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시아 연대기 - 14.공작의 갈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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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가드에서 가장 유서 깊은 세 가문을 들라면 누구나 왕가인 에인절 가문, 로딤체프 공작 가문, 그리고 레스터 공작 가문을 꼽는다. 이들 세 가문이 레인가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계기를 찾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에인절 왕조의 1등 개국공신으로서 공작 가문이 된 레스터 가문은 본래 레인가드 북부 해안가에 위치한 작은 지방 영주 가문에 불과했다. 레스터 가문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래 하시에르에서 망명한 귀족들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믿을 만한 사료에 따르면 그들은 소금을 생산해내는 조그마한 영지의 주인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레스터 공작 가문도 내심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레스터 공작 가문의 사람과 결투를 벌이고 싶다면 그를 ‘소금 장수’라고 부르면 된다.)
레스터 가문의 사람들은 질 좋은 소금을 제조해 내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방들에 비해 상당히 건실한 재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모리안의 해적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자경단을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레인가드 북동부 20만 명의 백성들 사이에서 맹주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 보잘 것 없는 레스터 가문이 레인가드의 권력의 핵심에 다다른 것은 에인절 가문과 손을 잡으면서였다. 당시 에인절 가문은 공작 가문으로서 서포크 왕가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간신들의 모함으로 에인절 공작 가문은 반역의 누명을 쓰게 되었고 가문의 가주는 물론 그 모든 자손들까지 모조리 숙청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 살아남은 단 한 사람이 바로 초대 에인절 왕조를 연 유리 드 리어 에인절 대왕이었다.
15세의 소년이었던 유리는 레인가드 동북부의 시골까지 도망쳐 레스터 가문에 몸을 의탁하였다. 본래 에인절 가문에 소금을 납품하였던 레스터 가문의 가주 아서 레스터는 유리의 정체를 알아보고 그를 보호하기로 결정하였다. 시대를 보는 안목과 사람을 보는 안목을 모두 갖추었던 아서 레스터는 이 소년을 양육하며 힘을 키웠고 조용히 일어설 때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르고 서포크 왕조의 혈통이 끊기면서 권력의 공백 상태가 찾아왔다. 서포크 왕조의 마지막 국왕은 죽기 전 한 공작을 유언을 통해 국왕으로 임명하였으나 곧바로 그 국왕은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카시네예프 귀족들 사이에서는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벌어졌다.
이 때, 유리 드 리어 에인절은 레스터를 비롯한 지방호족들의 동조를 받아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자 본래 에인절 공작 가문에 충성을 바쳤던 기사들과 군대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왕위 다툼으로 인해 사분오열 되어 있었던 국왕의 군대는 이들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레스터 가문은 수도 카시네예프에 입성하여 유리 대왕에게 왕위를 안겨주는데 성공하였다.
이 왕위 계승 과정에서 유리 드 리어 에인절을 국왕으로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던 아서 레스터는 공작의 작위를 얻어 아서 드 브랜든 레스터가 되었고, 카시네예프 서부 지역에서 가장 먼저 군대를 이끌고 와 에인절 가문에 충성을 맹세했던 로딤체프 백작 가문 또한 공작의 지위를 얻었다. 이렇게 해서 레인가드의 공작 가문과 에인절 왕조의 300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에 로딤체프 가문과 레스터 가문은 개국 공신 가문들로서 평화롭게 권력을 나눠가졌다. 동쪽의 레스터 가문과 서쪽의 로딤체프 가문은 레인가드의 주요 영지를 양분하며 레인가드의 양대 가문으로 수십 년간 군림하였다. 이 당시 레인가드는 사실상 서부는 로딤체프 가문이, 중부는 에인절 가문이, 그리고 동부는 레스터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 없던 시절이었다. 개국공신인 두 공작 가문의 권력은 국왕을 능가하였으며 에인절 왕조의 힘은 미비했다. 이렇게 레인가드는 삼분 되어 20여 년간 평화를 구가했다.
그러나 권력이란 빼앗는 것보다, 나눠 갖는 것이 더 어렵다는 레인가드의 속담은 여기에도 적용되었다. 로딤체프 공작은 왕실과 외척을 맺음으로서 레스터 공작 가문을 누르고 레인가드의 제 1귀족 가문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불태웠다. 레스터 공작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딤체프 공작은 원래의 왕비를 강제로 이혼시킨 다음, 그 여동생인 카트리나를 레인가드의 왕비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낀 레스터 공작은 자신의 딸인 헬레나를 왕세자비로 만들었다. 헬레나는 원래 로딤체프 공작의 맏아들인 로딤체프 후작과 결혼을 하여 딸까지 두고 있는 유부녀였으나 반강제적으로 이혼을 당한 뒤 마치 팔려가듯이 왕자에게 시집을 보내졌다. 물론 로딤체프 공작은 레스터 공작의 이런 ‘며느리 강탈’에 격분하였고, 레스터 공작이 자신의 가문에 먹칠을 했다고 여겼다. 두 가문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어 갔고, 그 둘은 어제의 동지에서 오늘의 정적으로 돌변하였다.
얼마 뒤, 레스터 가문을 섬기는 하인 하나가 로딤체프 가문의 집사와 다툼을 벌이다 우발적으로 집사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로딤체프 가문은 곧바로 하인의 처벌을 요구하며 신변을 인도할 것일 주장했으나 레스터 공작은 일언지하에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격분한 로딤체프 공작은 자신의 영지로부터 기사단을 수도 카시네예프로 불러들이며 무력 시위를 하였고, 레스터 공작 역시 이에 대응하여 휘하의 기사들을 이끌고 카시네에프에 입성하였다.
이를 중재하려던 허수아비 에인절 국왕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양측의 충돌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모든 카시네예프 시민들은 또다시 내전의 피바람이 휘몰아칠 것을 두려워하며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숨을 죽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내전은 아벨 신의 중재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시네예프에서 발한병이 창궐하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권력 다툼을 중단하고 물러서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발한병은 결과적으로 레스터 공작의 손을 들어주었다. 발한병에 의해 에인절 국왕과 로딤체프 공작이 동시에 사망하면서 홀로 남은 레스터 공작이 왕실의 유일한 외척으로서 독재 권력을 움켜쥐게 된 것이었다.
권력다툼에서 승리한 레스터 공작 가문은 자신들의 독주를 공고히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이름 뿐인 에인절 왕가를 제쳐두고 수백년 동안 레인가드의 국정을 좌지우지 했다. 심지어 외국의 대사들은 레인가드의 수도는 국왕이 있는 카시네예프가 아니라 레스터 공작이 머무르고 있는 시농 성이라고 자국에 보고할 정도였다. 레스터 공작의 힘은 국왕을 능가했으며 레스터 공작 가문의 영지는 사실상 독립된 왕국으로 수백년 동안 레인가드에 자리 잡아 왔다. 그동안 이 레스터 공작 가문에게 에인절 왕가가 왕위를 빼앗기지 않은 것은 한 마디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콘라트 3세와 같이 한 때나마 공포 정치로 정권을 휘어 잡은 국왕이 없었다면 진작에 에인절 왕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을 터였다.
한편 로딤체프 공작가의 세력은 레스터 공작 가문이 권력을 잡게 되면서 중앙 무대에서 축출되었다. 그들은 서부의 영지를 이런저런 명목으로 기사단과 성직자들, 왕실, 그리고 레스터 가문에게 몰수 당했고, 난쟁이족과의 충돌로 얼룩진 남쪽의 척박한 영지로 밀려났다. 시시때때로 난쟁이족과 격렬한 물리적 충돌이 빚어지는 남부 영지는 로딤체프 공작 가문으로 하여금 막대한 군사 비용을 지출하게 만들면서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렇게 해서 한 때는 영광스러웠던 로딤체프 공작 가문은 레인가드 역사에서 별 볼일 없는 가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최근 30여년 동안 로딤체프 공작 가문은 반격을 개시하였다. 로딤체프 공작 가문이 신흥 세력인 알타미라 후작 가문과 손을 잡으며 레스터 공작 가문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강력한 레스터 공작 가문에 대항하기 위해 차근차근 힘을 키워왔던 에인절 왕가 역시 로딤체프 공작 가문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특히 샤를은 군제 개혁이라는 명목 하에 레스터 공작 가문이 장악하고 있던 십수 개의 기사단들을 해체해 버리고 방면군과 군단이라는 새로운 상비군 조직으로 재편하면서 로딤체프 공작 가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현재의 로딤체프 공작이 남부 방면군의 5천 병력을 이끌게 된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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