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춤을 원하는 대로 쳐보시죠
그 말에 민망한 듯 김수정 과장은 고개를 떨궜다. 부하직원이 졸고 있는지도 모르고 열정이 어쩌고저쩌고했으니.
하지만 이서준은 절대 혼을 내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내친김에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주기로 했다.
“김수정 과장.”
“네, 실장님.”
“앞으로 부하직원이 할 수 있는 업무는 전부 부하직원들에게 맡기세요. 책임자는 말 그대로 책임을 지는 자리입니다. 쉽게 말해 일은 밑에서 하고, 책임은 위에서 지는 겁니다. 이말 명심하세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지만 이쯤 해두기로 했다.
“네.”
눈을 돌려 세상 물정 모르고 졸고 있는 직원들을 쳐다봤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해는 했다. 하지만 꼴 보기 싫은 것도 사실이었다.
“자, 받으세요.”
실장급부터 나오는 법인 카드를 김수정 과장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적잖게 당황스럽다는 표정이다.
“뭐합니까? 받으라니까.”
“실장님, 갑자기 웬 법인 카드예요?”
“그만 정리하고 여기 있는 직원들과 식사나 하러 가세요. 한우 먹으러 가자고 하면 웬만해서는 전부 갈 겁니다. 그래도 가기 싫은 직원이 있을 수 있으니 부담 없이 빠지고 퇴근할 사람은 퇴근시키고요. 금액은 얼마가 나오든 상관없으니 신경 쓰지 말고요.”
말했듯 굳이 혼을 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김수정 과장 입장에서는 혼이 나다가 갑자기 한우 회식을 하게 생겼으니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기분은 좋은 듯 금세 미소를 짓는다.
밖으로 향하자 껌뻑껌뻑 졸고 있던 직원들이 언제 깼는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영업팀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통로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현재시간 오후 6시 40분, 서서히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지금 출발하면 시간이 얼추 맞았다.
아반떼 문을 열고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경운기 같은 소리가 나며 시동이 걸리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
근데 차라는 것이 오래 타다 보니 은근히 정이라는 것이 들어 바꾼다 바꾼다 하면서도 계속 끌고 다니게 된다.
하지만 이사가 되면 임직원 품위유지라는 것도 있으므로 바꾸기는 해야겠다.
주차장을 빠져나와서 약속한 역삼동 르네상스 호텔로 향했다.
최영우 이사는 이미 호텔에 도착해서 호텔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며 손을 내밀었다.
“최영우 이사님 맞으시죠? 제가 늦었습니까?”
“아닙니다, 저도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손을 맞잡아주며 인사에 응해주었다.
자리에 앉아 직원을 불러 음료를 주문하고 잠시 형식적인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음료가 나오고 한 모금 목을 축인 다음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알고 있는 게 맞다면 이사님은 자수성가로 힘겹게 삼심보험사 지분을 얻은 것으로 아는데, 맞습니까?”
“예상은 했지만 정말 저에 대해서 많이 아시네요. 아까 통화할 때 김정우 비서인가요? 그분에게도 말했지만 전 삼심보험사에 지분이라고 해봤자 0.1%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주가가 많이 하락해서 가치가 더 떨어졌지요.”
계속 자신은 힘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아 경계를 단단히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은 정확했다.
‘양 회장이 한번 떠보라고 보낸 사람일 수도 있어. 쉽사리 속내를 보여서는 안 돼.’
현재 주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손짓하며 이유를 말해주었다.
“현재 삼심보험사의 주가 가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식은 언제나 꿈을 먹고 올라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의 비서를 통해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주가는 곧 오를 겁니다. 왜냐? 제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이서준 실장님이 어떻게 주가를 끌어올린다는 겁니까?”
“오늘 삼심보험사 주가 마감을 확인하셨나요?”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한 표정이 흐릿하게 지나갔다.
“확인해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하락세는 멈췄습니다. 현재 보합 상태죠. 주가는 언제나 어떤 이슈로 인해 하락과 상승을 반복한다는 것쯤은 이사님도 잘 아실 리가 생각합니다. 그러니 보합세는 오래가지 않을 겁니다. 이제부터 어떤 이슈가 나오느냐에 따라 상승이냐 하락이냐가 결정될 겁니다.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세요. 전 말입니다, 다음에 어떤 이슈가 나올지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말했듯 제가 이슈를 만들어낼 테니까요. 바로 명일 기자회견을 개최할 겁니다. 그 자리에서 왜 주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는지를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밝힐 겁니다.”
“굳이 지금은 밝히지 않는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무언가를 공개한다고 하는데 말을 안 해주니 궁금할 수밖에 없다.
“제가 지금 말하지 않는 이유는 어차피 말을 해봤자 믿기 힘든 얘기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이사님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주가를 끌어올리지 못하면 지금부터 제가 할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다만 제가 약속대로 주가를 반등시켜놓는다면 제게 힘을 실어주세요. 이사님이 가지고 있는 그 많은 우호지분을 활용해서.”
말하지 않을 이유 따위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다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를 더욱 자극해 흥미를 유발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뻔한 얘기도 조금 흥미롭게 던졌을 뿐이다.
그래야 최영우 이사 이 양반 입에서 약속을 받아낼 수 있을 테니까.
예상대로 이번에도 흥미를 느꼈는지 반응을 보였다.
“그것참 흥미롭네요. 당신이 주가를 끌어올리지 않으면 나로서는 손해 볼 것도 이득을 볼 것도 없고. 대신 주가를 반등시켜놓으면 힘을 실어달라?”
“맞습니다.”
“그나저나 절 다시 사내이사로 만들어놓을 계획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일단 그것부터 들어본 다음에 결정하도록 하죠. 참고로 이미 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 저와 현재 삼심그룹 양 회장과는 아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도 쉽지 않을 거라는 의미였다.
이서준은 아주 간략하게 계획을 말해주었다. 물론 세부적인 계획이 더 있었지만, 굳이 그런 것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사님이 양 회장과 사이가 안 좋다는 부분이 바로 제가 이사님께 가장 먼저 연락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양 회장이 왜 삼심보험사에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몰아넣었는지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 계획은 이렇습니다. 현재 양 회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이사들은 주류에 속하고, 아닌 자들은 비주류에 속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비주류에 속한 이사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이 바로 삼심보험사라는 겁니다.”
“자, 잠깐만요! 그러니까 지금 비주류의 반란이라도 일으키자 뭐 그런 겁니까, 이서준 실장?”
“현재 삼심보험사 이사들 지분으로만 치자면 거의 주류나 비주류나 대등합니다.”
“그러니까요? 대등한 거지 비주류가 이긴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 않습니까?”
충분히 의문을 품을만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서준은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가 깜짝 놀랄만한 대답이.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어 대답했다.
“중심의 축이 한쪽으로 기울게끔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바로 제가 말입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혹은 양 회장이 본격적으로 움직여 피해를 보게 되더라도 이사님이 다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왜냐? 제가 앞장서 있을 테니까요.”
“앞장선다? 그럼 당신이 삼심보험사 사장이라도 되겠다는 겁니까?”
“바로 그겁니다. 이사님은 원하는 바를 얻으세요. 대신, 가장 맛있는 열매는 제가 먹겠습니다. 그 안에 독이 들었든 꿀이 들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마치 오늘만 사는 사람 같네요.”
“가장 위험수를 떠안은 사람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 자리가 벼락 끝에 달린 등불이라는 건 알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럼요. 그러니 엘티그룹 집안사람인 강미리 사장이 앉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도 앉지 않으려는 자리 제가 한번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그러니 다시 말하지만 우호지분을 활용해 힘을 실어주세요.”
가식도 전혀 없고, 이건 뭐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가식을 보였다면 양 회장이 보낸 사람이 한번 떠보려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하는 걸 보니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간다.
‘양 회장이 버젓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런 양 회장을 한번 자극해 보겠다? 하긴, 나로서는 이 사람 말마따나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지. 나쁠 거 없네.’
자신에게 아무런 타격이 없다는 계산이 들자 망설일 이유가 없다.
“좋습니다, 이서준 실장. 전 한발 물러나서 등불이 꺼지지 않게 조금이나마 바람막이가 되어줄 테니, 어디 한번 칼춤을 원하는 대로 쳐보시죠.”
삼심보험사에 피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비주류가 주류를 몰아내는 전무후무한 피바람이.
그리고 그것은 곧 양 회장을 향한 도전이기도 했다.
다음날 오전 10시,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기자회견을 위해 서둘러 회사에서 나와 김정우와 함께 르네상스 호텔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올라갔다.
기자회견이 진행될 곳은 스위트 룸이었다.
어제 자신에 관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실렸기에 생각보다도 많은 언론 기자들이 참석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회견장 안으로 들어서자 기자들이 사정없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며 찍어대기 시작했다.
번쩍거리고 찰칵찰칵하는 소리가 쏟아졌다.
그것에 더해 웅성거리는 소리까지,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긴 테이블에 놓인 수많은 마이크가 오로지 한 자리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발언하기 위해 마이크를 조금 당겨서 입으로 가져오자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더욱 시끄럽게 들려오며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바로 발언하지 않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뜸을 들였다.
조용해지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떼 발언을 시작했다.
“일단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참석해주신 모든 언론 기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자리를 흔쾌히 제공해주신 호텔 관계자분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그러곤 주변을 둘러보며 반응을 확인했다.
어느새 모두 숨을 죽이고 오로지 자신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전보다 목소리에 힘을 실어 발언을 이어갔다.
“다들 정말 바쁘실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전할 말은 총 세 가지입니다.”
너무도 당당한 말투와 태도.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정우가 오히려 긴장되는지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 긴장도 안 하고 저렇게 말을 잘할 수 있을까? 진짜 서준이는 대단한 것 같아.’
- 작가의말
읽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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