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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시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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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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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5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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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29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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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로라시아 연대기 - 15.새로운 시작(1)

DUMMY

12번 계절이 바뀌고,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 3년의 세월이 지났다.

카시네예프 도심을 관통하는 엘브 강은 북서풍이 부는 여름이면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가 넘치게 된다. 북서풍을 타고 하시에르에서 내려온 상인들이 그 상품들을 엘브 강의 선착장에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거래를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카락이라던가 캐러벨과 같은 대형 상선들은 카시네예프에서 5시간 정도 떨어진 아라스의 항구에 닻을 내리지만 홀수가 얕은 작은 상선들은 엘브 강을 거슬러 올라와 카시네예프 선착장에 직접 선적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하시에르에서 넘어 오는 향신료와 비단, 찻잎 등 소량의 사치품들은 주로 카시네예프 선착장에 내려졌고, 밀이나 포도주와 같이 대량으로 거래되는 물품들은 아라스에서 선적이 이루어졌다.

엘브 강가에 존재하는 수십 개의 포구 중에서도 가장 거래가 활성화된 곳은 레미엔 상인 조합이 사용하는 제3선착장이었다. 알타미라 후작 가문이 뒤를 봐주는 것으로 알려진 레미엔 상인 조합은 하시에르와의 향신료 무역에서 50% 이상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강력한 조합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제3선착장이 하시에르와의 거래가 활발해지는 7월 즈음에 성황을 이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오, 이것은 정말이지 최고의 품질인 후추로군!”

레미엔 상인 조합 소속의 카시네예프 지부장인 에르카일이 감탄하며 말했다. 20년 동안 향신료 장사를 해온 그는 지금 하시에르 상인이 가져온 후추가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엘카일 님.”

하시에르 상인이 에르카일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며 말했다. 하시에르 인다운 혀가 짧은 발음이었다. 이러한 하시에르 사람들을 많이 상대해 온 에르카일은 딱히 불쾌해하지 않으며 말했다.

“이 정도 품질의 후추가 다섯 통. 맞습니까?”

하시에르 상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인 조합의 확인서를 내밀었다. 그 서류를 면밀히 살펴본 에르카일은 조합의 서류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말했다.

“한 통당 아라스 금화 30냥으로 어떻습니까?”

에르카일의 말에 하시에르 상인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작게 불렀다는 뜻이었다.

“최근 모리안의 해적들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습니다. 그 때문에 보험료도 천정부지로 올랐고요. 후추에 붙는 보험료가 무지막지하다는 것을 잘 아시잖습니까? 관세, 보험료, 선적료, 선적 대여료, 인건비를 생각하면 30냥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상인의 말에 에르카일은 ‘흐음’하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하시에르 상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요즘처럼 해적이 극성을 부리는 불안정한 상황에는 누구라도 바다를 건너는 것을 꺼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시에르 상인은 막대한 보험료를 내가면서까지 레인가드에 온 것이었다. 저 쪽에서 위험부담을 진만큼 주거래처인 레미엔 상인 조합 측에서도 성의를 보여줘야 했다.

“그렇다면 다섯 통 전부 해서 아라스 금화 160냥은 어떻습니까?”

다섯 통에 160냥이면 한 통당 32냥으로 올려서 쳐준 셈이었다. 그러나 하시에르 상인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워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에르카일 님. 최고급 후추입니다. 이 정도의 품질이라면 레인가드의 국왕에게 진상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이제 곧 성 토마스 축일이지 않습니까? 후추의 수요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을 저희도 뻔히 알고 있는데요. 모두 해서 190냥은 쳐주셔야 합니다.”

레인가드의 성인인 성 토마스를 기리는 성 토마스 축일에 국왕인 샤를은 분명 큰 연회를 열 것이 틀림없었다. 왕족들은 항상 통이 크게 마련이라 이 연회에 후추를 납품할 수만 있다면 레미엔 상회는 어쩌면 배로 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품질의 후추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쪽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줄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품질이 좋다고 해도 190냥은 너무 비싼 가격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전부 해서 아라스 금화 160냥에 홀스만 공방의 머스켓 총 40정을 드리겠습니다.”

에르카일이 제안했다. 향신료가 하시에르의 주력 수출 품목이었다면 레인가드의 특산품은 머스켓 총이었다. 로라시아 대륙에서 가장 화약 기술이 발달한 레인가드는 명중률이 뛰어난 머스켓 총을 만들어 내는 수십 개의 공방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최고로 쳐주는 것이 바로 홀스만 공방이었다. 레인가드의 총사대에게 국왕이 하사하는 머스켓 총이 홀스만 공방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홀스만 공방의 머스켓 총 40정을 넘겨주는 것은 상당히 후한 제안이었다.

“또다시 추수기가 되면 칼리테인의 야만족이 하시에르 북부로 침략해 오지 않겠습니까? 영지를 지키려는 영주들은 분명히 머스켓 총을 구하기 위해 안달할 것입니다.”

에르카일의 말에 하시에르에서 온 상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흐음'하는 소리를 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머스켓 총의 가치를 재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던 하시에르의 상인이 마침내 웃으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거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에르카일은 미소를 지으며 상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그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손을 맞잡았다.

“현찰로 드릴까요? 아니면 어음으로?”

에르카일이 상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질문에 상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어음으로 하겠습니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에르카일은 이렇게 말하며 품 속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그는 오직 레미엔 상인 조합원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를 서류에 끄적거린 다음 하시에르 상인에게 넘겨주었다.

“바니헤임의 우리 조합 지부에 넘기면 아라스 금화 160냥을 내줄 것입니다. 머스켓 총 40정은 내일 이곳 제3선착장에서 드리도록 하죠.”

하시에르 상인은 에르카일에게 받은 종이를 소중히 품 속에 집어 넣었다.

그가 받은 종이는 어음이라는 것으로서 상인 조합 사이에 맺은 일종의 채권이었다. 이 어음은 상인들이 해적이나 산적에 의해 금화를 빼앗기는 것을 막고, 당장 현찰이 없을 경우를 대비하여 만든 제도였다. 즉 이 경우, 레미엔 상인 조합에서 하시에르 상인에게 금화 160냥에 대한 어음을 발행해 주면, 하시에르 상인은 본국으로 돌아가 레미엔 상인 조합 지부에 가서 어음을 제출하여 금화 160냥을 받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최근 3년 전부터 에우로텐과 하시에르, 레인가드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였으며 레미엔 조합을 비롯한 대다수의 상인 조합들이 채택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레미엔 상인 조합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하시에르 상인이 꾸벅 인사를 했다. 그 인사를 받으며 에르카일이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시간이 있으시다면 저의 집으로 오셔서 저녁 식사라도 같이 하심이?”

에르카일의 초대에 상인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대답했다.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에르카일은 고개를 끄덕인 후 휘파람을 불었다. 뒤에 서 있던 짐꾼들에게 후추를 실어 나르라는 신호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짐꾼들은 배에 다가가 후추가 든 통을 들어올렸다.

“조심해! 그걸 강에 빠뜨린다면 갤리선에서 10년은 썩어야 할 거다!”

에르카일이 잡담을 하며 킬킬거리는 짐꾼에게 매섭게 주의를 주었다. 저런 귀중품을 들고 히히덕거리는 모습에 불안해졌기 때문이었다. 에르카일의 무서운 반응에 짐꾼은 입을 다물고 조심스럽게 후추를 꺼내 짐마차에 실었다.

“그럼 이 쪽으로 오십시오.”

에르카일은 상인에게 정중히 팔을 펴며 길을 안내했다. 하시에르 상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에르카일을 따라갔다.

그들은 시끌벅적한 포구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짐꾼들은 ‘어영차’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짐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고, 천칭과 저울을 들고 있는 상인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쳤다. 교역소의 도제들은 곳곳에서 상인들과 가격을 흥정을 벌이고 있었는데 어느 쪽이든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하시에르의 상인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 속에는 하루가 다르게 번창하는 레인가드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질시가 담겨 있었다.

“요즘 하시에르는 어떻습니까?”

상인의 표정을 읽지 못한 에르카일이 물었다. 그러자 하시에르에서 온 상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라 꼴이 엉망입니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남쪽에서는 모리안의 군대가 대대적으로 징병을 실시하면서 전쟁이 발발하기 일보 직전입니다. 북쪽에서는 칼리테인의 기병대가 벌써부터 티베르 강의 물로 그 목을 축이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고요. 그 숫자가 말을 타는 장정만 하더라도 자그마치 2천 명이라는군요.”

하시에르 상인은 진저리를 치며 우울하게 말했다. 그 말에 에르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리안이 최근 다시 하시에르를 침략하려 한다는 소식은 그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왕실이고 귀족들이고 사치품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는 모양입니다. 죽을 고생을 해서 후추를 들여와도 소비해 줄만한 시장이 없어요. 영주들은 기사들을 소집하느라 하루가 다르게 주머니가 가벼워 지고 있고, 왕실도 산더미처럼 불어난 빚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원래 저 후추도 왕실에 납품하려던 것이었지만 왕실에서 대금을 지불할 여력이 없어서 거래가 취소되었죠.”

하시에르 상인은 힘없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에르카일은 무의식 중에 혀를 찼다. 그러나 그것은 레인가드의 동맹국인 하시에르의 정세가 불안정해졌다는 소식에 가슴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단지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를 이끌어올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생각에서였다.

상인의 말대로 하시에르 왕실이 그 정도로 피폐해져서 향신료를 소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하시에르 상인들의 시장은 오직 레인가드만이 남은 셈이었다. 니블헤임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에우로텐 역시 하시에르와 피장파장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르카일은 이 점을 이용했으면 좀 더 싸게 가격을 후려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쉬워하고 있었다. 간만에 보는 최고급 향신료에 욕심을 부리느라 더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에 하시에르에서 다른 상인이 온다면 좀 더 가격을 낮게 부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에르카일이 이렇게 지극히 상인적인 생각을 하며 손익을 계산하는 동안에도 하시에르 상인은 주저리주저리 자국의 우울한 상황에 관해 떠들어댔다. 기나긴 항해 동안 제대로 된 말동무가 없어서 입이 근질거렸던 모양인지 그는 묻지도 않은 사실까지 떠벌리고 있었다.

“... 전쟁의 위험 때문에 밀이나 보리 같은 곡물은 벌써 두 배 가까이 가격이 폭등하고 있는 반면에 향신료와 홍차 값은 바닥까지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하시에르에서 저 후추를 팔았다면 분명 손해를 봤을 겁니다. 우리 같은 향신료 상인들은 참으로 죽을 맛이죠.”

“그것 참 곤란한 일이군요. 후추 값이 폭락하다니... 과연 어려움이 많겠습니다.”

에르카일은 하시에르 상인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상인은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하시에르의 불안한 정세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조합에서는 차라리 이 참에 향신료 따위는 때려치우고 총포류를 취급할까 고민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상인의 말에 에르카일은 귀가 번쩍 뜨였다. 향신료를 때려치운다는 것이 그의 귀에는 향신료를 처분한다는 이야기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향신료의 재고가 아직도 많이 남았나요?”

에르카일이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아직 한 몫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하시에르 상인은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렇고말고요. 사치품을 소비해 줄 왕실이 빚더미에 올랐으니 재고가 쌓일 수밖에요. 후추는 물론 비단, 홍차 등 온갖 사치품이 창고에서 그대로 썩고 있습니다. 애석한 일이지요.”

상인의 말에 에르카일은 벌써부터 입 안에 군침이 도는 것 같았다. 향신료를 처분해 줄만한 시장은 레인가드 밖에 없었다. 그리고 향신료 시장을 휘어잡고 있는 것은 자신들 레미엔 상인 조합이었다. 하시에르의 불안한 정세를 잘만 이용한다면 막대한 금화를 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알타미라 후작님께 말씀드려야겠군.’

에르카일은 하시에르의 시장에서 쏟아져 나올 향신료의 매물을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창고에 쌓여 있는 하시에르의 향신료를 레미엔 상인 조합이 독점하기 위해서는 알타미라 후작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에르카일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하시에르 상인은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며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에르카일은 그 이야기를 유심히 귀담아 들으며 행여 또다른 솔깃한 정보가 나오지 않을까 상인의 입을 예의주시했다.

그 때,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던 하시에르 상인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한 곳을 바라보았다. 상인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던 에르카일은 상인이 말을 멈추자 조금 당황했다. 그래서 그는 상인의 눈길이 머무르는 곳으로 재빨리 눈을 돌렸다. 그 곳에서 그는 바람이 부는 강가를 배경으로 힘차게 말을 달리고 있는 한 기수를 발견하였다.

그 기수는 강 위에 세워놓은 허름한 널빤지 다리 위로 하얀 말을 몰고 있었다.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놀리는 솜씨로 봐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승마를 배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마치 곡예를 펼치는 듯이 말을 펄쩍 뛰게 만들어 포구 위로 올라갔다. 이 위태로운 뜀박질에 백마는 당장이라도 발을 헛디뎌 강가로 떨어질 것만 같이 포구 위에서 비틀거렸다. 그러나 기수는 대담무쌍하게 말을 조종하며 교묘하게 위험한 자리를 피한 뒤 곧바로 말에 박차를 가하며 포구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포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기수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하시에르 상인과 에르카일도 마찬가지였다. 기수는 당장이라도 강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만 같이 위태위태한 동작을 거듭 하면서 말을 포구 위로 달리게 했다. 포구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을 피해 옆으로 펄쩍 뛰어야 했다.

대담하면서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이 기수는 이런 위험한 상황을 즐기는 듯 포구의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순간까지 말의 고삐를 풀어주었다 낚아채기를 반복했다. 말에 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무모한 행위에 기겁을 했을 테지만 기수는 그런 위험 대신 사람들의 탄성과 승마의 스릴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말을 모는 그의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이윽고 포구의 반대편에 다다른 기수는 다시 말을 건너뛰게 만들어 선착장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그리고 그는 말을 돌려 자신이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보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선착장의 서편 입구를 향해 외쳤다.

“어이, 아르넷! 지옥까지 날 따라와서 다리를 분질러주겠다는 그 배짱은 어디로 갔냐?”

사람들은 기수가 소리를 지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검은 색의 말을 탄 채 씩씩거리는 얼굴로 이를 갈고 있는 한 건장한 소년이 있었다.

“너 거기 그대로 있어! 이번에야말로 네 놈을 박살내 버릴테니!”

“킬킬킬. 관둬, 아르넷. 네 승마 실력은 내가 더 잘 알아. 이 구정물을 마시고 싶지 않다면 이쪽으로 오는 것은 포기하고 저쪽으로 돌아오는 것이 어때?”

먼젓번의 기수는 아르넷을 비웃으며 모욕적인 손짓을 했다. 그 도발에 아르넷이라는 소년은 이를 부득 갈며 고삐를 늦추었다. 그리고 그는 처음의 기수와 마찬가지로 있는 힘껏 말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어어! 아르넷! 잠깐 기다려!”

아르넷이라는 소년의 뒤를 따라오고 있던 또댜른 소년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회색의 눈동자를 가진 잘생긴 소년이었다. 그 역시 말을 타고 있었지만 그는 처음의 기수나 아르넷과 같이 무모하게 말을 모는 성격은 아닌 듯했다. 그는 아르넷과 달리 선착장의 앞에서 말을 멈춘 후 한숨을 내쉬더니 안전한 강가의 길을 따라 처음의 기수가 있는 곳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한편 아르넷은 과감하게 말을 몰며 좁다란 널빤지 위로 달려갔다. 첫 번째 기수와 마찬가지로 아르넷은 뛰어난 승마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람한 근육이 붙은 팔로 능숙하게 고삐를 당겼다 놓았다 하며 엘브 강 위에 놓인 널빤지 다리 위로 말을 몰았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탄성을 내질렀다.

가장 위험한 T자 다리를 지난 뒤 아르넷은 자신을 놀린 기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르넷을 도발했던 소년은 말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여차하면 자리를 피해 다시 달아나려는 속셈이었다.

“이 자식! 거기 서어어.... 어어어! 엇!”

기세 좋게 소리를 지르던 아르넷의 입에서 괴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아르넷이 탄 검은 말이 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기우뚱했다. 사람들은 아르넷이 탄 말의 왼쪽 다리가 어느 새 다리 아래로 쏙 빠져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허술하게 지어져 있던 포구의 왼쪽 바닥이 끝내 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아르넷의 말은 한 발이 다리 아래로 빠지면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말은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오른쪽 다리와 함께 기다란 목을 힘껏 치켜들었다. 오른쪽 종아리 근육에 무리가 가는 동작이었지만 그 덕분에 검은 말은 간신히 물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르넷은 전속력으로 달리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말 안장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버렸다. 말에서 떨어진 아르넷은 마치 곡예사처럼 공중에서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돌더니 참으로 볼품없는 모습으로 엘브 강에 머리를 쳐 박으며 수면 아래로 깊숙이 가라앉고 말았다.

잠시 후 아르넷은 어푸어푸하며 물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는 갖가지 채소와 과일 찌꺼기들이 들러붙은 채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처음의 기수는 배꼽을 잡으며 웃어댔다. 그는 말 위에서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듯이 몸을 들썩거리며 박장대소했다. 아르넷이 물에 빠지는 광경을 지켜본 선착장의 사람들 역시 그 기수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한 순간에 웃음거리가 된 아르넷은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하여 기수에게 무언가 욕설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 때마다 더러운 구정물이 아르넷의 입 속으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에 신랄한 욕설 대신 ‘꼬르륵’ 거리는 끔찍한 소리만이 아르넷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백마를 탄 기수는 그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더욱 즐겁다는 듯이 깔깔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허우적거리던 아르넷은 겨우겨우 포구의 난간을 붙잡고 선착장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 때서야 선착장에 도착한 회색 눈동자의 소년은 황급히 아르넷에게 달려와 그 등을 두드려주었다. 아르넷은 구역질을 해대며 배 속 깊숙한 곳까지 쏟아져 들어갔던 구정물을 토해냈다. 그렇게 한동안 검은 색의 더러운 물을 쏟아낸 아르넷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진짜로 죽여 버릴 거야, 이 자식.”

아르넷의 말에 첫 번째 기수는 혀를 날름 내밀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너 혼자 강에 빠진 거잖아. 재수가 옴 붙은 너 자신을 탓해야지.”

“프레이르, 그만해.”

아르넷을 두드려주던 소년이 아르넷을 놀리는 기수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프레이르라는 기수는 그런 주의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만할 것도 말 것도 없어. 아르넷은 괜히 나를 미워한단 말이야.”

프레이르는 마치 아르넷에게 잘못이 있다는 듯이 항변했다. 그러나 아르넷은 그런 프레이르의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기랄! 괜히 미워한다고?"

아르넷이 꽥 소리를 질렀다.

“네 놈 자식이 우리 집 정원을 온통 흙발로 짓밟아서 엉망으로 만들었잖아!”

아르넷이 입에서 당장 불이라도 뿜을 듯이 외쳤다.

“그리고 대단히 고맙게도 네 놈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내가 정원을 망쳐 놓았다고 거짓말을 해 주었지. 그 바람에 난 영문도 모르고 죽지 않는가 싶을 만큼 얻어맞았어. 16살 때 아버지가 국왕 폐하께 하사 받았다는 보검을 잃어버려서 얻어맞은 이후로 이렇게 얻어터진 적은 처음이야.”

아르넷의 분노에 찬 말에 프레이르는 그제서야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이마를 탁 쳤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머리를 쓱 뒤로 넘기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깜박 잊고 말하지 않았는데 그 때 그 보검을 잃어버렸던 것은 나야. 아니, 그 표현은 정확하지 않은 건가? 그 검을 부러뜨렸던 것이 나야.”

“그것도 너였냐!”

아르넷이 분개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증오심에 불타는 표정으로 프레이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제 17살이 된 프레이르는 결코 아르넷의 눈 먼 주먹에 쉽사리 얻어 맞을만큼 녹록하지 않았다.

“와! 하하하! 미안해, 아르넷! 원래는 그대로 고쳐서 갖다 놓으려고 했는데 마틴 경이 너무 빨리 발견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프레이르는 얼른 아르넷을 피하며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아르넷을 진정시키기는커녕 화만 돋우었다.

아르넷이 다시 식인귀와 같은 모습으로 프레이르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이번에는 루크가 아르넷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는 아르넷의 두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야, 아르넷, 그만 둬. 어차피 다 끝난 일이야. 일단은 의사한테 가보자.”

“이거 놔, 루크! 진짜로 죽여 버릴 거야, 저 자식.”

아르넷은 루크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자 루크는 두 팔을 더욱 단단히 죄며 아르넷의 어깨를 족쇄처럼 옭아맸다. 황소와도 같은 아르넷을 붙잡으며 그가 다급히 외쳤다.

“먼저 가, 프레이르. 난 아르넷을 의사한테 보인 다음 뒤따라갈게.”

루크의 말에 프레이르는 빙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는 재빨리 말을 몰며 아르넷으로부터 달아나버렸다. 그 뒤를 향해 아르넷은 분노에 찬 함성을 지르며 주먹을 휘둘러대다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르넷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한편 아르넷의 이러한 반응과는 정반대로, 선착장에 서서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멀어지는 프레이르를 향해 휘파람과 함께 환성을 질러댔다. 그들은 프레이르가 자신들의 앞을 지나가자 상자를 두드리고, 휘파람을 불면서 즐거워했다. 프레이르는 그 모습에 씩 웃어 보이며 카뮈로 왕궁으로 말을 몰았다.

이 떠들썩한 모습을 보던 하시에르 상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에르카일에게 물었다.

“도대체 저 소년은 누구입니까?”

에르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치 10년은 더 늙은 듯한 목소리로 에르카일이 말했다.

“방금 지나간 분이 바로 국왕 폐하의 장남이신 프레이르 왕자 전하십니다.”

에르카일의 말에 상인은 깜짝 놀란 얼굴로 이제는 멀리 도망가서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런데 왕자님이 도대체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상인의 물음에 에르카일은 다시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보면 모르십니까? 노는 겁니다. 종종 이곳에서 승마를 하시곤 합니다.”

그는 상인에게 간단히 대답한 다음, 여전히 환호를 보내고 있는 일꾼들에게 호통을 쳤다. 서슬 퍼런 에르카일의 명령에 일손을 놓은 채 놀고 있던 짐꾼들은 투덜거리며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왕자님이 저렇게 행동해도 되는 겁니까?”

하시에르 상인이 여전히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에르카일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누가 감히 왕자 전하를 말리겠습니까? 딱히 크게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국왕 폐하께서도 이 정도의 장난은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 하지만...”

하시에르 상인이 당황하며 말했다. 그는 하시에르의 왕자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왕족이라면 점잔을 빼며 성스러운 이야기를 주고받는 인간이라고 상상해 왔던 그에게 프레이르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저 소년은 왕자입니다. 저렇게 천박하게 행동해도 되는 겁니까?”

상인은 이렇게 말하며 자칫 자신이 타국의 왕자에 대해 무례를 저지르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에르카일은 상인의 말에 기분이 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쩌면 말입니다.”

에르카일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변했다.

“어쩌면 프레이르 전하께서는 일부러 저러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에르카일의 말에 하시에르 상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에르카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 상인을 보며 에르카일이 덧붙였다.

“사람들이란 모름지기 멋진 서커스에 열광하는 법이니까요.”

하시에르 상인은 그제서야 에르카일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선착장의 일꾼들이 프레이르가 자신들의 일을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열광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분명 진심으로 그들의 왕자를 연호하고 있었고 또한 사랑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저 한 나라의 왕실에 대해 국민들이 느끼는 애정과는 달랐다. 그들은 프레이르라는 소년 그 자체에 대해 애정을 품고 있었다.

하시에르 상인은 정말 에르카일의 말대로 프레이르라는 왕자가 어쩌면 이것을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레이르가 일꾼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씩 웃어보이던 모습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는 프레이르의 그 미소가 단순한 즐거움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상인의 얼굴에 경탄의 빛이 떠오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에르카일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상인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저의 집은 이쪽입니다. 함께 가시죠.”

에르카일의 말에 상인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멋쩍게 웃어 보이며 에르카일의 뒤를 따라갔다. 하시에르의 상인을 데려가며 에르카일은 향신료의 재고에 관해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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