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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첼
작품등록일 :
2008.11.22 23:02
최근연재일 :
2008.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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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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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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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13,860

작성
07.05.17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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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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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11쪽

신대륙(12)

DUMMY

엘이 실비를 안고 마을 근처의 높은 수목을 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불안한 얼굴로 그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중앙에 피워놓은 커다란 모닥불이 길게 뻗어난 사람들의 그림자가 도리어 마을의 주민인 것 같았다. 엘이 그들에게 언질을 주기 전에 이미 와 있던 카린이 그를 발견해 소리쳤다.


“아, 레!”


사람들의 시선이 카린이 소리친 방향으로 모였고, 시선이 모인 시점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은 다급하고 반가운 표정으로 그들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괜찮나?”, “어떻게 된 겁니까?”, “아이고, 다행입니다.” 각자의 다급함을 담은 복잡한 말들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엘은 얼굴을 붉힌 채 자신의 품에 안긴 실비를 그제서야 땅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조신하게 옷을 추스르며 그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카린은 그 광경을 보고 잠깐 불안한 표정을 보였다가 쪼르르, 엘 근처로 갔다.


“오우거 잡고 오니 실비양이 오크들에 의해 납치됐다고 해서 굉장히 놀랬어. 네가 긍방 쫒아 갔다는 말을 듣고 안심하긴 했지만. 어떻게 된 거야?”


카린이 물었다. 그녀는 오우거를 잡고 엘에게 자랑하려는 기대에 들뜬 마음으로 마을에 돌아왔는데, 기다리고 있던 것이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아픈 몸을 이끌고 긴장과 의문을 섞은 얼굴로 서 있는 촌장이 보였다. 엘은 실비를 바라봤다. 전말을 밝히는 것은 실비에게 꽤 아플 수 있다. 진정될 때까지 이야기를 미루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 그녀의 의향을 묻는 것이다. 실비는 엘의 눈빛을 받고 아픈 표정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엘은 초조하게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가라앉았던 마을의 분위기는 분노로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런 개새끼를 봤나!” “찢어죽을 놈 같으니!” “잡놈!” 욕설이 뒤섞인 성토가 마을 사람들의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이대로 놓아두면 당장에라도 덴힐 마을로 쳐들어 갈 듯한 기세였다. 촌장인 세트도 아픈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했다.


“흠, 분노하시는 건 알겠지만 다들 진정하세요. 그래도 뭐, 위험한 순간에 실비양을 구해냈고, 약소한 물리적 처벌과 피해보상을 겸한 몇 가지 약속을 그에게서 받아냈습니다. 그의 더러운 욕망 탓으로 마을 사람들이 몇 명이나 죽고 마을이 고통을 받긴 했습니다만 현재 마을이 처한 상황을 생각할 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대처보다는 재활용이 더 낫겠지요.”


엘은 설명했다. 이 루딜 마을이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는 덴힐 마을과의 교류를 필수적이었다. 밉다고 미운대로 상대해서는 루딜만 손해일 뿐이다. 더구나 덴힐 마을에서 나쁜 짓을 한 것은 촌장 한 명이지 그 마을 사람들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분노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수군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불안하게 물었다.


“자네 말이야 옳네만, 자네가 떠나고 나서도 그 치가 그렇게 해 주겠는가? 차라리 자네가 있는 지금 아주 정리해 버리는 게...”


“무얼 걱정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은 자신이 악당이라 판단한 이라 해도 거의 죽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비로운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이냐 하면 좀 과격하다. 그가 적을 상대함에 다소 과격한 면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습니다.”


설명이 배제된 싸늘한 답변이었다. 논거가 제거되어 있기에 단순한 주장일 뿐, 아무 것도 아닌 말 같기도 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누구하나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엘이 그 대답을 하면서 보여준 기세의 힘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저런 기세가 적으로 돌아서서 자신을 향한다면? 상상만으로 바지에 오줌을 지릴 것 같았다. 사람들은 엘의 말을 신뢰했다. 이어서 촌장이 나섰다.


“그러면 마을의 우환거리였던 오우거도 린카양이 처치했고, 이번 일의 흑막이었던 마티 촌장도 레 씨가 해결했해, 이제 루딜은 전과 같이 평화로워질 수 있게 되었으니, 기념해서 내일은 축제를 벌이도록 하겠네! 어떤가?”


사람들은 “와!”하고 기뻐했다. 마을의 우환은 해결됐다. 하지만 사실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세상은 억지로라도 기뻐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가혹한 물건이라는 점이다. 이런 힘들고 분한 일이 있었으니 더욱 기뻐할 필요가 있다. 분노를 분노로서 곱씹는다면, 기뻐할 일이 드문 이 세상을 견디기는 한층 힘들어질 뿐이다. 그래서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촌장의 말을 긍정했다. 마을 사람들의 엉켜진 감정은 다른 방식으로라도 풀어져야 하니까.


“어떡할 거야?”


카린이 물었다. 오우거도 잡고 했으니 이제 여기서 할 일은 모두 끝났다. 그러니 내일 떠날지, 아니면 좀 더 있다 떠날지 묻는 것이다. 엘은 답했다.


“음, 내일은 참여하자.”


“응.”


카린도 그쪽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단순한 축제라기보다 상처를 감싸 안기 위한, 상처 입은 짐승이 제 상처를 혀로 핥아내는 행위 같은 것인 이상, 여기까지 관여해놓고 참여하지 않는 것은 매정하다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교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면서 카린은 엘의 손을 잡았다. 엘이 카린을 바라봤다. 카린은 눈웃음을 보이며 “헤헤헤” 한 장 천 너머로 웃음 소리를 전했다. 엘은 ‘큼’하고 머쓱한 콧소리를 냈다.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을 실비는 약간 처연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헐벗은 몸을 감싸고 있는 옷에서 엘의 체취가 맡아졌다. 그녀는 쓸쓸함을 느꼈다.






다음날, 마을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밤에 있을 축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단한 준비는 아니었다. 자이언트 베어의 가공한 고기를 꺼낸다던가, 그 고기에 어울리는 특별한 향신료를 만든다던가 하는, 그런 창고에 넣어두었던 음식 가운데 특별한 것을 조금씩 꺼내는 것과 다들 부산스럽게 아껴두었던 옷을 챙겨 입고 오랜만에 기억나지 않는 춤의 리듬을 다시 되새겨 본다던가, 먼지가 앉은 악기들을 깨끗이 닦고 다시 연주를 해 본다던가, 그런 정도의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하면서 사람들은 모두 밝고 열정적인 표정을 지었다. 엘은 그 광경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엘도 축제일을 도왔는데, 나무를 베어 밤에 모닥불을 피우는데 쓸 장작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 일을 하면서 엘은 순식간에 나무를 전부 해체해 장작으로 만들어 가지런히 늘어놓는 묘기를 보여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카린은 아주머니들이 요리하는데 괜히 끼여서 이것저것 배운다고 부산스러웠다. 그리고 그럭저럭 해가 넘어가고, 붉었던 세상이 달의 선명한 모습과 더불어 어두워지는 시점이 되어, 촌장이 축제를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마을 사람들은 여자, 남자,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다들 기뻐했다. 루딜은 자그마한 마을이었기에 금세 달콤한 음식 향기와 경쾌한 음악 소리에 충만해졌다. 웃음이 그 사이로 피어올라 또 다른 음악을 이룬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냠.”


엘은 자이언트 베어의 고기로 만든 큰 꼬치를 맛있게 뜯었다. 장기보존을 위해 습기를 빼는 처리를 했던 고기라서 씹는 감촉이 조금 질겼지만, 괜찮은 향신료가 소스에 듬뿍 뒤섞여서 일구어내는 맛은 꽤 괜찮았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노래하고, 술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중앙에 높게 피운 모닥불이 마을을 환히 밝혔다. 아이들은 그 저마다 꼬치를 하나씩 들고 그 모닥불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즐거워했다.


루딜은 야생에 둘러싸인 마을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야생이 아니라 완연한 인간의 대지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낭만적인 장면이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지만 카린은 재미없게도 아직도 아주머니들 일하는데 가서 방해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엘을 먹여주겠다는 야망을 품은 것 같은데, 정작 엘은 별로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저기-”


그래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엘을 먼저 찾아온 목소리는 카린의 것이 아니었다. 엘은 실비에게 시선을 돌렸고, 놀란 표정을 보였다.


“와, 굉장한걸요.”


평소 실비는 여기저기 바느질 흔적이 있고, 드문드문 헤진 자국이 있는 깨끗하지만 수수한 차림을 했다. 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물론 귀족들의 차림에 비할 수는 없지만 수수한 백색의 옷감이 늘씬하게 그녀의 몸을 감싸고, 몇 가지 문양을 단정하게 넣으면서 옷의 매듭은 붉은 색으로 염색하고 있어 선명한 색의 대조가 눈에 확 띄었다. 실비는 본디 아름다운 여성이라 옷이 날개라고 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이렇게 차려입은 그녀는 평소보다 한층 더 아름다웠다.


“아, 아니예요.”


“아니긴요. 음, 아주 멋져요. 그래. 아름다워요.”


엘의 환한 칭찬에 실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저기, 부탁드리고 싶은게 하나 있는데...”


“얼마든지!”


“조금 있으면 쿠틴 댄스를 시작하는데, 그때 제 파트너가 되어 주셨으면, 하고요.”


어렵게, 실비는 말했다. 겨우 말하고 나서 그녀는 ‘어렵다면 거절하셔도...’라고 웅얼거리며 뒷말을 추가했지만 그것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엘이 말이 끝나기 전에 얼른 대답했기 때문이다.


“와, 그것 영광이군요! 그럼 사양 않겠습니다.”


“그, 그럼요.”


엘의 밝은 대답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실비는 환히 웃었다. 무닥불의 불빛에 물든 그녀의 얼굴은 선명한 음영과 더불어 또 다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것은 순결한 기쁨이라기보다 처연한 슬픔에 희뿌옇게 물든, 그리고 물들어가는, 달콤 씁쓰름한 기쁨을 생각나게 했다.





*의견 주셈!-_-!


*비상업적 용도의 인용은 지나친 분량이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다음화면 챕터도 끝이고, 이제 비밀글도 갱신해야.


*희망찬을 개인지로 내도 양장본을 낼지는, 제가 양장본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뽀대는 나는데 정작 읽기는 불편해서. 데카르트 독서법이 어렵잖습니까!(침대에서 뒹굴 대며 읽기) 싸인북은 생각해볼만 하겠습니다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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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4

  • 작성자
    Lv.74 하얀별빛
    작성일
    07.05.20 23:02
    No. 31

    확실히 양장본은 불편하죠...
    보관은.. 주의만 기울이면 양장본이 아니어도 괜찮으니깐요,
    나오게되면 최초로 사게되는 판타지소설이 되겠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07.05.21 19:13
    No. 32
  • 작성자
    Lv.52 어킁
    작성일
    08.11.12 21:03
    No. 33

    와아아아앗.... 잘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7 레이진
    작성일
    09.03.29 14:48
    No. 34

    단지 요리용으로 출현하기위해 등장한 불쌍한 존재
    원랜 오우거가 출현하기로 약속되잇었는데 단지 사건
    해결후에 파티열때 필요한 음식출처의 구색마추기위해
    먹거리제공을위한 이유로만 등장된 불쌍한 존재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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