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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님의 서재입니다.

로라시아연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조회수 :
27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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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88,474

작성
09.12.22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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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로라시아 연대기 - 12.인명록(3)

DUMMY

보통 고아가 되면 오빠가 되었든, 누나가 되었든, 연장자는 그 동생들에 비해 더 많은 심적 부담을 안게 될 수밖에 없다. 연장자는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의지해 오는 동생들까지 건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연장자가 한 가문을 이끌어야 하는 의무까지 지고 있는 귀족 남성인 경우에 고충은 배가 된다. 현재의 카스티야 백작의 경우가 정확히 이런 경우였다.

이제 고작 18세의 소년으로서, 아직 성인식조차 치르지 않은 알베로 경은 이미 카스티야 백작가를 담당하는 가주로서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여동생인 에버딘을 보호하고 그녀를 건사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다행히 죽은 아버지의 친구인 샤퓌르 부인이 그들을 돌봐주고 있었지만 알베로 경은 그녀 역시 그다지 부유한 형편이 아닌데다가 막대한 빚마저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종종 지방에 있는 자신의 영지는 물론 샤퓌르 백작부인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늘리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고,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소모하지 않기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어린 카스티야 백작은 출세를 해서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집념을 갖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그 부모님이 죽기 전부터 이미 국왕의 눈에 들어 중앙 정계에 진출하겠다는 야심을 품어 왔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카시네예프 왕립 학교에 입학하였다. 정세를 살피는 날카로운 안목이 있었던 그는 이 왕립 학교야말로 자신과 같은 군소 귀족들이 출세할 발판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보았던 것이다.

불같은 집념과 뛰어난 재능, 그리고 누구나 감탄할만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던 그는 곧 왕립 학교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학년의 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성과에 힘입어 그는 알타미라 후작가의 후계자인 세자르 경과 깊은 친분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알베로 경은 이 친분 관계가 불평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일단은 알타미라 후작가의 협력을 얻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세자르 경이 내민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보호자인 샤퓌르 부인의 후원자가 다름 아닌 알타미라 후작부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알타미라 후작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 냉철한 백작은 결코 알타미라 후작가의 살롱에 투신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귀족주의자가 아닌 왕당파로서 국왕 샤를이 신봉하는 절대 왕정을 지지하고 있었다. 지방 귀족인 그는 강력한 군주가 통치하는 절대왕정이야말로 인재를 쓰는데 있어서 실력과 재능이 가문의 이름에 우선하는 이상적인 정치 체제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왕립 학교에 입학한 이유도 국왕의 눈에 들기 위해서였지 결코 알타미라 후작의 눈에 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일단 자신의 세력이 미약한데다 알타미라 후작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왕당파에 대한 신념은 숨겨야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적당한 힘을 키울 때까지 겉으로는 세자르 경의 가신이자 성실한 친구로서의 역할을 해주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이렇게 냉철하고 얼음 같이 차가운 알베로 경이었지만 그 여동생인 에버딘에게 만큼은 따뜻한 오빠였다. 그는 자신보다 2살 어린 이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실제로 그는 어렸을 적,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에버딘을 구하기 위해 다짜고짜 물에 뛰어들어 익사할 뻔한 적이 있을 정도로 여동생을 아꼈다. 그의 이런 여동생에 대한 집착은 이미 상당히 유명했기 때문에 친구인 세자르 경조차도 에버딘에게 함부로 말을 거는 것은 삼가는 편이었다.

따라서 에버딘과 다짜고짜 친구가 되었다고 말하며 그 주변에서 치근덕거리던 프레이르를 그가 경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만약 프레이르가 단순히 에버딘을 건드려볼 생각으로 치근덕거리는 것이었으면 온 힘을 다해 그를 파멸시켜버릴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다행히 그는 이 치근덕거리는 꼬마가 왕자인 프레이르였다는 사실에 경계심을 조금 늦추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겠다고 여겼다. 만약 프레이르 왕자의 관심이 에버딘에게 쏠린다면 그것은 카스티야 가문에게 커다란 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장난삼아 에버딘에게 접근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일단 프레이르 왕자는 아직까지 여자문제에 관해서는 평판이 나쁘지 않았으며 포르테빌 대공과 같은 난봉꾼도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에버딘이 프레이르 왕자의 관심을 오랫동안 붙들어 둘 수만 있다면 알베로 자신도 출세할 기회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렇게 판단한 그는, 에버딘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프레이르 전하께 파트너 신청을 받았어요.’라고 말했을 때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곧바로 그는 에버딘이 무도회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그가 아는 모든 궁중예절과 춤을 가르쳤다. 비록 에버딘의 얼굴이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럽다지만 수천 명의 영애들이 모이는 궁성에서 황홀한 미모를 갖춘 여인들은 밤하늘의 별보다도 많았다. 따라서 고귀한 사람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는 미모뿐만 아니라 재치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번 무도회 역시 재색을 겸비해야만 영광스런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에버딘은 이런 면에서는 백치나 다름없었다. 조금만 긴장해도 말을 더듬어버리는 데다가 순진한 시골 아이었던 그녀는 모르는 사람들 앞에 서기만 해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곤 했다. 더구나 그녀는 상당히 춤에 소질이 없는데다가 운동 신경도 형편없어 춤을 배우는 것도 더디기 그지없었다. 실제로 알베로 경은 그녀에게 춤을 가르치면서 발등에 피멍이 들만큼 발을 밟혀야 했다.

오늘도 한 시간 동안 춤 연습을 시킨 알베로 경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에버딘 역시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격렬히 움직이느라 지친 기색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본인도 지쳐있었지만 항상 여동생을 먼저 생각하는 알베로가 물었다.

“힘들지 않니?”

에버딘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알베로의 물음에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오빠. 더 연습할 수 있어요.”

알베로는 일견 그녀가 대견하게 여겨졌다. 그는 그녀가 이 춤 연습을 할 때마다 무척이나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빠인 알베로와 프레이르에게 불명예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배우는 것을 쉬지 않았다. 알베로는 그녀에게 다가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너무 힘들면 말 해.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연습할 시간은 충분히 있어.”

알베로의 격려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더 연습해야 될 것 같아요. 아직도 뒤로 물러설 때마다 넘어지잖아요.”

자신의 실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에버딘이었다. 머리는 영특한 소녀였지만 불행히도 그녀의 운동 신경은 일반인의 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춤에 영 소질이 없는 그녀는 뒤로 물러설 때마다 스텝이 꼬이며 몸의 균형을 잃었는데, 수백 번을 연습해도 이 부분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잘 될거야. 자신감을 가져.”

알베로는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격려에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전 지금도 왜 전하께서 제게 파트너 신청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말했다. 그녀의 음성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전 말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고, 춤도 못 추고, 지위도 낮잖아요. 전하께서는 절 놀리시려는 걸까요?”

알베로는 그녀의 이 자격지심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이 여동생은 항상 스스로를 비하할까? 알베로가 이 사랑하는 동생에게서 딱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면 바로 이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는 자격지심이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눈을 또렷이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바보구나. 넌 이 궁성에서, 아니 카시네예프 전체에서 가장 예쁜 아이야. 네 그 연갈색 눈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르니? 난 만약 전하께서 네가 아니라 다른 아이를 선택하셨다면 나야말로 정말 놀랐겠지. 너의 그 눈은 그 어떤 나라의 공주님보다 아름다우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며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에게 자신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프레이르 전하를 보면 그 어떤 여자아이들보다 너를 아끼는 것이 확실해. 아니면 왜 너를 파트너로 선택했겠어?”

알베로는 자신 있게 말했다. 에버딘은 그 말에 순진하게 웃었다.

“정말이에요? 정말 오빠는 그렇게 생각해요?”

“아벨 신에 맹세코 궁성에서 너보다 사랑스러운 아이는 없어.”

알베로는 그의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오빠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에버딘이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는 알베로의 손을 잡았다. 연습을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였다. 알베로는 이 여동생의 작은 손을 잡고 다시 방의 가운데로 향했다.

똑똑.

나지막한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여성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알베로와 에버딘의 보호자인 샤퓌르 백작부인이었다.

“백작부인.”

알베로와 에버딘은 그녀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그녀는 따뜻한 미소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방 안에 들어온 그녀는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두 남매를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버딘은 그 손길에 기분이 좋은 듯 방긋 웃었다. 이 사랑스러운 미소에 부인은 다시 웃음을 지으며 마치 고양이를 쓰다듬는 듯한 세심한 손길로 에버딘을 어루만졌다.

“땀으로 흠뻑 젖었구나? 무엇을 하고 있었니?”

알베로가 에버딘 대신 대답했다.

“에버딘에게 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무도회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요.”

알베로의 말에 백작부인의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무도회에 관해서 안 좋은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러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하필이면 무도회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에 그녀는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우물거렸다.

그녀와 수년을 함께 살아 온 알베로는 이것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퓌르 백작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알베로의 날카로운 연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자 더욱 마음이 찔린 부인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그녀가 쓰다듬는 것을 멈추자 영문을 모른 채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에버딘이 있었다. 이 천진난만한 아이를 바라보며 그녀는 차마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딸처럼 아끼는 아이었다. 지금까지 상처 없이 키우기 위해 얼마나 애지중지 여겨왔던가? 그런 아이에게 잔인한 말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자 부인은 목이 메어왔다.

“무슨 일이 있군요.”

알베로가 차분한 목소리로 백작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부인은 차마 에버딘의 앞에서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망설이는 그녀를 보며 알베로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하였다.

“무슨 일이죠? 무도회에 관련된 일인가요?”

알베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 누구보다 총명하고 눈치가 빠른 알베로였다. 그는 백작부인이 에버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기를 망설이고 있는 것을 보고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알베로의 추궁에 백작부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굽혀 에버딘의 키에 맞추었다. 그녀의 연갈색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에버딘, 만약 너에게 파트너 신청을 하려고 하는 다른 멋진 남자 아이가 있다면 지금 프레이르 왕자님에서 그 남자 아이로 바꿀 수 있니?”

순진한 에버딘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알베로는 이미 모든 것을 간파했다. 그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아버렸다.

에버딘이 자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부인이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왕자님께서는 너 대신 다른 파트너를 고르셔야 할 것 같구나. 우리와는 격이 안 맞는 분이시란다.”

그녀가 재차 말했으나 에버딘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이미 프레이르 전하와 약속을 했는걸요?”

에버딘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몸짓을 하며 백작부인에게 되물었다. 이 순진한 아이를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지 부인은 난감해졌다. 어떻게 안톤 부주교라는 성직자가 찾아와 알타미라 후작가문의 베아트리체 양이 프레이르 전하와 파트너를 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네가 물러나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어떻게 자신들이 알타미라 후작가에 산더미만큼 빚을 지고 있어서 그들에게 이 영광을 양보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을 이해시키기에 에버딘은 너무 어리고 순수했다. 잘못 말하다가는 이 여린 아이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입힐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에버딘을 납득시켜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와 이 두 아이가 살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생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모진 마음을 먹고 에버딘의 작은 손을 쥐었다.

“아가, 우리는 알타미라 후작님께 많은 은혜를 입어 왔단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다 후작님의 덕분이야. 그런데 그 후작님께서 우리가 한 가지 일을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계시 단다. 신세를 졌으면 우리도 도움을 드리는 것이 진정한 칼레타 교인 아니겠니?”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이 어린 아이에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이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안톤 부주교 님의 말씀에 따르면 후작 님의 따님인 베아트리체 님이 프레이르 전하의 파트너가 되고 싶으신가봐. 그런데 프레이르 전하와 에버딘 네가 이미 파트너가 되었다고 하셔서 굉장히 실망하신 모양이야.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니, 에버딘?”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자 마침내 에버딘도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했다. 그녀는 백작부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더 이상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결국 그들의 윗사람인 베아트리체 양이 에버딘 자신에게 파트너 자리에서 물러달라고 요구했으므로 에버딘이 양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샤퓌르 부인과 알베로 덕분에 순진하게 자랐다지만 그녀는 자신들이 알타미라 후작가문의 도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만약 알타미라 후작이 그들을 버린다면 그들은 끝없는 파멸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울보에 여린 심성의 그녀였지만 만약 자신이 여기서 울면서 떼를 쓴다면 부인의 마음이 더 아플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 착한 아이가 의외로 순순히 마음을 돌리자 부인은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정말 미안하구나, 아가. 정말 미안해.”

부인은 한동안 에버딘을 껴안고 놓지 않았다. 이렇게 포옹하는 것으로서 에버딘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였다. 꽤 긴 시간 동안 그렇게 에버딘을 안아주었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황급히 방을 나갔다.

샤퓌르 백작부인이 방을 떠나자 방 안에는 알베로와 에버딘 두 사람만이 남겨졌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춤 연습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연습을 해보았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알베로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에버딘은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알베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오빠에게 생긋 웃어보였다.

“괜찮아요, 오빠. 울지 않아요.”

그녀는 낙담한 기색 없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마치 오빠에게 걱정을 끼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투였다. 그러나 알베로는 그 말 뒤편에 어려 있는 상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안아주었다.

“알고 있어. 넌 울지 않아.”

알베로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다음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버딘은 고개를 숙인 채 알베로의 품 속에 있었다. 이 작은 아이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자 알베로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특히 그녀를 껴안은 두 팔에 무언가 따뜻한 물기가 떨어지자 그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에버딘이 입은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동안 슬픔에 젖은 에버딘을 안아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슬픔이 어느 정도 가시자 그의 가슴 속에 남은 것은 격렬한 증오였다. 이 증오라는 악마는 처음에는 슬픔에 가려져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베로가 냉정을 되찾을수록 그 힘을 키워가며 알베로의 마음 속을 채워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증오가 베아트리체 알타미라 양에게만 향했다. 그러나 곧 그의 증오의 대상은 알타미라 후작, 후작부인, 그리고 친구인 세자르 경에게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알타미라 후작가문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알타미라 가문은 알베로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여동생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에버딘을 통해 왕당파에 가담하려던 알베로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알베로가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장점을 무산시켜버리며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알타미라 후작가!’

그는 이 이름에 분개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이 일을 꾸민 것이 틀림없이 알타미라 후작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샤퓌르 백작부인을 방문한 안톤 부주교도 알타미라 후작이 보내서 압력을 넣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샤를의 의도대로 알베로는 이 파트너 신청을 깬 것이 알타미라 후작의 탓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알타미라 후작이 원흉이라고 여긴 그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이렇게 상처를 입히고, 자신의 앞길을 방해한 후작가문에 대한 분노를 삼킬 수 없었다. 그의 어깨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알베로의 품 안에 안긴 에버딘은 이런 오빠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들고 오빠의 얼굴을 보지 않은 것은 그녀에게 오히려 다행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알베로의 두 눈은 적개심 때문에 무섭게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타미라 후작 가문에 대한 분노는 이 때부터 알베로의 마음 속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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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3 광룡천마
    작성일
    09.12.22 22:45
    No. 1

    힝... 불쌍해 샤를이 아마도 알타미라후작의 부채가지고 어떻게 할텐데...
    권력과 돈이 짱인 더러운세상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5 티미.
    작성일
    09.12.22 23:04
    No. 2

    에버딘은... 야심이 없어보이는군요;;; 낄낄... ㄱ-;;;;;
    그... 이름도 까먹은 그 할아버지도요;; ㄷㄷㄷ
    죄송합니다. ㅠㅠㅠㅠㅠ
    그런데 후작부인이 파트너를 그만두라고 할때 어떻게 반응할까요;;;
    왠지 거절 권유 -> 갈등 -> 왕자한테 고자질 -> 왕자버럭 테크를탈것같아서 ㅎㄷㄷ...
    건필하세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륭륭귀
    작성일
    09.12.22 23:14
    No. 3

    좋은 글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8 백인대장
    작성일
    09.12.23 10:33
    No. 4

    감사히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 夢幻林
    작성일
    10.01.01 16:05
    No. 5

    잘보고 갑니다 건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무광천하
    작성일
    10.07.12 17:32
    No. 6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 아우레아
    작성일
    10.07.13 08:49
    No. 7

    건필하세요
    정말 모든 등장인물이 야심으로 가득 찼군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다훈
    작성일
    10.09.07 22:47
    No. 8

    인간이 욕심을 갖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데, 그것을 위해 남에게 심하게 상처를 주는 것은 되도록 피하는게.......

    왕실 사람은 정략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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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5) +3 10.07.03 1,764 16 13쪽
43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5) +2 10.06.30 1,760 13 22쪽
42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3) +2 10.06.29 1,799 19 12쪽
41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2) +2 10.06.29 1,806 16 12쪽
40 로라시아 연대기 - 13.무도회(1) +5 09.12.24 1,940 13 12쪽
» 로라시아 연대기 - 12.인명록(3) +8 09.12.22 1,989 15 19쪽
38 로라시아 연대기 - 홀트 백작의 보고서 전문 +6 09.12.22 1,966 13 5쪽
37 로라시아 연대기 - 12.인명록(2) +4 09.12.21 1,880 15 8쪽
36 로라시아 연대기 - 12.인명록(1) +6 09.12.20 1,907 17 11쪽
35 로라시아 연대기 - 11.우정의 대가(3) +9 09.12.20 1,996 14 19쪽
34 로라시아 연대기 - 11.우정의 대가(2) +4 09.12.19 1,976 14 10쪽
33 로라시아 연대기 - 11.우정의 대가(1) +6 09.12.19 2,024 15 12쪽
32 로라시아 연대기 - 10.결투의 미학(3) +3 09.12.18 2,101 17 9쪽
31 로라시아 연대기 - 10.결투의 미학(2) +7 09.12.18 2,096 17 6쪽
30 로라시아 연대기 - 10.결투의 미학(1) +5 09.12.17 2,171 14 11쪽
29 로라시아 연대기 - 결투 +3 09.12.17 2,179 1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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