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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첼
작품등록일 :
2008.11.22 23:02
최근연재일 :
2008.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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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1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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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글자
12쪽

신대륙(11)

DUMMY

엘은 거대한 수목의 가지 위에 올라섰다. 창문으로 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코테지가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흔적을 따라 숲을 가로지다 보니 결국 도달한 곳이다.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실비가 인질로 잡힌 걸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엘의 검은 강하고 빠르고 무섭지만, 다수의 적을 하나하나 상대하면서 발생하는 틈은 실비를 충분히 위험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일격에 그들 전부를 상대할 수도 없었다. 실비가 자신의 검에 위험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코티지 곁으로도 일단의 무리가 떠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으, 으응...그...”


“후우, 후우...”


집중된 의식 사이로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나무 사이로 흐르며 부대끼는 소리, 여러 곤충의 우는 소리, 짐승의 발소리. 그곳에는 여러 소리가 만들다 만 스튜의 속처럼 뒤섞여 있었지만, 코테지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는 다른 모든 것을 모두 꿰뚫고 전달되어 왔다. 엘의 얼굴이 한 번에 구겨졌다. 아직 해본적은 없지만, 저게 어떤 종류의 소리인지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최악의 상상이 엘의 뇌리를 스쳤다. 다급하게 피가 끓어올랐다. 이것저것 고려할 수 없었다.


“이런 씨발!”


엘은 나무를 박차며 코테지를 향해 날았다. 쾅! 거대한 나무가 그 충격에 박살이 나며 뒤로 튕겨나갔다. 엘은 거대한 힘을 타고 코테지의 지붕으로 검을 휘둘렀다. 지붕에 원이 생겼고, 엘은 그것을 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들어가면 지붕이 무너져 실비가 다칠 것을 우려한 선택이다. 그리고 코테지 안으로 들어간 엘은 도저히 유쾌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광경을 봤다. 희미하게 익숙한 얼굴의, 벌거벗은 중년 남자는 손발이 묶인, 그리고 찢겨진 옷 사이로 희뿌옇게 빛나는 나신을 드러낸 우는 얼굴의 여인을 능욕하고 있었다. -는 것은, 극단적인 관음증을 가진 이가 아니라면 도무지, 도무지 좋은 기분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다.


“너, 너는-”


“제기랄!”


엘은 짜증스럽게 발을 들어 다급하게 묻는 그의 얼굴을 걷어찼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벽에 처박혀 기절했다. 엘은 한숨을 쉬며 겉옷을 벗어 실비의 몸을 가렸다. 그녀의 하얀 나신 곳곳으로 붉은 손자국이, 그리고 타액의 번들거림이 보였다. 근처에 마티가 벗어놓은 옷이 있었지만, 나신으로 있을지언정 저 남자의 옷을 실비가 달갑게 받아들일리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로 손발의 줄을 베어 그녀의 몸을 자유롭게 했다. 실비는 엘이 벗어준 옷으로 몸을 감사면서 고개를 숙였다. 긴장과 땀에 엷게 젖은 머리카락이 힘없이 늘어뜨려진다. 가리워진 옷 사이로 드러나는 그녀의 하얀 살결이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너는 무력하다.’ 그녀의 살결은 그런 것들을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괜찮습니까?”


“괜... 찮... 습니다.”


울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실비는 고개를 들지 않고, 한 손을 꺼내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그 대답을 들으며 엘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무의미한데다 잔인한 질문을 했다, 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을 리가 없는 걸 뻔히 알면서 습관적일 뿐인, 그런 질문을 건내다니. 더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했던 것과 같다.


“미안합니다.”


“아, 아니요...미안하실 이유는... 욱-”


고개를 젓다가 실비는 울기 시작했다. 엘은 그녀를 무릎을 꿇고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묻었다. 엘의 가슴에서 실비는 계속에서 울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그렇게 있었고, 서서히 실비는 울음을 그쳤다. 적당히 그녀가 진정되었다고 생각된 시점에서 엘은 일어나서 기절한 총장의 머리를 잡고 질질 끌기 시작했다. 밖으로 데려나가려는 것이다.


“아, 저-”


엘이 실비를 돌아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눈물에 젖은 눈망울로, 얼굴을 붉게 물들인 그녀의 모습은 슬프다. 그녀는 망설이는 표정을 보이더니, 건조한 목소리로 엘에게 부탁했다.


“그 분을, 죽이지, 마세요.”


그녀답다면 그녀답지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말이었다. 엘은 일순 불편한 표정을 보였다. 단순히 복수의 감정이 분출될 길을 그녀가 막으려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벤이 생각나서였다. 그는 정말로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선량함으로, 쌓아올렸던 모든 것을 빼앗겨야 했다. 엘은 그녀가 같은 처지에 빠지지 않을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악은 너무나 쉽게 선을 착취한다. 하지만 엘은 이내 새하얗게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입니다.”


엘의 웃음을 보면서 실비는 흠칫 몸을 좁혔다. 정중하고 아름다운 엘의 미소는 이면에 생각하기 힘든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를 품고 있는 것 같았고, 그 감정은 결코 온화와 자비로 충만한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마티가 비명을 지른다면 쫒아갈 생각이었다. 그는, 그는, 정말로 증오스런 사람이지만, 그는, 그는, 그래도- 패튼의 한 자식이고, 참회를 통해 사랑받을 가치를 다시 획득할 수 있는 한 인간이라고, 그녀는,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밖은 조용했다. 실비는 안도했다. 안도하자, 긴장이 풀렸고, 풀려진 긴장 사이로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피부로 느껴지는 대기의 감촉은 비일상적인 것이고, 그래서 비일상적인,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소름끼치도록 무섭다.






“...그랬던가요.”


실비는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많이 진정된 태도였다. 여전히 심장은 뛰고 손끝은 떨리지만, 최악의 단계는 피했던 덕분에 진정하기 그나마 쉬웠다. 그녀의 앞에는 엘이 있었고, 그는 지금껏 촌장에게서 알아낸 것들을 그녀에게 설명했다. 마티는 그녀를 얻기 위해 상금사냥꾼을 고용해 오우거를 부려서 루딜을 습격하도록 했고, 엘이 마을에 찾아오자 마음이 다급해져서 이런 일을 벌이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추악한, 이야기였다.


“제가, 잘못했던 것인지도 몰라요. 제가 태도를 좀더 명확히 했다면, 그분의 호의를 알면서도, 그분의 가져오는 것들을 생각해 냉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리가요.”


엘은 실비의 말을 잘랐다. 그는 선한 이들의 이러한 점이 싫었다. 그들의 사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 자신을 탓함으로서, 자신을 악당으로 만들고, 세상을 선하게 계속 유지시킴으로서 정리해 버리려 한다. ‘내 탓이오.’ 그래서 그들의 세계에서도 악 또한 선하다. 그것은 아름다운 태도일 수 있지만, 엘이 생각하기에, 그래서는 안 된다. 그 아름다운 대지에서, 가장 추악한 꽃이 피어날 수 있다.


“실비 양이 그를 매몰차게 거절했다면, 그는 오늘 같은 일을 훨씬 더 빨리 저질렀을 겁니다. 그뿐입니다. 그러니 실비 양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습니다. 단순한 피해자일 뿐입니다. 자책은 도리어 죄악입니다. 반성의 책임을 악에게서 앗아 오는 것이 될테니까요. 반대로 일찍 받아들였더라면, 이라는 종류의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이런 짓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그는 루딜 마을 사람들을 여럿 죽게 했습니다. 그런 짓을 태연히 저지르는 이가 다스리는 마을로 이주해 봐야 좋은 꼴은 못 볼 겁니다. 더구나 실비 양이 말하는 식의 반성은 패튼님도 바라시지 않을 겁니다. ”


“......”


엘의 말은 단호하고 논리적이었다. 실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양 손을 끊임없이 주물럭거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고, 열망은 담은 눈으로 엘을 바라봤다.


“저, 저- ...마티 촌장은, 어떻게 되었나요?”


말 사이가 끊어졌다가 억지로 이어진, 그런 말이었다.


“행정력이 닿지 않는 만큼 정상적인 처벌이 불가능할테니, 적당히 아픈 꼴을 보게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엘은 담담하게 말했다. ‘적당히’는 아니었다. 엘은 결계를 치고 그를 두들겨 팼다. 소리가 안 들린건 그 탓이다. 엘이 주먹을 멈췄을 무렵에 그는 숨 쉬는 고깃덩어리 비슷하게 됐다. 그렇게 패고 안 죽도록 한 것도 삼좌로서의 기술이 아니었다면 힘든 일이었으리라. 물론 엘은 그런 정도는 그가 저지른 짓에 비하면 ‘하찮은’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니, 뭐 그런 건 상관없겠지요. 하여간 이후로 그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겁니다.”


엘은 웃으며 뒷말을 그렇게 이었다. 유쾌한 웃음이었다. 엘이 말을 자른 부분은 굳이 그녀에게 말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여겨진 부분이다. 촌장을 두들겨 팬 다음 그는 몇 가지 암시를 걸었다. 첫째로는 물론 일체의 악의나 원망을 실비와 루딜 마을 사람들에게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작업이었다. 특히 실비에게는 반경 반 킬로미터 이내에 접근하지 않도록 암시를 걸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부가적으로 덴힐 마을의 피해가 없는 한도 내에서의 루딜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과 교류의 확대를 추진하도록 했고, 자선에도 열중하도록 암시를 걸었다. 훌륭한 쓰레기 재활용이었다. 그리고, 핵심적으로 앞으로 그는 평생 발기불능으로 살아야 한다. 엘은 그걸 생각하고 유쾌해 했던 것이다. 이런 것 까지 다 합쳐야지 엘은 촌장이 저지른 죄에 ‘적당한’ 죄값을 치른거라고 생각한다.


유감이 있다면 촌장이 고용한 상금사냥꾼을 처리하지 못한 것인데, 신상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입수했으니 느긋하게 기회를 기다리면 될 터였다. 하지만 엘이 웃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실비로서는 그저 갸우뚱하게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가요...”


엘은 실비의 곁으로 다가갔고, 양 팔로 그녀를 옆으로 끌어안고서 들어올렸다. 잠깐 흠칫 놀란 모습을 보이던 실비는 곧 얼굴을 붉혔다.


“다들 걱정하고 있으니, 이제 돌아가기로 하지요.”


붉어진 얼굴로, 실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은 대지를 박찼다. 숲에 내려앉아 있던 마른 풀잎들이 토사와 함께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엘은 한층 더 높이 뛰어 올랐다. 숲의 가장 높은 나무보다 높이, 어딘가의 산 봉우리에 닿을 듯이 높이. 그래서 그는 나는 것 같았고, 실비는 그의 품 안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득한 기분을 맛보았다. 실비는 시선을 돌려 엘을 바라봤다. 그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놀라운 사람이었다. 엘은 웃으며 말했다.


“큼, 괜찮은 풍경이지요? 제가 이런 거 할 수 있다는 거,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입니다. 그냥 이런 게 자그마한 위로라도 됐으면 합니다.”


실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로 어렵게 물었다.


“저, 레, 씨는 린카 양과는, 어떤 사이인가요?”


“사나운 마누라? 뭐 그런 거 비슷합니다.”


엘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거친 수사는 그만큼 거칠게 듣는 이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실비의 얼굴은 다른 종류의 슬픔으로 물들었다.




*의견주셈!


*곧 책이 나올 듯 합니다. 서브라임이 많이 팔리면 희망을 위한 찬가도 출판할 수 있을 테고, 그게 아니라도 개인지를 위한 총알이라도 마련이 되고, 무엇보다! 글 쓸 기간이 연장될 수 있을테니 여러분의 응원 부탁~


*이 시절 옷은 입다가 마음에 안 들면 버리는 게 아닙니다. 아루스 쪽은 맘에 안 들면 버리는게 옷! 이라고 바뀌어 가고 있긴 하지만 신대륙 지역 같은 지역에서 옷은 흔하지 않고, 마을마다 수선공이 반드시 있습니다. 천은 기본적으로 감촉보다 튼튼함을 우선으로 생각해 쓰지만 시간의 흐름에는 어쩔 수 없지요. 그래서 내구력이 좀 약합니다. 살짝 상처난 비닐이 그걸 통해 쉽게 잘라지는 걸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음, 이런 것도 출판본 설명에는 끼워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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