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김혁준 과장에게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보는 눈이 많았기에 일단은 업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김인혁 대리가 자료를 챙겨 들고 나왔다.
“실장님, 자료 다 챙겼는데요.”
“영업본부 자료는 제 자리에 가져다 놓고. 나머지는 김인혁 대리하고, 고상태 대리가 맡아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밑에 있는 직원들을 먼저 보냈다. 그러고 잠시 김혁준 과장의 표정을 살폈다. 망연자실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럴 거 없어. 어차피 이건 회계팀을 베기 위해 휘두른 칼이 아니니까. 나중에 다 설명해줄게.”
“정말이죠, 실장님?”
“내가 말했잖아? 자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그를 달래주듯 가볍게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근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오타로 일어난 단순한 실수로 문서작성이 잘못된 거라면 이렇게까지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걱정한다는 것은···. 느낌이 별로 좋지가 않다. 부디 지금 생각하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이서준이 회계팀을 감사했다는 것은 금세 다른 부서 사람들 입에까지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특히 소문에 민감한 홍보팀 사람들이 유난히 관심을 보였다.
“감사팀이면 계열사만 감사하면 되지, 본사에 있는 회계팀은 왜 털어갔데···?”
“그야, 모르지. 그래도 이유 없이 했을 리는 없고, 뭐라도 사전에 나왔으니까 하지 않았겠어?”
“물론, 그렇긴 하겠지만···. 이거 원 감사팀 무서워서 살겠나.”
“듣자 하니 이서준 실장이 회계팀을 치려는 게 아니라, 영업본부를 치기 위해 감사했다는 말이 있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감사팀 김 대리 있잖아?”
“김 대리가 누구야?”
“김인혁 대리 말이야.”
“아, 생각났다. 그 뺀질뺀질하게 생긴 인간?”
“그래. 그 친구가 그러던데, 이서준 실장이 영업본부 자료만 자기 자리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데. 그게 무슨 말이겠어? 다른 건 페이크고 영업본부만 제대로 건드려보겠다는 거 아니겠어?”
홍보팀 정윤호 대리는 나름 눈치가 빠른 인간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고 있다.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건가?”
반면에 홍보팀 박혁민 대리는 눈치가 별로 없었다.
그들은 대리급들 중에서도 나름 경력이 높은 편에 속했다.
특히 정윤호 대리라는 인간은 본사 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내곤 했다. 알아낸 정보들이 하나같이 실속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물론 이서준은 이 모든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입이 가벼운 김인혁 대리에게 그런 말을 한 것부터가 계산된 행동이었다.
한편 회계팀을 감사했다는 것을 넘어 그것이 영업본부를 향한 칼이라는 것을 양병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그놈이 대체 뭘 찾아내려고 그 난리를 떠는 거지?”
“글쎄요. 하지만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이사님. 딱히 걸릴 만한 자료가 그곳에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양병현은 그 정도 말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묘하게 이서준이라는 인간이 거슬리고 어떻게든 뭔가를 찾아낼 것만 같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놈을 어떻게 하고 싶다. 하지만 양 회장을 생각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그러니 선뜻 움직이는 게 쉽지가 않다.
“그나저나, 박 실장. 그 아이가 말한 거 말이야.”
“김은정 비서가 말한 이집트 사업 말입니까?”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가 않아. 왜 하필 이집트 사업을 추진한다고 하는지, 박 실장이 한번 알아봐. 회장님께서 양기필 그놈에게 대체 무슨 일을 시킨 건지 말야.”
“알겠습니다.”
박창신 실장은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양병현이 다시 불러세웠다.
“만약에 말야.”
“네, 이사님.”
“회계팀에서 우리와 관련된 자료가 하나라도 나오면, 박 실장이 알아서 깨끗하게 정리해.”
꼬리를 자르라는 소리였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하나였다.
만약 이서준이 회계팀을 감사하지 않고 알아낸 자료로 영업팀을 건드리게 된다면 틀림없이 김혁준 과장이 다쳤을 거라는 것이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서준은 페이크 같은 감사를 먼저 감행한 거였다.
“알겠습니다, 이사님.”
박창신 실장은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회장실로 올라갔다. 그렇다고 양 회장을 보기 위해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비상계단으로 관능미가 넘치는 김주희 비서를 불러내기 위해 올라간 것이었다.
“자기, 나 화장실 좀.”
김주희 비서가 저번처럼 화장실을 핑계 삼아 비서 데스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왜 김 비서님은 매번 비상계단으로 나가면서 자꾸 화장실 간다고 핑계를 대는 걸까? 아무래도 수상하단 말야.’
김 비서를 보조하는 이민아 비서가 조금씩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세요, 박 실장님?”
“회장님께서 양기필 그놈에게 대체 무슨 일을 시킨 거지?”
“네? 무슨 일이라뇨?”
“분명 감사팀에서 해결하기 힘든 난제를 양기필이 해결했으니, 무슨 반응이라도 나왔을 거 아냐?”
“저도 잘은 몰라요. 다만, 김강호 실장에게 말하길 양기필 상무께 이제 큰일을 맡겨도 되겠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 같기는 했어요.”
“그 큰일이라는 게 대체 뭐야?”
“그것까지는 저도 몰라요. 회장실에 도청장치를 달아놓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상세하게까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박창신 실장은 그녀를 강압적인 눈빛으로 노려봤다. 그러자 그녀가 겁먹은 듯 뒷걸음질 쳤다.
“왜, 왜 이러세요? 거짓말 아니에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강압적인 눈빛이 어느새 음탕하게 바뀌더니 그녀의 깊은 가슴골과 골반을 훑기 시작했다.
“자꾸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거예요?”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여전히 그녀를 음탕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 순간 박창신 실장이 그녀의 늘씬한 허리를 강하게 낚아챘다.
“앙!”
순식간에 강한 힘이 허리에 가해지자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짧지만 야릇한 여자의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겁탈하거나 비상계단 안에서 어떻게 해볼 생각은 아닌 듯했다.
“다음번에는 조금 더 확실한 정보를 알아와. 그러지 않으면 당장 네년을 회사 밖으로 쫓아낼 테니까. 다시 술집에서 몸이나 파는 신세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똑똑히 기억하는 게 좋을 거야.”
“아, 알았어요. 그러니 이 손 좀 놓으세요.”
“양 회장이 왜 네 같은 년을 비서로 쓰고 있는지 잊지 마.”
“알았다고요!”
그녀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소리가 비상계단에 크게 울려 퍼져 나가더니 급기야 비상문 밖에 있는 이민아 비서의 귓가에까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이민아 비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반드시 비서 데스크에는 사람이 한 명은 남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규정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한 여자의 목소리를 들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겁이 많아 단번에 달려가지는 못하고 천천히 비상계단이 있는 비상문으로 향했다.
“혹시 김 비서님이세요?”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다시 한번 입을 떼려는 순간, 상당히 지쳐 보이는 김주희 비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김 비서님! 괜찮으세요?”
“어, 자기.”
그녀는 식은땀을 흥건히 흘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로부터 겁탈을 당한 여자처럼 보였다.
“정말 괜찮으세요, 김 비서님?”
“어. 괜찮아, 자기.”
“근데, 이런 곳에서 혼자 뭐하시고 계셨어요?”
박창신 실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이민아 비서로서는, 김주희 비서가 왜 식은땀을 흥건히 흘리고 추행을 당한 여자처럼 서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겁탈이나 추행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고 재빨리 비상계단으로 내려온 박창신 실장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아무것도 건진 게 없음에도 양병현에게 보고하는 것이 옳을지, 아니면 조금 더 구체적인 맥락을 알아보고 보고하는 것이 옳을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신속한 보고냐 정확한 보고냐의 문제였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어차피 그 큰일이라는 게, 이집트와 관련된 사업 얘기겠지?’
박창신 실장은 그렇게 단정해버렸다. 정확히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흘러가는 맥락상 자기 생각이 절대 틀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양병현을 찾아가 그렇게 보고했다.
“그럼 회장님께서, 정말 아무도 모르게 양기필 그놈에게 이집트 사업을 추진시켰다는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사님.”
“안 돼! 절대 그렇게 되게끔 해서는 안 돼! 양기필 그놈이 불과 얼마 전에 감사팀 난제의 문제를 해결했는데, 이집트 사업까지 따낸다면···.”
차마 양 회장의 후계자가 그놈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탁!
양병현이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졌다. 그러곤 오더를 내렸다.
“김은정이라는 아이에게 반드시 알아내라고 해. 양기필 그놈이 구체적으로 무슨 사업을 어디까지 추진했는지 말야!”
“알겠습니다, 이사님.”
다시 한번 오더가 떨어졌으니 움직여야 했다.
박창신 실장은 곧장 김은정에게 연락해서 최대한 빨리, 양기필이 무슨 사업을 어디까지 추진했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통화를 끝낸 김은정은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뭐야, 이 아저씨. 내가 무슨 자기 똘마니인 줄 아나? 왜 갑자기 명령조야?’
bar에서 봤을 때만 해도 나름 신사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이 다급해지니 서서히 본색이 드러난 것이다.
김은정은 앵두 같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 나름대로 기분 나쁠 때마다 나오는 습관성 행동이었다. 하지만 남들 눈에는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게 보였다.
“무슨 일 있어요, 은정 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김 대리님.”
속마음이 들키기라도 한 듯 살짝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나쳐 가려고 했다. 하지만 뺀질뺀질하게 생긴 김인혁 대리는 종처럼 그녀를 쉽게 보낼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떻게든 말이라도 더 걸고 싶다는 게 엿보였다.
“무슨 일 있으면 제게 말씀만 하세요. 웬만한 일은 제가 다 해결할 수 있거든요.”
그 소리에 김은정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대리 주제에 뭘 해결한다고. 하여튼 남자들이란 늙으나 젊으나 예쁜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김인혁 대리를 무시한 채 휴게실로 향했다.
그녀는 휴게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서둘러 이서준에게 보낼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박창신 실장이 적극적으로 이집트 사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음. 보나 마나 양병현 상무의 오더가 떨어진 듯함.]
메시지를 전송해서 보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메시지를 하나 더 추가했다.
[오빠, 박창신 실장에게 뭐라고 전하면 돼? 얼마짜리 사업이라고 할까? 천억? 이천억?]
- 작가의말
읽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고라 오타나 어색한 부분이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빠르게 다듬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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