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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님의 서재입니다.

로라시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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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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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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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19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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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로라시아 연대기 - 14.공작의 갈등(5)

DUMMY

로딤체프 공작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프레이르를 맞이했다. 이런 어린 아이의 등장에 동요하는 것은 유서 깊은 귀족인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부러 평소보다 훨씬 천천히 홍차를 우유와 섞으며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그리고 그는 느긋한 몸짓으로 프레이르에게 홍차를 권했다. 프레이르는 빙긋 웃으며 공작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켁켁거리며 홍차를 내뱉었다. 홍차의 떨떠름한 맛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왕자는 울상을 지으며 홍차가 담긴 찻잔을 바라보더니 그것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 그는 조금 민망하다는 듯이 배시시 웃으며 로딤체프 공작의 눈치를 보았다. 이 바보 같은 모습을 보며 로딤체프 공작은 리처드 대공의 말에 회의를 느꼈다.

아무리 봐도 프레이르는 15살의 평민 소년일 뿐이었다. 그는 현재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바보같이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공작은 프레이르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졌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듯한 프레이르의 눈동자는 천진난만하면서도 매력적이었으나 아직 덜 여문 풋사과마냥 경솔해보였다.

프레이르를 얕보게 된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프레이르의 서글서글하면서도 부드러운 입가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신뢰를 갖게 만드는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꼬리는 여전히 아이다운 순수함이 남아 있었고 영악함이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멍청한 미소를 짓고 있는 프레이르를 보며 로딤체프 공작은 프레이르를 적당히 달래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프레이르에 관해 헛소리를 지껄였던 리처드 대공에 대한 반감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로딤체프 공작의 이러한 판단은 변방 귀족으로서 살롱에서 소외당했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었다. 살롱에서 떠도는 프레이르에 관한 소문을 조금이라도 귀담아 들었다면 공작은 이렇게 섣불리 프레이르를 애송이로 평가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로딤체프 공작이 프레이르에 관하여 들은 것이라고는 오직 알타미라 후작과 방금 다녀간 리처드 대공의 인물평이 전부였다. 알타미라 후작은 프레이르에 관해서 ‘아직 판단하기에는 이른 상태다.’라고만 이야기 해주었고 리처드 대공은 프레이르에 관하여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너무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며 프레이르를 깎아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로딤체프 공작이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프레이르의 외모뿐이었다. 그래서 로딤체프 공작은 프레이르의 작은 체구와 소년 티가 남아 있는 얼굴, 그리고 바보 같고 격식 없는 행동만을 보고 단숨에 그를 애송이라고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이런 로딤체프 공작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레이르는 다짜고짜 용건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리처드와는 정반대인 정면돌파였다.

“제가 왜 공작님을 방문했는지 공작님도 짐작하고 계시죠?”

리처드 대공과 달리 프레이르는 로딤체프 공작의 의중을 떠볼 생각도 하지 않는 듯했다. 로딤체프는 다시 한 번 프레이르가 세상물정 모르는 하룻강아지라는 자신의 인물평에 확신을 더했다.

“아마도 포르테빌 대공 각하와 관련된 일이라 생각합니다만.”

로딤체프 공작이 일부러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애송이인데다 어린 아이라지만 방금 리처드 대공으로부터 프레이르가 얼마나 포르테빌을 아끼고 있는지에 관해 듣고 난 뒤로 그는 프레이르에게 친절하게 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무감동한 목소리로 프레이르에게 대응하고 있었다.

한편 프레이르는 리처드 대공의 방문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로딤체프 공작의 냉담하고 쌀쌀맞은 반응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타미라 후작과 친한 친구인 로딤체프 공작이라면 자신에게 제법 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얼굴에 떠오른 당혹감을 숨기며 다시 천진난만하게 웃어보였다. 동시에 그는 재빨리 작전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프레이르를 완전히 얕잡아 본 로딤체프 공작은 이 빠른 표정 변화를 읽지 못했다.

“알타미라 후작에게서 로딤체프 공작님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대단히 애국심이 투철하시고, 뛰어난 용병술을 지니셨다고요. 알타미라 후작은 시간이 날 때마다 로딤체프 공작님의 1506년 푸르투와 공성전(로딤체프 공작이 난쟁이족의 항구도시인 푸르투와를 단 일주일만에 점령했던 공성전, 이 당시 남부방면군의 손실은 겨우 43명에 불과했다.)을 입이 닳도록 칭찬했거든요.”

프레이르의 입에서 로딤체프 공작이 가장 자랑하는 업적인 푸르투와 함락에 관한 찬사가 쏟아져 나왔다. 로딤체프 공작은 ‘과찬이십니다.’라며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공작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프레이르의 감탄은 끊이질 않았다. 그는 로딤체프 공작이 해상봉쇄를 기다리는 것처럼 적을 속이며 발빠른 기동대를 내보내 도시의 시청을 점거한 양동작전에 관해 감탄했다고 말하며 그 전투에 관해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로딤체프 공작은 이런 프레이르의 열성적인 반응에 적당히 대답만 해주었다. 그가 보기에 프레이르는 속이 빤히 보이는 짓을 하고 있었다. 그는 프레이르가 한심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프레이르 본인은 공작을 치켜세우며 잘 구슬리고 있다고 믿고 있겠지만 이런 입에 발린 소리 하나 분간해내지 못할 로딤체프 공작이 아니었다. 프레이르는 이런 식으로 공작의 기분을 좋게 만든 다음 그에게 결투를 중지하도록 요청할 모양이었다.

그는 프레이르의 쓸데없는 노력에 한숨을 내쉬며 얼른 프레이르의 헛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시라도 빨리 그를 보낸 다음 리처드 대공의 제안을 검토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프레이르가 떠드는 소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이런 공작의 태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열성적으로 찬사를 늘어놓았다.

이윽고 푸르투와 공성전에 관한 장황한 이야기가 끝났다. 그리고 프레이르는 방 한쪽에 놓여진 훈장에 관해 화제를 돌렸다.

“저기 있는 은빛 십자 훈장이 바로 푸르투와 함락에 대한 공적으로 받은 생지몽 훈장이로군요.”

프레이르가 감탄하며 말했다. 로딤체프 공작은 그런 작위적인 찬사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상대는 왕자인지라 정중히 말했다.

“한 번 직접 보시겠습니까?”

프레이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로딤체프 공작은 이 성가신 왕자를 얼른 떼어놓고 싶었지만 훈장을 꺼내어 프레이르에게 공손하게 건네주었다. 프레이르는 그 훈장을 받아들고 ‘와’하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로딤체프 공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어린아이를 상대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게 바로 진짜 생지몽 훈장이군요! 정말 대단해요. 현존하는 귀족 중에 이 훈장을 수여받은 분은 세르티프 백작과 로딤체프 공작님 단 두 분이라면서요?”

“영광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소중한 가보로서 보관할 생각입니다.”

로딤체프 공작은 공손하게 말했다. 그 말에 프레이르는 다시 감탄사를 늘어놓으며 이리저리 훈장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생지몽 훈장의 이곳저곳을 뜯어보던 프레이르는 다시 그것을 공작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공작에게 물었다.

“생지몽 훈장은 군사적 업적도 중요하지만 명망을 갖춘 다른 사람의 천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들었어요. 세르티프 백작의 경우에는 로딤체프 공작님께서 추천을 해주셨다면서요? 그럼 로딤체프 공작님 때는 누가 천거 해주었나요?”

로딤체프 공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예기치 못한 복병에게 측면을 찔린 기분이었다. 이 왕자는 누가 생지몽 훈장에 관해 추천을 해주었는지 뻔히 알면서 물어본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푸르투와 전투에 관해 떠들어댔던 것은 이것을 위한 포석인 모양이었다. 로딤체프 공작은 왕자가 생각만큼 바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공작은 평정심을 유지하며 간단히 대답했다.

“포르테빌 대공입니다. 함께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에 국왕 폐하께 주청을 올렸죠.”

로딤체프 공작의 말에 프레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왕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9년 전, 푸르투와의 대승리 직후, 로딤체프 공작을 따라 참전했던 포르테빌 대공은 생지몽 훈장을 로딤체프 공작에게 수여할 것을 주청했었다. 즉 공작이 이 훈장을 얻은 것은 포르테빌이 뒤에서 힘을 써준 덕분이었다. 왕자는 그 사실을 들먹거리고 있는 것이다.

“역시 포르테빌 대공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네요.”

프레이르가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은 순수하고 천진난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로딤체프 공작은 프레이르의 눈이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것이 프레이르의 칭찬에 대한 대답임을 아는 공작은 언짢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뭐... 포르테빌 대공은 그것 하나는 꽤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묘한 비아냥거림이 어려 있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이것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포르테빌 대공은 분명 로딤체프 공작님을 존경하는 것이 틀림없어요.”

로딤체프 공작은 코웃음을 쳤다. 그 어떤 무뢰배가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의 아내를 건드린단 말인가? 이 왕자는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이것이 진심이라면 이 왕자는 정말로 그 삼촌을 사랑하는 것이고, 진심이 아니라면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이어서 계속되는 포르테빌에 대한 칭찬에 그는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프레이르는 아까 로딤체프 공작에 대해 열성적으로 칭찬을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포르테빌을 추켜세우고 있었다. 계속되는 찬사에 신경질이 난 공작은 결국 퉁명스럽게 말대꾸를 하고 말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전하?”

“네, 뭐가요?”

프레이르가 되물었다. 로딤체프 공작은 아차 싶었다. 감히 왕자의 말에 토를 달다니... 그는 자신이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짜증을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프레이르가 했던 말을 되짚으며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진심으로 포르테빌 대공이 뛰어난 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애국자라고 생각하시는지 물었습니다.”

프레이르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리고 그는 웃으며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님께서는 제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프레이르의 말에 공작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하고 싶은 말이나 다 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리처드 대공의 말대로 어차피 왕자와 사이가 틀어질 것이라면 차라리 속 시원히 하고 싶은 말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물론입니다. 이번 사건만 봐도 포르테빌 대공은 전하께서 말씀하신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공작님께서는 포르테빌 대공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로딤체프 공작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방탕하고 주색에 빠진 인물로서 왕족으로서 위엄도, 긍지도, 명예도 없는 인물입니다.”

로딤체프 공작의 가차 없는 혹평에 프레이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로딤체프 공작은 그 표정을 보며 흡족했다. 이 건방진 왕자에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프레이르는 한동안 얼빠진 얼굴로 공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공작의 기대를 깨끗이 배반하며 프레이르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배꼽을 잡으며 마치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심지어 그는 공작이 앉아 있는 책상까지 두드리며 천진난만하게 웃어댔다. 로딤체프 공작은 이 예상치 못한 반응에 오히려 자신이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박장대소했던 프레이르는 겨우 진정을 찾으며 말했다.

“뭐, 반쯤은 맞는 말이네요. 포르테빌 대공은 분명 방탕하고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다 얼빠진 짓을 저지르곤 하죠.”

프레이르는 다시 킥킥거리며 웃었다. 포르테빌의 경솔한 행적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로딤체프 공작은 프레이르라는 왕자는 포르테빌에 관해 생각만 해도 유쾌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공작님 말이 맞아요.”

프레이르는 이렇게 말하며 숨을 골랐다. 웃음을 멈추려는 시도였다. 그렇게 한동안 심호흡을 한 뒤 다시 프레이르는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전 포르테빌 대공을 로딤체프 공작님만큼이나 아끼고 있어요. 포르테빌 대공에게는 분명히 탁월한 덕목이 있으니까요. 단지 대공이 가지고 있는 덕목은 공작님이 가지고 있는 덕목과 겹치는 부분이 별로 없기 때문에 공작님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거겠죠.”

프레이르의 칭찬에 로딤체프 공작이 발끈했다.

“다른 귀족의 부인을 강탈하는 행위 중 도대체 어디에 덕목이 있다는 겁니까?”

공작은 대뜸 큰소리를 치며 프레이르를 윽박질렀다. 프레이르는 이 호랑이 같은 장군의 호통에 잠시 움찔했지만 다시 평정심을 되찾으며 대꾸했다.

“굳이 골라보자면 화술, 교양, 학식, 그리고 잘생긴 외모 정도가 덕목이 되겠군요.”

프레이르는 손을 꼽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로딤체프 공작은 주먹을 탁자에 ‘쾅’ 내리치며 외쳤다.

“그렇다면 저에게는 그런 덕목이 없다는 겁니까?”

“굳이 말씀드리자면...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프레이르가 냉혹하게 말했다. 그러자 격분한 로딤체프 공작이 소리쳤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군요. 전하께서는 저보고 그런 덕목이 없어서 아내를 강탈당했다면서 저를 조롱하시려는 겁니까?”

“그럴리가요. 로딤체프 공작님께는 다른 덕목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이었어요.”

프레이르는 로딤체프 공작의 위협적인 주먹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했다. 그는 마치 공작을 달래는 듯이 차근차근 로딤체프 공작의 장점을 짚어주었다.

“예를 들자면 결단력, 과감함, 추진력, 통솔력, 병사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포르테빌 대공으로서는 꿈도 못 꾸는 공작님의 덕목이죠. 포르테빌 대공의 우유부단함은 보는 제가 안쓰러울 정도니까요.”

프레이르는 이렇게 말하며 공작의 오른손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농담 삼아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제발 그 주먹 좀 치워주세요. 저는 생각보다 맷집이 약하거든요.”

프레이르의 말에 공작은 자신이 당장이라도 프레이르의 턱을 가격할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레이르의 말에 화가 난 나머지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어린 아이의 말에 이성을 잃고 화를 냈던 것에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공작이 조금 진정된 것을 보며 프레이르가 말했다.

“저는 그러한 덕목들이 희생되길 원하지 않아요. 포르테빌 대공의 덕목들과 로딤체프 공작님의 덕목들 중 어느 것도 잃고 싶지 않거든요. 전 그 모두를 원해요.”

이것이 프레이르의 본심이었다. 결투를 중지해 달라는 간접적인 요청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애원한다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로딤체프 공작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결투를 중지해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프레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하. 이것은 귀족으로서의 명예가 걸려 있는 결투입니다. 여기서 물러서는 것은 겁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공작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프레이르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자 프레이르는 탄식하듯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아... 명예라... 명예... 아무래도 제가 생각하는 명예와 공작님이 생각하는 명예는 상당히 다른 것 같네요."

프레이르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공작님이 생각하는 명예란 도대체 뭐죠?”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로딤체프 공작은 마치 이 질문에 대해 미리 준비라도 했다는 듯이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명예란 귀족의 모든 것이지요. 귀족의 자긍심이자 가문의 영광입니다.”

“흠... 글쎄요.”

공작은 프레이르의 얼굴에 처음 보는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잠시 동안 그 표정이 무엇인가 고민하던 로딤체프 공작은 그것이 냉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15살의 왕자는 지금 로딤체프 공작의 답변을 비웃고 있었다.

“제가 볼 때에 공작님이 말하는 명예는 진정한 명예가 아닌 것 같아요.”

로딤체프 공작은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프레이르의 얼굴에 다시 비웃는 듯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공작님이 말하는 명예란 체면치레에 불과하다는 뜻이에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귀족들에게 웃음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는 체면이요.”

로딤체프 공작은 프레이르의 말에 격분하여 벌떡 일어섰다. 겨우 마음을 진정 시켰건만 프레이르는 다시 공작을 도발하고 있었다. 그는 이글거리는 듯한 눈으로 프레이르를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프레이르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명예란 무엇입니까?”

프레이르는 공작의 노기 어린 목소리에 위축되지 않고 여유 있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뻔하지 않나요? 천 년이 지나도 스러지지 않는 불멸의 영광이에요. 전 로라시아 대륙의 사람들이 앞으로 수천 년 동안 ‘프레이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칭송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명예지요.”

프레이르의 거창한 대답에 로딤체프 공작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천 년이 지나도 스러지지 않을 불멸의 영광이라니... 공작은 지금껏 이토록 거창한 영광을 가리켜 명예라 부르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이 어린 왕자는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전 과대망상 따위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마치 공작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프레이르가 덧붙였다. 공작은 순간 뜨끔했다.

“잊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레인가드의 왕자에요. 제가 가는 길 하나하나는 역사로 남고 위대한 업적은 영광이 되죠. 불멸의 명예라는 것도 저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프레이르는 자신감과 함께 오만함이 어려 있는 어조로 말했다. 로딤체프 공작은 이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꼬마의 말에 기가 막히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는 이토록 자만심에 넘치는 꼬마를 본 적이 없었다. 제아무리 왕자라 해도 천년 동안 지속될 명예란 너무 과장이 심하지 않은가?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레이르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이제 레인가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에인절 왕조 건국 역사를 들먹이고 있었다.

“에인절 왕조를 시작했던 유리 드 리어 에인절 대왕과 당시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던 로딤체프 백작은 불멸의 영광을 차지하며 진정 명예로운 인물이 되었어요. 또한 레스터 공작 가문의 명성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요. 그들의 이름은 스러지지 않는 영광과 명예로서 남아 있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공작님. 저는 이런 명예를 원해요. 하찮은 귀족들의 평판 따위는 이 명예의 발 끝에도 못 미치는 것이죠. 그런 것 따위에 집착하다 이 커다란 명예를 놓치는 것은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이죠. 하지만 공작님이 바로 그 멍청한 짓을 하려 하는군요!”

로딤체프 공작은 프레이르의 호통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프레이르의 말은 오만함과 허풍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아이를 상대로 윽박지르는 것은 로딤체프 공작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화술에 재능이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프레이르의 말에 토를 다는 것 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로딤체프 공작이 궁색하게 물었다. 그러자 프레이르는 냉정한 어조로 대답했다.

“로딤체프 공작님은 한낱 귀족들의 평판 따위에 정신이 팔려 이 위대한 영광을 버리려 한다는 뜻이에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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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5

  • 작성자
    Lv.76 사동령
    작성일
    10.07.19 00:25
    No. 1
  • 작성자
    Lv.76 사동령
    작성일
    10.07.19 00:26
    No. 2

    긍정적으로 흘러갈것같아 보이긴 한데
    절망의 그림자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Enya
    작성일
    10.07.19 00:53
    No. 3

    프레이르의 꽤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로딤체프 공작이 꼭 필요하겠네요ㅎㅎ 과연
    프레이르는 로딤체프 공작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것인지...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5 우현(遇賢)
    작성일
    10.07.19 08:09
    No. 4

    로딤체프 공작이 넘어 올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1 제크
    작성일
    10.07.19 08:26
    No. 5

    재밌게 잘 보고 갑니다.
    프레이르의 주식은 버터일지도 ㅎ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경천
    작성일
    10.07.19 08:53
    No. 6

    돌아가는 상황은 괜찮아보이는데 제목이 참;;;; 알 수 없는 불길함이 계속;;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6 아우레아
    작성일
    10.07.19 09:55
    No. 7

    참 재미있게 돌아가고
    일이 잘 풀릴거 같은....
    '절망의 그림자' 가 무엇이길레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1 스카이76
    작성일
    10.07.19 10:41
    No. 8

    그렇게 잘풀릴것 같진 않은데.. --;

    너무 어린아이의 치기에 가까운 말들이라..

    이상은 멀고. 현실은 가까운 법이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8 백인대장
    작성일
    10.07.19 13:31
    No. 9

    감사히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무마리
    작성일
    10.07.19 14:36
    No. 10

    드디어 다 읽었네요..
    조회수/댓글수가 너무 적다는게 안타깝네요.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9 Stellar
    작성일
    10.07.19 16:08
    No. 11

    조회수/댓글수가 적어서 안타까우시면 추천해주셔도...

    ㅋㅋ 농담입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 인형법사
    작성일
    10.07.23 00:22
    No. 12

    강력하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6 그램린
    작성일
    10.07.23 11:20
    No. 13

    멋진 말 들 입니다
    단지,
    나이 먹엇다면 현실을 무시한 이상론에는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거라 봅니다
    즉 현실을 바탕으로한 이상론이어야 설득이랄 수 있다, 본다는 거죠
    그런데 현실도 없고 이상도 없는 포부만 있으면 이건 머라 해야 할지,,
    머 제 생각 인건 아시죠
    그래도 멋집니다
    가슴이 부푸러 오르니 글은 이맛 이겟죠?
    좋은 글 잘 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다훈
    작성일
    10.09.08 00:14
    No. 14

    소제목 없애기 궐기대회라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은하계
    작성일
    10.09.26 15:54
    No. 15

    제크님의견에 한표...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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