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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님의 서재입니다.

로라시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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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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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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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474

작성
10.07.12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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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로라시아 연대기 - 14.공작의 갈등(4)

DUMMY

로딤체프 공작은 순간 움찔했다. 설마 리처드 대공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알타미라 후작으로부터 자신을 조롱하는 시를 쓴 인물이 아마도 리처드 대공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리처드가 감히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후작의 이야기를 듣고 난 로딤체프 공작은 비록 그 시를 쓴 리처드 대공보다 포르테빌 대공에게 훨씬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리처드 대공에게 결투를 신청할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리처드 대공을 결코 좋게 볼 수는 없는 상태였다. 더구나 평소에 리처드 대공은 종종 변방 출신인 로딤체프 공작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왔기 때문에 공작은 이 젊은 대공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악감정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어찌되었든 리처드 대공을 만나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리처드는 상당한 권력을 지닌 대공이었고 이렇게 자신을 찾아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집사에게 리처드 대공을 자신의 응접실로 모셔오라는 명령을 내린 후 응접실로 갔다.

잠시 후,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리처드 대공이 들어왔다. 대공은 평소처럼 고귀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태도로 로딤체프 공작에게 인사를 했다. 로딤체프 공작은 대공처럼 우아하게 답례를 하지 못했지만 군인다운 절도 있는 태도로 머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로딤체프 공작이 딱딱하게 물었다. 그는 자신을 신랄하게 조롱한 이 대공과 그다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용건만 듣고 그를 내쫓을 작정으로 일부러 대공에게 쌀쌀맞게 굴고 있었다. 공작의 이러한 기색을 알아차린 리처드 대공이 공손히 말했다.

“이번 일은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무도회의 분위기에 휩쓸려 술 김에 어리석은 짓을 해버린 것 같아 공작님께 사과를 드리러 왔습니다. 감히 그런 시를 써서 공작님을 불명예스럽게 만든 저의 실수를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리처드 대공은 공작에게 사죄를 구하며 다시 머리를 숙였다. 로딤체프 공작은 리처드 대공이 그 말대로 술에 취하여 이런 짓을 벌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자신을 조롱하려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시를 썼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본인이 이렇게 스스로 사죄를 구하는데 그것에 대해 물고 늘어져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 짓을 해봐야 구차해질 뿐이었다. 더구나 공작의 마음 속에 위치한 증오의 화살촉은 리처드 대공이 아니라 포르테빌 대공 오직 한 명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리처드 대공의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실수는 실수일 뿐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공작의 말에도 리처드 대공은 여전히 미안한 표정으로 공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셔도 제 마음은 편하지가 않습니다. 무언가 사죄의 표시를 해야 할 텐데...”

“괜찮습니다.”

로딤체프 공작은 이렇게 말하며 리처드 대공에게 화해의 제스처로 팔을 벌려보였다. 그 모습에 리처드 대공은 미소를 지으며 공작과 짧은 포옹을 나누었다.

그렇게 로딤체프 공작과 형식적인 화해를 마친 리처드 대공이 입을 열었다.

“저는 그렇다 치지만 포르테빌 대공의 일은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행여 로딤체프 공작님께 누가 될까 하여 어떻게 알려드려야 할 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되다니...”

리처드 대공이 마치 입에 기름이라도 칠한 것 마냥 술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이 모든 것을 의도한 주제에 그는 마치 자신의 불찰로 감추었던 비밀이 드러났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딤체프 공작은 리처드 대공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기만을 당하고 있었다면 더 큰 조롱을 받았을 겁니다. 차라리 이렇게 알게 되어 명예를 회복할 기회가 생긴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저는 오히려 대공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로딤체프 공작은 이렇게 말하며 리처드에게 앉을 자리를 권했다. 얼른 나갔으면 하는 손님이긴 했지만 그래도 의자조차 권하지 않는 것은 너무 무례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리처드 대공은 그 의자에 앉으며 안심하는 듯했다. 로딤체프 공작이 자신에게는 그다지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로딤체프 공작에게 물었다.

“명예를 회복할 거라면... 역시 결투인가요?”

로딤체프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처드 대공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커지다니... 큰일이군요. 제 불찰이 큽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다니...”

리처드 대공의 대답에 기계적으로 대응해오던 로딤체프 공작은 순간 발끈할 뻔했다. 이 대공은 자신과 포르테빌이 결투를 하길 바랐던 것이 확실했다. 자기가 원해서 이런 일을 터뜨려 놓고 이제 와서 불찰이 크다며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태도를 보고 있으니 공작은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신경질 섞인 눈초리와 함께 이 능구렁이 같은 대공을 노려보았다.

이런 로딤체프 공작의 반응에 리처드 대공은 잠깐 움찔했지만 곧 평소의 고고하면서도 거만한 태도를 되찾으며 하던 말을 마저 다했다.

"이런 결투가 벌어지게 된 것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걱정이 되어서..."

리처드는 가증스럽게도 걱정스럽게 한숨까지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딤체프 공작이 화를 꾹꾹 눌러담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엇이 걱정 된단 말입니까?”

그는 리처드 대공에게 분노를 폭발시키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철면피 같은 리처드였지만 상대는 대공이었다. 이미 자신에게 사죄를 구한 그에게 주먹을 휘두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로딤체프 공작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처드 대공은 뻔뻔스럽게 태연히 대답했다.

"결투의 결과에 대한 걱정입니다."

로딤체프 공작은 리처드 대공의 말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방금 리처드 대공이 한 말이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제가 결투에서 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로딤체프 공작의 질문에 리처드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로딤체프 공작님은 결투의 달인. 설사 검이 아니라 권총으로 결투를 벌일지라도 포르테빌 쯤이야 두 발 안에 쓰러뜨리실 만한 분이시죠."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로딤체프 공작은 짜증스럽게 물었다. 군인인 그는 이렇게 빙빙 돌리는 귀족식 말투를 대단히 싫어했다. 그는 항상 직설적이고 간략하게 간추려진 보고에 익숙해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아벨 신께서 정의의 손을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공작님이 승리하는 것은 정해진 결과지요."

리처드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의 파란 눈에는 날카로운 빛이 떠올랐다.

"다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리처드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시에 허스키한 대공의 목소리가 은밀하게 변했다.

“포르테빌 대공이 죽고 난 뒤의 일입니다.”

리처드 대공의 말에 로딤체프 공작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무엇이 문제냐는 태도였다.

“합법적인 결투고, 정의의 손에 포르테빌이 죽는다 한들 저에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설마 국왕 폐하께서 이런 문제로 저를 내치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입니다. 샤를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철저히 계산적인 인물입니다. 로딤체프 공작님 같은 고귀한 분을 이런 문제로 외면하실 리가 없습니다.”

리처드 대공이 공작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이 반응에 공작은 더욱 짜증이 났다. 그는 리처드 대공의 이 빙빙 돌리는 화법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럼 도대체 뭐가 걱정이라는 겁니까?”

로딤체프 공작이 신경질을 내며 묻자 리처드 대공이 말했다.

“프레이르 왕자. 전 그가 걱정됩니다.”

로딤체프 공작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뜸을 들이더니 한다는 소리가 이런 것인가? 그는 리처드 대공이 잠꼬대 같은 소리로 자신을 기만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프레이르 왕자는 고작 15살이었다. 그런 어린 아이가 결투나 정치에 관해 무엇을 안다고 이 리처드 대공은 걱정 한단 말인가?

“프레이르 왕자 전하는 이제 겨우 15살입니다. 삼촌이라지만 포르테빌 대공과 지낸지는 채 3달도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고요. 그런 전하 때문에 제가 걱정해야 된다는 겁니까?”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그렇습니다, 공작님.”

“어처구니가 없군!”

마침내 로딤체프 공작은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랐다. 그는 두 손을 탁자에 쾅 내려찍으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을 빙빙 돌리더니 한다는 소리가 고작 이런 헛소리입니까? 믿을 수가 없군요! 당장 이 곳에서 나가십시오!"

로딤체프 공작은 손가락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이 곳에서 나가라는 제스처였다. 그러나 그 모습에도 리처드 대공은 침착한 표정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일단 진정하십시오. 그리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공작 각하. 제 말을 듣고 나면 분명 저의 걱정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리처드는 당장이라도 다시 소리를 지르려 하는 공작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는 로딤체프 공작에게 더욱 은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로딤체프 공작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프레이르가 궁성에 들어온 이후, 그는 샤를보다 포르테빌과 함께 한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새로운 환경 때문에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15살의 소년에게 그 다정한 삼촌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포르테빌은 살롱에서 프레이르를 도와주었고, 온갖 귀족 사회의 난관을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는 법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습니다. 프레이르가 그 짧은 시간이나마 포르테빌을 얼마나 의지하고 사랑했는지 로딤체프 공작님은 잘 모르시는군요.”

로딤체프 공작은 '크릉'하며 코웃음을 쳤다. 변방에서 생활한 그는 중앙정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지 못 했으나 프레이르가 15살의 꼬맹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40대의 로딤체프 공작이 보기에 15살의 어린아이는 말 그대로 애송이일 뿐이었다. 그런 꼬맹이 때문에 자신이 걱정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봤자 15살 아이일 뿐입니다. 왕자 전하께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로딤체프 공작의 말에 리처드 대공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는 음울한 목소리로 로딤체프 공작을 위협하듯이 말했다.

"공작님께서는 호랑이 새끼도 언젠가 호랑이가 된다는 것을 간과하고 계십니다. 지금 당장이야 한심한 애송이에 불과하지만 그는 언젠가 분명 샤를과 같은 이빨과 발톱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공작님께서는 프레이르라는 왕자가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걱정 되지 않습니다. 훗날 호랑이가 될 지라도 지금은 역시 호랑이 새끼에 불과합니다. 프레이르 왕자 전하께서는 아직 아는 것도 없고, 아무런 힘도 없지 않습니까?"

로딤체프 공작의 말에 리처드 대공의 입가가 미묘하게 비틀려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공작은 그 입모양에서 대공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공작님께 프레이르라는 왕자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적의와 증오심을 품고 있는지 말씀 드려야만 겠군요."

이렇게 말한 리처드 대공은 레스터 공작이 자신에게 보냈던 편지를 보여주었다. 그 편지에는 프레이르가 알타미라 후작의 살롱에서 아르첼 일파의 귀족들에게 내뱉었던 독설이 쓰여 있었다. 로딤체프 공작은 그 편지를 읽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스웰 자작과 레스터 공작에게 프레이르가 퍼부었던 말들입니다. 이래도 로딤체프 공작님께서는 프레이르가 단순한 15살 소년으로 보이십니까?"

로딤체프 공작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리처드 대공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이 편지 속에 등장하는 프레이르 왕자는 확실히 단순한 어린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존재였다. 특히 '독사의 머리' 비유와 이를 통해 레스터 공작에게 퍼부었던 비난 속에는 명백한 적의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레스터 공작파에 대한 적의는 참으로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었다. 프레이르는 비유로서 교묘히 그 본색을 숨겼지만 그의 말 속에는 굳이 레스터 공작 일파에 대한 적개심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은 리처드 대공의 염려가 완전히 허황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포르테빌 대공이 가르쳐 준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면 국왕 폐하라던가."

"존경하는 공작 각하,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리처드 대공이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 때 살롱에 있었던 사람은 그 누구도 이것이 포르테빌 대공이나 샤를의 생각이라고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포르테빌 대공의 얼굴에 떠오른 충격에 빠진 표정은 도저히 연극으로 볼 수 없었으니까요. 아, 물론 저도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기는 합니다만 현장에 있었던 알타미라 후작 역시 저와 똑같은 의견일 겁니다."

로딤체프 공작을 꼼짝 못하게 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알타미라 후작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것이었다. 리처드 대공의 입에서 알타미라 후작의 이야기가 나오자 로딤체프 공작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리처드 대공의 말대로라면 프레이르는 단순한 애송이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프레이르는 적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이빨을 드러내고 덤벼듭니다. 로딤체프 공작님께서는 프레이르 왕자가 얼마나 공공연히 레스터 공작과 아르첼 전하를 적대하는지 모르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프레이르를 얕보고 계시는 것이지요."

리처드 대공의 말이 이어졌다.

"이런 왕자의 눈 앞에서 포르테빌 대공을 공작님께서 살해... 죄송합니다. 결투로 죽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포르테빌은 프레이르에게 있어서 제2의 아버지와도 같은 사람입니다. 프레이르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결투로 인해 죽는 것은 원한이나 복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귀족이라면 그 정도는 상식일 터!”

당황한 로딤체프 공작이 항변했다. 그러자 리처드 대공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물론이죠. 결투는 귀족의 의식이지, 복수극이 아닙니다. 하지만 프레이르는 15년을 평민들과 살아온 녀석입니다. 과연 그가 이런 깊은 의미를 이해하고 있을까요? 존경하는 공작님. 그를 우리와 같은 위치에서 보면 안 됩니다. 그는 15살의 평민 소년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고귀함이라던가 명예라던가 하는 것은 없습니다.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은 좋아하고, 자신에게 잘 대해주지 않는 사람은 증오하는 평민이라는 겁니다.”

리처드 대공은 이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레스터 공작이나 로딤체프 공작님과 같은 고귀한 혈통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는 꼬마지요."

리처드 대공의 말에 로딤체프 공작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대공의 말에 당해낼 수가 없었다. 상대는 레스터 공작의 편지를 증거로 들이미는데 카시네예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자신으로서는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리처드 대공의 말대로 프레이르 왕자가 정말 저런 말을 했다면 그는 분명히 상상 이상으로 무시무시한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편 그렇다고 해서 프레이르 왕자가 결투에 담겨 있는 의식이나 사상을 이해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정신적으로는 성숙한 반면, 귀족들의 문화에 관해서는 무지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15년간 평민 가정에 방치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가 결투에 담긴 깊은 의미를 이해했을리 없었다. 그렇다면 로딤체프 공작 자신이 포르테빌을 죽일 경우 리처드 대공이 암시하는 대로 프레이르라는 왕자는 자신에게 심한 적대심과 증오심을 안을 가능성이 높았다.

로딤체프 공작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며 리처드 대공은 자신의 작전이 먹혀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역시 로딤체프 공작은 귀족 사회나 중앙정계에 어두운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말에 이렇게 손쉽게 흔들리는 공작을 보며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미련한 곰탱이와 다름 없는 공작은 이제 대공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는 결정타를 준비했다.

“여기서 포르테빌 대공을 죽이게 되면 로딤체프 공작님에게 남은 것은 파멸뿐입니다. 프레이르는 공작님께 원한을 품게 될 것이므로 그를 국왕으로 세운다면 공작님은 파멸합니다. 물론 손발이 닳도록 왕자에게 아양을 떨면 혹시 프레이르가 감동을 받아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로딤체프 공작님 같이 자부심 강하신 분이 그런 저급한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프레이르를 국왕으로 세우려다 실패하게 되는 경우에도 공작님은 파멸합니다. 레스터 공작님은 너그러운 분이시지만 자신에게 끝까지 맞선 정적들까지 포용해 줄만큼 자비로운 인물은 아닙니다. 잘 아시잖습니까?”

로딤체프 공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리처드 대공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의미는 분명했다.

“그렇다면... 대공의 말은 포르테빌을 죽이면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프레이르 전하의 적대감과 그에 뒤따르는 파멸뿐이라는 거군요.”

리처드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로딤체프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파멸을 면하고 싶다면 프레이르가 아니라 아르첼 전하를 지지하라는 말입니까?”

로딤체프 공작의 말에 리처드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 쪽이 올바르다고 여기지만 레스터 공작님은 프레이르 왕자를 지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로딤체프 공작님께 크게 감사할 것입니다. 물론 아르첼 전하께서 국왕이 되셔야만 공작님은 프레이르의 원한으로부터 벗어나실 수는 있겠지요.”

로딤체프 공작은 젊은 대공의 말에 동요하고 있었다. 리처드 대공의 말대로 프레이르 왕자가 포르테빌 대공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면 그가 포르테빌을 죽이게 될 경우 원한을 품게 될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프레이르가 원한을 가진 채 국왕이 될 경우, 그에게 남은 것은 절망뿐이었다.

“로딤체프 공작님이 조금만, 아주 조금만 협조해 주신다면 아르첼 왕자님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째서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는 길로 굳이 발을 들이려 하십니까?”

리처드 대공이 재촉했다. 로딤체프 공작으로 하여금 조바심을 내게 만들려는 수작이었으나 고뇌에 빠진 공작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한동안 고민하던 공작은 이윽고 천천히 말했다.

“알타미라 후작과 상의해보고 결정해야겠습니다. 이런 중요한 결정은 아무래도 상의를 해봐야겠군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같으니...’

리처드 대공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표정의 변화를 감추며 로딤체프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님께서 좋을 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알타미라 후작님이 공작님을 위한 조언을 내놓을 지는 의문이군요.”

로딤체프 공작은 이 말에 발끈했다.

“알타미라 후작과 나는 30년을 함께 해 온 친구입니다! 그는 항상 나에게 현명한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공작이 소리쳤다. 그러나 리처드 대공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냉혹하게 말했다.

“그거야 로딤체프 공작님이 알타미라 후작님과 행동을 같이 했을 때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과연 알타미라 후작님이 로딤체프 공작님께서 '이만 정치적인 동지에서 갈라서야겠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동의하실 것이라고 보십니까?”

공작은 리처드의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알타미라 후작과 30년을 함게 해 왔지만 아직까지 그의 본색을 알지 못했다. 항상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알타미라 후작이지만 그 속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알타미라 후작이었다. 만약 로딤체프 공작이 적으로 돌아설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알타미라 후작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공작은 알 지 못했다.

알타미라 후작에 관해 생각하고 있던 그 때 응접실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공작의 집사가 또다른 손님의 내방을 알렸다.

“누군가?”

로딤체프 공작은 최대한 태연한 어조를 유지하려 애쓰며 물었다.

“프레이르 왕자 전하이십니다.”

집사가 대답했다. 그 말에 로딤체프 공작과 리처드 대공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두뇌 회전이 빠른 리처드 대공은 재빨리 이 급작스런 상황을 기회로 돌렸다.

“보십시오. 분명 프레이르는 공작님께 결투를 중지해 달라는 부탁을 하러 왔을 겁니다. 그가 살리고 싶어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공작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죠.”

“흐음...”

로딤체프 공작은 다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잠깐 동안 프레이르의 방문에 당혹해 하던 그는 이제 완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친구와의 신의를 배신하고, 국왕의 뜻을 거스르면서 자신의 파멸을 막을 것인가. 아니면 알타미라 후작과 함께 프레이르 왕자를 그대로 지지하면서 프레이르의 자비만을 바랄 것인가.

그렇게 한참 동안 고민하던 로딤체프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리처드 대공에게 입을 열었다.

“역시 이대로 결정하는 것에는 아직 무리가 있습니다. 알타미라 후작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조금 더 심사숙고한 뒤 결정하겠습니다.”

리처드 대공은 ‘부득’하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공작에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오셨다고 하니까요.”

리처드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로딤체프 공작 역시 의자에서 일어서서 대공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그가 말했다.

“대공님의 말씀은 잘 이해했습니다. 대공님의 제안은 한 번 검토해보겠습니다.”

로딤체프 공작은 혼란스런 표정으로 리처드 대공에게 말하며 배웅했다. 그 모습을 보며 설득의 실패로 불쾌했던 리처드 대공은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어쨌든 자신의 말이 로딤체프 공작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켰다면 프레이르가 무슨 짓을 하려하든 먹히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로딤체프 공작을 갈등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그의 방문은 성공이라고 부를만 했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조금 유쾌해진 기분으로 공작의 저택을 나섰다. 그리고 그는 다음번 방문에야말로 로딤체프 공작과 알타미라 후작을 갈라놓겠다고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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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1

  • 작성자
    Lv.41 제크
    작성일
    10.07.12 08:29
    No. 1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5 우현(遇賢)
    작성일
    10.07.12 10:14
    No. 2

    프레이르가 무슨 말을 할지 정말 궁금하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0 요호이
    작성일
    10.07.12 13:54
    No. 3

    오늘도 잘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경천
    작성일
    10.07.12 19:37
    No. 4

    하아 재밌네요. 하나 같이 속에 칼 안자루 안쥐고 있는 놈들이 없네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1 Enya
    작성일
    10.07.13 19:34
    No. 5

    아 재밌네요ㅠㅠㅠㅠㅠ 다음편이 궁금해 죽겠습니다!!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6 그램린
    작성일
    10.07.23 11:03
    No. 6

    말 몇마디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그건 나이먹은 사람이 아는듯 하군요
    그저 그럴수도 있겟구나 정도면 될 것 같은데
    무리 하시는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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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3 장한별
    작성일
    10.07.26 23:24
    No. 7

    잘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뭔가 이상합니다.
    이제까지 잘 이끌어 오셨는데 로딤체프공작의 묘사가 너무나 어색합니다. 속마음까지 묘사하려고 하다보니 그런듯 합니다.
    그냥 공작의 속마음을 없애고 겉모습이나 리처드대공의 짐작으로 하는것이 자연스러울듯 합니다.
    주제넘은 참견에 죄송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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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 Stellar
    작성일
    10.08.03 15:26
    No. 8

    댓글에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이 부분에서 고민이 많습니다. 더욱 자연스럽게 고쳐야겠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9 설사맛사탕
    작성일
    10.09.02 14:32
    No. 9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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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2 다훈
    작성일
    10.09.08 00:06
    No. 10

    자 여러분이 결혼을 했다.
    그런데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
    어느날 언 넘이 그걸 대자보로 아파트벽에 붙였다.
    부정 상대는 말할 것도 없고 붙인 그넘은???

    대공이 여기 온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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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9 은하계
    작성일
    10.09.26 15:43
    No. 11

    연륜이라는 부분이 좀 더 고려되야 할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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