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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님의 서재입니다.

로라시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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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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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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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88,474

작성
10.08.01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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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로라시아 연대기 - 15.새로운 시작(2)

DUMMY

한편 엘브 강가에서 한바탕 즐거움을 만끽한 프레이르는 샤를과 개인적인 접견을 하기 위해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마구간에 말을 맡긴 그는 경쾌하면서도 즐거운 듯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며 복도에서 흥얼거렸다. 시종과 시녀들은 이렇게 천진난만하면서도 유쾌하게 길을 걷고 있는 프레이르를 바라보며 애정 어린 미소를 건네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프레이르라는 왕자는 고귀하지만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소탈하면서도 종종 왕자다운 기품을 보이는 프레이르에게 그들은 일반적인 왕족에 대한 경의와 함께 인간적인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프레이르에게 인사를 하면서 얼굴을 들어 프레이르를 호감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 중에서도 나이가 어린 시녀들은 복도를 지나가면서 종종 고개를 돌려 프레이르의 얼굴은 흘낏흘낏 훔쳐보았다. 프레이르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시녀들은 프레이르의 얼굴에서 좀처럼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눈길을 끈 것은 프레이르가 미남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프레이르보다 잘 생긴 귀족들은 궁성 안에 넘치고도 남았다. 다만 사람들이 프레이르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얼굴에 무언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특징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교도의 남신상처럼 단정하게 정돈된 검은 머리와 빨려 들어갈 것 같이 깊고 푸른 눈동자. 서글서글하면서도 부드럽게 흘러내려오는 눈매. 적당한 낯빛을 띠는 얼굴, 좌우 입가에 묘한 각도로 올라가서 상당히 모순된 느낌을 주는 입꼬리. 날카롭게 꺾여 내려오면서도 끝이 둥글게 목 안 쪽으로 말려들어가 있어서 딱딱한 느낌을 주지 않는 턱선...

프레이르의 외모에 대한 특성들은 다음과 같았는데 레인가드의 표준적인 미남자의 조건과는 거리가 있었다. 샤를과 레아첼의 특징이 반반씩 뒤섞인 프레이르는 때때로 심술궂은 표정을 짓곤 했으므로 누구나 인정할 만한 미남은 아니었다. 그의 주위에는 그를 능가하는 조각과도 같은 미남자들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었다. 고귀함과 기품이 넘쳐흐르는 샤를이라던가, 유부남이 된 뒤에도 여전히 살롱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포르테빌 대공, 절제된 야수와도 같은 느낌을 주는 리처드 대공, 마치 초상화에서 뛰쳐나온 귀공자 같은 알베로, 그리고 회색의 우아한 눈동자를 가진 루크. 이들이야말로 진정 레인가드에서도 제일이라 불리는 미남들이었다.

그러나 프레이르에게는 이들에게는 없는 무언가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그에게서는 어딘지 모르게 비밀스러우면서도 모순된 느낌이 풍겨 나왔다. 그리고 이것은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 번씩 더 눈길을 돌리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특히 사람들은 프레이르의 눈가와 입가에서 이러한 특징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기분에 따라서 그 특성들은 전혀 딴판으로 뒤바뀌었다.

프레이르는 기분이 언짢거나 누군가를 공격할 때마다 대단히 심술궂은 표정을 짓곤 했다. 그의 입가에는 종종 비아냥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자만심이 어린 눈웃음 걸리곤 했는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 언짢은 느낌을 주게 만들었다. 또한 프레이르의 입에 머무르는 비꼬는 듯한 미소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음산한 느낌을 주곤 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특징을 가진 외모는 또한 정반대로 대단히 호감이 가는 얼굴로 변할 수 있었다. 프레이르는 시시때때로 진심을 담아 웃음을 짓곤 했는데 그 미소는 레아첼과 마찬가지로 눈이 부실 만큼 매력적이었다. 또한 종종 거만하면서도 빈정거리는 듯한 눈길을 주는 깊고 푸른 눈동자 역시 소년다운 장난기와 부드러움이 어려 있었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다른 사람들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오늘도 프레이르는 그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샤를의 집무실에 다다랐다. 샤를의 비서관인 아이자크 경은 우호적인 미소를 지으며 프레이르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오, 왔느냐?”

무언가 글을 쓰고 있던 샤를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반갑게 프레이르를 맞이했다. 그 파란 눈에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 깊이 녹아 있었다.

어느새 40대 초반이 되었건만 샤를은 여전히 젊었을 시절의 의지력과 정열을 잃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파란 눈에서는 새 시대를 열겠다는 패기와 함께 강인한 정신력이 머무르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이제 국왕으로서의 관록과 경험이 더해져, 중년다운 중후함까지 가지게 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위엄마저 갖추게 되었다. 이 모든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기품 있는 모습에 프레이르는 고개를 숙였다.

“오래간만에 뵙게 되어 기쁩니다, 아버지.”

프레이르의 말에 샤를은 기쁘게 웃으며 프레이르에게 자리를 청했다. 그리고 그는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요즘 생활은 어떠냐? 별다른 문제는 없느냐?”

프레이르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뭐, 항상 똑같죠. 강의를 듣고, 졸업을 하기 위해 논문을 준비하고... 가끔 살롱에도 출입하고... 문제라면 에인절 대공 부인이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저를 살롱에 초대해주는 것 정도일까요?”

프레이르의 대답에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포르테빌 대공과 네가 동시에 참석한다면 살롱의 대성공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지. 나도 들었단다.”

샤를이 말하는 에인절 대공 부인이란 로딤체프 공작의 딸인 샤를로트를 의미했다. 샤를로트는 3년 전, 포르테빌 대공과 결혼식을 올려 에인절 대공 부인이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샤를과 왕비 엘리스의 결혼 이래 최대의 정략결혼으로 평가 받았는데 전 카시네예프에서 대단한 화제가 되었다.

정략결혼이었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나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바람둥이 포르테빌 대공은 장인인 로딤체프 공작에게 3년 전 크게 혼쭐이 난데다가, 그 사건의 여파로 인해서 암살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기 때문인지 그 뒤로는 몸가짐을 조심하고 있었다. 물론 ‘독버섯은 제 색깔을 못 바꾼다.’는 레인가드의 속담처럼 포르테빌은 여전히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긴 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샤를로트와 비슷한 위치인 귀부인들을 건드리지는 않고 다녔기 때문에 로딤체프 공작도 눈 감아 주고 있는 듯했다. 어차피 한 두 사람의 정부 정도는 귀족이라면 누구나 데리고 있기 마련이었기 때문이었다. 로딤체프 공작 역시 남부의 영지에 자신보다 스무 살 정도 어린 정부를 두고 있었다.

샤를로트 또한 현명하게 포르테빌을 관리하며 행복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그들 사이에는 벌써 2살 된 딸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하나 있을 정도였다.

“대공 부인을 뭐라고 할 수는 없지. 남편의 조카를 초대한다는데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느냐? 더구나 그 결혼의 주선자는 너니까 말이다. 일을 벌였으니 네가 책임을 져야지.”

샤를이 웃으며 말했다. 장난스럽게 책망하는 어조가 섞여 있긴 하지만 프레이르는 그것이 결코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요즘의 생활에 관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프레이르가 부쩍 바빠졌기 때문에 좀처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올해 카시네예프 왕립 학교를 졸업하는 프레이르는 졸업을 위해 논문을 써야했기에 상당히 분주했다. 이 논문은 카시네예프 대학의 교수들에 의해 제법 까다롭게 평가되기 때문에 매년 3할 정도가 탈락된다고 알려졌다. 아무리 왕실에 우호적인 교수들이라 할지라도 안심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프레이르는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논문은 무엇에 관하여 쓰고 있느냐?”

어느새 프레이르의 졸업에 관해 이야기하던 샤를이 프레이르에게 물었다.

“스콜라 철학을 통해 왕실의 당위성과 그 권력의 범위에 관해 기술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만만치 않네요."

프레이르의 대답에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르다운 논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졸업 논문에 왕실에 관해 기술하는 것은 왕족이 아니면 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자칫 왕실을 언짢게 만드는 글을 썼다가 국왕의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곤란한 일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왕실에 관해 장문을 쓰다보면 좋든 싫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어느 정도 내비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자칫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은 어느때나 위험한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감히 왕실에 관해 마음껏 논할 수 있는 것은 프레이르와 같은 왕족뿐이었다. 가끔 대담무쌍하면서도 야심에 차 있는 일부 학생들이 왕실에 관해 논문을 쓰곤 했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은 대체로 메피스토펠레스의 철학이나 법학, 그리고 신학에 관해 논문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 너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

샤를은 신뢰가 담긴 어조로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잠깐 동안 자신의 아들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지켜보았다. 그 눈빛에는 프레이르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어려 있었다.

잠시 후 논문에 관한 이야기를 마친 샤를이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논문은 그렇다 치고... 프레이르, 이것을 좀 보겠느냐?”

그는 잘 꾸며진 한 종이를 내밀었다. 프레이르가 들어오기 전에 필기하고 있던 그 종이었다.

프레이르는 그 것을 받아들었다. 왕실의 문장이 박힌 그 종이에는 깔끔한 글씨체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이것은 무엇인가요?”

프레이르는 고개를 갸웃하며 샤를이 넘겨준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 곳에는 레인가드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국왕 : 샤를 드 랭스 에인절

귀족의회 의장 겸 동부방면군 사령관 : 프란츠 드 케조프 레스터 공작

귀족의회 부의장 : 리처드 드 랭스 에인절 대공

재무부 고문 겸 재무 감찰관 : 쿠드 드 베른카스텔 알타미라 후작

해군대신 겸 제 1함대 사령관 : 카르도르 드 세이커 세르티프 백작

호민관 겸 국민회의 의장 : 다프 브라쇼브

남부방면군 사령관 : 카밀 드 페르탕 로딤체프 공작(부재로 인해 포르테빌 드 랭스 에인절 대공에게 위임)

대법관 : 마르커스 드 제리엘 톨리 남작

내무부 감찰관 : 설리반 드 타이번 트라바나스 백작

외무부 장관 : 올리비에 드 볼테인 가드너 자작

추기경 대표 : 프랑수아 드 에스탕 라시드 대주교

국가 마법사 위원회 대표 : <광명의 마법사> 브로츠와프

왕실 대표 :


“그것은 중추원 정기 회의의 명단이란다.”

프레이르가 서류에 적힌 이름들은 쭉 훑어보는 것을 바라보며 샤를이 대답해주었다. 프레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샤를은 단지 안부를 묻기 위해서라는 순수한 이유 오직 하나 때문에 그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쪽이 본론이었던 셈이었다.

“그런데 왜 이것을?”

한참 동안 레스터 공작과 리처드 대공의 이름에 눈길을 주던 프레이르가 샤를에게 물었다. 그러자 샤를은 로딤체프 공작의 이름이 적힌 부분을 가리켰다.

“평소 왕실 대표로 참석하던 포르테빌 대공이 이번에는 로딤체프 공작의 공석을 대신하게 되었단다. 로딤체프 공작은 현재 카시네예프에 있지 않거든. 그리고 그는 포르테빌 대공에게 자신의 자리를 위임했단다. 따라서 이번 회의에는 왕실 대표 자리가 비게 되었지.”

눈치 빠른 프레이르는 곧바로 샤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어쩐지 명단에서 왕실 대표의 이름이 공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의아했던 참이었다. 샤를은 지금 프레이르가 포르테빌 대신 왕실 대표가 되어 중추원 회의에 참석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프레이르는 씩 웃었다.

“왕실 대표라면... 엘리스 왕비님이 대신하시는 건가요?”

프레이르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러자 샤를은 빙그레 웃으며 깃펜을 꺼내들어 프레이르에게 내밀었다.

“엘리스도 괜찮겠지만 난 네가 참석해주었으면 더 좋겠구나.”

그리고 그는 프레이르의 앞 쪽으로 잉크가 담긴 병을 밀었다.

“중추원에는 내 편이 별로 없거든.”

프레이르는 곧바로 샤를의 말뜻을 이해했다. 형식적으로 중추원이란 왕실에 대한 일종의 자문 기관에 불과했다. 정식 의결기관인 의회와 국민회의와는 달리 중추원에는 실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 참여하는 귀족들은 모두 레인가드의 최고 권력자들이었기 때문에 이 회의는 사실상 자문 기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중추원 의원들은 정기적인 회의를 거쳐 왕실에 일종의 ‘권고’를 하는데 이것은 결코 간단히 무시할 수 없는 무게감을 갖고 있었다. 이 중추원 권고는 각 부의 장관 회의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으며 실질적으로 레인가드의 정책 방향을 결정하였다. 따라서 샤를은 포르테빌을 왕실 대표와 로딤체프 공작의 대리를 겸임시키는 대신에 프레이르를 끌어들여 조금이라도 우세한 상황을 확보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는 프레이르에게 이 중추원을 통해 정치 경험을 쌓게 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저에게는 조금 무리가 아닐까요? 전 겨우 17살이라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요.”

프레이르가 마음에도 없는 겸손을 떨며 발을 뺐다. 그러나 그는 이미 샤를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이런 좋은 기회를 ‘경험 부족’이라는 핑계로 걷어찰 만큼 그는 야심 없는 인물이 아니었다.

샤를 역시 이런 프레이르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잉크병을 더욱 가까이 프레이르에게 끌어당기며 강권했다.

“그렇게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단다, 프레이르. 그저 좋은 경험을 해보는 셈 치고 자리에 앉아 지켜보기만 해도 된단다.”

샤를이 은근하게 말했다. 그 말에 프레이르는 잠깐 고민하는 것처럼 턱을 두어번 쓰다듬었다. 아버지인 샤를이 고민에 잠길 때마다 수염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본뜬 듯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잠깐 동안 생각하던 프레이르는 곧 힘차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아버지. 왕실 대표로 참석할게요.”

프레이르는 이렇게 대답하며 자신있게 깃펜을 들어 듬뿍 잉크를 찍었다. 그리고 그는 멋들어진 필체로 ‘왕실 대표’ 란의 우측 공백에 ‘프레이르 드 세이비어 에인절 공작’이라는 글자를 채워 넣었다. 샤를은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중추원 회의는 언제죠?”

명단의 작성을 마친 프레이르가 샤를에게 종이를 되돌려주며 물었다. 샤를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앞으로 사흘 뒤, 오전 10시부터란다. 장소는 ‘거울의 방’이고.”

“그럼 그 때까지 이것저것 공부를 할 수 있겠네요. 다행이에요. 리처드 대공 앞에서 무식을 뽐내고 싶진 않거든요. 그 자에게 무식을 들키느니 차라리 독사를 대여섯 마리 삼키는 것이 속이 덜 쓰리겠어요.”

프레이르의 말에 샤를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처드 대공이 무식한 사람을 얼마나 경멸하는지는 익히 알려진 일이었다. 따라서 프레이르는 리처드 대공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충분한 공부가 필요했다.

그런 프레이르에게 샤를은 격려하듯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프레이르. 이번에는 나도 함께 있으니까 말이다.”

샤를의 말에 프레이르는 ‘천군만마를 얻는 느낌’이라는 것은 아마도 지금과 같은 감정을 일컫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샤를의 믿음직스러운 얼굴은 그 어떤 것보다도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만큼 샤를이란 존재의 무게감은 프레이르에게 크나큰 자신감을 불러 일으켰다.

“아버지께서 계신다면 리처드 대공에게 한 방 먹이는 것도 꿈만은 아니겠네요.”

프레이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 솔직한 말투에 샤를은 다시 한 번 껄껄 웃으며 프레이르의 단정한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그럼 사흘 뒤에 보자꾸나, 프레이르.”

샤를은 중추원 의원 명단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프레이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샤를에게 인사를 하였다.

“아, 참. 그리고...”

편지지에 명단을 접어 넣던 샤를이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프레이르를 불렀다. 프레이르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샤를을 바라보았다.

“중추원 회의에는 반드시 비서관을 한 명 대동해야 한단다. 너도 한 명 준비해 두어야 하지.”

샤를의 말에 프레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샤를이 조언했다.

“비서관은 눈치 빠르고 귀족 사회의 동향에 민감한 귀족을 고르거라. 둔하고 어리석은 비서관은 없느니만 못하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무 강력한 권력을 지닌 자를 선택해서도 안 돼. 예를 들자면 레스터 공작의 아들인 루크레스티 경이라던가, 알티미라 후작의 아들인 세자르 경은 피해야 된단다.”

“굳이 저 쪽 사람을 한 명 더 추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군요.”

프레이르의 말에 샤를은 다시 한 번 기특하다는 듯이 프레이르를 바라보았다.

“그래, 눈치 빠르지만 세력이 미약한 군소 귀족을 비서관으로 고르는 것이 현명하지. 예를 들어 나는 아이자크 경을 비서관으로 대동한단다. 아이자크 경의 뒤보아 가문은 세력이 미약한 자작 가문이거든.”

샤를이 방 한구석에 서 있는 아이자크 경을 흘낏 바라보며 말했다. 프레이르 역시 잠깐 아이자크 경에게로 눈길을 돌린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르가 자신의 말을 잘 이해했음을 안 샤를은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그럼 한 번 차근차근 생각해 보거라.”

샤를의 말에 프레이르는 자신의 지인들 중에 후보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들의 왕립 학교 친구들의 특성을 분석해가며 비서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골라내려 했다. 그리고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알베로 드 노르베르 카스티야 백작...”

프레이르는 속삭이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알베로야말로 샤를이 말했던 조건에 정확히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눈치가 빠르고, 귀족들의 동향에 밝으면서도 가문은 별 볼일 없는 알베로야 말로 비서관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생각한 프레이르는 샤를에게 자신의 선택에 관해 알려주었다.

“음... 카스티야 백작이라...”

샤를은 그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시장에 나온 상품을 평가하는 상인처럼 냉철한 눈빛을 띤 채 알베로 경이라는 인물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카스티야 백작이라면 알타미라 후작의 살롱에 속한 인물이지 않느냐?”

샤를이 조금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프레이르는 순순히 샤를의 말을 인정했다. 그러자 샤를은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한쪽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가급적이면 알타미라 후작의 살롱 사람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프레이르의 심복이 될 사람이 알타미라 후작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은 조금 걱정스러웠다.

“되도록 포르테빌 대공이나 브라쇼브 호민관의 세력권에 있는 사람으로 선택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만...”

샤를이 어딘지 개운치가 못하다는 표정으로 프레이르에게 권유했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고개를 저었다.

“알베로 경이 알타미라 후작의 살롱에 속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 알베로 경을 비서관으로 삼고 싶어요.”

프레이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갖고 있다는 듯한 어조였다. 하지만 여전히 샤를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샤를의 우려대로 카스티야 백작은 알타미라 후작 가문의 심복으로 보는 것이 타당했다. 알베로 경은 알타미라 후작의 아들인 세자르 경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의 보호자인 샤퓌르 부인은 알타미라 후작 부인의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이성적으로 볼 때, 알베로 경이 알타미라 후작의 살롱에 속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프레이르의 직감은 알베로를 비서관으로 삼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는 왠지 모르게 알베로의 진심은 알타미라 후작으로 향하고 있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프레이르는 일전에 알베로가 알타미라 후작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그 연갈색의 눈동자에 명백한 적의가 떠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더구나 알베로는 표면상으로는 알타미라 후작에 동조하지만 종종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은연중에 드러내곤 했다. 그리고 그 말들은 귀족주의보다는 왕당파의 주장에 더 가까웠다.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프레이르는 알베로의 진심은 결코 알타미라 후작에게 향해 있지 않다고 믿고 있었다.

결심이 선 프레이르는 더욱 확고한 어조로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리고 샤를은 결국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알았다, 프레이르. 넌 항상 현명한 선택을 해왔으니 이번에도 너를 믿겠다. 네 뜻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프레이르는 활기차게 웃으며 샤르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휘파람을 불며 복도로 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샤를은 심란한 표정이었다. 천성이 의심이 많은데다가 직감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그는프레이르의 휘파람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문가에 서 있는 비서관을 불렀다.

“아이자크 경.”

샤를의 부름에 아이자크 경은 샤를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비서관에게 샤를은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알베로 드 노르베르 카스티야 백작이 썼던 논문들을 중점적으로 카스티야 백작이 왕립 학교 학생 시절 썼던 글들을 모두 구해오게. 만약 교수들이 자료를 넘겨주기를 거부한다면 나 샤를이 직접 명령을 내렸다고 말하게. 그럼 그들은 분명히 자네에게 순순히 자료를 넘겨 줄거야. 아무래도 그 카스티야 백작이란 자의 머리 속을 조사해봐야겠군.”

샤를의 명령을 받은 아이자크 경은 곧바로 방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샤를이 중얼거렸다.

“카스티야 백작이라...”

그는 3년 전 프레이르로부터 카스티야 백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왕립학교의 수석학생인데다 평소의 언행을 들어보면 그는 침착하고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비범하다고 해서 비서관이 되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었다. 너무 똑똑한 비서관은 양날의 검으로서 자칫 그 주인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샤를은 카스티야 백작이라는 사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중추원 회의에 알타미라 후작의 앞잡이를 한 명 더 추가할 수야 없는 일이었다.

‘뭐, 곧 알게 되겠지.’

샤를은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깃펜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국민회의가 제출한 의결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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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4

  • 작성자
    Lv.9 Stellar
    작성일
    10.08.01 15:29
    No. 1

    정말 정신 없이 바빠서 글을 퇴고할 새도 없네요...

    나중에 전부 깔끔하게 고쳐야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은여울
    작성일
    10.08.01 17:19
    No. 2

    정말 오랜시간이 흐른듯 한 생각입니다.
    그것은 저만의 생각이겠지만... ^ ^
    오늘 글 감사드리고... 아마도 첫 댓글일지 모르니 작가님의 건필을 바라 마지 않는다는 말씀을 함께 올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1 제크
    작성일
    10.08.01 17:45
    No. 3

    아이자크경은 "프레이"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네요.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2 제르미스
    작성일
    10.08.01 18:01
    No. 4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5 우현(遇賢)
    작성일
    10.08.01 18:02
    No. 5

    저 늘 잘보고 있는거 아시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8 isoa33
    작성일
    10.08.01 19:10
    No. 6

    어째서 이런 훌륭한 글에 댓글이 안달려있나 의심스럽군요.
    여태 정주행하느라 처음으로 댓글답니다 ^^
    용서해 주시고 건필하세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8 백인대장
    작성일
    10.08.02 00:04
    No. 7

    감사히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2 스릉흔드
    작성일
    10.08.02 01:40
    No. 8

    잘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세혁
    작성일
    10.08.02 16:33
    No. 9

    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보고 싶어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15 온달장군
    작성일
    10.08.02 17:56
    No. 10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네요...ㅎ

    한가지...인구가 2000만명이면...군인수가 약 20만 ~40만 정도가 되어야 할 것같은데....숫자가 좀 적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 아우레아
    작성일
    10.08.02 21:46
    No. 11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 Stellar
    작성일
    10.08.02 23:41
    No. 12

    많은 분들의 격려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온달장군님 말씀이 맞습니다. 다만 아직 상비군에 관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시대인지라 상비군만 치면 2만 명 정도가 레인가드 전국의 군인 숫자입니다.

    다만 전쟁이 벌어지면 농민들을 군대로 동원하고 징병을 실시하기 때문에 그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마련이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7 호야선생
    작성일
    10.08.03 01:43
    No. 13

    /온달장군

    인구가 2천만이라도 산업사회가 아닌이상 20만~40의 상비군은 무리입니다.

    군대 자체가 돈먹는 괴물인지라 중세 국가중 저런게 가능했던건 송나라 정도인걸로 압니다.-전성기의 송은 약소국가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불가사의할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었던 먼치킨 국가였던지라.

    아무튼 2천만의 인구라면 농업국가로서는 한계치에 가까운 대제국이고
    이런 나라가 무리없이 유지할수 있는 상비군은2~5만정도가 적당하다 봅니다.(영주의 사병제외)

    그 이상이면 경제가 파탄납니다.
    전쟁으로 유지하는 병영국가가 아닌이상 20만명이나 군대에 묶어 두면 누가 농사를 지을 것이며 누가 경제활동을 할까요?

    10만의 상비군을 먹여살리고 훈련시키는건 산업혁명을 맞이한 근세국가나 할수 있는 일입니다.

    징집병이나 둔병과는 차원이 다른일이죠.
    그런건 100만도 소집할수 있습니다.
    장부에 적어두고 훈련시키고 전쟁나면 단기동원하면 되는 문제니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다훈
    작성일
    10.09.08 09:34
    No. 14

    다른 글에서 100만 동원하고 하는 걸 보면 공중에서 놀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10만이 몰살하고 다시 징집 보충하고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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