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이서준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 주방으로 가서 밥솥에 있는 밥을 펐다. 그러자 임진호가 센스 있게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을 꺼냈다.
“진호 너도 먹을 거지?”
“당근이지.”
그들은 식사하면서 못다 한 대화를 이었다.
“사람이 언제 발끈하는지 알아?”
“글쎄?”
임진호가 허겁지겁 밥을 먹으며 대답했다. 그런 녀석을 보며 이서준이 알려주었다.
“반론이야.”
“반론?”
“그래. 자기주장에 누군가가 반론을 제기할 때 사람은 누구나 발끈하게 되어있어. 근데 자기보다 못났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반론을 제기한다면 반응은 배가 되지.”
“그래서 서준이 네가, 양병현이 무조건 걸려들 거라고 말한 거였구나?”
정작 중요한 얘기는 지금부터였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념, 철학. 그것을 건드리면 그 누구라도 발끈할 수밖에 없어. 양병현이 가지고 있는 신념은 항상 자기가 동생들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있다는 거야. 양 회장도 그런 면에서는 똑같아. 자신이 항상 삼심그룹 회장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양 회장을 어떻게 자극할 건데?”
“바로 그거야. 항상 자신이 삼심그룹 회장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믿음. 난 그런 양 회장의 신념을 건드릴 거야. 아마 양 회장 성향으로 봤을 때, 과거 양기필이 집 앞에서 봉변을 당했을 때도 이사진들을 의심했을 게 틀림없어. 분명 자신의 주거지를 잘 아는 인물의 소행으로 생각했을 테니까. 양 회장은 경찰에 신고해서 일을 키우는 대신 조용히 사람을 시켜서 사건과 연루된 이사가 있는지 알아봤을 거야. 하지만 연루된 사람이 없으니 아무것도 나온 게 없었을 테고, 그렇게 흐지부지 사건이 덮어지기는 했지만···. 한번 자라난 불씨는 쉽사리 꺼지지 않는 법이지.”
“그래서 서준이 네가 일부러 양 회장 저택 앞에서, 양기필을 건드린 거였구나?”
고개를 살짝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근데, 서준아. 양기필 그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아니야, 진호야. 난 그 사건을 다시 부각하려는 게 아니야. 양 회장은 지금도 충분히 이사진들을 의심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거야. 내가 하려는 건 따로 있어.”
이서준은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최정만 기자였다.
“아저씨, 저예요. 부탁할 게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두 가지만 해주셨으면 해요.”
-그러니? 뭐든지 말해 보렴?
“일단은 기사 하나만 써주셨으면 해요. 양 회장의 반응이 나올 수 있게 자극을 조금 줘야겠어요.”
-어떤 식으로 써줄까?
“양기필이 고등학생 신분으로 클럽을 들락거렸다는 타이틀로 기사가 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문란한 사생활이 포인트가 될 수 있게요. 그럼 분명 문제 아들을 삼심그룹 이사로 만들었다는 양 회장에게 비난이 갈 거예요.”
-그것보다 차라리 양기필 그놈이 일진이라고 하는 게 더 자극적일 것 같은데? 어떠냐?
“아니에요. 문제를 너무 키워서는 안 돼요. 양기필이 여론에 밀려 그룹에서 내려오기라도 한다면 곤란하거든요.”
-불씨를 크게 키우지 않으려는 이유라도 있는 거냐?
“네, 물론이에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일을 너무 키우면 아저씨가 다칠 수도 있어요. 양 회장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자니까요. 그리고 이건 제가 꺼야 하는 불씨기도 해요. 그러니 굳이 일을 너무 크게 키울 필요가 없어요.”
최 기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수긍했다.
-알겠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뭐냐? 내가 해줘야 하는 일이 두 가지라면서?
“조만간 고깃집에서 봤으면 해요.”
-뭐? 고깃집? 서준이 너 고기가 먹고 싶은 거냐?
“아니요. 그곳에서 사건이 벌어질 거예요.”
-그때는 어떤 기사를 써주면 되는 거냐?
“거짓 없이, 그 자리에서 본 그대로 기사를 써주시기만 하면 돼요. 관건은 그때는 양 회장에게 호의적인 기사가 나가야만 한다는 거예요.”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기사를 먼저 내보내고, 그다음에 다시 띄워준다?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하는 이유가 뭐냐?
“그렇게 해야 아저씨가 다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의 존재를 양 회장이 분명하게 알 수 있을 테니까요.”
통화를 끝내고 전화기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임진호가 궁금하다는 듯 묻기 시작했다.
“양 회장에게 악의적인 기사가 나간다고 해도, 양 회장이 이사진들이 그런 기사를 내보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아니, 양 회장은 틀림없이 이사진들 소행이라고 생각할 거야. 말했듯 이미 의심의 불씨가 자라난 상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웬만한 언론사에는 돈을 다 뿌려놓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사가 나갔다는 것은 이사 중에 누군가가 악의를 갖고 움직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야. 왜냐? 그런 기사가 나가서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이 바로 삼심그룹 회장 자리를 노리고 있는 이사들 중에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누가 가장 이득을 보냐를 생각하게 되어있거든.”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이서준의 머릿속에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조금씩 꺼내 보일 뿐이다. 그런 이서준을 보며 임진호가 감탄했다.
“그렇구나! 가장 이득을 본 놈이 범인일 확률이 높으니까, 양 회장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는 말이지? 역시 이서준이야, 대단해!”
녀석은 감탄하는 와중에도 밥그릇에 밥을 크게 베어먹었다.
이서준이 하려는 내부적인 자극은 쉽게 말해 악의적인 기사였고, 외부적인 자극은 반대로 호의적인 기사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이 문제를 일으키고 자신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므로 양 회장에게 인정받는다. 간단한 듯하지만 절대 아무나 구사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특히 삼심그룹 양 회장을 상대로는 더더욱.
최 기자는 이서준에게 연락을 받은 즉시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기사는 명일 헤드라인으로 실렸다.
[최근 삼심그룹 상무이사가 된 양기필 이사, 학생 신분으로 클럽 들락거렸다?]
기사가 실리자 다른 언론사들도 덩달아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양기필 이사의 문란한 사생활!]
[삼심그룹 양 회장은 알고 있었나?]
[학생 신분으로 그룹 이사를 맡은 것부터가 난센스.]
누군가가 먼저 총대를 메기만 하면 언제나 함께 돌진하는 것이 기자들의 습성이었다. 문제가 생겨도 최초 보도한 사람만 다칠 테니까.
그 시각 양 회장은 이사진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작은 회의는 회장 집무실에서 진행이 되었지만, 큰 회의나 이사진 회의는 회의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양병현 상무가 이번에도 한 건 제대로 했다지요? 양 회장님은 좋으시겠습니다. 그렇게 든든한 아드님을 두셔서요.”
“그놈이 어렸을 때부터 뭐든지 뛰어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도 좀 놀랐습니다. 스페인에서 1조나 되는 사업을 따내고 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하하하!”
양 회장은 기분이 매우 좋은 듯 소탈하게 웃었다. 공적인 자리든 사적인 자리든 자기 자식을 띄워주는데 싫어할 부모는 없었으니.
양병현은 영업본부를 총괄하는 상무였다. 그는 양 회장의 첫째로서 그룹 내에서도 상당히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원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그가 굳이 힘들다는 영업본부를 총괄하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그 자리가 바로 양 회장의 후임자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자리였으니까.
“두고 보세요. 그놈이 앞으로 삼심그룹을 지금보다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 나갈 테니까.”
“그럼요, 회장님. 저희들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들 안 그렇습니까?”
양 회장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강 이사가 맞장구를 치며 분위기를 유도했다. 그 모습에 양 회장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회의는 이른 시간에 끝났다.
여전히 기분이 좋은 듯 양 회장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김 실장이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로 다가가 버튼을 눌렀다. 문은 곧바로 열렸다.
“저기, 회장님.”
“음? 뭔가?”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양기필 도련님의 기사가 포털사이트에 올라왔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김 실랑이 태블릿 PC를 내밀어 화면을 보여주었다.
“이, 이게 뭐야? 감히 어떤 놈이 이딴 기사를 올린 거야?”
“회장님, 문제는 한 언론사가 아니라 거의 모든 언론사에서 양기필 도련님의 문란한 사생활에 관해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는 겁니다.”
“당장 막아! 이사들 입에 오르내리기 전에 당장 막으라고!”
양 회장이 격분해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김 실장은 곧장 각종 언론사 지점장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삼심그룹 광고 다 빼도 좋다는 겁니까? 그게 싫으면 지금 당장 내리시죠? 양기필 상무에 관한 기사 전부 내리라고!”
김 실장은 포털사이트에 올라간 기사를 최대한 빨리 내리겠다는 확답을 들고 나서야 회장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회장님, 올라간 기사는 전부 금일중으로 내리기로 확답을 받았습니다. 다만, 블로그에 올라간 것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블로그는 개인들이 올린 거라···.”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 수는 있었지만 그만한 일로 소송까지 가게 된다면 오히려 일을 키우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일반인들에게 너무 쉽게 돈을 운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봐, 김 실장.”
엘리베이터 안에서 격분한 것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
양 회장은 곰곰이 생각해보니 올라간 기사나 블로그만 내린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네?”
“기필이 그놈이 그룹 상무를 달자마자 그런 기사가 나왔다는 게 말이야. 좀 이상하지 않냐고?”
“도련님이 그룹에 들어왔으니, 언론사 지점장들이 돈이라도 더 뜯어낼 심보로 그런 기사를 내보낸 게 아닐까요?”
충분히 생각해 볼 일이었다. 하지만 양 회장은 생각이 달랐다.
“아냐. 가내들이 뭐하러 그런 무리수를 두겠어? 굳이 안 그래도 꼬박꼬박 돈을 받아먹고 있는 것들이. 내가 볼 땐, 아무래도 내부에 적이 있는 것 같단 말이지.”
“혹 이번에도 이사진 중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회장님?”
“저번 기필이 녀석 집 앞에서 봉변을 당한 것도 그렇고. 그때 분명히 이사진 쪽은 아니라고 했지? 그거 확실히 알아본 거 맞아?”
“네, 회장님. 이사들 중에 아무도 양기필 도련님을 언급한 인물은 없었다고 합니다. 수행비서들에게 확실히 그렇게 전달받았습니다.”
이사들에게 붙여놓은 비서들을 언급한 말이었다.
“우리가 하는 걸, 그들이라고 안 할 거라는 법 없잖아?”
“그 말씀은···.”
“그래, 그놈들이 기필이 녀석에게 사람을 붙여놓을 수도 있다는 소리야. 그들도 알겠지? 기필이 녀석이 내 자식 중에 가장 모자란 녀석이라는 걸.”
“인사팀에 이상한 낌새가 있는지 함 알아볼까요?”
“아니야, 그보다 좀 더 확실하게 해야겠어. 기필이 녀석 수행비서는 인사팀에서 뽑지 마. 외부 사람을 들여야겠어. 그게 안전할 거 같아.”
“알겠습니다, 회장님. 마땅한 사람이 있는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양 회장이 내부의 자극으로 인해 이서준의 뜻대로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이서준은 양기필을 데리고 고깃집으로 향했다.
“서준이, 네가 사준다고?”
“그래. 저번 기필이 네가 맛있다는 고깃집으로 가자. 거기 괜찮더라.”
양 회장이 외부에서 사람을 찾기 시작했으니, 이서준은 본격적으로 두 번째 자극을 주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 작가의말
읽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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