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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첼
작품등록일 :
2008.11.22 23:02
최근연재일 :
2008.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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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13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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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신대륙(9)

DUMMY

“나 왔어.”


탐색을 끝마친 카린은 조금 늦은 오후 무렵에 돌아왔다. 그녀는 불편한 안색으로 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냈다. 엘에게 부탁받았던 간단한 지도였다. 대단할 것은 없지만 여로를 꽤 정확한 축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최단시간 내에 목표로 하는 마을로 향하기 좋은 지도였다. 일반적인 여로를 참고할 이유가 없는 엘에게는 꽤 쓸모있는 지도다.


“고마워.”


“별로 가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거기는 그냥 몬스터가 습격해서 멸망한 것 같았어. 마을이 전부 숲에 잠식되어 있던걸. 씹혀 부서진 뼈 조각들도 많이 보였고. 아마 대규모로 당하고 나서 다들 거길 떠난 모양이야.”


“몬스터란 말이지.”


카린의 말을 듣고 엘은 중얼거렸다. '몬스터'를 발음하는 엘의 얼굴은 곰팡이 핀 오래 된 벽같았다. 카린이 허리를 굽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왜 그래? 마을 사람들도 한층 더 우울해 보이고, 엘까지 그러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이 방에 들어서면서 카린의 얼굴이 불편했던 이유다. 갔던 곳에서 이렇다할만한 성과를 얻지 못한 것도 이유의 한 가지였고, 그곳의 폐허에서, 비극의 장면장면을 연상한 것도 이유의 한 가지였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당장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활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냥 나갔다가 촌장 어른이 당했거든.”


“에, 심해?”


엘의 간결한 대답에 카린은 놀라서 반문했다. 이런 마을에서 촌장의 위치는 특별한 것이다. 그들은 지배자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권위자이기 마련이다. 카린도 그런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엘이 고개를 저으며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


“그렇게 심하진 않아. 자이언트 베어에게 당했는데, 그런 것 치고는 운이 좋았지. 거죽만 베였으니까. 그래도 파상풍이 걱정되니까 조금 있다가 가서 상처 좀 봐드려. 일단 내가 손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응급처치 수준이니까.”


짐승의 손톱에는 세균이 많다. 상처 자체는 설령 깊지 않더라도, 세균의 침입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응. 그런데 자이언트 베어라니, 여기, 생각보다 더 위험한 지역이네.”


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이언트 베어는 무척 위험한 맹수다. 오우거에 비해 꿀릴 것이 없다. 오우거는 미약하나마 이지를 지니고 있어 도구를 사용해 무기와 갑옷으로 사용한다는 점을 제하면 거의 동등한 수준의 괴물이다. 먼 곳으로 사냥을 나선 것도 아닌데 그런 괴물과 조우한다는 것은 이 일대는 인간이 아닌 ‘야생’의 대지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다. 안정된 거주지는 그런 위협적인 것들을 충분히 제거하고 나서야 성립되는 법이다.


“내가 오우거를 처리해도, 이 마을이 폐촌이 되는 건 아마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지역에서 수렵도, 농사도 제대로 할 수 있을리 없잖아. 기본적인 치안이, 너무 안 좋아.”


“그래서 얼굴이 그랬구나.”


“뭐, 그것도 있고, 거기 연결 되서, 좀 찝찝한 이야기를 들었거든.”


엘의 얼굴이 한층 찌푸려졌다. 그는 촌장의 집안에서 실비가 나간 다음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후, 저 아이에게 너무 미안한 짓을 하는 것 같은데.’ ‘어쩌겠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들 위험하니...’ 엘은 그들이 말하는 ‘미안한 짓’이 무엇인지 얼마 있지 않게 알게 됐다.


“어떤?”


“실비양이 덴힐 마을의 촌장 첩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거지. 그렇게 되면... 이 마을 사람들을 그쪽으로 차츰차츰 받아들여 줄 거다. 라는 거야.”


엘은 불쾌하게 답했다. 마을 사람들이 말하던 ‘미안한 짓’이란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엘은 어째서 자신이 오우거를 때려잡아 준다고 했는데도 그녀의 얼굴이 별로 밝아지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마을이 처해 있는 위기는 단지 ‘오우거’를 없앤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훨씬 복합적이고 근본적인 것이었고, 실비 그녀는 그것을 해결할 힘이 있었다. 비록 그 힘이라는 것이 ‘매춘’과 별 다를 바가 없다고 해도.


“그래?”


“마음에 참 안 들기는 한데, 그게 뭐 잘못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찝찝하잖아.”


한숨을 길게 내쉬며 엘은 말했다. 덴힐 마을에서 이곳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작은 조건이 아니다. 다들 이민자에 혈안이 되었다고는 해도 마을마다 수용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모여 살면 안전하고 좋은데 모여 살지 못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도시가 발달하기 위해 배후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신대륙에서 도시가 많지도, 크지도 않은 것과 같은 이유다. 그러니 확실히 실비가 그 마음에 안 드는 촌장의 첩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그건 별로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니다. 사태 자체는 불쾌하지만, 실비의 결단 자체는 도리어 칭송받을만한 일이다. 어차피 대게의 사회에서 결혼의 목적은 물질적인 것임을 생각하면 한결 더 그러하다.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란 아루스 도시 문화의 한 트렌드일 뿐, 현실적으로는 별로 실천되지 않는다.


“그렇네...”


“쩝, 그럼 나도 확인 차 좀 갔다 올게. 촌장 어른 부탁해.”


이야기를 그렇게 정리한 엘은 싱숭생숭한 기분을 씻고자 산책을 겸해 얼른 그 마을에 갔다올 생각이었다.


“응.”


다시 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엘은 지난 마을 보다 훨씬 빨리 작업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역시 쓸만한 지도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여행에 있어 꽤 중요한 요소였다. 일반적인 지도는 물론 일반인을 대상으로 만든 것이고, 지도 제작자들도 그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기 때문에 엘이 참고하기엔 많이 답답했고 미답지도 많았다.


가 보았던 마을은 카린이 말한 것 처럼 대규모 몬스터의 습격에 많은 피해를 입고 해체된 모양이었다. 어비스의 흔적은 느낄 수 없었다. 꽤 시일이 지난 듯, 주변의 숲이 서서히 마을을 잠식해 얼마 있지 않아 완전히 숲과 동화될 것 같았다. 그 장면을 보면서 엘은 어쩔 수 없이 루딜을 거기 겹쳤었다. 획기적인 전기가 없는 한, 루딜이 그 곳과 같은 꼴이 될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마을로 돌아온 엘은 그날 밤을 조용히 보내고, 아침이 되어 다시 카린과 의논해 다음에 찾아갈 폐촌을 선정했다. 거기도 어비스의 흔적이 없다면 이 지역에서는 더 이상 볼일이 없는 셈이었다. 다른 곳을 거점으로 탐색을 지속하는 것이 옳았다. 신대륙이 넓다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을 압도하는 넓이였다. 덕분에 탐색해야 하는 지역도 그만큼 광범위했다.





아침 수련에 열중하던 엘을 방해한 것은 실비의 등장이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는 안색으로 “저기-”하고 엘을 찾아왔다. 엘은 검을 허리춤으로 수납하며 그녀를 맞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네요. 그런데, 린카 양은, 어디에?”


시선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실비는 물었다. 엘은 간결하게 답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일이 있어서 잠깐 마을 밖으로 나갔습니다. 뭐 전할 말씀이라도?”


“아, 아니요, 그냥 어제 촌장님을 치료해 주셨다는데 감사 인사를 아직 못해서요.”


어제 카린은 촌장의 상세를 보살폈다. 그녀의 힘은 대단한 것이라 촌장의 상세는 한 순간에 좋아졌다. 다만 너무 눈길을 끄는 것은 달갑지 않기 때문에 완치시키지는 않았다. 마법에 대한 상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단번에 사람을 완치시키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 정도인지는 알 수 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엘이 이번에는 물었다.


“그러고보니, 실비 양은 촌장님과 친하신 모양이더군요.”


“아버지, 같은 분이시니까요. 친아버지가 몬스터에 의해 돌아가신 뒤, 줄곧 자식처럼 대해 주셨거든요. 큰 은혜를 입었지요. 그러니-”


“그렇군요.”


실비의 답은 차분했다. 엘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엘은 이 마을에 들어와서 그녀의 가족을 본 적이 없다.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갑자기 실비가 허둥대며 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런 의미에서, 레 님께도 감사드려요. 어제는 미처 경황중이라 인사를 못 드렸지만, 촌장님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레 씨는 무척이나 강하시던걸요. 마을의 다른 아저씨들도 무척 놀라고 있었어요. 그 거대한 곰을 단칼에 베어버렸다고... 덕분에 올 한해 고기 걱정을 없을 거라고, 그나마 위안이라고 다들 말하고 있어요.”


어제 베었던 곰은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가지고 왔다. 살아있을 때야 무시무시한 위협이지만 죽으면 중요한 자원이다. 가죽은 벗겨 무두질 중이었고, 고기는 절여서 저장식으로 만드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내장은 몇 가지 중요한 것을 빼고는 그냥 버렸다.


“대단한 건 아닙니다.”


엘은 겸손하게 답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그의 목표는 현 블랙 둠이다. 거기에 댄다면 엘의 지금 수준은 대단할 것도 없다. 일단, 그는 블랙 둠의 검 조차 뽑지 못한 상태다. 실비는 작게 속삭이듯이 중얼거렸다.


“...레 씨 같은 분이, 이 마을에 계속 있어주면 좋을, 텐데요.”


“......”


실비는 그것이 엘에게 들리지 않기를 기대하며 중얼거린 말이었으리라. 하지만 엘은 그 말을 들었다. 들었지만, 어떤 대답을 돌릴 수는 없었다.




*썼던 글을 정리해서 한번 읽어 봤습니다. 그리고 조금 안심했습니다. 괜찮은 글이라고 느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쓸 때마다 항상 허전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구멍 뚫린 느낌이었죠. 뭐랄까, 많이 먹어도 포만감이 들지 않는 그런 음식을 먹은 기분이랄까요. 아무래도 희망을 위한 찬가와 같이 대개의 문장이 소흘히 넘길 수 없는 정보를 담은 글이 자신의 취향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겠지요. 그걸 정리해서 읽음으로서 어느 정도 해소하는 게 가능했습니다. 위로가 되더군요.


*여담으로 서브라임의 반동으로 희망찬의 수위가 좀 과격해 졌더랬습니다. 반성 중.-_-; 하여간 캐성실하게 적고 있습니다.


*물론 팔아야 할 글에 있어 자기만족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고로 글에 대한 여러분의 감상은 언제나 중요한 참고자료이니 많은 의견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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