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1)
봄바람이 언덕을 쓸었다. 긴 바람의 파형이, 쓰러지듯 눕는 풀잎의 굴곡이 지어내는 음영에 맞춰 노곤히 드러났다. 그 언덕에 있는 여러 나무 가운데 한 나무 아래의 그늘에서 청년이 검을 옆에 놓아두고 조용히 자고 있었다. 바람을 타는 풀잎이 간혹 그의 얼굴을 쓸었다. 세상에서 분리되어 잠들어 있는 듯, 고요한 표정이었다. 그 청년 쪽으로 조그만 그림자가 다가왔다.
“카린.”
청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다가오던 그림자가 깜짝 놀라며 멈췄다. 청년은 눈을 뜨며 그림자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얼굴을 붉힌, 긴 금발의 아름다운 소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청년이 눈을 뜬데 대해 당혹스러워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청년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몰래 다가와서 놀라게 하는 거, 전부터 그만두라고 했잖아.”
“아, 아냐. 그냥 깨워주려고 한거야.”
그러면서 카린은 얼른 청년 곁으로 다가와 앉더니 그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 청년은 그녀의 모습을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을 풀었다. 바람이 다시금 길게 불었다. 한동안 청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카린은 머리를 들고서는 나무에 기대 세워져 있는 검을 바라봤다. 투박한 검집에 수납된 검은, 인공물이라기보다 자연물인 것 처럼 시간의 모습을 고고롭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헤, 정말로 받았네.”
“아아. 하지만 저대로는 무용지물이야. 검이 안 꺼내지거든.”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왜?”
“내가 아직 극의에 이르지 못했으니까.”
“극의? 네가?”
“그래. 내 검이 극의에 이르면 저 검을 자연히 꺼낼 수 있게 될 거라고 사부님은 말씀하셨지. 그리고, 그것은 내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게 될 때 가능할 것이라고 하셨어.”
시선을 하늘로 돌리며 청년이 말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
청년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카린이 살짝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말을 잘못했다 싶어 슬쩍 옆으로 거리를 두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뭘 그렇게 볼을 부풀리고 있어? 너도 예뻐. 다만-”
“다만?”
청년은 처음 사부를 만났을 때를 생각했다. 어둠 가운데 달이 떠 있고, 풀숲은 지저분하게 여기저기 뿌리를 뻗치고 있었다. 바람은 강하게 불어 세상의 조롱처럼 강했고, 무수한 사람이 죽었다. 죽음과 죽음과 죽음만이 연속되었고, 모든 삶의 흔적들은 허망하거나 추악했다. 대지는 그런 것들로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사부를 만났다.
그는 죽음을 피워내는 춤을 추었다. 해가 떠오르고, 달이 저물고, 별이 빛나고, 나무가 시들고, 사람이 죽는 것 처럼 자연스러운 검이었다. 그것은 진정으로 아름다웠다. 청년은 아름다움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그런 것이야 말로 아름다움이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사부의 말에 따르자면 ‘진정한’것이 아니다. 자신은 그 춤을 이미 보았고, 그렇지만 저 검을 검집에서 꺼낼 수 있을 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니까.
그 이상이 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청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의 너머에 존재하고 있을 터였다. 무얼까? 이제 그것을 찾으러 가게 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다.
“-잘 설명을 못하겠네. 그냥, 단순히 예쁘다거나, 아름답다라는, 그런 건 한참 넘어서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해.”
가슴은 벅차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고, 눈에는 눈물이 고이지만 울기는 어려운- 휘황한 빛의 한 단편이 마치 마음에 박혀, 지울 수 없는 상흔과 빛살을 넓게 퍼뜨리듯, 아득한 마음의 감추어진 저편마저 날려버릴, 무한한, 그런 느낌이지 않겠는가, 하고 청년은 생각했다. 정말로 아름다운 것 앞에서, 인간의 영혼은 저절로 자신의 초라함을 기꺼워하게 되니까. 그때 생의 모든 초라함은 축복으로 전화한다. 소년시절, 죽음을 통해 피어났던 그 아름다움에, 아무런 비판이나 반성 없이 다만 아름답다고 여겼던 것처럼. 더 서브라임. 숭고미(崇高美).
“뭐야, 그래가지고 삼좌(三座)를 통일 할 수 있겠어?”
먼 눈을 한 청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소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양 손을 허리에 걸치고 외쳤다. 그 말을 듣고, 청년은 깜짝 놀란 눈을 하고 되물었다.
“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후훗! 그야 나도 너랑 같이 내려가게 됐거든!”
여전히 허리춤에 손을 가져간 채로, 소녀는 자랑스럽게 콧대를 추켜세우며 말했다. 청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표정을 찡그렸다. 그녀와 함께 간다면 그야 도움이 꽤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전에 피곤해질 것은 분명했다. 무엇보다, 그녀를 데리고 간다면 행동에 많은 제약이 발생하지 않겠는가. 그는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는, 허락하셨어?”
“물론. 슬슬 할아버지 뵈러가야겠지 않느냐면서 너랑 같이 갔다 오래.”
‘그 아줌마가...!’ 라고, 청년은 본인 앞에서는 결코 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했다. 하여간 그가 생각하기에, 그 아줌마는 자식에 대해 좀 더 숙고할 필요성이 있다. 자신만만한 것은 좋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노리고라도 있는 걸까?
“그냥 너 혼자 가는게 더 빠르지 않을까?”
잡다한 생각을 하며 청년이 말했다. 카린은 입술을 삐죽이며 항변했다.
“이왕 가는 김에 세상 구경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뭐. 그렇잖음, 나랑 같이 가는 게 싫어?”
“...응.”
청년은 솔직하게 답했다.
“......”
아무 말 없이 카린이 도끼눈을 했다. 주변의 온도가 싸늘하게 내려갔다. 대략 3도 정도. 그러고도 더 떨어지는 것 같았다. 모골이 송연하다.
“...농담이야.”
주변의 온도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카린은 해맑은 미소를 선보이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나도 잘 부탁해.”
힘없는 미소를 되돌리며 청년은 답했다. 카린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았다.
“물론이지. 엘은 나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잖아.”
“후-”
“아, 뭐야 그 비웃는 것 같은 표정은!”
카린이 버럭 화냈다. 엘은 다만 고개를 돌려 다시 하늘을 한번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풀잎이 묻은 엉덩이를 털어내고, 나무에 세워둔 검을 회수해 허리춤에 넣고는 카린에게 짧게 말했다.
“가자.”
“에... 벌써? 어른들한테 인사 안하고?”
소녀는 놀란 표정을 하고 물었다.
“다 하고 나왔어. 여기서 낮잠 자고 있던 것도 너하고 작별인사를 안 해서 기다리느라 그랬던 건데... 음.”
‘이렇게 될줄 알았다면 아마 도망갔을 거야.’ 라는 뒷말을 물론 잇지 않았다. 제 무덤을 파는 것은 엘의 취미가 아니다. 그리고 엘은 언덕을 올라 숲으로 난 길을 향해 걸었다. 카린이 그를 향해 빽! 하고 외쳤다.
“옷 같은 건 어쩌구? 다 챙겨야 할 거 아냐. 삼좌를 통일하려면 꽤 오래 걸릴건데, 준비를 단단히 해야지.”
엘은 피식 웃으며 걱정 어린 카린의 말에 답했다.
“삼좌의 통일은 무슨 얼어죽을. 그걸 하려면 사부가 나서야지. 내가 아니라. 사부도 그걸 모르진 않을걸. 그러니 그냥 오랜만에 밖에나 나갔다 와보라는 거야. 검도 단련할 겸. 그리고 필요한 건 나가서 사면되잖아. 어차피 돌아가 봐야 입고 다닐 만한 옷이 없기도 하고. 돈, 정확히는 돈 될 만한 건 넉넉하게 받아왔으니.”
답하면서도 엘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카린은 그의 뒷모습과 집이 있는 쪽의 방향을 번갈아 가며 주춤주춤 바라보다가, 이내 성급한 발걸음으로 엘의 뒤를 따라 걸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라... 보게 되면 좋겠는데.'
자신의 뒤를 따르는 카린의 발걸음을 들으며, 조용한 하늘을 올려다보곤, 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소소한 여행의 시작이다.
*발랄유쾌한 모험물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숭고미(the sublime)는 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이고, 칸트 미학의 핵심중 하나죠. 물론, 그런 걸 다룰 생각은 쥐꼬리만큼도 없습니다.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조회수 낭비가 많아 서장 체인지 됐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을 위한 원본 주소. http://wmck.egloos.com/2969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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