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처음으로 대면한 순간
“젊은 친구가 겁이 없군.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르나 본데, 앞으로는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적반하장으로 박창신 실장이 오히려 큰소리다. 그는 이서준을 무시한 채 양기필을 바라보며 이제야 고개를 살짝 숙여 예의를 표했다.
“무례를 용서하시죠, 도련님. 상황이 매우 급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 그래요?”
양기필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근데, 어쩐 일이신지요?”
“양병현 이사님께서 급하게 도련님을 찾으십니다. 지금 당장 저와 함께 올라가셔야겠습니다.”
“지금요?”
“네, 지금 당장!”
억양에 다시 힘이 실렸다.
“지금···.”
그 모습에 이서준이 다시 나서려 하자 이번에는 양기필이 말리듯 그의 손을 붙잡고 속삭였다.
“서준아,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 그만해.”
양기필 녀석이 이렇게까지 말하면 이서준 입장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수긍하는 수밖에.
“전화로 부르셔도 될 것을 이렇게 박창신 실장님이 직접 오시고, 이거 괜히 저 때문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예전의 양기필이 아니었다. 나름 의젓하게 상황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그럴싸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큰형 양병현과 더불어 박창신 실장 또한 그에게는 상당히 두려운 존재였기에 나오는 본능에 가까웠다.
박창신 실장의 손에 이끌려 35층 양병현이 있는 집무실로 양기필이 올라갔다.
“순순히 부는 게 좋을 거야. 조사하면 다 나오게 되어있으니까.”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하지만 그런 차분함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형,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짜고 행동했다는 거야?”
“이 새끼가 진짜! 네놈도 호루스라는 놈이 사기꾼인 거 알고 있었잖아? 아니, 네놈이 그놈을 고용해서 날 물 먹인 거 아냐! 말해봐, 새끼야!”
“오해야, 형. 내가 뭐하러 그런 사람을 고용하겠어? 만약 정말 알았다면 뭐하러 그런 놈과 계약까지 하려고 했겠어? 나도 좀 전에 이서준 실장에게 들어서 안 거야. 정말이야, 믿어줘.”
양기필은 지금 자신이 왜 이런 변명을 늘어놓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큰형 양병현이 큰소리를 치니 무조건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양기필이 화를 낼 상황인데도 말이다.
“근데, 형. 우리 쪽에서는 아무도 호루스에 대해서 말한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안 거야?”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
“뭐?”
“아니, 궁금해서 말야.”
순간 양병현의 표정에서 당황함이 살짝 묻어났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박창신 실장이 거들고 나섰다.
“양기필 도련님, 감사팀에서 아는 정보를 저희라고 모르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그, 그건···.”
“지금 양기필 도련님은 저희 영업본부 정보통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네? 정말 그런 겁니까?”
확실히 양기필이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는 금세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 그건 아니에요.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박 실장님.”
큰형에게도 거듭 사과했다.
“미안해, 형. 내가 좀 주제넘었어.”
양병현이 또다시 호통을 치려고 하자, 박창신 실장이 말리듯 먼저 선수를 쳤다.
“이사님, 아무래도 양기필 도련님께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계셨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만 돌려보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치 부하직원을 다루듯 거만하기 짝이 없었지만, 양기필이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양기필이 돌아가자 양병현이 의문을 제기했다.
“기필이 그 덜떨어진 새끼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그렇습니다, 이사님. 그리고 만약 알았다고 해도 이서준 실장 손에서 처리된 일이 아닐까요?”
“그렇겠지? 기필이 그놈이 그런 생각을 해냈을 리가 없으니까.”
“일단 이서준 실장 집무실 통화내역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래, 보안팀에 연락해서 알아봐. 만약 그놈이 정말로 호루스라는 사기꾼과 계약을 할 생각이 있었다면 분명 집무실 통화로 전화한 기록이 있을 거야.”
반대로 한 번도 없다면 개인 전화로만 통화했다는 말이 되고, 그건 곧 서로 짜고 친 고스톱일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다.
“알겠습니다.”
박창신 실장이 돌아서 나가려고 하자, 양병현이 다시 불러세웠다.
“이봐, 박 실장.”
“네, 이사님.”
“그때가 언제지?”
“그때라고 하시면···?”
“왜 있잖아? 이서준 그놈이 통화 후 표정이 상당히 안 좋았다고 했을 때 말야.”
“보름 정도 된 것 같은데요.”
“회계팀 최종협 팀장에게 물어서 정확한 날짜 알아보고, 그날 이서준이 어디에 통화를 했는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이사님.”
엄연히 직원 사찰에 가까운 불법이었지만, 이제는 양병현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당하고 절대 그냥 먹어갈 수가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갚아줘야 한다.
그렇게 양병현은 제대로 이서준을 상대하기로 마음먹었다.
박창신 실장이 집무실에서 나간 지 정확히 2시간 후 다시 들어왔다.
“이사님,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날 이집트에 있는 호텔에 이서준 실장이 연락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 뭐야? 정말 그놈도 모르고 있었다는 거야? 가만히 있으면 그놈들이 당할 것을 우리가 선수 친 바람에, 우리가 당했다는 거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통화 내용까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은밀히 검찰 쪽에 연락해 볼까요?”
“아냐, 검찰은 안 돼. 언론은 속일지 몰라도, 회장님 귀에는 반드시 들어가게 되어있어. 이번 일은 우리 선에서 어떻게든 처리해야 해. 알아볼 다른 방도가 없는지 찾아봐?”
“그럼 일단 김은정을 불러서 물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애초에 그 아이에게서 호루스라는 말이 우리 쪽으로 흘러들어왔으니까요.”
같은 생각인 듯, 양병현이 소리쳤다.
“김은정, 그년을 당장 불러와!”
그 시각 김은정은 이서준과 대면하고 있었다.
옥상으로 그녀를 불러냈는데, 때마침 옥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에게 USB를 건네며 당부했다.
“저번에 녹취한 파일 불필요한 대화는 삭제하고, 필요한 부분만 남겨 놓았어.”
“근데, 오빠. 어차피 양병현에게 넘길 것도 아닌데, 왜 녹취하라고 했어?”
그걸 또 손수 편집까지? 김은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서준의 말을 끝까지 듣기 전까지는···.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양병현 쪽에서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정 안 되면 널 찾을 거야. 호루스라는 정보를 최초로 전달한 사람이 은정이 바로 너니까.”
“들은 대로만 전달했다고 잡아떼면 되는 거 아냐?”
“물론 그래야지. 하지만, 양병현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말뿐인 대답은 절대 믿으려고 하지 않을 거야. 네가 박창신 실장이 아닌 이상.”
“그럼, 어떻게 해?”
“그러니 이 USB를 그놈에게 넘겨. 그럼 믿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
“근데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따지면 뭐라고 그래?”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고 해. 나중에 문제가 되었을 때 그냥 말로 전달하는 건 소문을 퍼트린 정도로 볼 수 있지만, 당사자들 몰래 녹취까지 한 건 엄연히 불법이니까. 굳이 자신이 불법을 저질렀다고 밝힐 이유가 없었기에 말하지 않았다고 해.”
“그러니까 지금은 양병현 이사가 날 믿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내놓는 것처럼 말하라는 거지?”
“그래, 바로 그거야.”
그 순간 그녀의 휴대전화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박창신 실장인데.”
“받아봐.”
“응!”
그녀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금 당장 양병현 이사님 집무실로 오지.
“지금요?”
-그래, 지금 당장!
“아, 알겠어요.”
통화는 짧고 굵게 끝났다.
김은정은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역력했다.
“근데, 오빠? 이 인간 왜 나한테 성질이야? 기분 나빠!”
“빨리도 찾는군. 너무 기분 나쁘다는 내색 보이지 말고, 어서 가봐. 늦으면 더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알았어, 오빠.”
그녀는 양병현에게 가서 추궁을 당하다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건네는 모양새로 USB를 건넸다.
정확히 이서준이 시킨 대로 행동한 것이다.
양병현은 USB 녹음 파일을 듣고 더는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구구절절 말이 맞아떨어졌기에 의심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더 의심스럽기도 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그러게 박 실장, 내가 김은정 씨는 절대 의심할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아? 왜 괜한 사람을 불려오게 해서 이 곤욕을 치르게 하나?”
“죄송합니다, 이사님.”
김은정은 마치 도둑년 취급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상당히 나빴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럼에도 이서준의 충고를 잊지 않았다.
“아닙니다, 이사님. 이게 다 제가 이사님께 믿음을 못 드려서 생긴 일인걸요.”
“그래요?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네, 이사님.”
“어쨌든 아까는 내가 말이 좀 심했어. 기분 풀고 그만 나가보지.”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녀가 돌아가자, 양병현은 일을 너무 키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기필이 녀석이 설마하니 회장님께 입을 함부로 놀리지는 않겠지?”
“그렇긴 하겠지만, 제가 한번 조용히 따로 말씀을 드려볼까요?”
“그래, 박 실장이 가서 기필이 녀석에게 입조심 하는 게 좋을 거라고 단단히 일러줘. 회장님이 아는 날에는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으니까 말야.”
“알겠습니다, 이사님.”
“그나저나 법무팀 박태균 차장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그 말에 박창신 실장이 집무실 밖으로 나와서, 비서 데스크에 있는 한소희 비서에게 물었다.
“법무팀 박 차장은 아직 연락이 없나?”
그녀는 누군가와 통화하다 말고 서둘러 수화기를 내려놓고 대답했다.
“그게, 실장님. 아무래도 사고가 난 것 같아요.”
“사고?”
“방금 병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박 차장이 급하게 회사로 오다가 교통사고가 난 모양이에요. 지금 병원이라고 하는데요.”
“한심하기 짝이 없군.”
박창신 실장은 다시 영업본부 총괄 상무실로 들어가 양병현에게 사실을 알렸다.
기가 찬다는 반응이 돌아왔지만, 병원에 있는 인간을 끌고 오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그날 저녁, 그는 박창신 실장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1층 로비로 내려갔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이서준이라는 놈은 무조건 회사에서 내보내야겠어.”
“안 그래도 작업 중입니다, 이사님. 곧 회사에서 나가게 될 겁니다.”
엘리베이터 표시판에 나온 숫자가 빠르게 떨어졌다.
띵!
도착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익숙한 듯 낯선 인물이 지나갔다.
바로 이서준이었다.
사진과 말로는 수없이 들었지만 서로 대면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게 누구야? 사람이 보려고 하니 또 이렇게 봅니다, 이서준 실장님.”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이서준은 1층 로비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하다 말고 그를 돌아왔다.
- 작가의말
읽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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