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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시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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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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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09.12.17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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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시아 연대기 - 10.결투의 미학(1)

DUMMY

귀족들은 결투야말로 진정한 귀족의 자격을 시험하는 무대라고들 한다. 결투는 ‘차갑고 이익만을 따지는’ 평민과 달리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는 귀족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그 때문에 귀족들은 사실 결투에서 이기고 지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진정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또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초월하는 무덤덤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총구와 검 앞에서 벌벌 떨면서 승리하는 것보다 의연하게 패배하여 죽음을 맞는 것이 더 명예로운 일이다.

이런 미묘한 미학이 담긴 결투에서는 승리자의 명예는 물론 패배자의 명예 또한 회복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승패의 유무가 아니라 얼마나 멋지고 명예롭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느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결투는 달랐다. 물론 귀족으로서의 명예를 걸고 벌이는 결투였지만 오늘의 결투자들은 레드포드 자작과 리처드 대공이었다. 레인가드에서 가장 적대적인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벌이는 결투는 결코 ‘멋과 명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목숨을 가져가고자 하는 결의로 단단히 다져져 있는 것이다.

그 태생부터 두 사람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철저한 귀족주의자인 리처드 대공의 입장에서는 감히 평민 주제에 누이의 덕을 봐서 귀족 행세를 하고 있는 레드포드 자작을 인정할 수 없었다. 반면 레드포드 자작은 사사건건 프레이르와 레드포드 자작가문을 모욕하는 리처드 대공에게 깊은 증오심을 품고 있던 차였다. 따라서 이 결투는 이미 20여 년 동안 계속된 그들의 반목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했다. 이 깊은 원한과 증오심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심장에서 피냄새를 맡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동쪽 평야 너머로 새벽의 안개가 걷혀갈 무렵 레드포드 자작과 입회인 둘이 마차를 타고 결투 장소에 도착했다. 결투 장소에는 이미 리처드 대공과 셰리프 남작, 보스웰 자작이 한 의사와 함께 레드포드 자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훗,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길래 겁을 먹고 내뺀 줄 알았습니다.”

리처드 대공이 실실 웃으며 레드포드 자작에게 다가왔다. 레드포드 자작은 이를 으득 갈며 대답했다.

“나야말로 대공이 여기에 없을까 걱정하면서 왔지.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야.”

“흥, 그랬군요.”

리처드 대공은 레드포드 자작의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입회인으로 온 사람은 브라쇼브 호민관과 로네이 백작이었다. 둘 다 레인가드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쌓은 인물들로서 입회자로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쳐다본 리처드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회인의 자격에 합당하다는 의미였다. 그는 곧바로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안 쪽에 입었던 조끼마저 입회인에게 맡기며 셔츠 차림으로 그 자리에 섰다.

“긴 말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진행하죠.”

“그렇게 하지. 네 놈 심장에 이 검을 쑤셔 넣을 수 있는 날이 오니 힘이 솟아나서 말이야.”

레드포드 자작은 정말로 기쁜 표정으로 겉옷을 벗어 입회인들에게 건네주었다. 이제야 이 눈엣가시이자 프레이르의 원수인 리처드 대공을 없애버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에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이 넘쳤다. 검술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그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검은 문제없습니다.”

“두 검이 모두 동일합니다.”

입회인들이 리처드 대공이 가져온 검에 속임수나 마법이 없는지 확인한 다음 말했다. 그리고 브라쇼브 호민관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리처드 대공님께 묻겠습니다. 레드포드 자작님께 사과하고 결투를 중단하시겠습니까?”

리처드 대공은 큭큭거리며 아무 말 없이 검을 집어들었다. 싸우겠다는 의지였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마틴 경 또한 입회인이 건네주는 검을 집었다. 날렵한 레이피어가 그의 손가락에 익숙한 감각과 함께 걸렸다. 이제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은 약 다섯 보쯤 떨어진 곳에 서서 검을 위로 치켜세웠다. 결투를 시작하겠다는 표현이었다. 그렇게 서로 예의를 표한 그들은 입회인의 신호를 기다렸다. 입회인들은 회중시계를 들고 차분히 6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정확히 정반대를 향하는 순간 입회인이 박수를 쳤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투가 시작되었다.

양 쪽 다 검의 고수답게 일단은 서로의 약점을 찾기 위해 가벼운 신경전만을 벌였다. 레드포드 자작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군인이었고 리처드 대공은 레인가드에서 가장 많이 결투를 벌인 남자였다. 양 쪽 모두 서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치명상을 입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탐색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한동안 리처드 대공의 검을 건드려보던 레드포드 자작이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그의 검이 먼저 다리로 향하는 듯 잠시 아래로 숙여졌다가 위로 솟구치며 대공의 목젖을 노렸다. 리처드는 재빨리 그 검을 튕겨내며 반격을 가했다. 그는 검을 대각선 방향으로 크게 휘둘렀다. 깨끗하고 훌륭한 공격이었으나 레드포드 자작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뒤로 물러나며 가슴 바로 앞 쪽으로 그 공격을 흘려냈다. 마치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회피였다.

리처드 대공의 공격이 이어졌다. 몇 합을 겨루는 동안 대공은 자신의 베는 속도가 레드포드 자작의 회피 속도에 못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대공은 작전을 바꾸어 레드포드 자작의 곳곳을 찔러가며 간간이 베는 공격은 흉내만 내면서 자작을 눈속임하려 했다. 그러나 역전의 용사인 마틴 경은 그 속셈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찌르는 공격은 적절한 방어로 막아서다가 리처드가 베는 자세를 취할 때마다 회피하는 대신 반격을 가했다.

이런 식으로 결투가 진행되는 동안 어느새 새벽안개를 가르며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쬐기 시작하는 태양빛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두 칼날은 차가운 금속성을 내며 계속해서 맞부딪혔다. 그리고 그 곳에서 결투를 보는 사람들 역시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잊고 두 달인들의 결투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살기등등하게 위협적인 공격을 주고받았다.

레드포드 자작이 그의 검을 횡으로 휘두르자 다시 리처드가 검을 막았다. 그대로 흘려보낼 것만 같았던 두 검이 이번에는 허공에서 서로의 칼날을 맞댄 채 부르르 떨었다. 두 사람은 위협적인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어느 쪽도 먼저 물러 설 기색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입회인의 신호에 따라 두 사람 모두 뒤로 물러났다.

검을 거둔 리처드 대공이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역시 아무리 대공이 검술의 달인이라지만 실전에서 괴물처럼 단련된 레드포드 자작의 체력을 따라가기에는 무리인 모양이었다. 리처드의 검에 실린 힘이 떨어진 것을 눈치 챈 레드포드 자작이 파상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지치기 시작한 대공이 조금씩 뒤로 밀려나며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놓칠 레드포드 자작이 아니었다.

레드포드 자작은 리처드 대공의 주의력이 떨어진 틈을 타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은 패턴의 공격을 가했다. 그의 검이 깊숙한 찌르기를 할 것처럼 대공의 얼굴로 향했다. 그 공격에 당황한 리처드 대공이 칼날을 쳐내기 위해서 레드포드 자작을 막아섰다. 그러나 마틴 경은 찌르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리처드 대공의 검을 흘려내며 검손잡이로 대공의 얼굴을 강타했다.

‘퍽’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대공의 얼굴에서 피가 솟구쳤다. 동시에 대공은 그 충격으로 잔디밭에 나자빠졌다. 레드포드 자작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아침으로 잔디를 먹는다.’라는 말 알고 있겠지? 참 빨리도 달성했구만 그래.”

리처드 대공이 분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코뼈가 부러졌으나 이미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당장이라도 레드포드 자작을 찢어죽이기 위해 달려드려는 그를 저지하며 입회인들이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코피로 인해 시야가 가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리처드 대공이 얼굴을 닦고 자세를 취하자 다시 결투가 시작되었다. 보통은 이 정도의 부상이라면 레드포드 자작의 승리로 결투가 끝나지만 오늘은 한 쪽이 죽을 때까지 벌여야 하는 결투였다. 그리고 현재 그 어느 쪽도 이 정도의 결과로 만족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격돌했다. 아까의 타격으로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대공의 공격은 여전히 강력했다. 이에 맞서는 레드포드 자작은 리처드 대공의 공격을 흘려가며 대공이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아까의 부상으로 화가 나 있는 리처드가 이런 식으로 힘이 실린 공격을 한다면 곧 체력이 바닥 날 것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리처드 대공이 다시 밀려갔다. 역시 체력이 고갈된 모양이었다. 대공의 검은 처음보다 현저하게 위력이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을 노린 레드포드 자작이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크윽!”

리처드 대공이 그의 검을 떨어뜨렸다. 레드포드 자작이 그의 레이피어를 대공의 어깻죽지에 예리하게 꽂아 넣은 것이었다. 레드포드 자작은 이 공격의 성공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다시 검을 뽑아냈다. 자작의 검이 어깻죽지에서 빠져 나가자 온 몸에 힘이 빠진 듯 리처드가 잔디밭에 쓰러졌다. 이미 승부는 결판이 났다. 리처드 대공이 더 이상 결투를 진행할 수 없을 만큼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입회인들은 결투를 중단하지 않았다. 이 결투는 한쪽이 죽을 때까지 끝이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직 레드포드 자작의 검이 대공의 심장을 꿰뚫지 않았다. 리처드 대공의 숨통을 끊는 마지막 의식이 남은 것이다.

레드포드 자작이 어깨를 부여잡은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리처드 대공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정해진 의식대로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이것은 패배자에게 자비를 구할 것인지 묻는 의식이었다. 만약 여기서 리처드 대공이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하면 레드포드 자작은 기사도 정신에 따라서 그의 검을 거두어야 했다. 하지만 리처드 대공은 자비를 구하지 않았다.

“검을 꽂아 넣으시죠, 반쪽자리 귀족님. 당신 따위에게 자비를 구할 것 같습니까?”

리처드가 큭큭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레드포드 자작은 미소를 지으며 내려놓았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검을 리처드의 심장이 있는 자리로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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