌 대공의 유혹에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예술적 재능이 풍부하고, 여자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포르테빌 대공은 무뚝뚝한 군인인 로딤체프 공작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결국 로딤체프 공작 부인은 포르테빌 대공과 부정한 관계를 맺었고 그 대가는 이렇게 참혹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로딤체프 공작은 알타미라 후작이 국왕인 샤를과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후작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따라서 알타미라 후작의 반쪽이나 다름 없는 로딤체프 공작 역시 현재 샤를과 동맹을 맺은 셈이었다. 그러나 돌로레스와 포르테빌 대공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알타미라와 로딤체프 공작, 그리고 샤를의 협력 관계는 흔들리고 있었다. 포르테빌이 죽든 로딤체프 공작 자신이 죽든 그 결과는 결코 그들에게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쪽이나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것은 자명했다.
자신들의 세력이 약화되는 것에 관해 생각하던 그는 갑자기 자신이 대단히 어리석게 느껴졌다. 결투를 벌이는 것은 로딤체프 공작 자신이지 않은가? 포르테빌이 죽으면 세력이 약화될 뿐이지만 로딤체프 공작 자신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한쪽의 결과가 유쾌하지 않다면 다른 한쪽의 결과는 완전한 파멸이었다. 두 개의 결과는 그에게 있어서 결코 동등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포르테빌이어야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문득 결투를 벌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검으로 싸운다면 그가 승리할 확률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9할 이상은 된다고 여겨졌다. 그는 과거 국왕의 근위대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총사대원이었던 것이다. 검으로 하는 결투에는 그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그러나 결투를 신청하는 사람은 공작 자신이었다. 그리고 포르테빌은 분명 권총을 사용할 터였다. 운에 운명을 맡기는 권총을 사용할 경우 그가 살아날 확률은 6할 정도였다. 결코 자신의 생명을 걸기에 만족할 만한 수치는 아니었다. 그는 잔디밭에 나동그라진 채 꿰뚫린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잠시 동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 문 바깥에서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곧이어 집사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로딤체프 공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알타미라 후작은 방금 그를 다녀갔다. 그리고 카시네예프에서 이런 상황에 그를 방문해줄 만큼 신뢰할만한 친구는 없었다. 분명 자신의 반응을 구경하고 싶어하는 철부지 귀족일 것이라 생각한 그는 짜증이 났다. 그는 성난 목소리로 집사에게 외쳤다.
“당장 내쫓게!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네.”
공작의 대답에 집사는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렇지만...”
집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분은 어떻게든 공작님을 꼭 뵙고 싶어 하십니다.”
로딤체프 공작이 되물었다.
“누군가?”
공작의 물음에 집사가 말했다.
“리처드 대공 각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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