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 눈치채지 못하게 어서 나오세요!
째깍째깍!
사무실 벽에 걸린 초심이 돌아가고 있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다.
이서준은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서울 시각이 오후 4시니 이집트 수도인 카이로에서는 오전 9시를 지나고 있을 것이다.
‘지금쯤 일어났겠지?’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집무실에 있는 전화기로 임진호에게 연락했다.
-그래, 서준아?
“자고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일어나 있었네.”
-근데 왜 휴대폰으로 연락하지 않고 호텔로 연락한 거야?
“지금 이 전화기도 사무실 전화야.”
-뭐? 그럼 보안팀에 걸릴 수 있는 거 아냐?
“맞아. 걸리라고 일부러 사무실 전화로 네가 묻고 있는 호텔로 연락한 거야.”
불필요한 얘기는 접어두고 본격적으로 전화를 건 목적을 말할 때다.
-서준아, 게시물은 언제 올릴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연락한 거야. 양병현 쪽에서 의심하지 못하게 몇백에서 몇천억을 투자하고 싶다는 식으로 게시물을 올려.”
-그런 게시물까지 올라가면 녀석들 완전히 속아 넘어가겠는걸.
“그리고 진호야, 곧 박창신 실장이 네게 연락을 취할 거야.”
-그럼 내가 호루스인 척하면 되는 거라?
“아니, 넌 아랍어도 잘 모르잖아? 진호 넌 그냥 대리인을 맡은 통역사인 척하면 돼.”
-통역사?
“호루스라는 인물은 세계인을 상대로 사업하는 사람으로 설정이 되어있어.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 통역사가 있다는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 이미 우리와 계약을 추진하고 있다고 되어있으니까, 네가 그 브로커 역할 겸 통역사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돼.”
-호루스랑 직접 통화하고 싶다고 하면? 그땐 어떻게 하지?
“바쁘다고 해.”
-뭐? 그러다 계약을 안 한다고 하면···?
“그럴 리가 없어. 오히려 진호 네가 계약할 수 없다고 빼. 이미 양기필 측과 계약하기로 합의가 된 상황이라고 하면서 말야. 거절하면 할수록 그쪽에서는 안달이 날 거야. 그럼 더욱 초조해지겠지? 그렇게 되면 분명 돈을 더 준다고 나올 거야.”
-그때 돈을 더 받아내라는 소리지?
“아니, 틀렸어. 그쪽에서 계속 사정하면 못 이기는 척 그때 계약해줘. 대신 자신들은 대한민국 기업인들과 좋은 파트너를 원하는 거지 수익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고 해. 그러니 돈은 양기필 측에서 받기로 한 3,500억만 받겠다고 해. 그리고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었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해, 양기필 측에서 너무 까다롭게 확인절차를 하려고 해서 우리 대표님께서 상당히 성가셔한다고. 그래서 어느 쪽이든 원금을 먼저 입금하는 쪽과 계약을 하기로 했다고 해.”
-만약 묻지 않으면 어쩌지? 그리고 돈 더 준다고 하면 그냥 받으면 장땡 아니라?
“묻지 않아도 먼저 돈을 입금한 쪽과 계약할 거라는 말은 해. 그리고 돈을 더 받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있어. 돈을 조금 더 받는다고 마음이 바뀔 사람이 뭐하러 시장가보다 반이나 저렴하게 토지를 내놓겠어? 앞뒤가 안 맞잖아? 그리고 준다는 돈을 안 받음으로써 그쪽에서는 의심을 덜 할 거야.”
-하긴, 그렇긴 하네. 어느 사기꾼이 준다는 돈을 마다하겠어.
“바로 그거야. 우리의 목표는 돈을 받아내는 것을 넘어, 그들이 신고를 못 하게 하는 거라는 걸 잊으면 안 돼.”
-신고하기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숨으면 되는 거 아니라? 어차피 서준이 넌 굳이 숨지 않아도 되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서준은 생각이 달랐다.
“진호야, 그렇지가 않아. 아무리 계좌 명의가 우리가 아니라고 해도 3,500억이나 되는 자금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세탁을 해야 해. 그들이 사기를 당했다고 신고하는 순간 그 자금은 우리가 만져보지도 못하고 다시 고스란히 그쪽으로 넘어갈 거야.”
-그럼 어쩌냐? 서준이 네가 지금까지 계획한 일이 헛수고가 되는 거잖아?
“그러니 신고를 못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만약 정말로 그들이 신고하려고 하면, 그전에 양 회장에게 그 사실을 알릴 생각이야. 그럼 최소한 외부로 새어나가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말했듯 우리에게 최고의 베스트 결과는 양병현이 혼자서 묻고 가는 거야.”
-아, 알았어.
이서준은 통화를 끝내고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등을 기대었다.
돈을 받아내기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자신이 속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일부러 회사 전화로 통화까지 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까지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혀를 내두를 것이다.
‘아버지, 이제 시작이에요. 이제 조금 더 과감하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걸 뺏어 올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도 할 수 없었던 회사 내 불합리를 모조리 뜯어고칠 생각이에요. 하지만 그러려면 절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아버지도 잘 아시죠? 부디 이해해주시길 바라요.’
회사 내 불합리를 바꾸고 싶다는 것은 그의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집무실 밖에서는 가만히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는 그를 보며 직원들이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이서준 실장,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김인혁 대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옆자리에 있던 고상태 대리가 의자까지 끌고 와서는 궁금하다는 듯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저 봐! 가만히 의자에 기대고 있잖아? 눈까지 감고서 말야.”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그냥 피곤해서 쉬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냐, 지금까지 이서준 실장이 쉬는 거 봤어?”
“그러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서준 실장이 AI도 아닌데, 쉴 수도 있지.”
“그게 아니라니까. 만약 정말 쉬려고 저러고 있는 거라면 블라인드라도 쳤겠지.”
“그럼 왜 저러고 있는 건데?”
“내가 볼 땐, 분명 큰 충격을 받은 거야. 그러지 않고서는 저렇게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 분명 무슨 일이 틀어진 게 틀림없어.”
“일이 틀어지다니? 대체 무슨 일이?”
“그거야 나도 모르지.”
김인혁 대리는 항상 말에 핵심이 없었다. 물론 고상태 대리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듯했다.
“혹시 그거 아닐까?”
“고 대리, 뭐 아는 거라도 있는 거야?”
“얼마 전 회계팀 감사했잖아? 그때 영업본부와 관련된 서류는 전부 이서준 실장이 맡았으니까, 그것과 관련된 게 아닐까?”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서준 실장이 영업본부와 관련된 서류에서 뭐라도 건졌는데, 그걸 터트리자니 양병현 이사가 걸리고, 그냥 덮어주자니 자신의 신념에 걸린다는 소리야?”
“그럴 수도 있다는 소리지. 지금까지 이서준 실장이 무슨 일을 함에 있어 주저하거나 망설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듣고 보니 김인혁 대리는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지금 이대로 있을 때가 아니다.
“고 대리, 잠깐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갑자기 어딜 가는데? 이봐, 김 대리!”
고상태 대리가 부른 것도 무시한 채 서둘러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양병현 이사의 라인을 탈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도저히 사무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김인혁 대리는 그런 생각으로 입이 싱글벙글해져서는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가만, 대리급인 내가 찾아간다고 양병현 이사가 과연 만나나 줄까? 오히려 영업본부 사람들만 이상하게 보는 거 아냐?’
영업본부는 30층이었고 양병현이 있는 곳은 35층이라 엄연히 별도의 층이었다.
그럼에도 양병현이 어떤 인물인지 소문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대면하기가 꺼려졌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일단 올라탔다.
양병현에게 직행하려면 35층을 눌러야 하고, 박창신 실장을 찾아가려면 30층을 눌러야 한다. 하지만 그는 29층을 눌렀다.
29층에는 회계팀이 있었다.
일단 친분이 있는 회계팀 최종협 팀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 찾아가면 회계팀 직원들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최 팀장을 불러내기로 했다.
“최 팀장님, 접니다. 감사팀 김 대리요.”
-뭐? 누구? 어디서 뭐 하는 미꾸라지 새끼라고?
“아이,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저도 어쩔 수 없이 이서준 실장 따라서 간 거 뻔히 다 아시면서?”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잘나신 감사팀 직원도 아닌데···.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감사할 때보니까 김 대리 자네가 가장 적극적으로 서류를 챙기던데, 아주 눈꼴 사나워서 혼자 보기 아까웠어.
계속 비아냥거리는 최종협 팀장을 달래주는 것도 잠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팀장님, 지금 그런 얘기할 때가 아닙니다. 급히 드릴 말이 있으니까 잠시만 나와 보세요.”
-왜 자네가 직접 이리로 오지그래? 여기 있는 우리 애들이 자네 얼굴 보면 얼마나 반가워하겠어? 혹시 알아? 저번에 못다 챙긴 서류라도 다시 자네 손에 올려줄지.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라니까요! 양병현 이사에 관한 얘기예요, 팀장님.”
-뭐? 누구?
그제야 분위기 파악을 한 듯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사라졌다.
“양병현 이사요! 지금 엘리베이터 잡아놓고 있으니까 다른 직원들 눈치채지 못하게 어서 나오세요!”
한창 바쁠 시간대라 엘리베이터 안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어, 아, 알았어.
몇 초 지나자, 멧돼지처럼 생긴 최종협 팀장이 똥배를 출렁거리며 헐레벌떡 사무실에서 튀쳐나왔다.
마치 누가 보면 사무실에 폭탄이라도 설치되어 생존을 위해 뛰어오는 사람처럼 보였다.
“팀장님, 여기요.”
“어, 김 대리!”
숨을 헐떡거리면서 엘리베이터 안에 올라탔다.
그러자 김인혁 대리가 곧바로 옥상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최종협 팀장은 여전히 진정이 안 됐는지 멧돼지가 숨이 차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휴~ 나 죽네.”
“팀장님 괜찮으세요?”
“그나저나 말해봐? 양병현 이사 얘기란 게 대체 뭐야?”
“잠시만요. 일단 올라가서요.”
“어? 그, 그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들은 파라솔이 펼쳐진 테이블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주변에 다른 직원들이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엘리베이터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었다.
“이제 진짜 말해봐? 만약 별거 아니면 자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날 미치도록 운동시켰으니까.”
운동이라면 질색하는 양반이라 그럴 만도 했다.
“제가 언제 싱거운 소리 한 거 봤어요?”
“봤지. 셀 수도 없이 많이 봤지.”
“에이~! 이번엔 아니라니까요. 생각 같아선 제가 양병현 이사와 대면해서 점수 좀 따고 싶은 거, 팀장님 생각해서 연락한 거구만. 저번 감사 일도 있고 해서 팀장님께 죄송해서요.”
“그러니 그만 뜸 들이고 말해? 대체 뭐야?”
“대신 양병현 이사에게 제 얘기도 좀 해주셔야 해요. 저한테 들었다고 꼭 전달해주셔야 해요?”
“알았다니까!”
- 작가의말
읽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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