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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첼
작품등록일 :
2008.11.22 23:02
최근연재일 :
2008.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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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07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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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신대륙(5)

DUMMY

죽음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는다. 무수한 죽음이 낮에 일어난다. 조건이 충족되면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어야 한다. 그 죽음의 조건에 ‘밤’은 포함되지 않는다. 어둠과 밤은 죽음의 속성이 아니다. 인간의 인지를 넘어서는 압도적인 규모의 그림자가 단지 밤이라 불리 울 뿐이다.


그러나 밤은 죽음을, 죽음은 밤을 연상하게 한다. 설령 그것을 어리석음이라 칭하더라도, 역시 인간은 밤과 죽음을 이어서 연상하고 만다. 어둠과 적막과 죽음의 친근 관계. 혹은, 어둠과 공포와 죽음이라는 연상단계로서 성립되는 부정성의 시발점으로서의 밤은, 어리석음이라고도, 나약함이라고도 이름붙일 수 있는 인간심리의 본질에 붙어 어쩔 수 없이 끝없는 자기재생산을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재생산은, 때때로 현실 가운데 실증되는 것 처럼 보이며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바로 이곳처럼.


“......”


엘은 밤의 가운데 서서,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약한 적막은 밤의 숨소리다. 메마른 대지의 모래는 습기를 잃고 퍼석퍼석했고, 허물어지다만 집의 모습은 빈사의 짐승이다. 귀를 기울이면 끄드드, 끄득, 하고 집의 이음매 이음매가 희미하게 내지르는 비명이 들려왔다. 찢겨진 옷을 입은, 낡은 해골의 텅빈 눈구멍으로는 염원의 빛이 이제라도 깃들 것 같다. 아우- 하고 적막을 찢어내며 늑대의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


엘은 그 죽음이 스며든 대지를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그 대지에 스며든 죽음의 냄새와 감촉을 음미하는 것 처럼, 신중한 걸음이었다. 엘은 그 죽음이 스며든 자리를 천천히 살폈다. 이 대지에 퍼뜨려진 죽음의 시작과 끝을 읽어내려는 것 처럼, 신중한 걸음이었다. 엘은 걸으면서, 살피면서, 그렇게 이미 풍화된 죽음의 모든 흔적을 읽어내려 하고 있었다. 흐트러지 모래. 부서진 바위, 파괴된 기둥, 금간 벽. 느긋한 달의 운행에 지루한 구름이 하품하며 지나간다. 마침내 엘은 모든 동작을 멈췄다.


“이상하군.”


그것이 이 대지에 깃든 죽음에 대한 엘의 판단이다. 먼 곳에서 아우- 하고 늑대가 다시 울었다.





“다녀왔어.”


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며 엘이 말했다. 새벽을 지나, 이미 서광이 서서히 대기를 물들이고 있었다. 엘은 카린이 아니라서 날지도 못하고, 속도도 음속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목표한 곳까지 가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일찍 일어나 책을 읽던 카린은 얼른 덮으며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아, 어서와? 가본 곳은 어땠어? 좀 찾았어?”


“음, 찾긴 찾았는데-”


엘은 애매하게 말꼬리를 죽였다. 카린은 부루퉁한 얼굴로 엘을 질책했다.


“뜸들이지 말고.”


“뜸들이는 게 아니라, 정말 잘 모르겠어. 확실히 특무기관에서 얻었던 정보처럼 완전히 파괴된 마을이 이 근처... 근처는 아니구나. 꽤 먼 곳에 있었어. 그런데, 어비스적인데, 어비스는 아냐.”


엘은 쓰읍, 하는 소리를 내며 변명했다. 카린의 얼굴이 한층 불만스러워졌다. 어비스적인데 어비스가 아니라니, 그런게 어디 있단 말인가. 어비스라면 어비스고,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어비스의 힘은 물질계의 것과는 많이 이질적이다. 카린은 다시 따졌다.


“뭐야 그게.”


“그러니까 모르겠다는 거야. 거기 일대 땅이 죽었어. 숲 가운데서 사막이 생겨났어. 더구나 해골의 모습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어. 몬스터나 야생동물이 뜯어먹지 않았다는 말이야. 근처에 늑대도 있었는데. 이건 전부-”


“어비스에서 비롯된 힘의 특징이네.”


카린은 심각한 얼굴로 엘의 말을 받았다. 엘은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비스의 힘은 생명에 대해 적대적이다. 생명을 증오하기 때문에 아니라 생명을 욕망하기 때문에 적대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산 것의 모든 활력을 어비스의 힘은 빨아들이고자 한다. 그 궁극에, ‘고통’이 있다. 고통은 산 것이 살고자 하도록 하는, 그래서 삶의 활력을 이끌어내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그래. 그 동네의 힘이 작용했다고 치면 어렵지 않게 설명이 되지. 하지만, 어비스가 아냐. 일단, 한 마리가 쳐들어와서 그 꼴을 만든 것 같은데, 엄청나게 강해. 대공보다는 아래지만, 평균적인 소드 마스터보다는 강하지 싶어. 내 체험을 기준으로 하면 마스터 로시테아보다는 약간 약하고, 두빌 장군 보다는 강할 것 같아. 시간이 오래 지난 탓에 정확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지만, 대충 그래.”


“이상하네.”


이어진 엘의 설명에 결국 카린도 복잡한 얼굴을 했다. 소드 마스터보다 강하다고 한다면 최상급의 악마에 준한다는 말인데, 그런 고위의 악마가 물질계에 ‘혼자’다닌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일 조차 드물다. 그렇다면 엘이 보았던 그 흔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쉽게 정체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렇지? 그러니까 카린, 내일은 네가 좀 가서 봐줘. 시간이 오래 지나서 아마 확실하게 읽을 수는 없겠지만, 만일 어비스가 확실하다면 남은 마나에서 판정할 수 있겠지.”


엘이 부탁했다. 현장의 물리적 흔적에 대한 체크라면 이미 다 했으니 이제 비물리적 흔적을 검토해봐야 한다. 그 작업은 카린이 엘보다 훨씬 능하다. 그녀는 조율의 일족이며, 가장 강대한 마나의 지배자다. 심지어 아바타라고는 해도 어비스의 대공조차 물질계에서라면 그녀의 지배력 아래서 자유롭게 마나를 조종하기 힘들 정도다. 그녀는 자신의 지배력을 통해 사고만으로 주변의 환경을 조정할 수 있다. 가령 온도를 내린다던가.


“음- 알았어.”


카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엘은 지나가듯 웃으며 물었다.


“여기는 별일 없었지? 오우거나 나와서 박살냈다던가, 그런 일 있었어?”


“응. 없었어. 저녁 먹고 애들이란 같이 쭉 놀았어. 착한 아이들이라 좋던걸. 실비라는 아가씨도 상냥했고.”


“그래? 그러고 보면 오늘은 내가 놀아줘야 하나? 애들은 좀, 상대하기 어려운데.”


엘이 피곤하게 중얼거렸다. 누군가 한 사람은 마을에 남아 있어야 한다. 오우거가 나타나면 처리해야 하니까. 적극적으로 찾아다녀 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 사이 마을을 습격하면 적게나마 사상자가 나올 수 있으니 묵묵히 기다리는 쪽이 나았다. 일하러 마을 밖으로 나가는 이들에 대해서는 카린이 호루라기에 마법을 걸어 위기 때 불도록 지시했다.


“저글링이라도 보여주면 좋아할 거야. 서커스 같은 걸 구경해 봤을 리도 없는 아이들이니 그런거 보면 얼마나 좋아하겠어? 다들 깜빡깜빡 넘어갈껄.”


“음. 그렇군.”


엘은 만족스럽게 그녀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아이들과 일일이 대화하며 놀아주는 건 엘의 성정상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일상적으로 볼 수 없는 묘기를 보여주는 거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다. 엘의 운동능력은 정말 무식한 것이다.


“여기 있는 아이들 다들 고아래. 그 전부터 쭉 있었고, 이번에 또 오우거니 뭐니 해서 많이 늘었데. 부모님은 없고, 마을은 작은데다 환경은 위험하니 다들 얼마나 쓸쓸하고 지루했겠어? 그나마 실비라는 아가씨가 착하고 말주변이 좋아서 아이들을 잘 돌봐준 덕분에 삐뚤어진 아이는 없는 거 같았어. 그러니까 잘 놀아줘.”


카린은 안쓰럽게 말했다. 태도를 보자니 오늘 그녀는 여기서 지내면서 아이들과 완전히 친해진 모양이다. 확실히 그녀는 장래 좋은 어머니가 될 것 같다고, 엘은 슬쩍 생각했다.


“그야. 물론이지. 아이들 수준에 맞춰서 애교떠는 이야기하는, 그런 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겠지만 볼거리 제공하는 거야 아무 것도 아냐. 어떤 서커스보다 멋진 묘기를 보여주도록 하지!”


엘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과장이 아니다. 20단 저글링만 해도 전 세계 어떤 서커스단에서도 할 수 없는 묘기다. 엘은 20단 저글링은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신체능력의 극단적인 표현이라면 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것은 모두 최고수준의 서커스에서도 볼 수 없는 볼거리다.


“그리고, 나 없는 동안 쓸데없는 짓 하면 화낼거야!”


카린은 그렇게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서슬이 퍼랬다.


“응.”


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실비 양과 손을 잡으면서 잠깐 싱글벙글 있던 것이 아무래도 많이 밉보인 모양이다. 엘은 카린이 너무 쩨쩨하게 군다고 생각했다.




*후, 저도 필명 체인지하고 써볼걸 그랬나요?^^


*의견 주시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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