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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시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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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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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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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474

작성
10.08.05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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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로라시아 연대기 - 15.새로운 시작(3)

DUMMY

한편 프레이르는 복도를 지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샤를과의 접견이 예상보다 빨리 끝났기 때문에 논문에 관한 자료를 찾아볼 만한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스콜라 철학을 통해 왕실에 관해 논한다고 샤를에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스콜라 철학자는 한두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는 구체적인 자료가 필요했다.

프레이르는 도서관으로 가면서 이번에는 토마스 아르케나스의 <신정 국가론>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대 레인가드어로 기록되어 있어서 읽는데 골치를 앓겠지만 신학과 국가 권력의 관계를 신학자의 입장에서 규명하였다는 평가를 받는 책이었기 때문에 프레이르의 논문에는 이 책이 반드시 인용되어야 했다. 이 책을 빼놓고 스콜라 철학과 정치를 동시에 논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생각한 프레이르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누군가가 이미 그 책을 대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워낙 유명한 도서이기 때문에 사본이 대여섯 부 정도 있을 테지만 졸업 논문의 시기가 코 앞에 닥친 지금, 이미 모든 사람들이 빌려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텅 빈 서간을 우울하게 바라보는 상상 속의 자신을 떨쳐버리려 애쓰며 프레이르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도서관에 다다른 프레이르는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빛바랜 허름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 건물의 입구에는 <카시네예프 왕립 장서관>이라는 글자가 고대 레인가드어로 새겨져 있었다.

“여전히 우울한 건물이로군.”

프레이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처음 이 건물을 보았을 때, 프레이르는 틀림없이 이곳이 홀트 백작이 사용하는 비밀치안대의 본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고문을 당하는 죄수의 비명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은 창살 진 창문, 어두운 검은 색 벽돌로 지어져서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빠져나오지 못할 듯한 외벽, 음울한 표정을 지은 채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서관보다는 비밀치안대에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재무부는 이 도서관의 증축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70년도 더 된 이 건물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레이르는 만약 자신이 권력을 갖게 된다면 이 도서관부터 증축을 시작하겠다고 항상 마음 먹어왔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구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경비병에게 대충 답례한 프레이르는 신학에 관한 책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본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본관의 현관에 다다른 프레이르는 사서에게 신학에 관련된 도서가 있는 위치를 물었다. 텅 빈 도서관에서 꾸벅꾸벅 졸던 사서는 프레이르에게 신학서적들은 안쪽 서간에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그는 현관을 통과하여 가장 안쪽에 있는 북쪽 서간으로 향했다.

복도와 현관이 만나는 기둥을 지날 즈음, 프레이르의 귀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렇게 어둡고 칙칙한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여인들의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는 복도의 우측 끝에서부터 들려왔다.

“...양의 오라버니는 언제쯤 우리 살롱에 와 주실 거예요? 항상 초대장을 보내는데 핑계만 대시면서 통 오시지를 않으시네요.”

“죄송해요, 베아트리체 아가씨. 요즘 오빠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느라 바쁘신 모양이에요. 사실은 저도 요즘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요.”

“백작님은 이미 지나치다 싶을 만큼 배우셨잖아요. 왜 굳이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거죠? 백작님은 이미 저를 열 명 정도 합쳐놓은 것보다 더 아는 것이 많을 텐데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오빠는 저보다 훨씬 똑똑하니까요. 무언가 깊은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프레이르는 눈을 들어 기둥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서 프레이르는 한 떨기의 꽃과 같이 아름다운 두 미녀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 목소리의 주인공은 베아트리체였다. 요염하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는 자태와 여왕님과도 같은 화려한 옷차림만으로도 프레이르는 그녀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늘씬하고 맵시 있는 몸매는 최신 유행에 맞춘 의상에 완벽하다 싶을 만큼 잘 어우러져 한껏 성숙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또한 보석과 같이 빛나는 그녀의 호박빛깔의 눈동자는 어두운 도서관 내부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 같았는데 어느 정도의 거만함이 담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 뿐만 아니라 애교가 담겨 있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떤 남자라도 마음이 흔들릴 만큼 사랑스러웠다.

두 번째 영애는 에버딘임에 틀림없었다. 베아트리체의 화려한 옷차림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수수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볼품없는 그녀의 옷차림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전혀 퇴색시키지 못했다. 그녀는 알베로와 너무나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따뜻하고 부드러운 연갈색의 눈동자와 창백하면서도 발그스레하게 달아오른 뺨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보통의 카시네예프 여자와는 달리 청초하고 순진한 느낌을 주었다. 그에 더하여 그녀의 앳띤 얼굴에 떠오르는 따스한 미소는 다정다감하고 순수한 그녀의 심성을 반영하면서도 어떤 남자라도 반하게 만들 수 있을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올해로 19살이 되는 에버딘은 막 피어나기 직전의 꽃봉오리처럼 수줍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린 프레이르는 발걸음을 멈추고 목소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기둥에 등을 기대어 서서 베아트리체와 에버딘이 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프레이르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조금 더 자주 우리 살롱에 와 주라고 애기해주세요. 카스티야 백작님 같이 멋진 분이 오신다면 살롱이 훨씬 즐거워질 거예요. 아, 물론 에버딘 양도 마찬가지고요.”

베아트리체의 말에 에버딘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도저히 무리에요. 저는 사람들 앞에 서면 자꾸 긴장이 되어서...”

“지금은 잘만 이야기 하시는데요? 이렇게만 이야기하시면 돼요. 긴장하지 말고요.”

“하지만 아무래도 저는...”

“게다가...”

베아트리체의 목소리가 갑자기 장난스럽게 변했다.

“에버딘 양이 오시면 어쩌면 프레이르 전하께서도 아가씨를 위해 따라 오시지 않으시겠어요? 요즘 프레이르 전하를 에인절 대공 부인의 살롱에 빼앗겨서 저는 너무 가슴이 아프답니다. 그러니까요, 에버딘 양? 아가씨가 저를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베아트리체 아가씨!”

베아트리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에버딘이 당황한 목소리로 황급히 말을 끊었다. 프레이르는 분명히 순진한 에버딘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 손사래를 치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프레이르는 에버딘의 그 귀여운 얼굴이 달아오르는 모습을 상상하며 작게 키득거렸다.

“아~아. 프레이르 전하께서는 에버딘 양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드실까요? 혹시 알고 계시면 저한테도 일러 주시지 않을래요?”

베아트리체는 더욱 짓궂은 질문을 던지며 에버딘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에버딘에게서는 대답이 없었지만 프레이르는 분명 에버딘이 어쩔 줄 몰라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역시 에버딘에게 베아트리체는 너무 버거운 상대였다. 그 프레이르마저 꼼짝 못하게 만드는 베아트리체는 순진한 에버딘을 쥐락펴락하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더 이상 엿듣는 것은 좋은 모양새가 아닐 것이라 생각한 프레이르는 기둥에서 등을 뗐다. 그리고 그는 복도 앞으로 나와 두 사람에게 모습을 보였다.

“어머, 프레이르 전하.”

베아트리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프레이르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곳에서 갑자기 나오시다니... 깜짝 놀랐어요.”

그러나 프레이르는 베아트리체가 싱긋 웃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모습에 프레이르는 왠지 그녀가 자신이 이곳에 서서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아트리체의 아름다운 눈망울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묘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딱할 정도로 둔한 에버딘은 이곳에서 프레이르를 만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그 녀는 프레이르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프레이르는 그런 그녀에게 멋쩍게 웃어보였다. 그러자 아까의 대화를 프레이르가 들었으리라 짐작한 에버딘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였다. 그녀는 프레이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붉어진 볼을 가리기 위해 손을 올렸다. 그 바람에 그녀가 가슴에 품고 있던 책들은 요란한 소음을 일으키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두꺼운 책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보며 에버딘은 더욱 어쩔 줄을 몰라하며 프레이르와 베아트리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아... 이런...”

프레이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허리를 굽혀 책들을 주웠다. 그리고 그는 책들에 쌓인 먼지를 턴 다음 에버딘에게 넘겨주었다. 에버딘은 창피함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 책들을 받아들었다.

“음... 여행기들이네. 그런 종류의 책을 좋아하는 거야?”

프레이르가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에버딘에게 물었다. 에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전하.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어요.”

에버딘이 빌린 책은 <바르덴 항해기>와 <티르 산맥 원정에 관한 기록>이었다. 두 책 모두 여행이나 탐험에 관한 기록들이었다.

“여행기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음... 혹시 여행을 가고 싶은 거야?”

프레이르의 떠보는 말에 에버딘은 들켰다는 듯이 움찔했다. 여전히 알기 쉬운 성격이었다. 그런 에버딘을 보며 베아트리체가 대신 대답했다.

“에버딘 양은 항상 여행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오늘도 저한테 카시네예프를 떠나 바다를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말하는 베아트리체의 입가에 다시 장난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 말인데요, 전하. 언제 저희들과 함께 한 번 바다를 보러 가시는 게 어때요?”

베아트리체의 제안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에버딘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프레이르가 가타부타 말할 새도 없이 손을 내저었다.

“다, 당치도 않아요! 베아트리체 아가씨!”

에버딘이 베아트리체를 말렸다. 그러자 베아트리체는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왜 그러세요, 에버딘 양? 아까 분명히 제게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전하와 함께 간다니... 그건...”

에버딘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베아트리체는 에버딘을 놀리듯이 말했다.

“아... 혹시 프레이르 전하와 함께 가는 것이 싫은 거예요?”

베아트리체의 말에 에버딘은 다시 손을 내저었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저... 전하는 논문 때문에 바쁘시고 다른 일도 많으시고 하니까...”

에버딘이 자신 없이 웅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베아트리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전하의 논문 작업이 끝나면 에버딘 양도 불만이 없다는 뜻이네요?”

베아트리체는 집요하게 에버딘을 물고 늘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순진한 에버딘을 놀리는 것이 더없이 즐겁다는 듯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악취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프레이르는 굳이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사실 프레이르도 베아트리체와 마찬가지로 에버딘이 귀엽게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하, 하지만...”

에버딘은 여전히 곤란하다는 듯이 우물쭈물하며 프레이르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 에버딘의 표정을 살피며 베아트리체가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럼 혹시 프레이르 전하와 함께 있는 것이 쑥스러워서 그러는 건가요?”

에버딘에 관해서 훤히 꿰뚫고 있는 베아트리체였다. 에버딘이 대단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며 프레이르와 함께 여행을 가는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쑥스러워한다는 것을 그녀는 절대 모를 리 없었다. 따라서 그녀가 굳이 이렇게 에버딘을 몰아세우며 대답을 유도한 것은 순전히 에버딘을 놀리는 재미 하나를 위해서임이 틀림없었다.

정곡을 찔린 에버딘은 귀까지 새빨갛게 변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베아트리체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프레이르는 그런 에버딘이 너무나 귀엽다고 생각되었다.

에버딘의 반응을 보며 베아트리체는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게 쑥스러워하지 않아도 돼요, 카스티야 양. 정말이지 에버딘 양은 너무 부끄러움을 타신다니까.”

그리고 그녀는 에버딘에게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충고하듯이 말했다.

“카스티야 양, 어느 정도 교태를 부리는 것은 좋지만 너무 부끄러움을 타는 여자는 매력이 없어요.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에버딘 양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아니에요. 에버딘 양은 정말이지 한 나라도 뒤흔들만한 미인이니까요.”

베아트리체가 여전히 웃음기 띤 얼굴로 에버딘에게 말했다. 그러나 마지막 한마디로 인해 에버딘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모양인지 아무 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져버림을 확인한 베아트리체가 이번에는 프레이르에게 물었다.

“프레이르 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잠자코 베아트리체의 장난을 지켜보던 프레이르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베아트리체 양의 말이 옳아요.”

프레이르의 대답에 베아트리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이런 눈길이 머무른 대상은 항상 놀림감의 대상이 되곤 했기 때문에 순간 프레이르는 자신이 무언가 꼬투리를 잡힐 만한 말을 했나 되짚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베아트리체는 재빨리 프레이르를 추궁했다.

“전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 말의 어떤 부분이 옳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교태를 부리는 여자가 매력 있다는 부분인가요? 아니면 에버딘 양이 한 나라도 뒤흔들만한 미인이라는 부분인가요?”

베아트리체의 노골적인 질문에 프레이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프레이르는 곧바로 자신이 어느 쪽으로 답변하든 베아트리체가 그것을 물고 늘어지며 자신을 놀릴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당했다는 것을 알고 킬킬거리며 웃었다.

“휴, 베아트리체 양, 한 번만 봐주세요. 제가 졌어요.”

프레이르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익살맞게 베아트리체에게 사정했다. 그 반응에 베아트리체는 싱긋 웃으며 프레이르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남동생을 타이르는 누나마냥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럼 전하께서는 저희와 바닷가에 가시는 거겠죠?”

프레이르는 이 매혹적인 몸짓에 자칫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에버딘이 프레이르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오직 하나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프레이르는 꼼짝없이 베아트리체에게 당했을 것이다.

프레이르는 베아트리체의 능수능란함에 혀를 내둘렀다. 항상 베아트리체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녀는 정말이지 남자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녀의 제안은 딱히 큰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프레이르는 졌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요, 알타미라 양. 조만간 연락을 할게요.”

프레이르의 말에 베아트리체는 빙긋 웃었다.

“레스터 후작님과 레드포드 남작님도 오시는 거죠?”

“베아트리체 아가씨가 원하신다면 그 녀석들도 부르겠습니다, 공주님.”

프레이르는 익살맞게 모자를 벗어 보이며 베아트리체에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베아트리체는 천만금을 주더라도 아깝지 않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에버딘 역시 프레이르의 대답에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프레이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웃음을 짓자 프레이르는 마치 어두침침한 도서관이 밝게 빛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곳에 어쩐 일이세요?”

이윽고 장난을 그만 둔 베아트리체가 프레이르에게 물었다. 프레이르는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왔던 목적을 상기할 수 있었다.

“졸업 논문을 준비하고 있어요. 스콜라 철학에 관한 자료가 필요한데...”

프레이르의 대답에 베아트리체는 딱하다는 듯이 프레이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년 이맘 때, 제 동생 세자르가 졸업 논문을 쓰던 것이 생각나네요. 그 아이도 논문을 쓰느라 정말 고생했죠. 그 아이를 보면서 전 정말 여자로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전 논문을 안 써도 된다는 것이 <여자로 태어나서 좋은 점>이라는 명단의 열 번째 안에 든다고 확신하고 있다니까요.”

베아트리체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프레이르는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을 보며 물었다.

“그럼 세자르 경은 작년에 졸업을 했나요?”

프레이르의 물음에 베아트리체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은 작년에 세자르는 논문 심사에서 탈락했어요. 그래서 그는 올해 다시 졸업 논문을 준비하고 있어요. 지금도 저택에서 논문 주제에 관해 고심하고 있어요.”

프레이르는 베아트리체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어두운 빛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항상 여유만만하고 기품을 잃지 않는 그녀가 무언가를 걱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그 때문에 프레이르는 베아트리체가 동생인 세자르에 대해 많이 걱정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러나 천성이 긍정적인 베아트리체는 곧 어두운 기색을 지우고 밝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프레이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뭐, 올해는 통과되겠죠. 정말 많이 노력했고, 이미 경험도 있으니까요. 거기다...”

베아트리체는 에버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힘을 주어 말했다.

“올해는 에버딘 양의 오빠인 알베로 경이 도와주고 있어요. 그러니까 분명 문제없을 거예요.”

베아트리체의 이야기를 들으며 프레이르는 다시 한 번 알타미라 후작 가문에 관해 적의의 눈빛을 보이던 알베로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런 이야기를 베아트리체에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잠자코 베아트리체의 이야기에 수긍해주었다.

알베로에 관해 생각이 미친 프레이르는 이 기회에 비서관에 관한 이야기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에버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에버딘...”

프레이르가 입을 열자 에버딘은 프레이르에게로 눈을 돌렸다. 다시 침착함을 회복한 그녀는 입가에 작은 보조개를 띄우며 프레이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은 사흘 뒤에 중추원 회의가 열리는데 내가 왕실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어. 그런데 그곳에 가려면 비서관이 필요하거든?”

프레이르는 이렇게 이야기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베아트리체는 입가에 손을 모았다. 그녀는 이미 프레이르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간파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런 부분에 있어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에버딘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의아한 눈빛으로 프레이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프레이르의 뒷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런 에버딘을 위해 프레이르는 친절하게 자신이 생각한 바를 이야기해 주었다.

“난 네 오빠인 알베로를 그 비서관으로 지명하려고 해, 에버딘. 그러니까 네가 알베로에게 이 소식을 전해줬으면 좋겠어.”

에버딘은 잠시 동안 멍하니 프레이르를 바라보았다. 프레이르가 한 말의 의미를 판단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프레이르의 말뜻을 이해한 에버딘은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녀의 눈에는 경탄과 함께 감사의 마음이 떠올라 있었다. 잠시 동안 그렇게 서 있던 그녀는 답례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프레이르에게 머리를 숙였다.

“고마워요, 프레이르 전하. 오빠가 정말 기뻐할 거예요.”

“잘 됐네요, 카스티야 양.”

베아트리체 역시 환하게 웃으며 에버딘에게 말했다. 에버딘은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알베로에게 오늘이나 내일 중에 날 찾아오라고 말해 줘, 에버딘.”

프레이르는 기쁨에 젖어 있는 에버딘에게 미소를 지으며 당부했다. 에버딘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볼게, 에버딘. 알타미라 양도 안녕히 돌아가세요. 배웅해 드리지 못하는 결례를 용서해주시고요.”

프레이르가 두 사람을 배웅하지 못하는 것에 관해 사과를 하며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베아트리체는 품위 있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바쁘신 분인데 저희가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앗은 것 같네요. 저희도 이만 물러가겠어요.”

베아트리체는 우아하게 치마를 들어올렸다. 에버딘 또한 그녀를 따라 프레이르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천천히 도서관 바깥으로 사라져갔다. 그녀들의 뒤로 베아트리체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레이르는 한 동안 그녀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논문에 관한 자료를 찾기 위하여 서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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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5) +3 10.07.03 1,765 16 13쪽
43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5) +2 10.06.30 1,760 13 22쪽
42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3) +2 10.06.29 1,800 19 12쪽
41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2) +2 10.06.29 1,807 16 12쪽
40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1) +5 09.12.24 1,941 13 12쪽
39 로라시아 연대기 - 12.인명록(3) +8 09.12.22 1,989 15 19쪽
38 로라시아 연대기 - 홀트 백작의 보고서 전문 +6 09.12.22 1,967 13 5쪽
37 로라시아 연대기 - 12.인명록(2) +4 09.12.21 1,881 15 8쪽
36 로라시아 연대기 - 12.인명록(1) +6 09.12.20 1,907 17 11쪽
35 로라시아 연대기 - 11.우정의 대가(3) +9 09.12.20 1,997 14 19쪽
34 로라시아 연대기 - 11.우정의 대가(2) +4 09.12.19 1,977 14 10쪽
33 로라시아 연대기 - 11.우정의 대가(1) +6 09.12.19 2,025 15 12쪽
32 로라시아 연대기 - 10.결투의 미학(3) +3 09.12.18 2,101 17 9쪽
31 로라시아 연대기 - 10.결투의 미학(2) +7 09.12.18 2,097 17 6쪽
30 로라시아 연대기 - 10.결투의 미학(1) +5 09.12.17 2,172 14 11쪽
29 로라시아 연대기 - 결투 +3 09.12.17 2,179 1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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