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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님의 서재입니다.

로라시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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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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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88,474

작성
10.07.07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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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글자
23쪽

로라시아 연대기 - 14.공작의 갈등(1)

DUMMY

샤를이 소위 <늑대부인의 시>에 관해 알게 된 것은 무도회 바로 다음 날의 일이었다. 프레이르와 함께 무도회에 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던 샤를에게 홀트 백작이 찾아온 것이었다. 홀트 백작은 그 시에 관련된 모든 사실을 가감 없이 샤를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프레이르는 백작의 보고를 듣는 샤를의 얼굴이 짜증과 당혹감으로 일변하는 것을 목격했다.

“포르테빌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내가 그토록 여자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했건만...”

샤를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에 손을 얹었다. 손수 문제를 일으켜 준 바람둥이 동생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했다. 그는 나지막하게 신음 소리를 내며 이 사건이 가져올 파장을 재보았다. 어느 쪽을 생각해봐도 그에게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초조한 낯빛으로 의자를 두드리던 샤를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홀트 백작에게 말했다.

“잠깐, 지금쯤이면 로딤체프 공작도 시에 관련된 소식을 듣지 않았겠나?”

“확실한 정보는 없지만 이미 몇 시간이나 지났기 때문이 충분히 알게 되었으리라 추정됩니다.”

샤를은 의자를 탕 치며 외쳤다.

“당장 포르테빌을 이쪽으로 부르게. 로딤체프 공작은 분명히 포르테빌을 죽이기 위해서 결투를 신청하려 할 거야. 두 사람이 결투를 벌이도록 놔두어선 안 돼!”

“알겠습니다.”

홀트 백작은 샤를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문 쪽으로 물러났다. 문 바깥으로 나가려던 그에게 샤를이 다시 외쳤다.

“절대로 두 사람을 먼저 만나게 해서는 안 되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포르테빌을 나한테 먼저 끌고 와.”

백작은 샤를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며 빠른 발걸음으로 포르테빌이 살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샤를은 한숨을 내쉬었다.

“홀트 백작이 늦어선 안 될 텐데...”

“왜 두 사람이 결투를 벌이면 안 되나요, 아버지?”

프레이르는 샤를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사실 귀족이 손상 당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결투를 하는 것은 한 달에도 두세 번씩 벌어질 정도로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샤를이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것이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궁금하다는 듯이 입을 내밀고 있는 프레이르를 보자 샤를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해주었다.

“리처드 대공이 왜 이런 시를 썼는지 생각해보면 내가 이토록 당황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다, 프레이르.”

“리처드 대공이요?”

프레이르는 놀라서 샤를에게 되물었다. <늑대부인의 시>가 로딤체프 공작을 조롱하는 내용이라는 것도 뜻밖이었지만 그 시를 쓴 인물이 리처드 대공이라는 것은 그 이상으로 의외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리처드 대공이 아무 상관도 없는 로딤체프 공작을 도발해서 형제인 포르테빌을 공격하게 만든 것인가? 리처드 대공은 포르테빌에게 그다지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텐데...

“의외라는 표정이구나.”

프레이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읽은 샤를이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생각을 들킨 프레이르는 어깨를 움츠러들면서 ‘네’라고 대답했다.

“프레이르, 누가 범인인지 알고 싶으면 그 사건을 통해 누가 가장 이익을 보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정석이란다.”

샤를은 프레이르에게 차분히 얘기했다.

“알타미라 후작과 로딤체프 공작은 서로 대단히 친한 사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

프레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군사적 명성이 없는 알타미라 후작이 제2귀족이 될 수 있는 것은 로딤체프 장군을 좌지우지할 수 있어서라고 포르테빌 대공에게 들었어요.”

프레이르의 대답에 샤를은 기특하다는 듯 프레이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리고 그 알타미라 후작은 이 무도회를 통해 우리 왕가와 손을 잡았단다. 이것은 로딤체프 공작 또한 우리 왕가와 손을 잡았다는 뜻이지. 이것이 누구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 생각되느냐?”

너무나도 쉬운 질문이었다. 왕가가 강력해지면 위협을 느낄 인물이야 뻔했기 때문이었다.

“레스터 공작, 세르티프 백작, 그리고 리처드 대공이요.”

“맞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내가 리처드 대공을 지목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느냐?”

샤를의 질문에 프레이르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샤를은 그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레이르는 샤를이 세 사람의 선택지를 준 것이 하나의 단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리처드 대공과 다른 두 인물의 차이를 생각해보았다.

리처드 대공이 왕족이라는 것? 그것은 적당한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리처드 대공이 적극적이고 행동을 좋아한다는 것? 이것 또한 결정적인 단서는 아니었다. 리처드 대공의 성격이 더 더럽고 못 됐다는 것? 명백한 사실이긴 하지만 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고심하고 있는 프레이르에게 샤를이 다시 말했다.

“레스터 공작, 세르티프 백작, 로딤체프 공작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거라.”

순간 프레이르의 머리 속에 그 답변이 떠올랐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 사람 다 군인 출신이에요.”

프레이르의 말에 샤를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레스터 공작과 세르티프 백작은 로딤체프 공작과 마찬가지로 군인 출신이란다. 리처드 대공은 아니지. 레스터 공작과 세르티프 백작은 로딤체프 공작의 군인으로서의 재능을 존경하고 있어. 프레이르, 너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군인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존경심이란 생각보다 질긴 것이란다. 더구나 세 사람은 함께 전쟁터에서 싸웠던 사이기도 하지. 그런 레스터 공작과 세르티프 백작이 로딤체프 공작을 신랄하게 조롱하는 시를 썼을 것 같니?”

프레이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레스터 공작은 마음에 안 드는 인물이긴 하지만 자부심 강하고 긍지 높은 귀족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인물이 같은 군인이자 대귀족인 로딤체프 공작을 조롱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세르티프 백작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군인이 아닌 리처드라면 고상하지 못한 데다가 부인에게 놀아나고 있던 로딤체프 공작을 경멸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생각과 같구나.”

샤를은 다시 기특하다는 듯이 프레이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 더 침착해진 목소리로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하나 더 내가 리처드를 의심하는 이유가 있단다. 솔직히 평가해서 그 시는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었다. 법도를 정확히 맞춘 형식하며, 신랄한 내용에, 완벽한 압운까지... 웬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런 시를 쓰지 못한단다. 레스터 공작도, 세르티프 백작도 그런 시를 쓸 만한 예술적 감각은 없지. 하지만 뛰어난 시인인 리처드라면...”

샤를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쓸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구나.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리처드는 그런 쪽에 상당한 재능이 있으니까.”

프레이르는 포르테빌이 항상 리처드 대공의 예술적 감각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프레이르 역시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리처드 대공의 신랄한 조롱과 비판이 얼마나 재치 있는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샤를의 설명을 듣고 보니 과연 그런 시를 쓸 만한 배짱과 재능, 그리고 이유를 가진 사람은 리처드 대공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리처드 대공이 포르테빌 대공과 로딤체프 공작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서 그런 시를 썼다고 하시는 건가요?”

프레이르는 다시 샤를에게 물었다. 프레이르의 물음에 샤를은 아무 말 없이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훗, 이간질이라.”

샤를의 얼굴에 우울한 웃음이 스쳐지나갔다. 샤를의 이런 표정을 처음 본 프레이르는 흠칫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샤를은 평소 그답지 않은 어두운 음성으로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리처드는 그렇게 무르지 않단다, 프레이르. 리처드는 겨우 이간질 따위를 위해 그런 시를 쓴 것이 아니야. 그는 지금 나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거란다. 포르테빌과 로딤체프 공작 중 누구를 버릴 것인지를.”

“버린다고요?”

프레이르는 깜짝 놀라 샤를에게 되물었다.

"버리다니요? 포르테빌 대공을요?"

프레이르가 재차 샤를에게 물었다. 하지만 샤를은 마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이야기라도 했다는 듯이 더 이상 프레이르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여기서 단념하지 않고 샤를에게 더 이야기를 재촉하려 했다. 그는 이 문제가 둘 중 한 명을 버려야만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라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샤를이 어째서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 사건을 그저 리처드 대공이 포르테빌과 로딤체프 공작 사이를 이간질 시키기 위해 벌인 짓궂은 장난 정도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레이르는 결국 샤를의 답변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했다. 절묘한 타이밍에 포르테빌 대공이 홀트 백작과 함께 방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만 나가봐도 좋네, 홀트 백작.”

샤를이 홀트 백작에게 부드럽게 명령했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샤를의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른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샤를이 터져나오려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챘다. 그것은 포르테빌 대공과 홀트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홀트 백작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포르테빌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샤를을 바라보았다.

그런 포르테빌을 가만히 지켜보던 샤를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포르테빌, 지금 내 솔직한 심정은 어렸을 시절처럼 자네를 죽지 않을만큼만 패고 싶다네.”

“면목 없습니다, 폐하.”

포르테빌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프레이르는 늘 자신감으로 가득 찬 호인인 포르테빌이 이토록 침울하고 풀이 죽은 모습은 오늘 처음 보았다. 그의 어깨는 움츠러들어 있었고, 그의 눈은 방어적으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손은 허리춤의 검 손잡이 근처에 놓여져 있었는데 마치 누군가가 그를 습격하는 것을 방지하기라도 하려는 듯했다.

“정말이지 자네의 그 바람기에는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네. 도대체 왜 로딤체프 공작 부인을 건드린 건가? 다른 귀부인들도 많은데.”

샤를이 포르테빌을 책망했다. 그러자 포르테빌이 눈이 번쩍 떠졌다. 동시에 그는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항변하기 시작했다.

“다른 귀부인이라니요? 폐하,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서 송구스럽게 생각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공작 부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그래, 그래. 자네는 항상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샤를이 질렸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경멸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포르테빌, 자네는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 자네는 오늘은 이 여자, 내일은 저 여자를 안으며 그때그때 진심을 다해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단지 사랑은 변하는 것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자신 있게 말하면서. 그러나 자네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변치 않고 사랑하고, 또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의 미소를 바라보며 잠에서 깨어나는 행복을 알지 못해. 자네가 알고 있는 것은 사랑의 파편일 뿐 사랑의 전신이 아니야.”

이제 샤를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그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픈 것 같기도 한 목소리로 포르테빌에게 말했다.

“그래, 자네는 진정한 사랑을 몰라. 자네는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으니까.”

프레이르는 샤를에게서 흘러나오는 애수를 느낄 수 있었다. 프레이르는 포르테빌을 꾸짖는 동안 샤를이 누군가 소중했던 사람을 떠올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프레이르는 그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움과 애정이 동시에 묻어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그 증거였다.

포르테빌 역시 샤를이 레아첼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샤를과 40여 년의 세월을 함께 해온 포르테빌은 냉정하고 이성적인 샤를을 이토록 감정적으로 만드는 인물이 이 세상에 단 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레아첼이었기 때문에 그는 샤를의 애수가 담긴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미묘한 표정으로 샤를을 바라보자 샤를은 황급히 얼굴에서 슬픈 기색을 지우고 다시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강인한 의지를 지닌 샤를은 감정의 변화에 대처하는 법이 능숙했기 때문에 이미 죽은 사람을 두고 절망감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가지고 회한에 잠길 만큼 어리석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그렇듯이 통찰력 있는 모습으로 돌아와 포르테빌이 저지른 일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미 일은 터졌고, 되돌릴 수는 없네. 자네를 책망해 봐야 아무 소용없지. 그래, 포르테빌 자네는 어떻게 대처할 생각인가?”

샤를의 물음에 포르테빌은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보기 드문 샤를의 감정적인 반응 때문에 잠시 동안 문제는 포르테빌 본인에게 있지, 샤를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그는 곧바로 몸을 꼿꼿이 세우고 대답했다.

“로딤체프 공작이 결투를 원한다면 응할 생각입니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포르테빌의 말에 샤를은 다시 머리에 손을 얹으며 포르테빌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결투는 안 되네. 이렇게 지독한 모욕을 당한 로딤체프 공작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분명 한 쪽이 죽을 때까지 결투를 벌이려 할 거야. 자네나 로딤체프 공작이 죽는 사태는 막아야 하네.”

“로딤체프 공작은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결투는 피하지 않을 겁니다. 저 또한 이 시로 인해 살롱에서 망신을 당한 이상 결투로서 명예를 회복하고 싶습니다.”

포르테빌이 결연하게 대답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며 프레이르는 귀족과 왕족이란 이런 것이구나라는 실감이 났다. 평소 프레이르는 비록 포르테빌이 호감이 가는 인물이긴 하지만, 결단력이 약하고 우유부단하며 심약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는 포르테빌은 결투를 겁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포르테빌은 로딤체프 공작과의 결투를 겁내고 있지 않았다. 아니, 사실 겁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결투보다 명예의 손상을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프레이르는 왜 귀족들이 그토록 결투에 집착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결투를 벌여선 안 되네.”

샤를이 다시 딱 잘라 말했다. 포르테빌이 뭐라 항변하려 하자 젊은 국왕은 다시 의자를 ‘쾅’ 두드리며 외쳤다.

“자네나 로딤체프 공작이 죽게 된다면 기뻐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레스터 공작과 리처드 뿐일세! 자네가 죽을 경우, 누가 살롱의 동향을 파악해주지? 또 만약 로딤체프 공작이 죽을 경우, 애써 알타미라 후작과 맺은 동맹은 물거품이 되어 버려. 난 로딤체프 공작을 잃은 반쪽짜리 알타미라 후작은 원하지 않는단 말일세.”

“그렇다고 해서 결투를 중지시킬 수도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결투를 말리시면 로딤체프 공작은 폐하께 등을 돌릴 것입니다.”

포르테빌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 말은 들은 눈치 빠른 프레이르는 어째서 샤를이 '포르테빌과 로딤체프 공작 중 누구를 버릴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 결투를 말리면 로딤체프 공작은 샤를이 포르테빌을 감싼다고 생각하고 틀림없이 샤를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투가 벌어지는 것을 방관하면, 포르테빌과 로딤체프 공작 둘 중 한 명이 죽는 것인 자명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샤를은 한 쪽을 버려야만 하는 셈이었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결투를 하게 허락해주십시오. 적어도 저는 불명예보다는 명예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포르테빌이 다시 샤를에게 말했다. 그러나 샤를은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단정 짓지 말게.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일단 로딤체프 공작보다 한 발 앞서 자네를 빼냈으니 시간은 벌었네. 지금부터 방법을 강구해보고, 최악의 선택은 모든 것을 검토한 뒤에 실행해도 늦지 않아.”

“폐하...”

포르테빌의 항변이 시작되려는 찰나에 샤를은 입을 다물라는 손짓을 했다. 더 이상은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포르테빌은 말하던 것을 멈추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는 샤를이 부질 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포르테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계속해서 이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강구하는 샤를을 내버려 둔 채 프레이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허리를 굽혀 프레이르와 눈 높이를 맞추었다. 그는 예의 그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프레이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하, 제가 죽을 경우를 대비해서 인사드리겠습니다. 결투에서 살아 남는다면 다행이지만 아침으로 잔디를 삼키게 된다면 더이상 전하를 뵙는 것이 불가능하니까요."

포르테빌은 애정 어린 손길로 프레이르의 머리를 만졌다. 그런 포르테빌을 보자 프레이르는 삼촌에 대한 애정이 왈칵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이제서야 한 가지 두려운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포르테빌 대공은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

프레이르는 지금까지 결투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레드포드 자작과 리처드 대공의 결투 사건은 그가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로서 그가 결투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마틴 경의 승리로 사건이 종결지어진 뒤였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결투의 무게감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귀족이면 으레 겪어야 하는 행사 정도로 그는 결투를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르테빌과 샤를이 대화하는 것을 보며 프레이르는 점점 결투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끝난 결투와 앞으로 치러질 결투는 그 무게감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그는 두려운 사실이 그의 마음 속에서 소리지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르테빌은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 방금 나누었던 대화가 포르테빌과의 마지막 대화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항상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었던 포르테빌, 적으로 둘러싸인 살롱에서 끝까지 그를 지켜주었던 그의 삼촌이 내일이면 싸늘한 주검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역전의 용사인 로딤체프 공작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이 반드시 죽는다면 관에 묻히게 될 사람은 포르테빌이 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제서야 프레이르는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초조하게 손을 들썩거리며 포르테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포르테빌에게 결투를 하지 말라고 외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입을 열지 못했다. 포르테빌이 그의 뺨 깊숙이 키스를 하며 속삭였기 때문이었다.

"아벨 신 앞에서 의롭고, 백성들에게는 자비로우며, 적들 앞에서는 용감한 국왕이 되십시오.”

포르테빌의 말에 프레이르는 뭐라 소리지르며 결투를 하려하는 그를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포르테빌은 프레이르가 입을 달싹이는 것을 보지 못한 채 그대로 모자를 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포르테빌은 짧게 인사를 하며 그대로 방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프레이르는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포르테빌은 프레이르를 떠나갔다.


포르테빌이 나간 뒤 프레이르는 한동안 입을 벌린 채 포르테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멍청히 앉아 있었다. 그의 삼촌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지 전혀 몰랐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삼촌을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였던 그는 처음 겪는 이 상황에 대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어떠한 어려움도 해결해 왔고 어떠한 난관도 극복해 왔던 아버지... 프레이르의 눈에는 전능한 것처럼 보였던 샤를이었다. 그는 샤를이라면 이 사태를 타개해 낼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샤를은 포르테빌이 나가자마자 행동에 나섰다. 그는 무언가를 급히 휘갈겨 쓴 다음 비서관을 시켜 홀트 백작에게 그 쪽지를 건네도록 지시했다.

그 다음 샤를은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프레이르. 포르테빌을 살리기 위해 네 도움을 빌려야겠구나."

샤를의 말에 프레이르는 앞으로 나섰다.

"무엇이든지."

프레이르의 힘찬 말에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로딤체프 공작을 방문하거라. 그리고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보거라. 혹시 그가 조건을 제시하거든 나와 상의해보고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약속을 하거라. 어쨌든 우리에게는 결투를 늦출 시간이 필요해."

샤를은 초조하게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방문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포르테빌을 감싸고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아직 어린 너라면 삼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비춰질게다."

이미 샤를은 그 부분까지 생각해 둔 모양이었다. 프레이르는 리처드를 살릴만한 희망이 조금이나마 보이는 듯 했다.

"격분한 로딤체프 공작을 달래는 것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 같은 일이지만 아무래도 그 수밖에 없는 것 같구나. 결국 너에게 이 문제의 해결이 달려 있단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최선을 다해 설득할 방법을 찾아볼게요"

프레이르는 힘있게 말했다. 역시 샤를이 절대로 쉽게 포기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프레이르는 샤를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자신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프레이르는 끝까지 발버둥을 쳐보고 싶었다. 설사 가능성이 전혀 없을지라도 그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는 절대로 포르테빌이 죽는 그 순간까지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지 않을 것이었다.

프레이르는 가볍게 인사를 하며 샤를을 남겨둔 채 방 바깥으로 나갔다. 그런 프레이르의 모습을 바라본 다음 샤를은 아무 말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는 홀트 백작으로부터의 소식을 기다렸다.


한편 프레이르는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한 사람을 불렀다.

“워렌!”

그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워렌이 곧바로 뛰어왔다. 그는 항상 그렇듯이 공손한 태도로 프레이르에게 무릎을 굽히며 명령을 기다렸다.

“지금 당장 마부와 마차를 준비해줘.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마부에게 어디로 모시라고 말할까요?”

워렌의 물음에 프레이르는 그의 모자를 고쳐 쓰며 결연히 대답했다.

“로딤체프 공작 저택으로.”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프레이르의 꼭 다문 입술을 보며 웨렌은 이 소년 왕자가 무언가 중대한 결심을 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충성스런 호위기사인 그는 프레이르가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돕기 위해 곧바로 마구간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프레이르는 그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 지 결심이 선 이상 그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그는 반드시 포르테빌을 살릴 것이다. 아는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지만 어쨌든 그는 로딤체프 공작과 포르테빌을 살려내고야 말 것이다. 그는 그렇게 계속해서 자신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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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90 요호이
    작성일
    10.07.07 10:39
    No. 1

    오늘도 잘보고 갑니다~검보단 권총이 확실이 살아날 확률이! 포르테빌 과연 살수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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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71 스카이76
    작성일
    10.07.07 11:10
    No. 2

    흠.. 몇가지 오류..

    과연 포르테빌이 죽는다고 해서..

    로딤체프공작과의 관계가 개선될것인가?

    친동생을 죽인 로딤체프공작과 샤를황제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끌끄러운 관계로 남겠죠.. 설령 적의 손을 들어주지 않더라도.. 샤를황제의 편을 들기도 힘들겠죠..

    게다가 그 다음 황제를 생각한다면.. 로딤체프는 더더욱 프레이르의 손을 들어주기 힘들죠..

    포르테빌 대공이 대놓고.. 프레이르의 대부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런 대부를 죽여놓고.. 로딤체프공작이 프레이르의 손을 들어줄건가?? 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 반대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아보이지 않나요??

    쩝.. 제가 단순한건가요??

    하여튼 엄청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멋진 소설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 Stellar
    작성일
    10.07.07 12:15
    No. 3

    스카이76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우리들의 사고 방식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겁니다.
    우리들은 친동생이나 삼촌을 죽인 인물을 껄끄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이들은 중세의 귀족들입니다.
    당시에는 정당한 결투로 인한 죽음은 원한이나 복수의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사람인지라 내심 사적인 복수심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결투로 누구를 죽였다고 해서 공적인 관계를 망치진 않았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결투와 이들이 생각하는 결투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관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다훈
    작성일
    10.09.07 23:38
    No. 4

    부인의 '부정'은 없었고 무고한 부인과 자신의 명예를 손상한 '음모가'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나니아
    작성일
    10.10.05 16:33
    No. 5

    안돼ㅠㅠ 포르테빌이 죽으면.. 프레이르한테는 솔직히 아버지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포르테빌이었는데!;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9 re******
    작성일
    23.10.12 21:46
    No. 6

    로라시아 궁중암투기!

    억수로 뒷북!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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