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시아 연대기 - 12.인명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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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트 백작의 인명록. 홀트 백작이 심혈을 기울여 8년에 걸친 세월 끝에 완성하였고 지금도 끊임없이 보완되고 있는 이 세 권의 책은 레인가드의 거의 모든 귀족들의 정보가 담겨 있었다. 출생지, 나이, 가문 내력과 같은 기본 정보에서부터 뇌물 수수 혐의, 뒷공작, 창부 등 지저분한 정보에 이르기까지 홀트 백작에 의해 조사된 모든 정보들이 이 책 안에 있었다. 이 책은 샤를과 홀트 백작만이 그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백작이 보관하고 있는 원본만이 존재했다. 사실 대다수의 귀족들은 이 책의 존재를 근거 없는 낭설 정도로 치부했지만 이 책은 엄연히 실존하고 있었으며 샤를이 이 레인가드를 통치하는데 있어 매우 유용한 무기로 활용하고 있었다.
홀트 백작은 그 비밀스런 책을 보자기로 잘 감춘 채 샤를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샤를의 충성스런 심복인 홀트 백작은 하시에르 대사관의 수상한 동향에 관하여 중요한 안건을 처리하는 중이었지만 샤를의 쪽지를 받자마자 이 책을 꺼내들었다. 국왕 샤를의 명령은 곧 국왕의 권리를 부여한 아벨 신의 명령과도 같다고 생각하는 그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홀트 백작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샤를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3권의 책들을 받은 다음 경건한 손놀림으로 책을 폈다. 그러나 샤를이 편 첫 페이지에는 아무런 글자도 써 있지 않았다. 인명록은 백지 상태였다.
하지만 샤를은 이 모습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책 위에 손을 얹고 나지막하게 주문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치 그 주문에 반응이라도 하듯 책 위에 글자들이 스물스물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글자들은 곧 서로의 위치를 찾아 이동하며 단어를 만들어냈다. 백지 상태였던 첫 페이지는 곧 ‘인명록’이라는 단어와 함께 ‘홀트 백작 저’라는 글귀가 떠올랐다. 샤를이 마법사를 시켜 걸어놓은 마법이었다. 이 책의 내용이 발설될 것을 염려한 샤를이 마법을 통해 그 내용을 숨겨 놓은 것이었다.
이윽고 책 위의 글자들이 선명하게 드러나자 그는 홀트 백작에게 ‘카스티야’ 가문에 관한 모든 정보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그 명령에 홀트 백작은 곧바로 수천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인명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카스티야’라는 이름이 나오는 모든 페이지를 기록하며 정보를 모았다.
약 1시간 반만에 홀트 백작은 카스티야 가문, 특히 현존하고 있는 카스티야 에버딘과 알베로 경에 관한 완벽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완성된 두 페이지의 종이를 샤를에게 올렸다. 샤를은 다급히 그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깨끗하고 절제된 글씨체로 작성된 그 문서의 내용을 대충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전 카스티야 백작 부부가 열병으로 급사한 후, 그 자녀인 알베로 드 노르베르 카스티야 백작과 카스티야 에버딘 양은 사퓌르 백작 부인에게 맡겨졌다. 샤퓌르 백작 부인은 고 카스티야 백작과 절친했던 사이로서 알타미라 후작의 살롱에 속해있다. 부군인 샤퓌르 백작은 예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카스티야 백작가와 샤퓌르 백작가 모두 빈곤한 지방 귀족이므로 재정 상태는 그다지 유복하지 않은 편이다. 39세의 샤퓌르 백작부인은 신앙심 깊고 고결한 도덕성을 지닌 인물로서 살롱에서 ’부인들의 귀감‘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다. 이처럼 샤퓌르 부인의 행실은 정숙하기로 명성이 높기 때문에 알타미라 후작 부인은 샤퓌르 부인의 낮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가까이 두어왔다. 두 남매 중 알베로 경은 현재 카시네예프 왕립 학교의 4학년 학생이며, 학년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우수한 학생이다. 알타미라 후작의 아들인 세자르 드 칼라일 알타미라 백작과 깊은 친분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스티야 에버딘의 경우 왕립 학교의 1학년 학생이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다.’
샤를은 그 보고서를 몇 번이고 꼼꼼히 읽었다. 특히 그는 알베로와 에버딘이 알타미라 후작의 영향력 아래 있는 샤퓌르 백작 부인에게 맡겨져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마침내 그는 무릎을 탁 쳤다.
“됐네. 이거면 해결할 수 있겠군.”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고서를 덮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어떠한 행동을 취할지 확실히 마음을 정했기 때문이었다. 알타미라 후작의 살롱에 속한 샤퓌르 백작 부인을 이용한다면 이 사건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듯했다. 방침을 정한 그는 신속하게 홀트 백작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홀트 백작, 지금 바로 안톤 부주교를 불러오게. 그 훌륭한 성직자가 샤퓌르 백작 부인을 방문해줘야겠어. 아무래도 그 성직자가 이 불쌍하고 신앙심 깊은 미망인에게 신앙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군.”
샤를의 말뜻을 알아차린 홀트 백작이 엷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샤를의 방침이 올바르다고 여겼다. 이런 종류의 일에는 확실히 홀트 백작 자신보다는 안톤 부주교와 같은 성직자가 더 알맞았다. 냉철하고 잔인한 홀트 백작 자신보다는 인간적이고 경건한 부주교가 중재자와 조언자로서 더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홀트 백작은 공손히 고개를 숙인 다음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한 전령에게 페리도트 성당에 가서 안톤 부주교를 자신에게 모셔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의 명령을 받은 전령은 곧바로 두 마리의 말을 끌고 페리도트 성당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편 홀트 백작의 보고서로 한결 마음에 여유를 되찾은 샤를은 옆에 놓인 성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 에버딘이라는 아가씨를 위해 성호를 그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샤를의 행동으로 인해 조만간 다른 파트너를 찾아야 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녀에게는 매우 잔인한 일이었다. 그러나 냉철한 군주인 그는 이 선택에 전혀 후회를 가지지 않았다.
사실부터 말하자면 알타미라 후작의 요구조건을 알게 된 순간부터 샤를은 이미 후작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프레이르가 이미 파트너 신청을 한 점은 그의 예상 밖의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결심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결단력 있고 유능한 군주인 샤를은 결코 살롱에서의 평판과 예의범절에 얽매이는 우유부단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속내를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파트너 신청을 깨는 한이 있더라도 알타미라 후작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한낱 살롱에서의 평판과 계집아이 하나 때문에 알타미라 후작과의 동맹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알타미라 후작과의 동맹은 그런 하찮은 것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는 되도록 프레이르의 평판에 흠이 가지 않는 최선책을 찾고 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파트너 신청을 받은 에버딘이라는 아가씨 쪽에서 먼저 약속을 철회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약속 철회는 프레이르와 국왕 측에서 어떠한 손도 쓰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했으므로 그는 꽤 열심히 카스티야 가문에 관해서 연구해야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 방법을 찾아내었다고 확신했다. 다시 한 번 카스티야 양을 위해 성호를 그은 뒤 샤를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안톤 부주교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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