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대한 전사(4)
“우리는 겁쟁이가 아니다!”
원주민 소년은 붉어진 얼굴로 외쳤다. 높은 목소리는 억지로 치켜올리진 현악기의 줄처럼 불편한 소리를 냈다. 그의 앞에선 남자는 킬킬 웃었다. 붉어진 얼굴에 풀어진 눈끝이 그가 이미 거나하게 취했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끅끅, 겁쟁이가 아니긴! 오늘 낮에 싸우지도 않았던 주제에!”
옆의 동료가 손뼉을 치며 동조했다. 소년의 얼굴은 한층 붉어졌다. 사실이었다. 엘이 기억하기에 소년은 전투 가운데 거의 싸우지 않았다. 소년은 조금 독특해 보이는 가죽 장갑으로 감싼 자신의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거칠게 반발했다.
“손을 다쳤을 뿐이다! 모욕하지 마라!”
이 역시 사실인 것 같았다. 엘이 기억하기로 소년은 뒤로 물러서서 초조한 얼굴로 상황을 바라봤었다. 하지만 그건 별로 전의가 부족하거나 두려움 때문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니 손을 다쳤다는 말은 믿을만 했다.
“큭큭. 웃기고 있네. 그 따위로 겁쟁이들만 드글드글거리니 노예 외에 어디 쓸데가 있을 리가 없지! 늙은 것은 늙은 대로 도망다니기 바쁘고, 젊은 건 젊은 주제에 도망 다니기 바쁘다니. 재주라곤 도망다니는 것 밖에 없지! 니놈들은 노예로 살아가는 게 더 어울려!”
하지만 소년을 비웃으며 남자는 말했다. 옆에서는 웃을 뿐 말리지 않았다. 그만이 아니었다.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남자와 비슷했다. 모두 이를 흥미로운 구경거리로 생각할 뿐, 진지하게 관여할 사태로 여기고 있지 않음이 역력했다. 원주민을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걸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엘의 얼굴이 한 번에 불쾌해졌다.
“너-!”
“어쭈? 한 번 해 보시려고? 덤벼봐 이 겁쟁이 새끼야. 너희 같은 열등 종자는 노예로라도 써 주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한단 걸 알려주지.”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가죽 장갑에 감춘 손을 강하게 꽉 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전신에서는 지금이라도 분노가 표출되어 눈앞의 남자를 찢어버릴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었고, 그의 눈만이 점차 원독으로 차오른다. 족장이 다가와 슬픈 얼굴로 소년을 말렸다.
“그만둬라.”
“하지만 족장님 이 놈들이-”
“그래 그만둬.”
끼어든 목소리는 제삼자의 것이다. 퍼억, 소리가 이어졌다. “크억!” 하는 비명은 높았다. 장내의 분위기가 경악으로 일변했다. 엘이 원주민과 대치하던 상금사냥꾼의 멱살을 쥐어 잡고 얼굴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엘은 이것도 불쾌했다. 특정한 종족 전체를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말 따위는 시시덕거리며 즐기던 개새끼들이 그런 개 같은 말을 한 놈을 두들겨 패니 놀라고 있다. 종족 전체를 노예로 삼는게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은 놀라운 게 못 되고, 그런 말을 한 쪼다가 두들겨 맞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는 말이다. 그 저열한 꼬락서니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기는 어려웠다.
“이런 쪼다 같은 것들을 상대하려고 일부로 애쓸 필요는 없어.”
그리고 엘은 비웃는 안색으로 잡았던 멱살을 풀었다. 정신을 읽은 남자는 허수아비 쓰러지듯 땅으로 쓰러졌다. 그의 동료는 다급한 안색으로 엘에게 외쳤다.
“너, 너, 아루스 시민인 주제에-”
“개새끼! 아루스 헌법 일장 일절이나 처 읽어봐라! 고자 같은 게!”
엘은 다시 치미는 불쾌감에 발을 들어올렸다. 술도 취한데다 엘의 발길질은 날카로워서 그는 피하지 못했다. 낭심에 엘의 신발 바닥이 작열했다.
“껙!”
그는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파리한 얼굴을 했다.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고, 엘은 상틈하게 웃는 얼굴로 원주민 소년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런 쓰레기같은 소리에 신경 쓰지 마.”
“...쓰레기 같다고?”
소년은 진정한 얼굴로, 하지만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엘은 그의 마음을 달랠 겸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쓰레기 같지. 귀를 기울일 아무런 필요도 없어.”
그것은 엘의 진심이기도 했다. 엘은 소년이 화를 가라앉혀 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어진 반응은 엘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분노가 짙게 깔린 목소리로 엘을 노려보며 말했다.
“확실히 그의 말은 쓰레기 같았어. 하지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건 아냐. 그런 쓰레기가 같은 말들에 우리의 삶은 실제로 좌우되고 있으니까! 너희 ‘파도를 넘어 온 자’들에 의해서 말이다!”
-퍽.
소년이 대지에 뻗었다. 위기에서 구해준데다 편도 들어줬는데도 불구하고 시건방진 말을 하니 엘이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버린 것이다. 아주 재빠르고 효율적인 일격이었다. 소년은 그대로 기절했다. 엘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했다.
“아.”
옆에 있던 카린이 엘을 흘겨봤다.
“디리디타!”
수우족의 족장이 다급한 얼굴로 소년의 어깨를 흔들어 그를 깨우려고 했다. 하지만 소년은 일어나지 못했다. 엘은 미안한 얼굴로 설명했다.
“곧 깨어날 겁니다. 특별히 세게 친 것도 아니니. 물론 후유증 같은 것도 없고요. 험한 말을 들었더니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버리고 말았네요.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디리디타가 무례하게 군것이야 말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족장은 되려 굽신거리며 엘에게 사과했다. 지나친 저자세에 엘은 부담을 느꼈다. 디리디타라는 소년이 너무 시건방지긴 했지만 기절시켜 버린 자신도 잘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서로가 허물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방적인 사과를 듣자니 기분이 상쾌하지 못할 밖에.
“그, 그럼.”
그리고 촌장은 소년을 업고 한쪽 구석에 있던 자기들의 모닥불 쪽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엘은 씁쓰름함을 느꼈다. 울티아 시에 들어가서 샀던 책이 기억났다. 오만하고 불쾌한 책이었다. 오만하고 불쾌한 세계관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일행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말을 타고 추적에 나섰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지금 신대륙은 여름이라 해가 높아지면 강행군을 할 수 없었다. 사람도 그렇지만, 말은 그렇게 튼튼한 생물이 아니었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그늘에서 시간을 보내고 적당히 선선해지길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 일행은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엘과 카린이 배급받은 식재와 물로 그간의 경험을 살린 독특한 스튜를 만들어 먹고 있는 차에 사람이 찾아왔다. 공식적인 일행의 리더인 ‘티리에’였다.
“무슨 일이신가요?”
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녀의 눈길에 티리에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가, 스스로 주책이라 반성하며 용건을 꺼냈다.
“그거 어제 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제 일이라면?”
엘이 국자를 멈추고 물었다. 어제는 오크 무리와의 전투라던가 여러 일이 많았다. 티리에는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 쿠틴 족의 소년을 도우신 그 일 말입니다.”
“아아. 그 일이군요. 그런데 왜?”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티리에가 엘에게 접근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두 분에 대해서는 시장님을 통해 살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표면에 밝히긴 어렵지만 마이어만큼이나 이번 추적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하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하는 이야긴데, 앞으로 저 두 사람과는 가까이 지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엘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두 사람은 이번 추적대의 가장 중요한 관계자다. 그런 이들을 일부러 소외 시키라니, 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하지만 티리에는 다급하고 엄중한 안색으로 설명했다.
“애당초 협력해 본 적이 없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강한 사람들이 몇 있다곤 하나 일행의 단결이 유지되지 않으면 이번 일은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전력이신 분이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택도 없는 소리 한 새끼 좀 때려준 게 전체의 갈등으로 이어진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게... 말이 됩니다. 아루스 본국에서 오신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원주민과 이민자들 사이에 벌어진 골은 상당히 큽니다. 아루스 사람이 원주민을 편들면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설명은 점입가경이었다.
“허-”
“그러니까,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티리에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종종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떴다. 카린과 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제 어설프게 느끼긴 했지만, 상황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심했던 모양이다. 어제 접했던 소년의 무례함이, 문득 이해되었다.
*근대국가의 삼요소. ‘자본-네이션-국가’ 이것은 타자배제의 시스템. 다민족 국가를 주장하는 미국도 상상적 '공동체로서의 국가'에 네이션을 담당시키고 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동일합니다. 이민제한이 심해진 지금은 완벽한 근대적 도식의 국가지요. 칼 슈미트 이런 인간까지 가면 정치행위 자체가 타자베제의 시스템 설정작업이라 못박고 있습니다만.(거북하지만 매우 강력한 이론적 입장임) 그나저나 이제 이게 마지막 연재가 되겠군요. 아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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