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대한 전사(2)
엘과 카린이 요원에게 요구한 것은 그간의 이 일대 인구조사기록과 여러 사건기록을 대조 조사함으로서 어비스의 습격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마을을 정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범위는 10년 이내였다. 과거의 기록은 현실적으로는 별 쓸모가 없겠지만 분석하면 출현 빈도나 자주 습격하는 장소를 특정할 수 있을 테니 그것도 부탁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요원의 얼굴이 곤란하게 찡그려졌다.
“힘듭니까?”
“어렵지는 않겠지만 힘들기는 할 것 같습니다. 예상하시겠지만, 저희는 별로 인원이 많은 부서가 아닙니다. 그런 대량의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는 작업은 상당한 노동력을 요하기 마련이니까요. 더구나 어비스가 연결되어 있다면 대놓고 떠들어서 도움을 요청하기에도 좋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으음...”
“물론 정보의 정확도를 어느 정도 희생하면 작업 기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인구조사기록 자체의 정확도도 변방으로 갈수록 믿기 힘든 형편입니다. 그런데다 작업 자체의 정확도를 떨어뜨린다면 정보의 신뢰도는 없는 것 보다 나은 게 될 뿐이겠지요.”
“그래도 수백 명씩 실종되고 하는 사건인데 꽤 유명하게 알려졌을 게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아루스 본국처럼 상업이 발달해 각지의 소식이 자주 교류되는 것은 아니고, 몬스터의 짓으로 치부되는 것도 많이 있어서... 그리고 여기도 행정부와 사법부는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사건기록을 참조하려면 인가가 필요합니다. 막 내어주진 않아요. 이것도 난점이죠.”
“이것 참...”
엘과 카린은 설명을 듣고 곤란한 얼굴을 했다. 요원의 말은 생각하지 못했던 난관이었다. 세키리아의 비밀 황금광산까지 찾아내는 그들의 악착같은 정보수집 능력에 기대어 보려고 했더니, 전공외 부분은 기대만큼 못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다른 종류의 기관이나 단체에 비해 압도적인 정보처리능력이다. 특히 광산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니 인구이동에 대해 민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엘로서는 여기가 안 된다면 다른 협력처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뭡니까?”
“저희외 다른 부서의 공무원을 끌어당겨 마소처럼 부려먹는 거지요. 그렇게 하면 원하시는 정보를 정리하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마침 인구조사 한지도 얼마 안 되었으니, 상당히 신뢰도 높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엘은 기뻐하며 요원의 양손을 잡았다가 얼른 뗐다. 그는 방금 토악질을 끝냈다. 간단히 치우긴 했지만 방안은 시큼하고 불쾌한 구토 냄새로 가득 차 있다. 요원은 힘없이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하지만 이게 쉽지 않습니다.”
“특무기관인데, 특권 같은 걸로 어떻게 안 됩니까?”
엘이 물었다. 요원은 자조적인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빌붙어 사는 형편에 특권은 무슨 얼어 죽을 특권입니까. 행정부 자료열람을 자유로이 하는 것만도 감지덕지죠. 신대륙은 중앙의 힘이 거의 닿지 않는 만큼 자치단체장의 힘이 아주 셉니다. 세키리아의 영주에 비견할만하죠. 그러니 완전한 중앙 직속인 저희는 좀 찬밥신셉니다. 감찰 비슷하게 보고 멀리하기도 하고... 그리고 중간과 말단쪽에는 특무기관 소속이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으니 좀 일을 잘 안하는 걸로 비치고 있기도 하고요. 더구나 행정부의 형편도 좋은 게 아니거든요. 중앙 엘리트라는거 여기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니까요!”
“으음.”
요원이 드물게 감정을 담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엘은 살짝 그의 기백에 압도당했다. 어디서든 인생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면 어떻게?”
“울티아의 시장과 거래를 해야겠지요.”
“어떤 거래입니까?”
“한동안 행정력의 일부를 중앙의 용무를 위해 전적으로 사용하는 대신, 그만한 일을 대신 처리해 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마 타 부서에서 인원을 좀 끌어와서 부려먹는 게 가능할 겁니다.”
“흐응.”
엘은 흥미가 동한 듯 콧소리를 냈다.
“시장을 설득하는 방법은, 돈도 상관없고 대신 토목공사를 하는 것도 좋고, 의뢰를 대신 해결하는 것도 좋고, 뭣하면 돈과 여자로 구워삶는 것도 좋겠지만... 세 번째는 보조수단이면 몰라, 그 자체로는 안될겁니다. 도시민의 눈도 있고. 뻔히 행정이 꽉꽉 막힐텐데 적당한 그럴듯한 명분도 안 세우는건 그네들로서는 파멸의 지름길이죠. 그리고 그렇게 하면 이 일이 끝난 뒤에 저희 부서 체면이 안 섭니다. 다들 싫어하는데 편하게 자기 일 처리했다고 말이죠.”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돈이나 중요한 의뢰 해결 중의 택일이었다. 토목공사에 있어 엘은 완전한 문외한이다. 물론 한다면 아주 뛰어난 만능유기공사체 정도로 써먹을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엘은 두 번째를, 그것도 아주 굉장한 악당으로 잡아들이고 싶었다. 그쪽이 엘 자신의 성미에 맞는데다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여겨졌다.
“그러니 의뢰를 하나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고맙게도 요원은 그렇게 말을 꺼냈다.
“어떤 겁니까?”
취향도 취향이지만, 한동안 좀 부려먹어야 될 사람이고 하니 가능하면 요원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은 마음도 있었다. 일의 효율을 위해서라도 그에게 원한을 사는 것은 좋지 않았다. 나름 엘리트라는데 이런 벽지에 와서 고생하고 있는 것도 좀 안 되어 보이기도 했다.
“수우족이 노예상인의 습격을 받아 상당수의 인원을 빼앗겼다고 합니다. 그들을 구출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장과 그들은 상호협력 조약을 맺은데다가 여러 이익관계에서 그들의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일을 무시할 수 없는데, 인원편성이 잘 안돼서 고민하고 있는 형편이거든요. 그리고, 납치된 이들의 안전은 묻지 않습니다만, 노예상인의 우두머리를 잡아주세요. 그들에게서 캐내어야 될 정보가 조금 있습니다. 더해서 그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니, 원하시는 작업을 위한 좋은 참고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기도 할 것입니다.”
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납치된 이들의 안전은 묻지 않습니다만.’이라는 말이 불편하게 들렸다. 합리적인 판단일 수는 있겠지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결코 기껍지 않다.
“아아, 그거 오면서 게시판에서 봤는데.”
카린이 눈에 이채를 띄고 말했다. 요원은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리며, 그녀가 신비로운 여인이라 생각되며 어딘가 선망을 담은 표정으로 설명했다.
“수우족의 족장이 직업 제작한 겁니다. 대단하지요? 키틴어는 원주민의 말과 문법적으로 많이 달라 배우기 아주 힘들다던데, 거기까지 배워왔습니다. 그들의 교류의지를 나타내는 거지요. 그러니 도의적으로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뭐, ‘도의’따져서 돌아가는 일은 이 동네에서 한 번도 본적이 없긴 합니다만.”
“그렇군요.”
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은 살짝 웃었다. 불과 몇 초전 납치된 이들의 안전을 묻지 않는다는 냉혹한 말을 했던 사람이 지금은 ‘도의’를 말하며 ‘도의’의 실종을 슬퍼한다. 그의 그런 자기분열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엘은 잠깐 그런 생각을 해 봤다.
“알겠습니다. 그럼 요청하시는 대로 하기로 하지요.”
“감사합니다!”
요원은 뛸듯이 기뻐했다.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된 일이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이야기 가운데 줄곧 드러났지만, 그는 이 문제로 꽤나 고민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엘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감사받을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노예상인이라는 작자들, 좀 관심이 있었거든요.”
“그렇- 습니까.”
돌아온 엘의 대답에 요원은 오싹함을 느끼며 등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뒤로 뺐다. 엘의 차갑게 웃는 모습이 너무 무서웠다. 그의 모습은... 그래. 부장을 생각하게 했다. 알려지지 않은 아루스의 또 다른 소드마스터. 그가 말없이 화낼 때의 기백이 지금의 이 소년과, 흡사, 했다. 아니, (착각이겠지만, 틀림없이 착각이겠지만) 한 단계 정도 더 무서운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이 어린 소년이 부장의 엠블럼을 받아낸 것에는 아무런 착오도 없었다.
엘과 카린은 치안부대의 건물르 찾아 들어갔다. 안에는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균일한 유니폼에 동일한 칼을 차고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도시의 치안을 지키는 사내들이다. 그들은 갑자기 들어선 어린 두 소년 소녀의 모습에 기묘한 호기심을 품고 바라봤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물었다.
“꼬마야, 무슨 일이냐?”
“노예상인 추적 토벌대에 등록하게 돼서, 편성에 참여하러 왔습니다. 어딘가요?”
그는 얼굴을 구겼다.
“세상이 진짜 말세군. 저런 아이들도 이런 일에 참여하다니! 더구나 한 명은 여자아이라! 얘들아, 다치기 전에 그냥 가거라. 너희가 참여할만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지금 참석한다고 들어앉아 있는 것들도...”
혈기왕성한 애들이 상급사냥꾼 노릇을 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지만 노예사냥꾼은 전문적인 전투 집단이기도 하다. 간단한 몬스터 퇴치와는 격이 다르다. 노예로 잡혀가면서 가만히 있을 인간 따위는 참으로 드물다. 꽤 난이도가 높다. 이런 일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처리하기 마련이니 그 점을 노려 좀 빌붙어보려는 생각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쳐도 무모하다. 실력과 생존율의 상관관계는 전쟁보다 더 밀접하다.
“괜찮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다 들었거든요.”
“네가 오기사의 한 명이라는 마이안을 기대하고 참석한 거라면, 그냥 돌아갈. 그 시건방진 새끼... 배울게 있을 리가 없지!”
분을 담고 남자가 말했다. 그쪽을 바라보던 다른 이들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실랑이가 잠시 있었지만 엘과 카린은 완고하게 고집했다. 고마운 호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호의도 세상에는 존재하는 법이다. 결국 그곳의 대원들은 혀를 차면서 2층의 안쪽 방에 있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그들의 안내에 따라 건물 2층의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방이었다. 퀘퀘한 냄새로 찌들어 있는 그곳은, 사방으로는 무기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은 낡았지만 푹신푹신한 천을 빳빳하게 깔아놓고 있었다. 연무장인 모양이었다. 통일되지 않은 복잡장의 여러 사람이 나태한 분위기로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들 가운데 검을 안고 벽에 등을 기대고 잠든 것 처럼 앉아 있는 남자와, 인종적으로 이곳의 다른 사람과 완연한 차이를 보이는 늙고 젊은 두 사람이 가장 눈에 띄었다.
*카린과 엘은 한 십년 붙어 지내다 보니 이렇게 친해졌습니다. 데일과 알렉의 경우는 데일이 알렉을 구원했기 때문이지요. 본인은 잘 모르지만.
*피곤하다... 감상 주세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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