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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시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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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조회수 :
272,697
추천수 :
2,587
글자수 :
788,474

작성
10.06.30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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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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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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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5)

DUMMY

무도회가 3일째에 접어드는 날, 영광의 홀에서는 가면 무도회가 열렸다. 형형색색의 가면들로 얼굴을 가린 손님들은 저마다 떠들썩하게 웃으며 춤을 추었다. 프레이르는 마검사 키르케의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것을 본 루크는 ‘확실히 넌 공주를 구하는 기사보다는 악당 쪽이 어울려.’라며 놀려댔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루크의 무엄한 말에도 단지 킬킬거리며 웃을 뿐 딱히 부정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 대신 프레이르는 ‘베아트리체 양 같은 미녀를 빼앗으려면 최소한 키르케 정도의 힘은 가져야 되지 않겠어?’라며 넉살 좋게 떠들어댔다.

베아트리체는 이러한 프레이르의 모습을 보며 이질감을 느꼈다. 일반적인 어린 아이들은 악당보다는 정의의 기사를 선호하기 마련인데 프레이르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강력한 힘을 가진 키르케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 나이 또래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특히 프레이르는 마검사 가면을 선택한 것에 일말의 후회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여겨졌다.

‘정말 독특한 아이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가 하면 무서울 정도로 조숙한 면도 가지고 있어.’

그녀는 프레이르가 알타미라 살롱에서 보스웰 자작에게 내뱉었던 독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아이가 그런 날카로운 풍자를 내놓았으리라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의 프레이르는 그저 흥겨운 무도회에 도취된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베아트리체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아이에 관해 고심하며 앞으로 조금 더 프레이르를 자세히 관찰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베아트리체가 프레이르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프레이르 본인은 별다른 자각 없이 아르넷, 루크와 함께 잡담을 하고 있었다. 가면 무도회에서 베아트리체와 질릴 만큼 춤을 추었던 프레이르는, 프레이르 이상으로 춤에 소질이 없는 아르넷을 루크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끌고 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프레이르가 부르기 전, 아르넷은 로네이 백작가문의 둘째 딸인 마르그리트를 파트너로 두고 있었는데 그녀의 찡그린 표정으로 볼 때 스텝이 뒤엉켜 발을 몇 번 밟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루크는 마르그리트가 불쌍하다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발을 밟힌 그 자그마한 여자아이보다 실수를 거듭하며 진땀을 빼고 있는 아르넷이 더 딱해보였다. 그래서 그는 마치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아르넷을 그와 루크가 앉아 있는 자리로 불러 냈다. 아르넷은 겉으로는 방해가 귀찮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내심 곤경에서 빠져나온 것에 안도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그런 아르넷에게 프레이르가 말했다.

“가면 무도회는 정말 멋진데. 난 이런 광경은 처음 봤어.”

프레이르의 감탄에 아르넷이 거만하게 대답했다.

“촌뜨기 같으니. 난 여러 번 다녀봤어. 이렇게 즐거운 것도 오래간만인데. 하지만 이번이 확실히 근사하긴 해.”

아르넷이 허세를 부리며 우쭐거렸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프레이르는 방금 전까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딱하게 서 있었던 아르넷을 떠올리며 간단히 대꾸했다.

“응, 맞아. 가면 무도회는 근사해.”

그리고 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무엇보다도 근사한 점은 아르넷의 못생긴 얼굴을 마르그리트가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아쉬운 점은 아르넷의 얼굴에 비해 가면이 너무 작다는 것이고.”

신랄한 빈정거림이었지만 친구 사이의 우정을 위해서 프레이르는 아르넷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루크에게만 속삭였다. 루크는 프레이르의 말에 배꼽을 쥐며 웃다가 아르넷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자 재빨리 파트너인 로잔느에게 말을 거는 척하며 시선을 외면했다.

“전하, 여기 계셨군요.”

누군가가 프레이르를 향해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프레이르는 아르넷에게서 눈을 돌려 훤칠한 키의 한 사내를 쳐다보았다.

“아, 포르테빌 대공. 오랜만이네요.”

프레이르가 씩 웃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대뜸 포르테빌을 껴안았다. 너무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반가움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르테빌은 막 춤을 추고 왔는지 몸이 대단히 달아올라 있었다.

“춤을 추고 오셨나 봐요.”

“아, 네. 그렇습니다, 전하. 로딤체프 공작부인과 함께,”

포르테빌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슨 춤곡을 추셨길래 땀이 이렇게 많이 나신 거죠? 몸이 대단히 뜨거워요.”

프레이르가 궁금하다는 듯이 포르테빌에게 물었다. 그러자 포르테빌은 눈에 띄게 당황해하며 헛기침을 했다.

"아, 별 건 아닙니다."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프레이르의 옆에 앉아 있던 베아트리체가 입을 막으며 작게 쿡쿡하고 웃었다. 대공이 저렇게 당황하는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까 포르테빌 대공이 로딤체프 부인과 한쪽 방에서 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었다. 바람둥이에 난봉꾼으로 소문난 포르테빌 대공이 공작 부인과 어두운 방에서 무슨 짓을 했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녀는 곤경에 빠진 포르테빌 대공을 도와주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

“포르테빌 대공 각하와 로딤체프 공작부인 모두 춤의 달인들이시니까요. 굉장히 열정적인 춤곡을 추셨을 거에요. 그렇죠, 포르테빌 대공님?”

“아... 하하, 베아트리체 양에게는 못 당해내겠군요. 그렇습니다.”

베아트리체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포르테빌에게 말하자 모든 것을 간파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포르테빌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무리 조숙하다지만 그는 이런 부분에서는 여전히 어린아이였기 때문이었다. 더욱 호기심이 생긴 그가 다시 포르테빌에게 물었다.

“열정적인 춤곡이요? 무슨 춤곡이요?”

베아트리체는 ‘쉿’하는 표정을 지으며 프레이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리고 그녀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프레이르 전하도 금방 아시게 될 거에요.”

프레이르는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베아트리체의 태도가 불만족스러웠지만 포르테빌이 원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다가 베아트리체가 계속 그만 물어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삼촌을 추궁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프레이르의 추궁이 대충 마무리 지어진 것을 확인한 포르테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제가 전하께 온 것은 소개시켜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입니다.”

포르테빌은 행여 다시 프레이르가 ‘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까 두려워하며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러자 포르테빌의 훤칠한 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두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상당히 큰 키의 사내아이였는데 비록 가면으로 눈가를 가리고 있었지만 날렵한 턱선으로 짐작해보건대 대단한 미남으로 추정되었다. 다른 한 아이는 가냘프게 느껴질 정도로 작은 여자아이였는데 이 자리가 불편한 듯 쭈뼛쭈뼛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녀 역시 나비 문양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상당히 귀여운 아이일 것이라 프레이르는 생각했다.

“이 아이들은 누구죠?”

프레이르가 대공에게 물었다. 그러나 포르테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프레이르에게 눈을 찡긋했다. 잠시 동안 포르테빌의 윙크의 의미를 고민한 프레이르는 곧 그 윙크의 의미를 눈치 챘다. 깜짝 놀란 그는 다시 여자아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여자아이는 여전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수줍은 듯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프레이르는 삼촌이 자신을 위해 큰 호의를 베풀어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프레이르가 상황을 파악한 것을 안 포르테빌 대공이 입을 열었다.

“궁성에 처음 온 아이들입니다. 제 절친한 친구의 자녀들인데 이번 무도회에 초대받았지만 이제 막 카시네예프에 도착한 터라 파트너가 없어서 곤란을 겪고 있던 참입니다. 송구스럽지만 프레이르 전하와 베아트리체 아가씨께서 두 아이들에게 잠시만 파트너가 되어주시는 영광을 베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프레이르는 베아트리체를 바라보았다. 베아트리체는 수락의 뜻으로 생긋 웃어보였다. 프레이르는 뛸 듯이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파트너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베아트리체 역시 새로 온 남자아이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곧 포르테빌이 데려온 남자아이는 베아트리체의 손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에스코트해갔다. 그들의 모습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프레이르는 활짝 웃으며 여자 아이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자, 에버딘. 이쪽으로 가자.”

프레이르가 활기찬 목소리로 여자아이를 이끌고 홀의 중앙으로 향했다. 프레이르는 에버딘이 손을 떨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상대로 그 녀는 단단히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약하고 소극적인 그녀에게 이런 무도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작은 손으로부터 떨림이 느껴지자 프레이르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떨지 않아도 돼, 에버딘. 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되는거야.”

“네... 전하...”

에버딘이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프레이르의 격려에도 에버딘은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했다. 에버딘은 처음 5분 정도는 나름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박자를 잘 따라와주었다. 그러나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고, 사람들이 이쪽을 주목하게 되면서 에버딘은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냉정함을 잃어버렸고 곧바로 두 사람이 추는 춤은 엉망으로 변해버렸다.

춤이란 본래 온 몸을 리듬에 맡긴 채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춰 부드럽고 유연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온 몸이 경직된 상태에서 모든 춤곡 가운데서도 가장 고난이도로 알려진 레인가드의 미뉴에트에 맞추어 추려다 보니 스텝이 순식간에 뒤엉켜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프레이르가 잘 주도해주면 이 위기 상황을 잘 넘겼을테지만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프레이르의 춤 솜씨는 아르넷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에버딘 역시 춤에 그다지 소질이 없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미뉴에트는 3/4박자의 춤곡에서 어느새 4/4박자로 바뀌어 버렸다.

‘곤란한데...’

프레이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베아트리체가 주도해주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미뉴에트는 결코 쉬운 곡이 아니었다. 그나마 에버딘이 박자라도 맞춰 준다면 프레이르는 배운 스텝을 이용해볼 수 있었겠지만 새하얗게 질려버린 그녀는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이대로는 곤란하다고 여긴 프레이르는 다시 한 번 에버딘을 타이르며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 했다. 그러나 에버딘은 여전히 몸에서 힘을 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뺨은 상기되어 있었고, 스텝은 프레이르를 따라오지 못했다.

결국 프레이르와 에버딘의 최악의 미뉴에트는 곧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더구나 모두들 키르케 가면의 주인공이 프레이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프레이르와 에버딘을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에버딘은 더욱 낙담하게 되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마치 자기 자신이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며 이리저리 프레이르를 따라다니기만 했다.

이런 에버딘의 모습을 보며 몇몇 사람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홀의 중앙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꽤나 우스운 모양이었다. 그나마 웃기만 하면 다행이었는데 몇몇 영애들은 노골적으로 경멸적인 눈빛을 보내며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감히 프레이르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그 파트너인 에버딘에 관해서는 ‘백치’니 ‘시골뜨기’니 하는 말을 서슴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이건 정말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프레이르에게 있어서 이토록 긴 곡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에버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녀는 부끄러움과 민망함으로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직전이었다. 두 사람의 스텝은 더더욱 흐트러졌고, 박자조차 맞추기 힘들어졌다. 더 이상 춤을 진행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프레이르는 결국 에버딘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홀 바깥으로 나가고 말았다. 더없이 민망하고 창피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 춤을 마치려하다가는 그 전에 에버딘이 먼저 쓰러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홀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그들의 뒤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흑흑흑...”

에버딘은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홀 밖으로 뛰쳐나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녀는 계속 울었다. 16살의 소녀에게 지금과 같은 경험은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일찍 철이 들었고 항상 자신감으로 차 있는 프레이르에게 이 정도의 망신은 속이 쓰리기는 하지만 하루이틀 정도 지나면 아르넷과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베로의 아래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로 자라온 에버딘에게 이 경험은 큰 상처로 다가왔다.

프레이르는 울고 있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가만히 에버딘의 등을 토닥여주고만 있었다. 언젠가 울고 있는 메르센을 코라가 이렇게 해주었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여자아이를 달래야하는지 모르는 그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평소라면 프레이르의 이런 행동에 에버딘은 얼굴이 새빨개져 달아났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마치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강아지마냥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만 했다.

그들은 그렇게 계속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우울한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궁성 곳곳에서 떠들썩한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선 불꽃놀이가 시작되었고, 호수 위에 띄워놓은 보트 위에서 악기들이 연주되었으며, 땅에서는 수많은 귀족들이 우아한 몸짓으로 춤을 추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원의 한쪽 구석에서 마치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처럼 쓸쓸한 모습으로 무도회에서 비켜나 있었다.

프레이르는 에버딘을 토닥거리는 것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그녀의 가면을 벗겼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에버딘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프레이르의 손이 에버딘의 부드러운 얼굴에 닿자 그녀는 황급히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그리고 그 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전하. 정말 죄송해요.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정말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괜찮아. 덕분에 이렇게 단 둘이 이야기할 시간도 생겼잖아.”

프레이르는 에버딘이 다시 울지 않도록 말을 골라가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녀를 위로했다. 이 작은 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사실 이 것은 어느 정도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 귀여운 아이와 단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버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히 그녀는 훌쩍이고 있었다.

“정말 죄송해요, 전하. 전 춤도 못 추고... 훌쩍. 조금만 무서워져도 울고 마는 울보라... 정말 죄송해요. 훌쩍. 저 같은 건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에버딘은 연신 죄송해요를 말하며 프레이르에게 사과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프레이르는 가슴 한 구석이 찌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힘든 시간을 보낸 그녀가 또다시 상처를 입고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파왔기 때문이었다. 프레이르는 에버딘이 가엾다고 생각했다. 또한 자신이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프레이르에게 있어서 이런 감정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다른 누군가를 동정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있어서 타인이란 존재는 어디까지나 타인일 뿐이었다. 타인의 감정이나 인생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몫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에버딘은 달랐다. 그는 왠지 모르게 에버딘의 감정에 자신이 이입되는 것 같았다. 또한 그는 자신이 에버딘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녀를 지키는 것이 그의 숙명인 것처럼.

갑자기 감정이 북받친 프레이르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말하지 마!”

훌쩍이던 에버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프레이르를 쳐다보았다. 프레이르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외치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아냐! 넌 꼭 왔어야 돼. 왜냐하면 네가 와서 내가 기뻤으니까. 네가 이곳에 왔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날 만나러 왔다고 했을 때 말이야. 정말이지 널 데려온 포르테빌 대공을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였어!”

평소의 프레이르답지 않게 횡설수설한 말이었다. 프레이르조차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의 감정이 무척 격해져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프레이르의 말에 에버딘은 깜짝 놀란 듯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전하...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전 오지 않았어야 했어요."

"아니라니까! 에버딘 네가 와서 정말 기뻐. 이건 진심이야. 네가 와서 정말 기뻐."

프레이르는 재차 기쁘다는 것을 강조하며 에버딘에게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에버딘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기, 기... 뻤다고요? 저 같은 것을 만나서요?”

프레이르는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지만... 저는... 전하께서 기뻐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에버딘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이런 반응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항상 또래 영애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시골뜨기 취급을 당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는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마치 에버딘을 향해 확신을 주도록 노력하는 것처럼.

"에버딘 너와 이야기 할 수 있어서 기뻐. 에버딘 너의 예쁜 눈을 볼 수 있어서도 기뻐. 네 따뜻한 손을 잡을 수 있어서도 기쁘고, 네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어서도 기뻐. 그리고 에버딘 너라서 그냥 기뻐."

프레이르의 말에 에버딘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틈으 놓치지 않고 프레이르가 다시 말했다.

"이래도 내가 기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어?"

에버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하지만 지금의 반응은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프레이르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있었던 어두운 기색이 아까보다 한결 줄어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하."

에버딘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훨씬 안정되어 있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물론이야."

프레이르는 기쁘게 말했다. 그러자 에버딘은 잠시 망설이는 듯이 머뭇머뭇 거리다가 이윽고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왜 이렇게 저한테 잘 해주시는 거에요?"

에버딘의 질문에 프레이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에버딘에게 이렇게 신경 쓰는 이유를 그 자신도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가지 마음에 짚이는 구석이 있긴 했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기에는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재빨리 대답을 얼버무렸다.

"글쎄... 왜일까?"

프레이르는 딴청을 피우며 에버딘의 눈을 피했다. 그러자 한동안 입을 모으고 프레이르를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프레이르도 그만 웃고 말았다.

"휴, 정말 바보구나, 너는."

프레이르가 책망하듯 에버딘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장난스럽게 에버딘의 얼굴를 꼬집고 있었다.

"죄송해요."

에버딘이 조금 주눅이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프레이르는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손수건을 꺼내들어 에버딘의 얼굴을 닦아주며 말했다.

“하지만 말야. 설사 바보일지라도...”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네가 와서 정말 기뻤어.”

그는 엉망이 된 에버딘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다 닦아준 다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빨갛게 물든 에버딘의 얼굴이 한여름의 포도주처럼 달아올랐다. 하지만 프레이르는 그런 에버딘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에버딘의 부드러운 연갈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제 괜찮아졌어?”

에버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그녀는 프레이르가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으로 쳐다보자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작게 웃어보였다. 그녀의 볼에 작은 보조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프레이르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 앉아 있는 에버딘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에버딘은 쑥스러워 하면서도 프레이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자, 가자. 불꽃놀이 보러.”

프레이르의 말에 에버딘은 잠시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피어나는 꽃처럼 활짝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힘차게 대답했다.

"네, 전하."

프레이르는 에버딘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불꽃놀이가 벌어지고 있는 호수가를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한 사내가 나무 뒤에서 나타났다. 그는 바로 포르테빌 대공이었다. 그는 프레이르가 홀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보고 따라나선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지금까지 프레이르와 에버딘이 했던 말을 모두 엿들은 터였다. 그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이런... 곤란하게 되어버렸네."

하지만 곤란하다는 말과는 달리 그의 만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더없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더니... 시녀 레아첼에, 시골 아이 에버딘이라... 하하하. 뭐, 내가 신경 쓸 것은 아닌가?"

포르테빌은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기분 좋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유유히 영광의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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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로라시아 연대기 - 15.새로운 시작(1) +9 10.07.29 1,838 25 27쪽
51 로라시아 연대기 - 포르테빌의 결혼식(1부 에필로그) +15 10.07.22 1,718 19 13쪽
50 로라시아 연대기 - 14.공작의 갈등(6) +20 10.07.20 1,715 19 26쪽
49 로라시아 연대기 - 14.공작의 갈등(5) +15 10.07.19 1,686 18 20쪽
48 로라시아 연대기 - 14.공작의 갈등(4) +11 10.07.12 1,768 17 23쪽
47 로라시아 연대기 - 14.공작의 갈등(3) +7 10.07.10 1,737 18 10쪽
46 로라시아 연대기 - 14.공작의 갈등(2) +2 10.07.08 1,770 15 9쪽
45 로라시아 연대기 - 14.공작의 갈등(1) +6 10.07.07 1,846 21 23쪽
44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5) +3 10.07.03 1,764 16 13쪽
»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5) +2 10.06.30 1,760 13 22쪽
42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3) +2 10.06.29 1,799 19 12쪽
41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2) +2 10.06.29 1,806 16 12쪽
40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1) +5 09.12.24 1,940 13 12쪽
39 로라시아 연대기 - 12.인명록(3) +8 09.12.22 1,988 15 19쪽
38 로라시아 연대기 - 홀트 백작의 보고서 전문 +6 09.12.22 1,966 13 5쪽
37 로라시아 연대기 - 12.인명록(2) +4 09.12.21 1,880 15 8쪽
36 로라시아 연대기 - 12.인명록(1) +6 09.12.20 1,906 17 11쪽
35 로라시아 연대기 - 11.우정의 대가(3) +9 09.12.20 1,996 14 19쪽
34 로라시아 연대기 - 11.우정의 대가(2) +4 09.12.19 1,976 14 10쪽
33 로라시아 연대기 - 11.우정의 대가(1) +6 09.12.19 2,024 15 12쪽
32 로라시아 연대기 - 10.결투의 미학(3) +3 09.12.18 2,101 17 9쪽
31 로라시아 연대기 - 10.결투의 미학(2) +7 09.12.18 2,096 17 6쪽
30 로라시아 연대기 - 10.결투의 미학(1) +5 09.12.17 2,171 14 11쪽
29 로라시아 연대기 - 결투 +3 09.12.17 2,179 1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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